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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복된 성경적인 리더십 (습 1: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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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된 성경적인 리더십 (습 1:1-18)
  
< 희생하는 문화를 만드십시오 >
  
요새 우리 경제가 큰 위기입니다. 그래도 왠지 한국인의 저력이 믿어지고 하나님이 우리나라를 크게 쓰실 것이란 믿음은 변함없습니다. 그런 쓰임 받는 나라가 되도록 무엇을 준비해야 할까요? 무엇보다 희생시키는 문화를 청산하고 희생하는 문화를 만들어가야 합니다. 특히 리더와 권력자가 희생을 선도하면 그 공동체가 얼마나 복된 공동체가 되겠습니까? 지나친 이상주의 같지만 우리 민족은 이미 그런 전통이 있습니다. 
  
역사상 전 세계에서 거의 유례없이 오래 지속된 왕조가 있습니다. 바로 우리나라 조선시대의 ‘이씨 왕조’입니다. ‘이씨 왕조’는 1392년 개국 이래 1910년 멸망할 때까지 519년간 세계에서 거의 유례를 찾기 힘들 정도로 오래 지속되었습니다. 한 국가가 그 이상 지속된 경우는 있어도 한 왕조가 그렇게 오래 지속된 예는 거의 없습니다.
  
그 기간 동안 연산군이나 광해군은 신하들의 반정으로 왕좌에서 쫓겨났지만 그때 신하들이 새 왕으로 내세운 사람은 쿠데타의 주모자도 아니고, ‘다른 성씨’나 ‘다른 이씨’가 아니라 왕족 혈통의 ‘이씨’였기에 ‘이씨 왕조’는 그토록 오래 지속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게 ‘이씨 왕조’가 지속될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이씨 왕조’가 집안 단속을 잘하고 ‘왕도정치’의 규범에 비교적 충실했기 때문이라고 역사학자들은 말합니다.
  
‘이씨 왕조’는 왕자와 왕손과 왕의 증손까지 벼슬길을 막았습니다. 그래서 왕손이나 왕의 증손들은 왕가란 명예만 있을 뿐 초가집에 살며 끼니를 걱정할 때도 많았습니다. 그 왕손들 중에는 학문이 탁월한 사람도 많았지만 왕손이란 이유로 과거도 보지 못했습니다. 그처럼 왕의 주도로 왕손들의 벼슬길을 철저히 막은 이유는 왕가가 희생해야 백성들의 모범이 된다고 여겼기 때문입니다.
  
얼마나 바른 정신입니까? 그 왕손들은 선왕들이 내세운 ‘왕도정치’의 규범에 충실히 따랐기에 그들의 희생은 큰 희생으로 미화되지 않고 자연스럽게 그 전통이 확립된 것입니다. 그런 희생정신으로 집안 단속을 철저히 했기에 ‘이씨 왕조’가 그토록 오래 지속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반면에 일전에 어떤 전직 대통령은 퇴임 후 친인척 비리가 밝혀졌을 때 그 비리의 범위가 구족의 범위를 넘어 종형제의 처가에까지 미쳤었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나라의 기강이 바로 서겠습니까?
  
지금 경제는 어렵지만 앞으로 ‘한국의 때’를 예상하는 미래학자들이 많습니다. 우리나라는 공산주의와 민주주의가 가장 첨예하게 대립한 현대사 최고의 이념 격전지로서 6.25전쟁의 고난을 통해 최고의 삶의 노하우를 배양한 나라입니다. 또한 정보화시대에 다양한 정보를 보유하기에 빠르고 편한 세계 최대의 문자인 한글을 가지고 있고 고학력의 인력도 많고 무엇보다 하나님을 잘 섬기는 나라이기에 우리의 미래는 찬란할 것입니다.
  
다만 한 가지 부족한 점은 세계를 품는 큰 그릇이 되지 못한 점입니다. 지금 여러 종류의 갈등이 곳곳에서 표출되는데 그 갈등들의 가장 큰 원인이 무엇일까요? 간단히 말하면 ‘희생시키려는 태도’는 크고 ‘희생하려는 태도’는 작은 것이 문제입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세계 주역국가가 되고 또한 개인적으로도 반전의 역사와 회복의 역사를 만들어가려면 가장 필요한 것이 바로 ‘희생정신’입니다. 그 사실을 본문은 강력하게 도전합니다.
  
