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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사 40;27-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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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사 40;27-31)    

세상에는 빗물, 샘물, 계곡물, 강물 등 다양한 물들이 있습니다. 이 중에서 가장 큰 물은 <바닷물>입니다. 그렇다면 바다가 가장 큰 물이 되는 비결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다가 맑은 물 더러운 물, 찬 물 더운 물 가리지 않고 모두 받아들이기 때문입니다. 큰 인물이 되려면 모든 사람을 받아줄 수 있는 넉넉함이 필요합니다. 

그렇다면 바다는 어떻게 모든 물을 다 받아들일 수 있습니까? 그것은 바다가 가장 낮기 때문입니다. 바다가 낮기 때문에 계곡과 강의 모든 물이 바다로 흘러듭니다. 사람도 큰 사람이 되려면 낮아져 겸손해야 합니다. 그러나 문제는 우리는 높아지려 한다는 것입니다. 사탄은 이것을 교묘하게 이용하여 아담과 하와로 하여금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 열매를 따먹게 하여 타락시켰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사랑하셨고, 그들이 큰 민족, 큰 나라가 되어 복되게 살길 원하셨습니다. 그러려면 그들은 낮아져 겸손해야 했습니다. 낮아져야 하나님의 말씀의 생수가 흘러들어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그들은 낮아지는 데 실패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 앞에서 목을 꼿꼿이 세웠고, 하나님을 거역하고 우상을 숭배하면서, 자신들이 원하는 대로 살았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흘러들어갈 수 없었습니다. 

여러분, 이런 백성들을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하셨을까요?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사랑의 매로 때리셨습니다. 솔로몬 이후 나라는 북 왕국 이스라엘과 남 왕국 유다로 분열되었고, 북 왕국은 앗수르에게 멸망했습니다. 이사야 선지자가 활동했던 남 왕국 유다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하나님께서는 바벨론이란 채찍으로 유다를 치셔서, 유다는 주전 586년에 바벨론에게 멸망했습니다. 예루살렘이 함락되고, 나라는 멸망했습니다. 

이 고난은 그들의 교만을 깨뜨리고 낮추시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낮아져야 큰 민족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때리신 것은 그들에 대한 사랑의 표현이었습니다. 

극심한 고난에 떨어진 백성들은 탄식하고 슬퍼했습니다. 그들의 슬픔이 시편 137편에 잘 나와 있습니다. <우리가 바벨론의 여러 강변 거기에 앉아서 시온을 기억하며 울었도다>라고 했습니다. 이들이 슬퍼하기만 했겠습니까? 아닙니다. 하나님께 부르짖고 기도하였을 것입니다. 어서 빨리 고국에 돌아갈 수 있기를, 어서 빨리 예루살렘이 회복되기를, 어서 빨리 나라가 다시 세워지기를 기도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도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을 때 이들은 낙심했습니다. 남은 것은 원망뿐이었습니다. <하나님은 너무하시다. 우리가 얼마나 고통 중에 살고 있는지 모르시는 것 같다. 우리가 송사를 해도 받아주지도 않으신다.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이 맞는가? 우리를 건져줄 능력이 있기는 한 것인가? 그 분도 우리처럼 지쳐 쓰러진 것은 아닌가?> 

이렇게 원망했습니다. 그들의 원망이 오늘 읽은 말씀 27절에 나옵니다. <야곱아 어찌하여 네가 말하며 이스라엘아 네가 이르기를 내 길은 여호와께 숨겨졌으며 내 송사는 내 하나님에게서 벗어난다 하느냐>  

이들의 원망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은 꾸지람이었습니다. 28-29절을 보십시오. <너는 알지 못하였느냐 듣지 못하였느냐 영원하신 하나님 여호와, 땅 끝까지 창조하신 이는 피곤하지 않으시며 곤비하지 않으시며 명철이 한이 없으시며  피곤한 자에게는 능력을 주시며 무능한 자에게는 힘을 더하시나니> 하나님께서는 <너희들은 하나님의 백성이라 하면서도 아직도 나를 모르고, 듣지 못했느냐>고 꾸짖으셨습니다. 그렇다면 그들이 알지 못한 것은 무엇이었을까요? 

