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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어린이의 행동하는 믿음 (요 6: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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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이의 행동하는 믿음 (요 6:1-15)


많은 교우들이 땀을 흘리고 또 많이 협조해 주셔서 여름사역이 잘 진행되고 있습니다. 우리 갈보리교회가 앞으로 넉넉히 할 수 있는 세 가지 프로젝트가 있습니다. 여름성경학교나 겨울성경학교를 장기간으로 하는 문제입니다. 충분히 잘 될 수 있습니다. 그동안 시설 문제가 있었는데 이제는 시작해도 좋습니다. 본래 여름성경학교가 시작된 초기의 역사를 보면 “Summer vacation school”이라고 했습니다. 영국이나 미국은 방학이 2~3개월이 됩니다. 그런데 학교에 안가니 아이들이 보통 문제가 아닙니다. 부모들이 다 직장에 가는데 아이들끼리 내버려두니까 아주 안 좋은 방향으로 건달패같이 나쁘게 됩니다. 

“이것은 큰 사회적인 문제이다.” 그래서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교회가 여름학교를 시작했습니다. 아예 학교처럼 똑같이 등록금을 받고 방학이 끝날 때까지 했는데, 과목을 가르치는 것도 성경만이 아니고 일반 과목도 다 취급해서 어려운 사회적 문제를 교회가 해결한 역사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제 한국도 이것을 해야 할 때가 되었습니다. 우리 교회가 이것을 한번 잘하면 좋을 듯합니다. 보십시오. 맞벌이 하는 엄마들은 방학 때가 제일 고통입니다. 자녀들을 두고 직장에 나가야 되는데 걱정입니다. 자녀들을 놔두고 직장에 가니까 자녀들이 안 좋은 방향으로 흐르게 되니까 보통 문제가 아닙니다. 

이런 문제를 교회가 해결해주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또 하나 문제는 유치원 같은 형태의 노치원이 필요합니다. 노인문제가 앞으로 큰 문제입니다. 이것을 교회가 손대야 합니다. 그래서 아예 복지 차원에서 연구하고 자격이 있는 선생님들을 고용해서 유치원 하는 것처럼 일주일에 5일 동안 9시 출근해서 저녁 3시쯤에 퇴근하여 모든 노인들에게 필요한 프로그램을 다양하게 연령에 맞게 아예 등록금을 받고 이것을 해보십시오. 

갈보리교회에서 이것을 시작하면 굉장한 센세이션을 일으켜서 한국의 그 많은 교회들이 너나 할 것 없이 시작할 것입니다. 노인 문제 해결에 교회가 앞장서야 합니다. 넉넉히 할 수 있습니다. 우리 늘푸른 대학 시작하고 지금 학생들을 모두 못 받습니다. 하도 많이 오시기 때문입니다. 노인들이 할 게 뭐가 있습니까? 그런데 자격증 있는 교사들이 와서 좋은 프로그램들을 아예 등록금 받고 진행하면 이 문제가 노인문제가 해결이 되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는 대안학교입니다. 지금 갈보리 프리스쿨 졸업하는 엄마들이 저한테 계속 조릅니다. 

“목사님! 대안학교 왜 안하십니까?” “지금 시설이 모자랍니다.” 그런데 지금은 할 수 있는 시설이 좀 확보가 되었습니다. 교실이 몇 개만 더 지으면 가능합니다. 그래서 여기서 유치원 졸업한 학생들이 그냥 1학년 올라올 수 있도록 하는 것 얼마든지 할 수 있습니다. 지금 우리 갈보리 프리스쿨은 최우수 평가를 받았습니다. 왜냐하면 미국에서 현지인 교사들 데려다가 가르치는데 그렇게 하는 곳이 없지 않습니까? 대안학교는 우리가 커리큘럼을 마음대로 정할 수 있습니다. 얼마든지 할 수 있습니다. 제가 지금 이사장으로 봉사하는 대학에서 20년 훨씬 넘게 봉사하고 있습니다. 