< 여호와의 심판을 피하는 길 >  

스바냐는 유다 16대 왕 요시야 시대의 선지자로 히스기야의 현손(고손)이고 아마랴의 증손이고 그다랴의 손자이고 구시의 아들이었습니다(1절). 구약 예언서 중에 예언자의 계보가 4대에 걸쳐 기록된 책은 스바냐뿐입니다. 그렇게 기록한 것은 스바냐의 고조할아버지가 히스기야 왕이었음을 나타내려는 의도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그처럼 스바냐는 왕족 출신으로서 예루살렘의 기득권층의 타락을 알고 그 타락한 사회를 향해 하나님의 심판의 메시지를 전했는데 그 메시지는 나중에 요시아의 종교개혁에 큰 영향을 미친 것으로 추정됩니다.
  
그 ‘하나님의 심판’이란 스뱌나서의 주제대로 본문 1절의 서론이 끝나자마자 바로 스바냐는 땅 위에서 모든 것을 하나님이 철저히 진멸하고 특별히 우상숭배를 하고 하나님을 배신한 사람들을 멸절할 것이란 심판의 메시지를 선포합니다(2-6절). 그러면서 한편으로 그 심판을 피할 길을 본문 곳곳에서 제시합니다. 하나님의 심판을 피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1. 거룩한 희생양이 되십시오
  
왜 본문 7절에서 하나님은 심판을 목전에 둔 백성들에게 하나님 앞에서 잠잠하라고 했습니까? 하나님이 희생을 준비하고 희생양이 될 사람들을 구별하셨기 때문입니다. ‘심판의 날’은 ‘희생양이 드려지는 날’입니다(8절). 그날에 하나님은 방백들과 왕자들과 이방인의 옷을 입은 자들을 희생양으로 삼고, 또한 강압과 속임수로 남의 것을 빼앗아 자기 집과 권력자의 집과 하나님의 집을 채운 자들을 희생양으로 삼아 벌하겠다고 하셨습니다(9절). 
  
요새도 악한 종교 리더들은 미혹과 거짓으로 양떼를 헐벗게 하고 자기재산과 교회재산을 불리지만 선한 리더들은 스스로 희생하면서 자기 것을 나누려고 최선을 다합니다. 남을 희생시키면 성공해도 하나님의 심판을 받으면서 대개 그 성공이 잠깐의 성공으로 끝납니다. 그러나 스스로 희생양이 되면 오래 선한 영향력을 미치는 바른 성공을 이뤄낼 수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희생물은 바로 ‘자기 자신’입니다. 
  
2. 심판의 때를 대비하십시오
  
심판의 날에 어떤 일이 벌어집니까? 예루살렘 곳곳이 파괴되고 완악한 마음으로 하나님은 복도 내리지 않고 화도 내리지 않는다고 말한 사람들을 하나님이 다 찾아서 벌할 것입니다(10-12절). 또한 하나님을 부인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심판으로 재물과 집과 포도원까지도 모두 빼앗길 것입니다(13절). 요새 무리하게 빚으로 집을 샀다가 집을 빼앗기고 더 나아가 무리하게 빚으로 불필요한 교회 건축을 했다가 교회건물이 경매로 넘어간 경우도 얼마나 많습니까? 그것도 일종의 심판의 표시일 수 있습니다.
  
그때 어떻게 해야 합니까? “하나님! 무리하게 교회건축에 욕심을 낸 것을 용서하소서! 이제 오직 하나님의 뜻대로 하소서!”라고 회개하는 마음을 가져야 그때부터 다시 길이 열립니다. 그러나 그런 회개도 없이 계속해서 교회재산과 교회건축에 연연하면 그것은 하나님의 심판의 손길을 더욱 재촉하게 됩니다. 그런 심판의 날이 가까워졌고 빨리 찾아올 것이란 의식을 가지고 늘 심판을 대비하며 깨어 있는 신앙생활을 해야 합니다(14절).
  
