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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신 4:34-35, 고전 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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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신 4:34-35, 고전 2:1-2)
  
일본의 어느 대학자가 나룻배로 강을 건너게 되었습니다. 넓은 강이므로 건너는 시간이 길어지자 무료해진 학자가 사공에게 말을 건냈습니다. 
“사공양반, 철학자 플라톤을 아시오?” 

사공은 “제가 그런 분을 어떻게 알겠습니까?”라고 했습니다. 

학자는 “당신은 철학을 모르기 때문에 인생의 절반을 잃은거요. 그럼 프랑스가 어디 있는지 아시오?” 라고 했습니다. 

사공은 “웬걸요. 저 같은 사람이 그런 것을 알 수 있나요?”라고 대답했습니다. 

“쯧쯧, 당신은 인생의 4분의 1을 잃어버렸소. 프랑스는 유럽에 있는 나라이며, 예술의 나라요. 그럼 시(詩)에 대하여 좀 알고 있소?” 학자는 다시 물었습니다. 

“어른, 전 그런 거 다 모릅니다.” 사공은 여전히 모른다는 말만 반복했습니다. 

학자는 불쌍하다는 듯 사공을 쳐다보았습니다. 강어귀에 가까이 왔을 때에 갑자기 돌풍이 일어나 배가 뒤집혔습니다. 물에 빠진 사공은 허우적거리며 안간힘을 쓰고 있는 학자에게 물었습니다. 
“학자님, 수영할 줄 아십니까?” 
“난 수영 못해요.” 그 때 사공은 “그렇다면 학자님은 목숨을 잃은 겁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세상 학문에는 뛰어나지만 자신의 생명을 보존하여 사는 법을 모르는 학자입니다. 세상에는 영원히 사는 법을 모르는 이런 똑똑한 바보가 너무 많이 있습니다.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철학과 예술과 문학이 아니라 생명을 얻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대로 온 천하를 얻고도 목숨을 잃으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모든 학문과 아름다움을 얻어도 죽으면 아무 것도 아닙니다. 흔히 하는 말처럼 “다 살자고 하는 일인데” 죽으면 아무 것도 아닙니다. 다른 거 없어도 이것만은 있어야 합니다. 다른 거 다 잃어도 이것만은 잃지 말아야 합니다. 이것은 생명입니다. 
  
최근에 ‘브리티시 오픈’이란 골프 대회가 끝이 났습니다. 필 미켈슨이란 선수가 우승하였습니다. ‘브리티시 오픈’은 세계 최고의 역사를 자랑하는 오픈대회입니다. 그래서 많은 경기가 있고, 많은 오픈대회도 있지만 유일한 오픈이란 뜻으로 ‘디 오픈’(The Open)이라고 합니다. 
  
종교를 사전적 의미에서는 ‘삶의 근본 목적을 찾는 문화 체계’ 혹은 ‘모든 민족에게서 보이는 문화 현상’이라고 합니다. 여러분, 우리의 신앙생활이 문화 활동입니까? 우리 기독교가 문화 체계입니까? 어떤 분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모든 종교가 문화라면 기독교는 생명이다”. “모든 종교가 종교가 아니라면 기독교는 종교이다”. 
  
기독교는 생명을 공급하고, 영생을 보장하는 유일한 종교라는 자부심이 있습니다. 어떻게 유일한 종교가 될 수 있습니까? 십자가의 그리스도 때문입니다. 십자가의 그리스도가 아니면 기독교가 다른 종교와 다를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도덕이나 윤리에 지나지 않을 것입니다. 
  
바울은 오늘 본문에서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 하나님의 증거를 전할 때에”라고 합니다. 이 말은 사도행전 18:1-17에 기록된 2차 전도여행 때에 고린도에서 증거한 내용을 말합니다. 바울은 고린도에서 제법 긴 시간인 1년 6개월 동안 머물렀습니다. 바울은 고린도를 잘 압니다. 그런데 바울은 고린도교회에 고린도의 철학이나, 문학이나, 이방종교와의 논쟁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와 십자가”만을 전하겠다고 합니다. 
  
왜 바울이 알고 전하고자 했던 것이 ‘예수 그리스도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만입니까? 바울에게 이것 외에 어떤 것도 가치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바울의 유일한 가치가 우리의 가치가 되어 우리도 예수 그리스도와 십자가만을 알고 전파하는 자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첫째, 알고 전하는 것은 말과 지혜의 아름다움이 아닙니다. 

고린도전서 2:1에는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 하나님의 증거를 전할 때에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으로 아니하였나니”라고 합니다.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은 헬라 사람들이 가장 소중히 여기던 것들입니다. 
  
