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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예수를 바라보자 (히 1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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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를 바라보자 (히 12:1-2)


며칠 전 어느 일간지 1면 기사 제목이“사뭇 다른 전직 대통령 품격…‘아버지 부시’에 美대륙 감동”이라는 뉴스가 있었습니다. 전두환 전 대통령의 3남 전재만 씨가 미국에서 운영하는 와이러니(와인 양조장) 매입자금 782억 원이 2005년 이후 그의 장인회사에서 송금되었다는 것입니다. 이 돈이 전두환 전 대통령의 비자금 은닉 재산에서 나온 것으로 의심하고 자금내역을 분석중이라고 했습니다. 그 기사 옆에 미국 41대 대통령인 조지 H W 부시 전 미국 대통령에 대해 미 대륙이 감동한다는 기사가 실렸습니다. 

「나이 아흔이 다 된 조지 H W 부시 전 미국 대통령이 백혈병을 앓고 있는 아기 환자를 위해 삭발했다. 전직 대통령의 품격을 고스란히 드러낸다는 평가가 나오고 있다. 
ABC 방송 등 미 언론은 24일(현지시간) 올해 89세인 ‘아버지 부시’ 전 대통령이 휠체어에 의지한 채 백혈병 치료로 머리카락이 모두 빠진 두 살배기 패트릭과 함께 환하게 웃는 사진을 공개했다. 부시 전 대통령은 자신의 비밀경호대원의 아들 패트릭과의 연대감을 표하기 위해 삭발을 감행한 것으로 알려졌다. 특히 패트릭은 부시의 비밀경호대원 중 한국계인 존의 아들이어서 더욱 눈길을 끈다. 사진 속에서 휠체어에 앉은 부시는 무릎에 패트릭을 앉힌 채 환하게 웃고 있다. 부시 전 대통령에 앞서 존과 한솥밥을 먹는 대원 20여명도 패트릭에게 힘을 보태기 위해 자진 삭발했다.」 

이 기사를 읽으면서 부럽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부끄럽기도 했습니다. 우리나라 전직 대통령도 저렇게 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아쉬운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때 받은 거액의 정치자금으로 만약, 대통령을 수행하다가 미안마 아웅산 테러 때 희생당한 유가족들의 복지를 위해 사용했더라면 국민들이 어떻게 평가했을까 하는 생각도 해보았습니다. 부시 전 대통령이 자기를 지켜주는 비밀경호원의 아들을 위해 삭발을 하듯 말입니다. 

왜 우리나라 국민들은 전직 대통령의 비상식적 행태를 보고 분노하고 있고, 미국은 전직 대통령의 삶에 대해 국민들이 감동을 하는 것일까요?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세상을 살아가면서 무엇을 바라보고 사는가 하는 삶의 방법과 삶의 목적의 차이입니다. 한 사람은 오직 나, 오직 내 자식, 오직 돈만 바라보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분이 정권을 잡았을 때 사회를 정화한다는 미명아래 수많은 사람들을 삼청교육대로 몰아넣고 모진 고통을 준 장본인이 아닙니까? 지금 보니 삼청교육대에 가서 의식정화교육을 받아야할 사람은 다름 아닌 그 사람 자신인 것 같습니다. 

부시 전 대통령은 무엇을 바라보았습니까? 딱한 사정의 부하를 바라보았습니다. 자기가 아닌 이웃의 아픔을 보았습니다. 이 아름다운 정신은 어디서 나온 것일까요? 그분은 독실한 기독교 신자입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그분은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본 사람입니다. 그리스도를 향한 사랑이 어려움을 당한 부하에게 나타난 것입니다.

본문에“예수를 바라보자”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바라보아야할 예수는 어떤 예수입니까?“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십자에 못 박혀 죽으시고 무덤에서 다시 살아나셔서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앉으신 예수를 바라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시기위해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예수님이 지신 십자가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1. 십자가는 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의 극치입니다.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라고 하셨습니다. 십자가는 하나님이 인간에게 베푸신 사랑의 극치입니다. 요한복음 3:16에“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하셨습니다. 