3. 우상숭배를 멀리하십시오
  
심판의 날은 무서운 파멸과 고통의 날입니다(14-17절). 왜 그런 무서운 심판이 있게 되었습니까? 본문 18절에 나오는 “온 땅이 여호와의 질투의 불에 삼켜진다.”는 표현을 보면 심판의 가장 큰 이유는 하나님을 멀리하고 우상숭배에 빠진 죄 때문임을 알 수 있습니다. 

구체적으로 어떤 우상숭배입니까? 18절 전반부에서 “은과 금이 여호와의 분노의 날에 건지지 못한다.”는 표현을 보면 특히 물질을 우상으로 삼은 것이 가장 큰 문제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유다의 권력자와 종교 리더들은 폭력과 미혹과 거짓으로 물질을 쌓았지만 심판의 날에는 그 많은 물질이 아무런 소용이 없다는 말씀입니다. 오늘날에도 최대의 우상은 역시 물질인데 어떻게 그 물질주의의 우상을 극복합니까? 끊임없이 나눔을 결단하고 실천하고 습관화해야 합니다. 나눔이 무엇입니까? 간단히 말하면 물질적인 희생입니다. 결국 희생은 심판을 면하게 최대 요인이면서 동시에 진정한 축복을 예비하는 최대 요인입니다. 
  
< 희생시키는 리더십의 부작용 > 
  
한국 사람들은 충성과 의리를 중시합니다. 성도들은 더욱 그렇습니다. 그처럼 충성스럽고 의리 있는 삶은 훌륭한 삶이지만 그 충성과 의리의 대상이 누구냐 하는 것도 중요합니다. 사랑과 정의와 희생과 나눔을 모르는 리더에게 보이는 충성과 의리는 리더의 배만 불려서 공동체를 더 망칩니다. 그러므로 리더의 카리스마를 너무 좋아하지 마십시오. 카리스마에 현혹되어 ‘희생하는 리더십’이 아닌 ‘희생시키는 리더십’에 정신없이 휩쓸리면 양떼들의 피를 담보로 카리스마적인 리더만 배부르게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가끔 보면 몇 십 명 교회에서 사모를 희생양으로 삼아 카리스마를 키우는 목회자들이 있습니다. 어떤 사모들은 안쓰러운 정도로 성도들 앞에서 희생양이 되어 모욕을 당합니다. 그것을 보면 안타까운 탄식이 나옵니다. “굳이 저렇게까지 해서라도 교회성장을 이루고 싶은가?” 그렇게 해서 교회가 성장한들 사모에게는 남모르는 깊은 아픔과 상처가 남고 그 성공은 남편 혼자만의 성공이 될 때가 많습니다.
  
그처럼 아내를 희생양으로 삼아 카리스마를 키운 목회자는 조금만 외적으로 성장하면 카리스마로 칼을 휘두르는 습성이 더 커집니다. 특히 교인이 몇 백 명이 되어 인력과 재정이 어느 정도 뒷받침되면 남을 희생시키는 습성이 더 노골화되면서 부교역자를 그 다음 단계의 희생양으로 삼을 때가 많습니다. 몇 십 명 단계의 교회와는 달리 몇 백 명 단계의 교회가 되면 부교역자가 사임해도 새로운 부교역자를 쉽게 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때부터 부교역자를 희생시키고 때로는 성도들 앞에서 창피를 주면서 그것을 훈련이란 말로 그럴듯하게 포장하지만 결국 그것은 자기를 위해 남을 희생시키는 모습입니다. 그런 리더들은 희생을 강조하지만 대개 자신의 희생은 외면하고 남의 희생만 요구합니다. 또한 그런 목회자들은 원래부터 남을 희생시키면서 교회를 성장시켰기에 나중에 교회를 도저히 남에게 넘기기가 아까워서 아들에게 세습시킬 때가 많습니다.
  