말은 힘이 있습니다. 그래서 흔히 ‘말의 힘’이라고 합니다. ‘말의 힘’이란 제목의 책도 있습니다. 말은 사람을 높이기도 하고, 낮추기도 합니다. 용기를 주기도 하고, 실망을 주기도 합니다. 말은 죽을 사람을 살리기도 하고, 산 사람을 죽이기도 합니다. 
  
파울로 코엘료는 ‘브리다’라는 그의 소설에서 “말은 그 어떤 의식보다 더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어”라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말은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어 사람에게 많은 감동을 주고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게도 합니다. 
  
“큰 사람은 사상 이야기를 하고, 보통 사람은 시사 이야기를 하고, 작은 사람은 남의 이야기를 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작은 사람들이 하는 말 때문에 남을 아프게 하고, 상하게 하고, 죽게 하는 경우도 흔합니다. 인터넷의 얼굴 없는 말이 연예인들과 많은 사람을 죽게 만들었습니다. 최근 정치권의 막말 파문은 나라를 혼란에 빠트립니다. 
  
이웃에 대한 거짓 증거는 옛 사회에서는 아주 엄하게 벌을 내렸습니다. 옛날 아덴에서는 이런 사람의 시민권을 박탈하였습니다. 로마에서는 이런 사람을 낭떠러지에서 밀어 떨어트렸습니다. 이집트에서는 코를 잘랐습니다. 왜 그렇게 엄한 벌을 내렸습니까? 말은 사람을 죽게 하는 독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말은 그 자체가 감동하는 힘이 있고 사람을 변화시킵니다. 말은 사람을 “들었다 놨다”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말과 지혜의 아름다움으로 복음이 전파되지는 않습니다. 복음은 말의 힘에 의하여 전파되는 것이 아닙니다.  
  
히틀러와 처칠은 똑같이 연설의 달인이었습니다. 히틀러는 연설로 게르만족을 흥분시켰고 분노와 적개심을 일으켰습니다. 그는 그의 말로 게르만족에게 힘을 주어 제2차 세계대전을 승리로 이끌 줄 알았지만 결국 패배하였습니다. 처칠은 영감 있는 웅변과 바르고 선하고 인격적인 말을 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의 말은 영국인에게 용기를 주었을 뿐만 아니라 제2차 세계대전을 승리로 이끈 동력이 되었습니다. 말은 곧 힘입니다. 말은 국력입니다. 
  
그러나 말을 잘한다고 전도를 잘하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 지혜가 풍성하다고 전도를 잘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말이 전도에 방해가 되며 세상 지혜가 전도를 막을 때도 있습니다. 전도는 말로 하는 것이 아니며 인간의 지혜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출애굽하게 하실 때 말을 잘못하는 모세를 앞세우셨습니다. 출애굽기 4:10에는 “주여 나는 본래 말을 잘 하지 못하는 자니이다 주께서 주의 종에게 명령하신 후에도 역시 그러하니 나는 입이 뻣뻣하고 혀가 둔한 자니이다”라고 합니다. 

이 말을 들은 하나님께서는 14절에 “네 형 아론이 있지 아니하냐 그가 말 잘 하는 것을 내가 아노라”고 하십니다. 인간적인 조건으로 볼 때 하나님께서 아론을 보내는 것이 훨씬 유리했습니다. 아론은 모세보다 세 살이나 많은 형이었고, 모세는 동생이었습니다. 아론은 애급에 머물고 있었고, 모세는 미디안 광야에 있었습니다. 아론은 말을 잘 하는 사람이었고, 모세는 말을 잘 못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아론이 아니라 모세를 지도자로 세우셨고, 아론이 동생인 모세를 돕게 하셨습니다. 구원이 사람의 말에 있는 것도, 사람의 나이에 있는 것도, 사람의 권위에 있는 것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위대한 부흥사인 무디가 어느 대학교에서 설교하였습니다. 그 대학교의 문학과 교수 한 분이 “목사님, 설교는 너무 좋았습니다만 유감스럽게도 문법적으로 틀린 부분이 50여 군데나 되는군요”라고 하였습니다. 그 때 무디는 “충고는 감사합니다. 한 가지 묻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나는 문법도 안 맞는 언어로 수천 명의 영혼을 주님께 인도하였습니다. 

그런데 선생님은 그 정확한 언어로 몇 사람이나 그리스도께 인도하였습니까?” 무디는 평소에도 문법적으로 틀리는 말을 많이 하였다고 합니다. 심지어 한 번 설교에 1,500번 정도의 언어의 잘못된 부분이 있었다고 합니다. 거창한 웅변이나, 정확한 언어 구사나, 아름다운 말이 아니라 십자가의 그리스도가 사람을 구원합니다. 영혼을 사랑하는 극진한 마음이 영혼을 주님 앞으로 인도합니다. 
  