처음에 학생들 100명도 안되었습니다. 지금 5천명입니다. 그러니까 얼마든지 키울 수 있잖아요? 이런 것에 마음이 있고 그 분야에 관심이 있고 재능도 있는 사람들이 몇 사람만 합의해도 됩니다. 그래서 이제 조금만 더 있으면 굉장한 교육기관 공동체로 사회에 유익을 주게 됩니다. 처음에 이것이 “Summer vacation school”로 영국과 미국에서 시작되었을 때 사회에서 얼마나 환영을 했는지 비기독교인들이 더 보냅니다. 

“너 제발 교회에 있는 학교에 가라. 내가 등록금을 대주겠다.” 그래서 교육 프로그램도 자격 있는 선생님들이 다 오니까 방학 동안에 방학이 아니고 교육의 연장으로 맞벌이 하는 부부들의 아이들을 교회가 맡아주니까 얼마든지 보냅니다. 또, 아이들 좋고 부모들 좋고 교회는 전도되니까 좋고 선생님들은 방학기간 동안에 똑같이 수입이 보장되니까 선생님들은 더 좋아하고 누구나 다 좋아하는 윈윈(WinWin) 전략이란 말입니다. 

이런 건설적인 프로그램을 넉넉히 해갈 수 있는 위치에 우리 갈보리교회가 지금 있는 것입니다. 앞으로 얼마든지 해나갈 수 있습니다. 다양한 프로그램을 할 수 있습니다. 1860년대부터 시작되었는데 제일 잘하는 데가 보스턴 제일교회입니다. 인르노이즈 소망감리교회가 아주 잘해서 1900년대 미국 전역으로 확산이 되었습니다. “Summer vacation school은 사회의 구원이다.” 그래서 한국도 그때가 된 것입니다. 아직 하는 교회가 없는데 그런 비전을 가지고 갈보리교회가 가야된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한국의 교회는 1922년 정동 감리교회가 5명의 교사가 200명 아이들을 데리고 처음 시작한 것이 여름성경학교 역사입니다. 실제로 1950년대, 1960년대 우리나라 어린이들 놀이 문화가 없었습니다. 전쟁한 다음에 먹을 것도 없는데 무슨 놀이 문화가 있었습니까? 그런데 교회가 운영하는 여름성경학교는 비기독교인 어린이들에게 더 인기가 있어서 다 이 성경학교를 통해서 예수 믿게 되는 그런 사람들이 퍼센트가 얼마나 많았습니까? 또, 시청각 교육은 대한민국에서 교회가 먼저 시작했습니다. 

무엇을 했는가? 융판 동화, 인형극 이런 것이 다 시청각 교육입니다. 이런 것을 다 교회가 했지 않습니까? 그래서 생전 보지 못한 것을 하니까 교회에 아이들이 구름떼같이 몰려서 이 즐겁게 하는 레크리에이션 파트도 교회가 개발한 것입니다. 교회가 개발해서 YMCA, YWCA를 통해서 전국이 확산되었습니다. 그 당시에 대한민국에 사는 어린이들은 누구든지 여름성경학교에 안온 사람이 없습니다. 거기 가야 재미있기 때문에 다 왔습니다. 여기 50대 이상 되신 교인들은 그때 생각 다 나실 것입니다. 

몇 가지 종류가 있는데 크리스마스 때, 추수감사절 때 교회는 떡을 만들어서 한 덩어리씩 누구에게나 다 나눠주어서 떡 교인이 있습니다. 그것을 먹으러 왔다가 그 길을 통해서 예수 믿게 되고 교회 다닌 사람들이 아주 퍼센트가 높습니다. 그 다음에 연필 공책 교인들이 있습니다. 행사 때마다 그것을 나누어주었지 않습니까? 공책 한권, 연필 한 개 사기도 힘들던 시절입니다. 교회 가면 그런 것을 주니까 그 동기를 통해서 예수 믿게 되고 인형극, 융판 동화를 재미있게 보았습니다. 