왜 교회세습이 생깁니까? 그 목회자에게는 원래부터 자기희생이란 개념은 없고 남만 희생시키는 개념으로 목회를 해왔기에 자기 것이라고 생각한 것을 희생하면서까지 남에게 주려고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결과적인 얘기지만 교회를 세습시키는 모습으로 그 목회자가 ‘희생하는 목회자’인지 아니면 ‘희생시키는 목회자’인지 거의 명백하게 드러납니다.
  
특히 지금처럼 교회세습을 반대하는 한국 교회의 전반적인 분위기에서도 세습을 강행하면 그 목회자는 더욱 ‘희생하는 리더’가 아닌 ‘희생시키는 리더’임이 분명합니다. 희생하는 리더십이 있고 한국 기독교와 한국 교회를 위한 양심이 있다면 도저히 그렇게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 상황에서 참된 목회자는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아들아! 사위야! 너의 탁월한 능력을 내가 잘 안다. 그러나 내가 이제까지 섬겨온 교회는 결코 눈독을 들이지 말라. 혼자서 일어서라. 나도 네가 일어설 수 있도록 다른 쪽으로 많이 돕겠다.”
  
얼마나 멋진 모습입니까? 그러나 그것은 멋진 모습이 아니라 지극히 당연한 모습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남을 희생시키면서 교회를 성장시킨 목회자는 그런 개념과 인식과 양심이 결여된 경우가 많습니다. 또한 그런 목회자는 부교역자도 동역자로 여기기보다는 자기를 위해 희생시키는 소모품처럼 여깁니다. 그렇게 부교역자를 희생시켜서 교회가 몇 천 명 교회로 성장하면 그때부터는 대개 장로에게까지 대범하게 칼을 휘두릅니다.
  
몇 백 명 교회에서 그렇게 칼을 휘두르다가 장로가 반발하면 교회가 상당한 데미지를 입지만 몇 천 명 교회에서는 장로가 반발하고 나가도 교회에 큰 영향이 없기 때문입니다. 몇 천 명 교회에서 장로가 30명이라면 목사에게 특별한 하자가 없는 한 그 30명의 장로가 뭉쳐도 그 교회를 개척한 목회자 한 명의 리더십을 넘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왕정 시대에 신하 30명이 뭉쳐도 왕 한 명을 당하기 힘든 것과 유사한 이치입니다.
  
그 사실을 체감하니까 장로들은 카리스마를 가진 목회자들에게 굴종의 단계로 들어설 때가 많습니다. 결국 교회가 커질수록 장로들의 의미와 영향력은 현저히 줄어듭니다. 그것도 모르고 목회자가 교회를 끊임없이 외적으로 성장시키려는 시도에 장로도 같이 편승해서 교회가 비대화되는 것을 막지 못하면 그것은 결국 자기의 존재의미나 보람이나 역할 문제에서 점차 왜소해지는 길로 가는 셈이 됩니다. 얼마나 불행한 일입니까?
  
결국 몇 천 명 교회가 되면 그때부터는 카리스마적인 목회자가 휘두르는 칼에 장로가 희생되는 사례가 심심찮게 벌어집니다. 부흥회를 하면 부흥사가 장로들에게 “일어서시오!” 하면 일어서고 “앉으시오!” 하면 앉습니다. 그렇게 성도들 보는데서 순종훈련을 한다고 창피를 주고 기를 죽입니다.
  
그때 그런 창피를 당하면서도 교회에 잘 붙어 있으면 잘 순종하는 장로로 높여집니다. 그때 반발하면 교회에서 거의 왕따를 당합니다. 왕따를 견디다 못해서 교회를 나와도 자기와 함께 움직여줄 사람은 거의 없어서 낙동강 오리알 신세가 됩니다. 결국 칼을 휘두르는 목회자 밑에서 대개 굴종하며 지내게 됩니다. 보통 교회는 대개 그렇지 않지만 이단 교회 장로들은 대개 그런 굴종적인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 이유 때문에라도 이단에 가면 안 됩니다.
  
