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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섬기는 자가 되십시오 (마 23: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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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기는 자가 되십시오 (마 23:1-12)

21장에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예수님께서는 성전을 한바탕 뒤흔드는 사건을 일으키신 후 당시 종교지도자들과 전면전을 치루셨습니다. 예루살렘 입성하시기 전까지만 하더라도 직접적인 충돌을 피하셨던 예수님께서 뭔가 의도적으로 당시 종교지도자들과 맞서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들이 예수님의 권위에 대해 시비를 걸자 예수님께서는 세 가지 비유를 통해 그들이 심판 받을 것을 강력하게 경고하셨습니다.

그 경고의 말씀이 두 아들의 비유, 포도원과 소작인의 비유 그리고 혼인잔치의 비유였습니다. 그리고 이어 그들과 네 번에 걸친 논쟁을 통해 그들의 신앙이라는 것이 얼마나 위선적이며 잘못된 것인지를 드러내셨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굴복시키기 위해 논쟁을 걸어왔지만 오히려 예수님께서 그들의 무지와 허위의식을 드러냄으로써 그들을 물리치셨습니다.

이제 그들의 잘못된 신앙을 질책하셨던 예수님께서 23장을 통해 그들에 대한 심판과 일곱 차례에 걸친 불행선언을 하심으로써 유대교를 완전히 굴복시키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아주 구체적으로 유대교와 그 지도자들이 갖고 있는 잘못을 드러내시고 그들이 하나님의 심판을 받을 것을 선포하셨던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부터 시작되는 이 말씀은 결코 당시 종교지도자들에게만 말씀하신 내용이 아니라는 사실을 염두해 두고 오늘 말씀을 들어야 할 것입니다. 오늘날도 자칭 우리가 교회 안에서 믿음이 있노라고 말하면서 우리 역시도 예수님 당시 종교지도자들처럼 종교생활을 하고 있지 않은지 뒤돌아 보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오늘 본문의 말씀이 결국에는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도 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이시기 때문입니다.

23장은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누어 집니다. 오늘의 본문인 1-12절은 무리와 제자들에게 행하신 경계의 말씀입니다. 한 마디로 율법학자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을 본받지 말라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 13-36절까지는 율법학자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을 향한 일곱 차례의 불행선언, 저주선언입니다. “너희에게 화가 있다”라는 구절이 일곱 번 나옵니다. 

그리고 끝으로 37-39절에 예루살렘을 향한 질책과 한탄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러분,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기 전 진정한 믿음생활을 하지 않고 그저 종교적 차원의 삶을 사는 이들에게 저주를 선언하셨다는 것은 우리가 깊이 살펴보아야 할 일입니다. 오늘날 이 미국땅의 이민교회가 어쩜 이 말씀을 깊이 새겨야 할 시기가 된 것인지 모릅니다. 

이민 100년의 시간을 지나면서 미국 땅에 한인교회의 역사도 함께 이루어져 왔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교회 안에서의 모습은 영혼구원에 대한 관심보다는 세상적인 일에 더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강대상에서는 복음 설교가 사라졌습니다. 교인들이 예수 그리스도가 어떤 분이신지 알지 못합니다.

그냥 교회에 나오기만 하면 뭔가 해결된 듯한 착각 속에서 삽니다. 교회 안에서의 직분도 문제입니다. 집사로, 권사로, 장로로 세움받았으면서도 그 합당한 믿음의 생활과 실천을 하지 못합니다. 교인들이 가장 많이 읽어야 할 성경을 제일 읽지 않는 책으로 여겨지기 시작했습니다. 

여러분은 성경을 날마다 읽으십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가까이 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말씀을 봐야 내가 뭘 해야 하는 지를 알 수 있습니다.

자, 오늘의 본문인 1-12절을 보겠습니다. 먼저 1-2절의 말씀입니다.

1 이에 예수께서 무리와 제자들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2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모세의 자리에 앉았으니

2절에서 '모세의 자리에 앉았다'는 것이 무슨 말이겠습니까? 유대인들의 회당에 가면 맨 앞에 율법 두루마리가 놓여 있고, 그 앞에 빈 의자가 하나 놓여 있는데 이름하여 “모세의 자리”입니다. 그 옛날 시내산에서 율법을 전수받아 백성들에게 전해준 모세를 기리는 자리이지요. 물론 그 의자는 평소에 늘 비어 있습니다.