말이 좀 쌍스럽기는 해도 그 당시에 처녀귀신 교인이라고 있었습니다. 이게 뭡니까? 총각들이 교회 오면 처녀들을 쉽게 만날 수 있는 기회가 생기지 않습니까? 그것을 통해 예수 믿게 된 사람들이 아주 많았습니다. 그래서 그 당시 예배당을 연예당이라고 놀렸지 않습니까? 어찌되었든 어떤 경로를 통했든 비기독교인들이 교회 올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주어서 그 길을 통해서 신앙인의 삶을 갖게 하는 건설적인 프로그램들을 훌륭하게 해나가야 교회 사명을 다하는 것입니다. 

오늘 성경말씀에는 중심인물이 한명 등장합니다. 어린아이입니다. 이 아이가 없었다면 이 성경기록은 없었습니다. 사복음서를 대조해보면 이 복음서를 기록한 기자의 마음방향에 따라서 ‘야! 이것은 참 중요하다.’ 그래서 기록해 놓은 거 아닙니까? 마태복음에 있는 것이 마가복음에 없는 것이 많습니다. 요한복음에서 크게 취급한 것도 누가복음에서는 언급도 안했습니다. 그 기자의 마음 방향에 따라서 기록한 것입니다. 그런데 오병이어 사건은 사복음서에 다 기록되어 있습니다. 마태복음에는 14장, 마가복음에는 6장, 누가복음에는 9장, 그리고 요한복음에 6장입니다. 조금씩 다르게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특이한 내용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세상에 계실 때 행하신 모든 기적 사건 중에서 규모적으로 가장 컸습니다. 다른 복음서에는 여자와 아이 외에 5천명이라고 기록했습니다. 그러면 다 합치면 얼마가 됩니까? 기독교 역사는 예수님부터 지금까지 항상 여인이 많습니다. 그리고 아이들이 많습니다. 그러니까 1만 명도 더 되는 사람들이 모여서 지금 부흥집회를 하는 것입니다. 생각해 보면 이 집회는 어린이 중심 집회가 아닙니다. 어른 중심의 집회였는데 어느 나라나 이 어린이의 특징은 호기심입니다. “사람들이 저렇게 떼로 몰려가는 것을 보니까 심상치 않은 일이 있을 거야.” 그리고 아이들이 잽싸게 뛰어들어서 예수님 주변에도 어린이들이 많았던 것입니다. 

너무 많은 어린이들이 예수님 주변으로 모여들었기 때문에 제자들과 어린이들 사이에 불쾌한 마찰이 빚어진 것도 성경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어린이들은 꾸짖어도 예수님 곁으로 모여들고 그래서 어린이들을 비키라고 하며 화내는 제자들을 예수님이 꾸짖으셨습니다. 때는 유월절이라고 언급했습니다. 이때는 외국에 살던 유대인들도 다 유월절을 지키기 위해서 유대 나라로 옵니다. 많은 순례자들이 오니까 예수님 소문이 많이 나서 더 많은 사람이 모였는데 갈릴리 호수 주변이라고 했습니다. 갈릴리바다, 게네사렛 호수, 디베랴 바다 이것은 다 똑같은 말입니다. 

그 지역 이름을 따서 바다 이름을 정한 것은 한 장소를 이야기 한 것입니다. 그래서 이 바닷가의 호수가 언덕에서 1만 명 가까운 사람을 모아놓고 예수님은 대중 집회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즐겨하셨던 일을 성경에서 보면 설교하시는 것을 제일 좋아하셨습니다. 청중이 많을수록 즐겁게 하셨습니다. 오늘 집회는 복음서 기록대로 제일 큰 규모가 되는 대중 집회였습니다. 예수님은 아마 영적으로 신이 나신 것 같습니다. 하루 종일 설교하셨습니다. 설교하는 예수님도, 설교를 듣는 민중도 만족했습니다. 그런데 이런 영적 만족의 장소에 육적 문제가 하나 발생했습니다. 사람들이 배가 고팠다고 했습니다. 