그처럼 카리스마적인 리더십이 겉으로는 대단해 보여도 얼마나 많은 상처와 후유증을 동반하고 예고하는 것인지 모릅니다. 그런 카리스마적인 리더의 칼이 끝까지 잘 통할까요? 그런 착각과 오해 때문에 겁 없이 카리스마를 행사하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습니다. 카리스마적인 지도자가 휘두르는 칼은 언젠가는 반드시 자신을 향하게 됩니다. 어느 공동체든지 굴종적인 희생의 강요는 나중에는 반드시 역작용을 초래하기 때문입니다.
  
사모를 희생양으로 삼으면 나중에 어떤 잘못으로 목회자의 리더십에 위기가 생기거나 나이가 들 때 결국 오래 참았던 사모가 반발해서 그때는 심한 말로 거꾸로 상처를 주는 경우도 종종 목격됩니다. 얼마나 불행한 일입니까? 그처럼 카리스마적인 리더십으로 남을 희생시킨 칼은 인생 후반기에 결국 다 자기에게로 되돌아오면서 대개 비참한 종말을 재촉합니다.
  
부교역자에게 훈련이란 명목으로 칼을 휘두른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나중에 어떤 사건으로 그 칼을 휘두른 목회자가 누군가의 공격을 받거나 힘이 빠지면 어떤 부교역자도 그의 편이 되어주지 않습니다. 젊은 부교역자들은 나중에 다 같은 교단의 중진이 될 사람들입니다. 그들이 나중에 다 돌아서서 칼을 겨눈다면 얼마나 비참한 일입니까? 그처럼 리더가 힘이 있을 때 휘두른 칼은 힘이 빠질 때 다 자기에게로 되돌아옵니다. 심은 대로 거둡니다.
  
장로에게 휘두른 칼도 마찬가지입니다. 칼을 든 목회자가 힘이 있을 때는 다 잠잠히 있지만 목회자가 은퇴를 앞두거나 어떤 일로 힘이 빠지면 그때부터는 오히려 역으로 칼을 맞게 됩니다. 김일성, 김정일, 김정은처럼 대를 이어서 철저히 백성들을 통제하면 모반의 기회가 없을 것 같지만 언젠가는 모반의 기회가 반드시 옵니다. 그때는 밑에서 굴종하던 사람들이 되돌아서서 칼을 휘둘렀던 리더에게 칼을 겨누는 것이 인간사회의 보편적인 현실입니다.
  
< 복된 성경적인 리더십 > 
  
요즘 조용기 목사님을 그 밑에 있던 몇 백 명의 장로들이 고소한 것을 보십시오. 외형적인 숫자놀음과 힘 과시가 얼마나 허무해지는 모습입니까? 힘이 있을 때 휘두른 칼이 나중에 되돌아와 자신이 그 칼침에 맞으면 얼마나 회한도 많겠습니까? 그래서 소수의 길을 갔던 프랜시스가 대 권력을 가진 교황보다 더 행복하고 더 이름을 떨치고 더 선한 영향력을 후세에 남기는 복된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희생시키는 카리스마 리더십은 유한하지만 희생하는 예수님의 리더십은 무한합니다.
  
그런 상황을 외면하고 요즘도 끝없는 탐욕으로 외적인 성장을 추구하는 초대형 교회들을 봅니다. 작은 교회가 바르게 성장을 추구하는 것은 존재 및 생존과 관련해서 꼭 필요한 복된 일이지만 초대형 교회의 탐식적인 교회성장 추구는 복된 일이 되기보다는 수많은 불행의 예고편이 될 때가 많습니다. 요새는 외적인 성장을 위한 수많은 세미나와 프로그램들이 생깁니다. 사실 교회에서 그런 세미나와 프로그램이 성행하는 것이 바람직한 일만은 아닙니다.
  
셀 체계도 굉장히 좋아 보이지만 그것도 역시 교회의 공룡화를 위한 교묘한 수단으로 이용될 때가 많습니다. 교회가 커지면 셀이란 조직을 무수히 만들어서 거대한 공동체를 유지시키려고 할 것이 아니라 그냥 깨끗하게 분립교회들을 개척해 내보내면 얼마나 좋습니까? 그러면 자기 아성이 약화되고 지경이 축소되니까 약간의 독립적은 활동은 보장하되 그 셀들을 전체로 묶어 큰 공동체를 유지시키려고 하는 것입니다. 결국 셀 체계도 거대한 유형 교회를 유지하는 방편으로 활용되는 단점과 위험성도 있음을 깊이 인식하고 동참해야 합니다.
  