어느 목사님은 목소리와 문법과 단어 하나하나가 얼마나 아름다운지 설교를 시작하면 말에 빠져 내용을 놓칠 때가 있습니다. 참 아름다운 설교이지만 오히려 아름다운 말과 지혜가 복음에 방해가 될 수도 있습니다. 
  
최근에 어느 기관에서 한국교회 여러 목사님들의 목소리로 ‘듣는 성경’을 제작하고 있습니다. 성우들이나 배우들의 목소리가 얼마나 부드럽고 듣기가 좋습니까? 목사님들이 아무리 잘 해도 그들처럼 할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 거친 목소리, 어색한 억양으로 낭독한 성경이 은혜가 된다는 것입니다. 한국교회에서 가장 연세가 높으신 103세이신 방지일목사님도 한 부분을 하셨고, 저도 한 부분을 녹음을 해 놓았습니다. 목소리가 좋은 것도 장점이지만 은혜는 목소리에 비례하는 것이 아닙니다. 은혜는 말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시편 23편을 암송하고 잘 알면 뭘 하겠습니까? 목자를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서기관과 바리새인과 다른 권세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말을 잘해서가 아니라 예수님이 말씀이기에 권세가 있었던 것입니다.  
  
요한일서 3:18에는 “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고 합니다. 우리가 전하는 것이 말과 지혜가 아니라 행함과 진실함으로 해야 합니다. 이것이 생활신앙입니다. 우리도 바울처럼 말과 지혜로 전하지 말고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만으로 전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둘째, 알아야 할 것은 예수 그리스도와 십자가뿐입니다. 

고린도전서 2:2에는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고 합니다. 바울의 유일한 지식, 관심, 전파는 예수 그리스도와 십자가입니다. 그 외에 어떤 것도 바울의 관심이 아닙니다. 
  
바울은 지식적으로 충만한 사람이었습니다. 사도행전 5:34에는 “바리새인 가말리엘은 율법교사로 모든 백성에게 존경을 받는 자라”고 합니다. 가말리엘은 당대의 위대한 랍비였습니다. 랍비 가운데 선택된 7인을 ‘라반’이라고 하는데 가말리엘이 라반이었고, 그의 아버지 시므온이 라반이었고, 그의 조부는 위대한 랍비 힐렐이라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사도행전 22:3에는 “나는 유대인으로 길리기아 다소에서 났고 이 성에서 자라 가말리엘의 문하에서 우리 조상들의 율법의 엄한 교훈을 받았고”라고 합니다. 바울은 유대 최고의 명문 율법교사에게 교육을 받았습니다. 율법이나, 철학이나, 문학에 조예가 뛰어났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지식이나, 말이나, 철학을 알지 않기로 했다고 합니다. 왜요?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힌 것 때문입니다. 어떤 것도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힌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바울은 그 많은 지식을 배설물같이 여겼습니다. 웬 배설물입니까?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어떤 것도 그리스도와 십자가에 비교할 수 있는 가치가 아니었습니다. 
  
마태복음 13장의 예수님의 천국 비유 가운데는 ‘감추인 보화의 비유’와 ‘진주장사의 비유’가 있습니다. 두 비유는 약간의 차이가 있지만 공통점은 모든 것을 팔아서 하나를 산다는 것입니다. 모든 것에 대한 관심이 아니라 하나에 대한 관심이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천국이란 유일한 관심입니다. 많은 것 가운데 하나가 아니라 유일한 것입니다. ‘진주장사의 비유’에서는 값진 진주 ‘하나’를 샀다고 합니다. 모든 것을 다 팔아 하나를 살 수 있는 유일한 가치가 진주입니다. 많은 것 가운데 선택이 아니라 선택의 여지가 없음(No choice)을 의미합니다. 이것이 천국이며 이것이 천국에 들어갈 십자가의 의미입니다. 
  
“B(birth)와 D(death) 사이에는 C(choice)가 있다”는 말이 있습니다. 사람은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끊임없이 선택하며 살아갑니다. 인생에서 모든 선택이 탁월한 선택이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러나 모든 것이 다 탁월한 선택이 아니라 하더라도 하나만은 탁월한 선택이어야 합니다. 곧 그리스도와 십자가입니다. 유일하게 하나만 선택하라면 용기 있게 선택해야 할 것이 십자가입니다. 그것만 가질 수 있다면 된다고 하는 한 가지가 십자가입니다. 바울은 이것 하나만 붙들고 살았고, 이것 하나만 전하기를 그렇게 바랐습니다. 
  
“내가 평생에 가장 잘 한 일은 당신을 만난 일이다”라고 어떤 분이 말했습니다. 정말 남편과 아내가 서로 이렇게 말할 수 있다면 다른 것을 보지 않아도 성공적 인생입니다. 이 말이 아부로 하는 말이 아니고, 거짓이 아니고, 진실이라면 이 사람은 행복한 사람입니다. 
  