마태복음 기록을 보면 “이곳은 빈들이요 때도 이미 저물었으니” 제자들이 예수님께 약간 짜증스럽게 반응하는 것입니다. “그만 돌려보내소서. 해가 저물어가나이다.” 이렇게 말합니다. “아니, 예수님! 사람들이 많이 모였다고 설교만 즐겁게 계속하면 어떡합니까? 이 사람들 가운데는 멀리서 온 사람들도 많습니다. 

하루 종일 굶고 있는데 빨리 보내소서.” 제자들의 판단은 상식적으로 옳습니다. 지금 그들은 이 어려운 문제를 해결하는 길은 빨리 이 군중을 해산시키는 일인데 예수님이 계속 붙잡고 계시니까 짜증이 났습니다. 사람이 배고프면 짜증이 납니다. 오늘 말씀에 이 문제를 해결하려면 200데나리온의 돈이 필요하다는 계산도 나와 있습니다. “만약 200데나리온의 돈이 있다고 합시다. 날이 저물어가는 이 빈들 벌판에서 어떤 식당을 찾아가서 1만 명의 음식을 주문해서 갖다 줄 것인가요? 도저히 불가능합니다. 빨리 해산시켜 보내소서.” 

아마 이런 문제는 우리 인생과도 비교할 수 있고 어떤 때는 교회 사정, 국가 운영도 비교가 됩니다. 우리 인생은 어느 때는 예수님을 바라보면서 영적 충만 가득하게 채워졌습니다. 그런데 육신은 배고프거든요? ‘아! 나는 영적으로 이렇게 믿음이 충만한데 내 육신 생활은 어두운 빈들, 배고픈 해가 넘어가는 들판에 홀로 서있구나. 돈이 하나도 없고….’ 이런 때가 있지 않습니까? 공동체도 보십시오. 믿음의 고백을 다 넉넉히 했습니다. 새벽기도 열심히 하고, 철야기도 하고…. 그런데 교회는 어두운 빈들이 올 때가 있습니다. 

국가도 보십시오. 대한민국처럼 교회 건물 많고 밤하늘을 십자가로 빛내는 나라가 세상에 없습니다. 제일 유명합니다. 가는 곳마다 십자가로 번쩍이는 밤을 볼 수 있습니다. 영적으로 충만한데 국가는 미래 불안의 대책 없는 소리만 들려올 때도 있지 않습니까? “해가 아직 많이 남아있을 때 군중 해산을 했더라면 아무 문제가 발생하지 않을 것을 해가 지도록 설교하시니 이런 어려운 상황이 닥친 거 아니겠습니까? 해가 저물어가나이다. 군중 해산만이 이 문제 해결입니다.” 사실 이 군중들은 예수님이 떡까지 준비해주시리라는 기대는 못하고 그냥 온 사람들입니다. 

이제 예수님은 설교를 중단하시고 제자들의 원망스러운 요청에 어떤 방법으로든 결단을 내리셔야 됩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보시는 시각과 제자들의 시각의 차이를 우리가 알아야 합니다. 제자들은 복합적 계산이 그들의 생각입니다. 벌써 계산하지 않습니까? “돈이 얼마 들 것이며 돈이 있다하여도 누가 음식을 만들어줄 것이며 시간적으로 황혼입니다. 불가능합니다.” 그렇게 상식적 계산을 해냅니다. 예수님의 시각은 “그렇게 복잡하게 여러 가지를 따지지 말고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의 가능성을 찾아보아라. 먹을 것만 있으면 되는 거 아니냐? 

그런데 우리 중에 누가 먹을 것을 가지고 왔는지 찾아보라.” 이런 간단한 상식을 발표하셨습니다. 이 대목은 우리에게 인생의 중요한 문제 해결에 열쇠를 암시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어려운 일을 당해도 그 문제를 해결해나갈 수 있는 원리가 나 자신에게 있다는 것입니다. 교회가 아무리 어려운 일을 만나도 교인들에게 그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원리는 잠재해 있다는 것입니다. 생각을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서, 어떻게 실천하느냐에 따라서 결정이 되는 것입니다. “찾아보지도 않고 논리만 말하면 되느냐? 가능성이 있는데 가능성을 찾아보라.” 이렇게 하신 것입니다. 