첫째, 하나님께서 그들을 위로하고 계시건만 그들은 알지 못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위로하시는 분이었습니다. .이사야 40장 1절을 보십시오. <너희의 하나님이 이르시되 너희는 위로하라 내 백성을 위로하라>  그러나 백성들은 그 사실을 알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도대체 언제 우리를 위로해 주셨는가? 우리는 이처럼 포로로 고통 받고 있지 않은가?>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포로된 유다 백성들을 어떻게 위로했나요? 다니엘과 에스겔 같은 예언자를 세워 포로된 이들에게 계속 말씀하셨습니다. 예루살렘에 남아 있는 이들에게는 예레미야를 통해 계속 말씀하셨습니다. 게다가 다니엘과 그의 친구들은 바벨론에서 최고위직에 앉았습니다. 

바벨론에 아부해서 얻은 자리가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신앙과 지조를 지키면서도 압도적 지혜와 능력으로 그 자리에 앉게 하셨습니다. 이는 유다 백성의 자존심을 엄청나게 세워주는 일이었습니다. 그들은 <유다 백성은 죽지 않았다! 하나님은 우리를 버리지 않으셨다!>고 외쳤어야 마땅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께서 아무 것도 하지 않으신다고 원망했습니다. 

이런 원망을 늘어놓는 것은 우리도 예외가 아닙니다. 어떤 교인이 불평조로 말했습니다. <난 교회를 30년이나 다니면서 말씀을 들었는데, 기억에 남는 게 별로 없어!> 그는 마치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신 일이 없는 것처럼 불평했습니다. 그러자 친구가 말했습니다. 

<난 지난 30년 동안 밥을 먹고 살았는데, 어떤 음식을 먹었는지, 별로 기억에 남는 게 없어. 그렇지만, 그 음식이 나를 지금까지 기르고, 살게 했네...> 

여러분, 어머니나 아내의 밥상이 특별하지 않다고 불평하는 분이 많지요? 어쩌다 멋진 레스토랑에서 외식을 한 것만 기억하지요? 그러나 우리를 여기까지 지탱해준 것은 99%가 어머니와 아내의 밥상임을 잊으면 안 됩니다. <당신 하는 게 뭐가 있어?> 이렇게 말하면 안 됩니다. <당신 덕에 먹고 살았어!>라고 바꾸셔야 합니다. 

아침에 분주하게 등교를 위해 준비하는 아이 앞에 차려져 있는 따뜻한 아침상은 언제 준비되었습니까? 그 아이가 아직 곤히 자고 있는 동안에 어머니께서 준비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그 때 아이는 알지 못한 채 잠만 자고 있었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유다 백성들은 하나님께서 자신들을 버리신 것처럼 말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늘 그들을 위해 일하고 계셨습니다. 자신이 느끼지 못한다고 하나님께서 한 번도 위로해 준 적이 없는 것처럼 하나님 원망하지 마세요. 하나님께서는 지금도 말씀으로, 주변의 소중한 분들을 통해서, 여러 경로로 위로하십니다. 우리가 깨닫지 못할 뿐입니다. 하나님의 위로는 언제나 고난보다 큽니다. 충분히 감사할 조건을 주셨는데도 깨닫지 못하는 우리가 문제입니다. 

두 번째로 그들은 하나님의 때에 대해 알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당장 자신들의 기도에 응답해 주셔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구원할 때를 좀 더 뒤로 늦추고 계셨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역사는 다 때가 있습니다. 갈라디아 4장 4절은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메시아이신 예수님을 보내셨는데, 그것도 <때가 찰 때까지> 기다리셨습니다.  