이 세상의 모든 성도들이 가장 많이 암송하는 성경구절이 요한복음 3:16일 것입니다. 이 말씀을 가리켜 마틴 루터는“작은 복음서”라고 불렀습니다. 마태복음, 마가복음, 누가복음을 공관복음이라 하고 요한복음을 제4복음서라 합니다.“작은 복음서”라는 것은 공관복음을 포함한 모든 복음서를 축소시킨 또 하나의 복음서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배시간마다 신앙을 고백하는“사도신경”이 있습니다. 이 사도신경은 신구약성경 66권을 하나로 함축해서 만든 것입니다. 천지창조로부터 마지막 심판까지 신구약성경 전체를 12마디로 요약해 놓았습니다. 이처럼 요한복음 3:16을“작은 복음”이라함은 작다는 말이 아니라 복음을 축소시킨 것을 뜻합니다. 복음이란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까?“복된 소식”즉 하나님이 인간을 사랑한다는 소식을 말합니다. 독생자 예수를 세상에 보내셔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하나님의 사랑을 말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은 어떤 의미의 사랑입니까?

요한일서 4:19에“우리가 사랑함은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이라”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먼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먼저 우리를 사랑 하셨기에 우리가 교회에 나와서 예수를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먼저 사랑하실 때 우리들은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죄인이었습니다. 

로마서 5:8에“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 하셨느니라.”하셨습니다. 사랑받을 가치가 전혀 없는 죄인인 우리를 위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습니다. 아무 쓸모없는 죄인인 우리를 사랑하셨다는 것입니다. 말로 표현할 길 없는 사랑이 십자가 사랑입니다. 이 십자가의 사랑이 우리의 죄를 정결하게 하시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도록 하셨습니다. 

일본에 오오가와 츠구미치라는 목사가 있습니다. 그는「예수님의 지우개」라는 책을 썼는데, 거기에는“예수님의 십자가가 인류의 죄를 깨끗하게 지우는 지우개”라고 했습니다. 아주 적절한 표현입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의 십자가로 우리의 모든 죄를 용서하시고 깨끗하게 지워주셨습니다. 오늘도 회개하기만 하면 다 지워 주십니다. 그동안 인생의 그림을 아무리 잘못 그렸다 할지라도 예수님의 지우개로 깨끗이 지울 수 있는 것이 예수님의 십자가입니다.

이 세상에 죄 없는 사람이 어디 있으며, 죄 짓지 않고 살아가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러나 깨끗하게 지우시는 예수님의 십자가의 지우개가 있습니다. 이 지우개에 대하여 이사야 1:8에 말씀하시기를“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너희의 죄가 주홍 같을 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흥같이 같이 붉을지라도 양털같이 희게 되리라.”하셨습니다. 

요한일서 1:9에도“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하셨습니다. 이것이 예수님 십자가의 사랑입니다. 

또한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 요한복음 15:16 말씀에“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라고 하셨습니다.“택했다”는 말은 많은 사람가운데서 선택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곧 그 사람들입니다. 

어떤 사람이 예수를 믿고 구원을 받을까요? 착한 사람이나, 의로운 일을 많이 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작정하신 사람입니다. 사도행전 13:4절에“이방인들이 듣고 기뻐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찬송하며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는 다 믿더라.”고 하셨습니다.

어떤 사람이 예수를 믿고 구원을 받을까요? 요한복음 6:44에 말씀하시기를“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면 아무라도 내게 올 수 없으니”라고 하셨습니다. 

어떤 사람이 예수님의 이름을 부를까요? 고린도전서 12:3에는“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하셨습니다. 
또한 갈라디아서 4:6 말씀에는“너희가 아들인고로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바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하셨습니다. 아무나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영이 그 마음속에 있는 사람만이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이것은 이해할 수 없는 하나님의 신비입니다. 조국과 부모는 내 의사와 상관없이 결정되는 이치와 같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는 죽어 천국에 가는 것만 아니라, 이 세상에서 풍파 많은 험한 세상을 이기는 능력과 권세가 주어지는 것입니다. 요한일서 5:4 말씀에“무릇 하나님께로부터 난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세상을 이기는 승리는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고 하셨습니다. 