제가 안양에서 개척교회를 하던 시절에 교회 바로 앞에 넓은 빈터가 있었습니다. 그 빈터에 투견대회라고 전국의 무서운 개들을 모아서 싸움시키는 것을 했습니다. 교회 앞에 있으니 자연히 저도 구경을 가게 되더라고요. ‘나도 개싸움 하는 것 좀 보러 가자.’ 불도그같이 무섭게 생긴 개들이 와서 서로 싸움을 하고 물고 늘어지고 하는데 무섭기도 하고 볼만하기도 합니다. 날마다 합니다. 그래서 제가 개 심판과 이야기를 하게 되었습니다. “사람이 개 심판하기 어려우실 텐데 어떻게 이겼다, 졌다 개를 심판하십니까?” 그랬더니 그분 말은 “이거 아주 쉽습니다.” 하시는 것입니다. 

자기는 이 두 개가 나와서 막 싸움을 시작하는 그 때에 어느 개가 이길 것을 금방 안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아세요?” “짐승들은 사람보다 육감이 아주 빠릅니다. 서로 눈을 뜨고 쳐다보는 순간 한 개는 이겼다고 눈빛을 발휘하고 한 개는 졌다고 합니다. 그래서 싸움을 시켜보면 거의 맞습니다. 그래서 나는 개 심판하는 것을 아주 좋아합니다.” 우리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도 그렇습니다. 졌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집니다. 예수님은 항상 강조했습니다. “네 믿음대로 될지어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제자들은 어떤 가능성이 있는가 열심히 찾아봤습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그 큰 문제를 해결하는 데는 아무 도움도 안 되는 보잘 것 없는 존재 하나가 발견되었는데 어린 아이가 하나 나타났습니다. 생각해 보면 그 일만 명 중에는 부자들도 많았을 것입니다. 능력 있는 지방 유지들도 많이 찾아왔을 것입니다. 사실 1만 명이 하루 종일 은혜 받은 대로 그 자리에서 헌금을 했다면 200데나리온 같은 것은 충분히 걷혔을 것이고 아마 그 중에는 그런 헌금을 혼자 할 수 있는 실력자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한 나설 만한 사람은 한명도 나타나지 않고 어린아이 하나가 발견되어서 예수님 앞으로 불려나왔습니다. 아마 제자들도, 모인 사람들도 기가 막혔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 보잘것없는 가능성을 무시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그에게 물었습니다. 

“네가 무엇을 가지고 있느냐?” “네! 여기 도시락 하나가 있습니다. 엄마가 만들어준 보리떡 5개와 반찬용 자반 물고기 2마리를 가지고 있습니다.” 안드레가 그것을 보고 기가 막혀서 예수님께 보고 하지 않습니까? 정확한 부정 판단을 금방 내립니다. “이것이 이 많은 사람에게 얼마나 되겠습니까? 이것을 누구 코에 가져다 붙이겠습니까?” 맞는 말입니다. 그 도시락 하나의 가능성이란 그 도시락 임자인 어린아이 하나에게 해당되는 가능성 밖에 되지 않습니다. 우리는 상상해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어린아이에게 그냥 “내놔라.” 하시지 않고 친절하게 물으셨을 것입니다. 

“어린아이야, 이 떡과 물고기는 사실 너 혼자 먹으려고 가져온 것인데 너 혼자 먹지 않고 이렇게 많은 사람과 나누어 먹겠느냐?” 이렇게 물으셨을 거 아닙니까? 어린아이지만 인격을 존중해주셨을 거 아닙니까? 사실 우리가 짐작해 보건데 이 어린아이는 그 도시락을 예수님 잡수시라고 내놓은 것입니다. 제자들이 먹을 것을 찾아다니니까 어린이 생각이 ‘아! 예수님이 하루 종일 설교하시니 배고프신 것이다. 먹을 게 필요하다.’ 그래서 들고 나온 것입니다. 이 어린아이가 ‘아! 예수님이 이것을 축복기도해주시면 여기 있는 사람들이 다 먹고 남을 것이다.’ 그런 계산을 하고 나왔겠습니까? 그래서 그냥 자기가 굶주려도 예수님을 대접하려고 들고 나와서 내민 것입니다. 