우리들은 금방 얻으면 당연히 얻어야 할 줄로 생각하여 감사하지 않습니다. 결혼한 부부가 금방 아기를 낳으면  허니문 베이비라고 말하면서 감사가 작습니다. 그러나 결혼한 지 오 년, 십 년이 지나 어렵게 아기를 낳으면 정말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그 아기를 하나님의 뜻대로 잘 키우겠다고 다짐합니다. 좀 기다릴 필요가 있습니다.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가자마자 구원을 받으면 그들은 감사하지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구원의 소망은 하나님께만 있음을 깨닫고 지난날의 죄를 깊이 회개하기까지 기다리게 하셨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십시오. 더 기도하십시오. 기도의 분량을 채우시길 바랍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에게도 이삭을 낳기까지 이십 오년을 기다리게 하셨음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세 번째로 그들이 몰랐던 것은 하나님께서는 단지 기다리게만 하는 분이 아니라 그들을 구원할 계획을 차근차근 진행하고 계심을 알지 못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유다 백성의 예루살렘 귀환을 위해 <고레스>라는 인물을 준비하고 계셨습니다. 고레스는 주전 590년 혹은 576년경에 비천한 출신인 <캄비세스>와 메대의 마지막 황제인 <아스티아게스>의 딸 사이에서 태어났습니다. 

고레스는 메대의 작은 제후국인 <안산>의 왕이 되었는데, 주전 549년 외할아버지의 나라 메대를 차지했고, 나라 이름을 바사, 즉 페르샤로 바꾸었습니다. 

그 후 그는 주전 546년에는 리디아왕국을, 주전 539년에는 바벨론을 차례로 무너뜨렸습니다. 그리고 그 이듬해인 주전 538년에 유다 백성들을 예루살렘으로 돌아가도록 선언한 것입니다.  

이런 놀라운 제왕인 고레스는 하나님께서 준비하신 사람이었습니다. 그레스 자신도 몰랐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를 준비하고 세우셨습니다. 

이에 대해 이사야서 45장 1절에서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여호와께서 그의 기름 부음을 받은 고레스에게 이같이 말씀하시되 내가 그의 오른손을 붙들고 그 앞에 열국을 항복하게 하며 내가 왕들의 허리를 풀어 그 앞에 문들을 열고 성문들이 닫히지 못하게 하리라>고 하셨습니다. 

또 4절을 보면 <내가 나의 종 야곱, 내가 택한 자 이스라엘 곧 너를 위하여 네 이름을 불러 너는 나를 알지 못하였을지라도 네게 칭호를 주었노라>고 하셨습니다. 고레스의 승리와 정복은 하나님의 계획이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낙심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위한 계획을 준비하고 계십니다. 어머니가 아침 밥상을 준비할 줄 믿고 편안히 아침까지 잠드는 아이처럼 하나님을 신뢰해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그들은 하나님의 능력을 잘 알지 못했습니다. 

여러분, 앞에서도 읽었습니다만, 하나님은 어떤 분입니까? 하나님께서는 피곤이나 곤비함을 모르시는 창조주이십니다. 그 분의 지혜와 능력이 우리의 것이 될 수 있습니다. 본문 30-31절을 다같이 읽겠습니다. <소년이라도 피곤하며 곤비하며 장정이라도 넘어지며 쓰러지되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독수리가 날개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 달음박질하여도 곤비하지 아니하겠고 걸어가도 피곤하지 아니하리로다>  할렐루야! 

하나님께서는 <새 힘을 주시는 분>입니다. 새 힘은 어떤 힘입니까? 한 사람의 생애 중 가장 힘이 넘칠 때는 소년 시절, 20-30대 시절입니다. 그런데 소년이나 장정도 한참 달리면 피곤하여 쓰러집니다. 그런데 본문은 <소년이라도 곤비하며 장정이라도 넘어지며 쓰러지되...>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힘은 소년과 장정도 가지지 못한 힘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힘은 조금 덜 피곤하게 만드시는 정도의 힘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힘은 사람으로서는 상상도 못할 완전히 새로운 차원의 힘입니다. 

그 힘을 본문은 <독수리가 날개 치며 올라감 같다>고 표현했습니다. 여러분, 아무리 힘이 센 남자도, 청년도 독수리가 창공으로 치솟는 것을 경험하지는 못합니다. 사람은 높은 곳에서 떨어질 뿐이지, 땅에서 하늘로 날아오를 수 없습니다. 그것은 사람으로서는 알 수 없는 새로운 차원입니다. 하나님께서 유다 백성에게 주시려는 것은 사람으로서는 상상을 못할 새로운 은혜였던 것입니다. 