2차 세계대전 때의 일입니다. 프랑스 어느 항구에서 영국군 수십만 명이 후퇴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영국군이 있던 항구와 거리상으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독일군이 집결해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영국군이 있는 항구는 물결이 잠잠한데, 독일군이 있는 항구는 풍랑이 몹시 심해 배를 띄울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기를 며칠, 독일군이 풍랑 멎기를 기다리는 동안, 영국군은 독일군을 피해 무사히 본국으로 돌아갈 수 있었습니다. 훗날, 사가들이 그 당시의 기록을 열어보니 영국군은 주일마다 모여서 “하나님이여! 독일군으로부터 우리를 보호하여 주소서. 그리하여 우리가 본국으로 무사히 돌아갈 수 있도록 하여 주소서.” 하며 하나님께 기도를 드렸었다고 기술하고 있었습니다. 이 기록을 보던 사가들은 그 당시 일어났던 일이 결코 우연이 아니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요한 웨슬레 목사는 말하기를“가장 최상의 것은 하내님께서 우리와 항상 함께 하시는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내 삶속에 함께 하시며 나를 주장하신다면 두려워 할 일이 무엇이겠습니까? 

하나님은 시편 50:15에 말씀하시기를“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로다.”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자녀에게 하나님의 능력을 베푸시는 통로가 하나님께 간구하는 기도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야고보서 4:2 말씀에“너희가 얻지 못함은 구하지 아니하기 때문이요.”하시면서“쉬지 말고 기도하라.”(데살로니가전서 5:17)하셨습니다. 

2. 예수님의 십자가는 순종의 극치입니다. 

본문에“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뜻에 대한 예수님의 복종에 대해 빌립보서 2:6~11 말씀에“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에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의미가 본문과 같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함의 결과가 무엇인가를 밝히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보좌우편에 앉으신 그 영광은 십자가까지 복종하신 후에 주어진 것임을 밝히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시되 전적인 순종이 있어야 합니다. 그 결과는 하늘나라의 풍성한 영광입니다. 하늘나라에서만 아닙니다. 이 땅에서도 누리는 축복이 큽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해야하는 원리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지난 금요심야기도회 때 드렸던 말씀을 다시 한 번 드려야 하겠습니다. 뜻글자인 한문으로 보면, 사람에게는 목숨 명(命: 목숨 명)자를 쓰는 세 가지의 생명이 있습니다. 

첫째, 생명(生:날생, 命:목숨명)입니다. 육신의 생명의 근원이 무엇인가를 말하는 것입니다. 이 생명은 하나님의 창조물입니다. 죄 범한 이 육신의 생명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피로 다시 얻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몸을 내 마음대로 쓰면 안 됩니다. 고린도전서 6:19~20에 말씀하시기를“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의 것이 아니라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이 육신을 사용하는 기본 원리입니다. 

둘째, 계명(誡:경계할 계, 훈계할 계, 조심할 계, 命:목숨명)입니다. 
계명이란, 육신을 가진 우리가 세상을 어떻게 살아가야할 것인가? 하는 삶의 방법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세상을 살아가는 기준이 무엇입니까? 그것이 성경입니다. 성경은 인간의 창조자 하나님께서 정하신 삶의 기준입니다. 성경을 따라 살아가 때 하나님의 인정과 사랑과 축복을 받을 수 있습니다. 이에서 벗어난 삶은 반칙입니다. 운동경기에서 규칙을 어긴 것은 인정하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는 장차 하나님 앞에 서서 성경을 따라 심판을 받게 될 것입니다. 성경을 따라 살아가야 후회를 남기지 않게 됩니다. 