이 말씀이 사복음서에 모두 기록된 이유는 결과 때문입니다. 결과는 무엇입니까? 오늘 말씀에 “보리떡 5개로 먹고 남은 조각이 12바구니에 찼더라.” 그 결과 때문에 이 기록이 다 남은 것입니다. 어떤 목사님이 너무 이 본문 설교하시다 흥분하셔서 보리떡 5천개로 5명을 먹이고도 남았다고 설교하셨다고 합니다. 우리가 이 사건을 오늘의 문제로 상상할 수가 있습니다. 우리 모두가 그 자리에 참석했다고 한번 가정해 봅시다. 지금 이 어린아이는 숫자에도 들지 못하는 문화, 여자와 아이 외에 남자만 5천명이라고 계산했습니다. 

그러면 그 많은 군중들 가운데 도시락을 들고 왔던 사람이 그 아이 하나만이라고 계산할 수 있습니까? 이 어린아이조차도 ‘오늘 예수님의 대중 집회를 내가 보니까 시간이 오래 걸린다. 그러면 도시락 정도는 챙겨가는 것이 현명할 것이다.’라고 판단이 되었기 때문에 어린아이가 가져온 것 아닙니까? 그러면 그날의 소문과 분위기로 보아서 그런 계산을 할 수 있었던 사람이 그 아이 하나밖에 없다는 것은 상식 수준으로는 말이 아닙니다. 다른 사람도 다 가지고 있었습니다. 

분명히 다른 사람들도 남이 모르는 자기만의 준비가 있었을 것이 당연한데 왜 내놓지 않았는가? 두 가지 판단 때문입니다. 내놔봤자 도움이 안 될 것이라는 상황을 결론한 것입니다. 또 하나는 나 혼자 먹기도 바쁘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어린아이는 그런 복잡한 생각을 안했기 때문에 내놓은 것입니다. ‘지금 예수님이 하루 종일 설교하시고 배고픈 거야.’ “예수님! 이거 잡수세요.” 예수님이 지금 찾고 계신 것을 자기가 갖고 있으니까 여기 있다고 내민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의 성격의 분명한 진리가 여기 나타났습니다. 하나님의 일은 내가 할 수 있는 것만 하면 그 다음은 하나님이 책임지십니다. 복잡하게 안 된다는 말부터 시작합니까? 우리는 성경에서 달란트 비유를 시작합니다. 어떤 사람은 한 달란트, 어떤 사람은 두 달란트, 그리고 다섯 달란트를 맡겨주셨습니다. 왜 차이가 있게 맡겨주셨는가? 그것이 하나님이 정해주신 그릇의 크기입니다. 어떤 사람은 넉넉히 큰일을 할 수가 있습니다. 

그 사람한테 맡기면 안되는 게 없습니다. 어떤 사람은 그렇지 못합니다. “너는 이거 하나만 해! 그래도 괜찮아.” 이 사건의 영적 교훈이 무엇인가? 하나님은 기적을 보여주려는데 목적이 있지 않습니다. 또, 떡을 만들어 먹이라는 이런 시험은 구원 사역 초기 광야기도 때 이미 예수님이 거절하셨습니다. 돌로 떡을 만들어 먹으라고 했을 때 아니라고 하셨습니다. 만약 우리 기독교 정신이 기적 창출에 뜻을 둔다면 기독교는 인류를 게으른 거지 떼로 만들 것입니다. “기도하면 다 생기는데 일해서 뭐해?” 하나님 나라 건설에 몸을 바치는 사람들이 가져야 할 믿음과 헌신의 방향 제시를 오늘 이렇게 하신 것입니다. 