그런데 회당에서 유대인들이 예배를 드리기 위해서 모였을 때 율법학자나 바리새인이 오면 바로 그 의자에 앉아서 백성들을 향해 율법을 읽고 강론을 했습니다. 그러니까 일반 백성들은 도무지 그 자리에 앉을 수 없습니다. 거기에는 오로지 율법학자나 바리새파와 같이 율법을 제대로 공부하고 강론할 수 있는 사람만 앉을 수 있었습니다. 그런 점에서 그것은 특권이었고, 바로 그것을 나타낸 것이 이 표현입니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모세의 자리에 앉았으니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모세의 제자들이요, 모세의 권위를 누리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모든 백성들이 그들을 존경했고, 그들의 가르침을 경청했습니다. 그들이 하는 말은 모세의 말과 같은 권위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탈무드와 같이 모세오경을 내용을 잘 풀이하여 설명한 책들을 랍비들이 썼을지라도 그 책의 권위는 성경다음으로 갖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오늘 아주 분명하게 지적하셨습니다. 3절의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그들이 말하는 바는 행하고 지키되 그들이 하는 행위는 본받지 말라 (그들은 말만 하고 행하지 아니하며)

그렇다면 율법학자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이기에 예수님께서 이렇게 심한 말씀을 하셨겠습니가? 우선 그들은 말만 하고, 행하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백성들에게 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다 행하고 지키되, 그들의 행실은 따르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한 가지 의문이 있습니다. 율법학자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이 정말 말만 하고 행하지는 않았냐라는 것입니다. 진실로 그들은 율법을 말로만 지킨다고 했지 실제로는 지키지 않았다는 말이냐는 것입니다.

아닙니다. 그들은 율법을 철저하게 지킨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율법을 지킨다는 것은 당연히 행동이 따를 때 쓸 수 있는 표현입니다. 세상에 그 누가 행동을 하지 않고 율법을 지켰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마태복음 19장에 나오는 부자 젊은이 이야기에 분명히 나타나 있습니다. 제가 새번역본으로 읽어 드리겠습니다.

“그런데 한 사람이 예수께 다가와서 물었다. ‘선생님, 내가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면, 무슨 선한 일을 해야 합니까?’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어찌하여 너는 나에게 선한 일을 묻느냐, 선한 분은 한 분이다. 네가 생명에 들어가기를 원하면, 계명들을 지켜라.’ 그가 예수께 물었다. ‘어느 계명들을 지켜야 합니까?’ 예수께서 대답하셨다. ‘살인하지 말아라. 간음하지 말아라. 도둑질하지 말아라. 거짓 증언을 하지 말아라.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여라. 그리고,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여라.’ 그 젊은이가 예수께 말하였다. ‘나는 이 모든 것을 다 지켰습니다. 아직도 무엇이 부족합니까?’ ” (마태복음 19:16-20)

방금 읽었던 본문에서 보는 바와 같이 그 젊은이는 분명히 주님이 말씀하신 바 그 모든 계명을 다 지켰다고 말합니다. 다 행했다는 의미입니다. 그 젊은이의 말이 진실되다는 것은 마가복음 10:21의 표현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예수께서 그를 눈여겨보시고, 사랑스럽게 여기셨다.”

이는 그 젊은이가 모든 율법을 다 지켰다는 것을 인정한 것입니다.

바리새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도 분명히 율법을 철저하게 지키기 위해 행동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말씀하신바 “그들은 말만 하고, 행하지는 않는다”는 말씀의 뜻은 무엇인가? 그것이 4절부터 나오는 말씀입니다.

또 무거운 짐을 묶어 사람의 어깨에 지우되 자기는 이것을 한 손가락으로도 움직이려 하지 아니하며

4절의 '무거운 짐'이라는 단어는 새번역에서 이렇게 번역하고 있습니다. '지기 힘든 무거운 짐', '지기 힘든 무거운 짐'이라는 것은 무엇입니까? 마태복음 11장 28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여러분! 한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유대의 율법학자들이 구약에서 지키라고 찾아낸 계명이 모두 613개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사실 613개의 계명이 무엇 무엇인지 보통 사람들이 아는 건 쉽지 않습니다.

그런데 하루하루 먹고 살기 바쁜 사람들이, 아니 사실은 먹고 살 길이 없어서 가난에 찌든 생활을 하는 백성들이 언제 613가지나 되는 계명들을 지킬 수 있습니까? 지키기는커녕 613가지가 도대체 무엇인지 알 수도 없는 형편입니다.

바리새파나 율법학자들은 재산이 많고 사는 것이 넉넉하니까 시간을 내서 율법을 공부할 수 있고, 또 그것을 지키겠다고 노력할 수 있지만 날품팔이하고, 남의 양을 치고, 빌어먹는 사람들이 무슨 수로 그 율법을 공부하고 또 지킬 수 있단 말입니까?

그런데 바리새파나 율법학자들은 바로 그 백성들을 향해 율법을 지키지 않는다고 꾸짖고, 무시하고, 욕하고 했던 것입니다. 대표적인 예가 바로 바리새파 사람들이 예수님의 제자들을 꾸짖는 장면입니다. 잔칫집에 가서 손을 씻지 않고 음식을 먹었다가 혼이 나는 장면 말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613가지나 되는 무거운 짐을 내려 놓으라고, 모든 것 다 지키려고 아등바등 댈 것 없다는 것입니다. 그 대신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의 편안한 멍에, 가벼운 짐만을 지라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마태복음 11장 28절의 진정한 의미입니다. 꼭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우리 주님은 우리에게 무거운 짐을 짊어지게 하시는 분이 아니라, 우리가 쓸데없이 지고 있는 멍에를 가볍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런데 바리새파나 율법학자들은 어떻게 행동했습니까? 그들은 경문 곽을 크게 만들어서 차고 다니고, 옷술을 길게 늘어뜨립니다. 경문 곽이란 양피지에다 성경구절들을 적어서 역시 양피지로 만든 성냥갑 크기의 통에다 넣는 것입니다. 어떤 이들은 항상, 어떤 이들은 기도할 때 경문 곽을 이마와 왼팔 윗부분에 묶습니다. 머리로는 항상 율법을 생각하고 왼팔 윗부분에 맞닿는 심장으로는 율법을 사랑하겠다는 표현입니다.