성경 말씀에 순종하는 것은 하나님이 예비해 놓으신 축복의 창고가 있는 곳을 찾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신명기 28:1~6에 말씀하시기를“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삼가 듣고 내가 오늘 네게 명령하는 그의 모든 명령을 지켜 행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세계 모든 민족 위에 뛰어나게 하실 것이라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청종하면 이 모든 복이 네게 임하며 네게 이르리니 성읍에서도 복을 받고 들에서도 복을 받을 것이며 네 몸의 자녀와 네 토지의 소산과 네 짐승의 새끼와 소와 양의 새끼가 복을 받을 것이며 네 광주리와 떡 반죽 그릇이 복을 받을 것이며 네가 들어와도 복을 받고 나가도 복을 받을 것이니라.”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 삶의 지혜입니다.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는 나의 경험, 나의 지식 모두 다 내려놓아야 합니다. 

이솝 우화에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미 꿩이 새끼들에게 늘 이런 주의를 주었습니다. “얘들아, 너희들이 땅 위에서 먹이를 찾아 먹을 때 입으로는 먹이를 먹되 귀를 열어서 내 음성이 들리는지 주의를 기울여라. 내가 땅을 보고 있다가 너희를 해치려는 짐승이 나타나면 크게 소리를 칠 테니 내 소리가 들리면 지체 말고 나무 위로 날아오너라. 너무 멀리가면 내 목소리가 들리지 않을 테니 멀리가지 마라.”그래서 꿩 새끼들은 엄마와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먹이를 찾으면서 입으로는 먹이를 먹고 귀는 엄마의 목소리를 듣기 위해 활짝 열어 놓았습니다. 

그런데 그 중 한 마리는 엄마의 말을 귓등으로 흘려버렸습니다. 꿩 새끼 한 마리는 맛있는 먹이를 먹는데 팔려서 형제들과 떨어져 멀리 갔습니다. 꿩 새끼들이 한창 먹이를 먹고 있을 때 여우 한 마리가 꿩 새끼들을 발견하고 가까이 다가갔습니다. 새끼들이 위험하게 된 것을 본 엄마 꿩이 소리를 지르자, 새끼 꿩들은 엄마의 목소리를 듣고 위험이 다가온 줄을 알고 일제히 나무 위로 날아갔습니다. 그러나 엄마 꿩과 멀리 떨어져 있던 꿩 새끼는 위험을 알려주는 엄마의 목소리를 듣지 못하여 그만 여우에게 잡혀 먹히고 말았습니다.

새끼 꿩이 어미 꿩의 지혜를 따라갈 수 없고, 어린아이가 부모의 지혜를 따라갈 수는 없는 것입니다. 하물며 인간이 신이신 하나님의 지혜이겠습니까? 그러므로 성경에 대해 순종하는 것이 최상의 지혜입니다. 

셋째, 사명(使:시킬사, 좇을 사, 命:목숨명)입니다. 
사명이란 사람이 무엇을 위해 살아가야 할 것인가를 알려주는 삶의 방향입니다. 삶의 목적을 말합니다. 이에 대해선 잠시 후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3. 예수님의 십자가는 우리의 삶의 푯대입니다.

마태복음 16:24 말씀에“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하셨습니다. 사람들은 누구나 다 각각의 십자가가 있다는 것입니다. 각자 자기 십자가를 지고 하나님을 섬기라는 것입니다. 이 십자가란 자기가 감당해야 할 사명을 가리킵니다. 

많은 사람들은 십자가를 지기 싫어합니다. 십자가란 땀을 흘려야 하고, 눈물을 흘려야 하거, 때로는 피를 흘려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영광과 축복은 받아 누기길 원합니다. 이것이 어리석은 생각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의 영광은 십자가를 지신 후에 있었습니다. 십자가가 없으면 영광도 없습니다. 심지 않으면 거두는 것이 없는 원리입니다. 