사실 이때 이 기적을 보고 떡을 먹은 군중들이 얼마 안가서 계속 떡을 안주니까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동의합니다. 예수님 자신도 제자들에게 그 사건을 물으셨습니다. “떡 먹을 때 그 많은 군중이 어디 갔느냐? 너희가 나를 따라온 것은 떡을 먹고 배부른 때문이다.”라고 하셨지 않습니까? 이게 군중들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어린이일지라도 하나님 나라 건설에 헌신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여기 보여주셨습니다. “찾아보아라. 무엇이 있을 것이다. 그것이 비록 작고 보잘 것 없는 작은 일이라도 괜찮다. 내게로 가져오면 그 다음에는 내가 책임을 질것이다.” 이것이 하나님 역사에 아주 중요한 진리입니다. 

총동원한 자원 개발이 어린아이 하나였고 그는 지금 도시락 하나밖에 없었지 않습니까? 결과는 이렇게 나왔습니다. 그것 위에 주님의 축사라는 영적 축복이 해가 진 빈들에 1만 명 시급한 문제를 삽시간에 완전히 해결해 주었습니다. 주님은 그 들판에 널려져 있는 돌멩이를 축사하지 아니하시고 어린이가 드린 도시락을 축사하셨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유대 나라는 어린이 무시 문화이기 때문에 성경에 보면 많은 사람의 이름이 나와 있는데 왜 이렇게 큰일을 한 이 어린아이의 이름은 성경에 기록하지 않았는가 아쉬운 일입니다. 이제 모든 일이 끝나고 군중은 영적으로도 만족했고 육적으로도 만족해졌습니다. 

이제 집으로 돌아가는데 그 돌아가는 길이 가장 기쁜 사람은 도시락을 드린 어린아이입니다. 자기도 만족했지 않습니까? 손해가 없게 되었습니다. 어린이보다 더 많이 무엇을 가지고 있던, 그러나 드리지 아니했던 어른들은 부끄러운 감정으로 돌아갔을 것입니다. 다 먹은 다음에 ‘아, 나도 도시락 있는데 내놓을 걸….’ 그럴 수도 없고, 끝까지 없었던 것을 감추어야 함으로 처치 곤란이고, 들키면 눈치 보이고 밤늦게 쓸데도 없어진 식은 밥을 허리춤에 감추고 씁쓸히 돌아갔을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의 인생을 마감하고 안식의 세계로 돌아가는 날, 저문 저녁이 될 때 그렇게 생각이 될 것이 확실합니다. 작은 것이라도 함께 나누었던 인생은 만족하게 아버지께로 돌아가고 쓸데도 없어진 감추어진 부끄러운 거 가지고 ‘어휴! 아무 쓸데도 없는 것을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 내가 소비할 것을!’ 그런 사람이 훨씬 더 많지 않습니까? 미국의 제임스 목사는 교회 건축하는데 돈이 모자랐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나가서 열심히 기도를 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성전 건축하는데 건축비가 이렇게 모자라니 어떡합니까?” 하나님이 대답하셨습니다. “그 돈 내가 너희 교인들에게 이미 다 나눠주었다. 그거 거두어서 해라.” 유명한 간증이 되었습니다. 이번 여름성경학교의 제목이 “행동하는 믿음”입니다. 오늘 말씀이 어린아이의 소박한 작은 행동의 믿음이 주님의 큰 축복과 기적을 불러왔습니다. 이번 여름성경학교 때 이런 일이 우리 어린이들에게 일어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 하나님 아버지! 오늘 말씀에 진리가 나타났습니다. 어린아이는 보잘 것 없는 도시락 하나를 내밀었지만 그것이 하나님의 나라 건설에 가장 큰 기적과 주님의 사랑을 받았고 일만 명의 모든 문제가 해결되는 축복을 얻어냈습니다. 이 진리를 생각하면서 이번 여름성경학교 우리 어린이들이 그런 행동하는 믿음에 영적 은혜가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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