그런데 바리새파나 율법학자들은 그것을 크게 만들어서 차고 다녔습니다. 그 이유가 남들 눈에 잘 띄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

옷술을 길게 늘어뜨리는 것은 신명기 22장 12절과 민수기 15장 38-39절의 말씀에 따라 겉옷 옷단 네 곳에다 흰 실과 푸른 실로 꼬은 술(히브리어로 지짓)을 달고 다니는 것인데, 이것 역시 율법을 명심하라는 표지입니다.

또한 그들은 잔치에서는 윗자리에, 회당에서는 높은 자리에 앉기를 좋아하며, 장터에서 인사받기와 사람들에게 랍비라고 불리기를 좋아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율법학자들이 의관을 정제한 채 경문 곽을 크게 달고, 옷술을 늘어뜨리고 시장을 지나가면 상인들은 하던 일을 멈추고 “랍비”하면서 인사했는데 그들은 그렇게 인사받는 것을 좋아했다는 것입니다. 혹시 오늘날 교회 안에서도 이런 모습이 보이지는 않습니까? 한번 생각해 볼입니다.

(저는 얼마 전 어떤 분으로부터 이런 얘기를 들었습니다. 자신을 대접해 주지 않는다는 말을 말입니다. 그 말을 들으면서 저는 속으로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정말 당신은 구원받은 사람이 맞습니까? 교회 안에서 대접을 받길 원한다는 것 자체가 자신은 구원받지 못한 사람이라는 것을 드러내는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마태복음 6장에 보면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자선을 베풀고, 기도할 때, 금식할 때 등 모든 행위를 다 남들에게 보여주기 위해서 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이 너희에게 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다 행하고 지켜라. 그러나 그들의 행실은 따르지 말아라.”

여기서 “그들의 행실을 따르지 말아라”는 것은 그 어떤 종교적인 행위든 남에게 보여주기 위해서, 위선적으로 하지는 말라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오늘날 우리 교회공동체에서는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이 이민 땅의 한인교회는 어떤 모습으로 서 있습니까? 오늘 주님은 이 땅의 한인교회 성도들에게 말씀하십니다. 오늘 이 말씀을 듣고 있는 교인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말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8-12절의 말씀입니다.

8 그러나 너희는 랍비라 칭함을 받지 말라 너희 선생은 하나요 너희는 다 형제니라
9 땅에 있는 자를 아버지라 하지 말라 너희의 아버지는 한 분이시니 곧 하늘에 계신 이시니라
10 또한 지도자라 칭함을 받지 말라 너희의 지도자는 한 분이시니 곧 그리스도시니라
11 너희 중에 큰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리라 
12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누구든지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방금 읽은 구절에서 세 가지 호칭이 나옵니다. 랍비, 아버지, 지도자입니다. 그런데 이 모두 다 높은 위치에 있는 사람들의 호칭입니다. 이 단어들은 스스로 높은 사람들, 권위가 있는 사람들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은 유대인들에게 묻습니다. “너희가 랍비라고?”

그리고 대답하십니다. “아니다. 너희는 랍비가 아니다. 랍비는 오직 한 분 하나님이시다.” 그리고 무리와 제자들에게 그렇게 불리지 말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오직 하나님 한 분만이 높임을 받을 분이시라는 것입니다.

교회는 세상의 조직과 다른 조직입니다. 세상은 높은 자리에 있는 사람들이 대우받고 명령할 수 있는 조직입니다. 우리가 다니는 직장이나 학교만 보더라도 그렇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는 다릅니다. 높은 자리의 사람들이 오히려 더 낮아지는 곳이 교회 즉 하나님 나라입니다. 그래서 교회 안에서는 목사가, 장로가, 권사가, 집사가, 직분자들이 더욱더 낮아지고 겸손해져야 하는 곳입니다.

교회공동체는 섬기는 사람이 으뜸가는 사람이요, 자기를 낮추는 사람이 높아지는 곳입니다. 자기를 스스로 높이는 사람은 낮아질 수 밖에 없는 곳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랍비는 오직 한 분,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는 그분 앞에서 늘 섬기는 자가 되고, 낮추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럴 때 오히려 하나님께서 우리를 높여주실 것입니다. 섬기는 자세를 갖춘 자만이 구원받은 자임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내가 대접받으려 하기 보다 남을 대접하는 그 사람이 아름다운 성도입니다. 진정한 교회를 세워나가는 거룩한 성도인 것입니다. 오늘 말씀과 같이 섬김을 통해 우리 모두 참다운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아가는 축복을 누리게 되시는 한 주가 되시길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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