14세기 네덜란드의 유명한 신학자 토마스 아캠퍼스(1379~1471)의 명저 <그리스도를 본받아>에 이런 글이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십자가에서 도망칠 수는 없다. 십자가를 피한다면 이미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가 아니다. 그대가 밖으로 도망쳐도 거기 십자가가 있고, 안으로 숨어도 거기 십자가를 볼 것이다. 위로 올라가도 십자가가 기다리고, 밑으로 파고들어도 십자가가 있을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어느 교회에 신앙생활을 잘하던 한 성도가 항상 심중에“내가 진 십자가는 너무 무거워. 왜 나만 이렇게 힘들게 신앙생활을 해야 해”하며 늘 불평을 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꿈에 무거운 십자가를 지고 언덕길을 올라갔는데 얼마를 힘겹게 가다보니 한 곳에 여러 개의 십자가가 있었습니다. 어디서 음성이 들려오기를 “네가 진 십자가가 무겁다고 불평만 하지 말고 여기 많은 십자가 중에서 하나를 골라서 지라.”고 했습니다. 그는 이것저것 살펴보니 번쩍 번쩍 빛나는 조그만 십자가가 있어 그것을 골라졌습니다. 이 황금으로 된 십자가는 일어서기조차 힘들 정도로 무거웠습니다. 

다시 소리가 들리기를 “다시 골라 보라.” 고 했습니다. 이번에는 역시 조그만 십자가인데 아름다운 장미꽃이 활짝 피어있는 십자가였습니다. 아름다운 향기도 나고 해서 그것을 골라졌습니다. 이 십자가는 무겁지는 않는데 가시가 등을 어찌나 찌르는지 도저히 지고 갈 수가 없었습니다. 할 수 없이 다시 내려놓았습니다. 결국 저 뒤쪽에 적당한 것 하나를 들고 나왔습니다. 그때 앞에 계시던 하나님께서 “여보게. 좀 더 자세히 살펴보게” 하셨습니다. 자세히 살펴보니 바로 자기가 지금껏 진 십자가였습니다. 자기의 십자가가 가장 가볍고 적당했습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시기를“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마태복음 16:24)하셨습니다. 십자가는 누구에게나 다 있습니다. 이것이 조금 전 세 가지 생명 중 셋째, 사명(使:시킬사, 좇을 사, 命:목숨명)입니다. 사명이란 사람이 무엇을 위해 살아가야 할 것인가를 알려주는 삶의 방향을 말합니다. 삶의 목적을 말합니다. 우리의 삶의 목적이 무엇입니까? 사람이 살아가는 방법과 직업은 각각 다를지라도 사명은 같은 하나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인간의 사명에 대해 고린도전서 10:31 말씀에“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 하셨습니다. 

미 우주선 패스파인더호의 화성착륙은“천문학의 승리”였습니다. 현대 천문학의 기초를 세운 과학자는 요한 케플러(1571~1630)라고 합니다. 그는 행성이 태양의 주위를 단순히 원형으로 도는 것이 아니라 태양을 초점으로 타원의 궤도를 그린다는 이론을 폈습니다. 독실한 크리스천이었던 그는 말하기를“천문학자는 스스로의 영광을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자연이라는 책에서 무언가 찾도록 허락된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종일뿐입니다.”라고 했습니다. 

88년 서울올림픽에서 육상의 삼관왕으로 세계인의 이목을 끈 여자 육상선수가 있었습니다. 그녀는“세계에서 가장 빠른 여자”라고 불리는 그리피스 조이너입니다. 그녀가 금메달을 따자 많은 기자들이 몰려 취재경쟁을 벌였습니다. 그 가운데 미 NBC방송의 한 기자가“달리면서 어떤 생각을 합니까?”라고 물었습니다. 그녀는 주저하지 않고 대답했습니다.“하나님께 영광 돌릴 것을 생각하며 달립니다. 최선을 다함으로 내 자신과의 싸움에서 이긴 후 하나님께 영광 돌릴 때만큼 인생의 보람을 느껴 본 적은 없었습니다.”라고 했습니다.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죄인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의 극치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하나님의 뜻에 대한 순종의 극치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우리들이 따라가야 할 삶의 푯대입니다.

그러므로 본문에 말씀하시기를“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에 우리의 시선을 고정시키고, 십자가를 바라보며, 십자가의 의미를 깊이 간직하며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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