그 은혜가 무엇이었습니까? 포로된 땅에서 처우가 조금 개선되고 살기가 조금 편해지는 정도가 아니라, 완전히 놓여 고국 땅으로 돌아가는 것이었습니다. 이건 상상도 못할 일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상황을 개선하시는 것이 아니라, 상황을 종료시키고, 새로운 상황으로 인도하시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의 구원은 어떤 것입니까? 마치 고아를 아들로 들이는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의 구원은 아이를 여전히 고아원에 두고 가끔 한 번씩 찾아와 만나는 것과는 차원이 다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이를 집으로 데려가서 호적에 올려 완전히 그 집의 자녀가 되게 하듯이 우리를 구원하십니다. 고아원이란 상황은 종료되고, 새로운 상황이 열립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사탄에게 맡기신 채로 가끔 방문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우리를 완전히 당신의 자녀로 삼으셨습니다. 이 사실을 확신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죽음의 세상의 상황 종료를 명하시고 새 하늘과 새 땅을 주실 것입니다. 이 병든 몸을 조금 호전되게 하시는 정도를 넘어서 나중엔 질병과 죽음이 아예 관계없는 부활의 새 몸을 입혀 주실 것입니다. 

이제 유다 백성이 할 일은 무엇이었을까요? 단 한 가지뿐이었습니다. 그것은 <여호와를 앙망하는 것>이었습니다.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앙망>이란 단어의 어근은 <참을성 있게 기다린다>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기다리는 동안에 할 일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기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앞에서 한 교우의 간증을 들었습니다. 그게 우리가 할 일입니다. 기도하십시오. 하나님의 때가 오길 바라보며 포기하지 말고 기도하십시오. 그렇게 할 때 우리는 새 힘을 얻을 것입니다. 

<새 힘을 얻는다>는 말의 원뜻은 <나무에서 싹이 나고 땅에서 풀이 돋는 것>을 의미합니다. 딱딱한 땅을 뚫고 여린 새싹이 돋는 것처럼 하나님께서는 당신을 앙망하는 자로 하여금 고난의 땅을 뚫고 나오게 하실 것입니다.  

어느 목사님의 글에 보니 <세상에서 가장 강한 자 몇 사람이 있다>고 했습니다. 그 첫째는 하나님 안에서 꿈을 가진 사람입니다. 바울 사도가 그러한 분이었습니다. 목표가 분명한 사람처럼 무서운 사람은 없습니다. 

둘째는 자신이 약하다는 것을 아는 사람입니다. 일본의 파나소닉, 즉 <마쓰시다 전기>를 창업한 <마쓰시다 고노스케>는 존경받는 경영인으로 남아 있습니다. 그는 신입사원 최종 면접에서 꼭 한 가지 묻는 게 있었다고 합니다. <당신이 최종면접까지 올라온 것은 노력 때문입니까? 운이 좋아서입니까?> 그는 노력 때문이라고 대답한 사람들은 낙방시켰습니다. 

후에 이유를 묻는 기자에게 대답했습니다. <노력 때문이라고 믿는 사람은 나중에 회사가 섭섭하게 하면 회사를 욕하면서 나가지요. 그러나 운이 좋아서라고 대답하는 사람은 끝까지 회사를 사랑합니다.> 

여러분, <운이 좋아서>란 말을 기독교적으로 바꾸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자신은 약하고, 은혜 때문에 사는 줄 아는 사람이 강합니다. 그는 늘 하나님의 은혜를 바라볼 것이고, 하나님께서는 은혜로 채우실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하나님께 기도하는 사람이 강합니다. 기도는 하나님의 전지전능하심을 우리의 것으로 만드는 비결입니다. 기도는 돈이 들지 않지만 가장 큰 재물보다 풍성하고, 요란하지 않지만 사탄도 굴복시키는 소리 없이 강한 무기입니다. 우리 모두 여호와를 앙망함으로 새 힘을 얻어 독수리처럼 우리를 묶어두는 땅을 박차고 축복의 창공으로 날아오르게 되길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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