모든 지식과, 모든 재물과, 모든 시간과, 모든 열정을 다 바쳐 예수 그리스도와 십자가만을 알고, 전하고, 최상의 가치라면 얼마나 행복하겠습니까? 바울의 이 신념이 우리의 신념이기를 바랍니다. 
  
미국 프로 야구에 칼 립켄 주니어라는 전설적 선수가 있습니다. 이 분은 철인이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습니다. 메이저리그에서 2,632게임 연속출장의 기록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런 대기록을 가지기 위해서는 자신의 몸 관리도 잘 해야 하고, 실력도 있어야 합니다. 그는 21년 동안 볼티모어 ‘오리올스’라는 구단에서 한 번도 다른 구단으로 이적하지 않고 은퇴하였습니다. 

어느 글에 보니 그의 성공은 단순성 때문이었다고 합니다. 그는 자신의 눈부신 성장의 원인을 일찍부터 한 우물만을 판 단순성이라고 고백하였습니다. 어릴 때 동네 다른 아이들은 모든 스포츠에 만능이 되려고 하였지만 그는 야구에만 몰두하였습니다. 그에게 운동이란 야구 하나뿐이었습니다. “내가 아는 것은 야구뿐이다”라고 그는 말합니다. 가장 강력한 삶은 단순한 삶입니다. 우리 신앙에도 마찬가지입니다. 모든 것을 다 알려고 하는 만능 믿음이 아니라 바울처럼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만을 아는 단순한 믿음이 가장 강력한 믿음입니다. 
  
위대한 영성가 토마스 머턴은 “당신의 삶을 단순화하기 위해서는 당신의 갈망을 단순화하라. 당신의 삶을 영성화하기 위해서는 당신의 갈망을 영성화하라”고 하였습니다. 단순성이란 영성훈련의 중요한 덕목입니다. 십자가 하나에 믿음을 집중시켜야 합니다. 이것이 단순한 믿음이며, 순수한 믿음입니다. 
  
성경에 등장하는 인물은 3만 명가량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구원에 필요한 인물은 한 분 곧 예수 그리스도밖에 없습니다. 성경에는 수많은 사건들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구원에 필요한 사건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사건밖에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은 그런 의미에서 우리 신앙과 지식의 핵심입니다. 그리스도와 십자가는 우리 구원의 주체이며, 신앙의 핵심이며, 지식의 유일한 내용입니다. 그리스도와 십자가를 확실하게 믿는 우리가 되기를 바랍니다. 
  
찬송 415장 3절에는 “십자가 그늘에서 나 길이 살겠네 나 사모하는 광채는 주 얼굴뿐이라 이 세상 나를 버려도 나 관계 없도다 내 한량없는 영광은 십자가뿐이라”고 합니다. 우리 찬양의 내용은 십자가뿐입니다. 십자가만이 가치입니다. 십자가만이 영광의 내용입니다. 

  
결론 

톨스토이의 민화에 ‘세 명의 수도사’라는 단편이 있습니다. 러시아의 아주 먼 섬에 세 수도사가 있었습니다. 아주 외딴 섬이기에 아무도 가본 사람이 없었습니다. 어느 날 주교는 큰마음을 먹고 그 섬에 가서 수도사들을 보기로 작정하고 떠났습니다. 그 섬에 도착하여 수도사들을 보니 주기도문도 모르고 있었습니다. 주교는 최선을 다해 주기도문을 가르쳐주고 자신의 한 일에 만족하며 그 섬을 떠나 돌아왔습니다. 배가 바다 한 가운데쯤 왔을 때 바다 위에 세 수도사가 물위를 걸어 따라오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배에 와서 말합니다. 
“주교님, 가르쳐 주신 주기도문을 잊어버렸습니다.” 주교는 어안이 벙벙했습니다. 
“형제들이여, 그대들은 어떻게 기도하였습니까?” 
“우리는 그냥 이렇게 아뢰지요. 사랑하는 하나님, 하나님도 세분이시고 저희도 셋이니 저희를 불쌍히 여기소서”. 

주교는 그들의 거룩함과 단순성에 탄복하여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대들의 땅으로 돌아가 평안히 거하시오”. 신앙이란 단순함에서 최고의 가치를 품어냅니다. 
  
우리의 신앙과 삶을 단순화합시다. 수많은 말과 지혜의 아름다움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와 십자가가 우리 신앙의 유일한 목적이며 핵심입니다. 그 외에 어떤 것도 더 가치 있는 것이 있을 수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만을 알고 전하는 십자가의 신앙을 가진 그리스도인이 다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이성희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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