교회가 너무 공룡화되어도 안 되고 또한 그런 공룡화의 방편으로 만들어진 프로그램이 너무 생각 없이 추종되어도 안 됩니다. 교회가 적절하게 커지면 기쁘게 분립교회들을 많이 개척해 내보내서 한 명의 인간 리더에게 너무 큰 권력이 집중되지 않도록 대형교회들은 자발적인 슬림화를 추구해야 합니다. 왜 그것을 못합니까? 사람이 명예욕과 권력욕과 물질욕을 버리기가 그만큼 어렵다는 반증입니다.
  
복된 성경적인 리더십은 ‘희생하는 리더십’이지 ‘희생시키는 리더십’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평생을 따를 리더를 찾을 때 가장 중점적으로 보아야 할 것은 희생하는 리더십이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물론 어떤 사람도 완벽하게 희생하는 리더십을 가지기는 힘듭니다. 그래서 완벽한 리더를 찾는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합니다. 그러나 전체적인 리더십 스타일이 어떤 스타일인지 정도는 대략 파악하고 리더를 선택해야 나중에 눈물짓는 일이 없게 될 것입니다.
  
너무 리더의 카리스마를 좋아하지 마십시오. 그런 카리스마에 휘둘리다가 자신이 누군가의 이용도구가 되었음을 한탄하고 그때 그런 희생시키는 리더십을 가진 사람에게 반발해보지만 그때는 이미 때가 많이 늦습니다. 그래서 나중에 회한에 빠진 장로님들이 주변에 얼마나 많습니까? 며칠 전에도 그런 장로님 한 분을 만나서 눈물의 하소연을 들었습니다. 그러나 누굴 탓하겠습니까? 결국 외형주의와 군중 속에 함몰된 자신을 탓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지금 한국 교회가 교회 밖의 공격과 더불어 교회 내부문제로도 많이 진통하고 있습니다. 그 외적인 공격과 내적인 진통을 자세히 보면 거의 대부분 교회 외형주의의 후유증들입니다. 한 마디로 말하면 교회가 너무 희생을 모른다는 비판입니다. 그 비판에 대해 성도들은 깊은 찔림을 느껴야 합니다.
  
저는 선교사들의 기도요청을 많이 받기에 그들의 힘든 현실을 너무 잘 압니다. 우리의 나눔은 그들의 사역은 물론 생존 문제까지 좌우합니다. 선교지 원주민의 현실이 비참해서 무엇인가 뜻있는 일을 시작했는데 처음부터 빠듯하게 시작했기에 일을 진행하면서도 계속 긴급하게 필요한 것들이 생겨납니다. 그런 기도제목을 받으면 저희 재정집사님들도 그저 하늘만 바라보는 현실입니다. 그런 문제의 안정적 해결을 위해 네트영어가 빨리 축복받으면 좋지만 그때까지는 우리 후방 성도들의 희생적인 나눔이 절실히 필요합니다.
  
이제 한국교회에 희생하는 리더가 많이 일어나도록 기도하고 무엇보다 자신부터 남의 희생만 바라지 말고 먼저 희생하는 희생양이 되기를 힘쓰십시오. 그러면 심판이 목전에 있고 고난 중에 있어도 그 희생을 보시고 하나님이 극적인 상황반전의 역사를 허락하실 것입니다. 

‘희생시키는 카리스마 리더십’을 추구하는 사회와 영혼은 미래가 없지만 ‘희생하는 예수님의 리더십’을 추구되는 사회와 영혼은 미래가 있습니다. 항상 성경적인 복된 리더십을 추구하고 그런 희생적인 삶을 자신부터 힘써 실천함으로 내일의 축복을 예비하는 심령들이 되십시오. (이한규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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