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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교회는 둥근 식탁입니다 (요 17:19-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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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는 둥근 식탁입니다 (요 17:19-26)

교회란 참으로 독특한 공동체입니다.   일생을 살면서 단 한 번도 만난 적이 없고 아무런 이해관계가 없는 사이임에도 불구하고 다양한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주의 이름으로 한 자리에 모여 함께 예배드리며 교제를 나누면서 가까워지며 마음을 열어 따뜻한 정을 나누고 형제와 자매처럼 서로를 위해 축복하는 한 가족이 됩니다.  세상 어디에서 이런 순수한 사랑을 나누기가 그리 쉽지 않습니다. 예수의 이름과 그의 사랑을 믿고 느끼고 고백함으로 그 이름을 함께 소유하는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주안에서 한 가족이 됩니다. 처음 만났지만 낯선 사람으로 보이지 않고 오랜만에 만난 친구와 같고 먼 여행을 마치고 돌아 온 가족을 만나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예수의 이름과 그 사랑이 우리를 하나로 연결해 주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 세상에 오신 목적이 바로 그것입니다. 본래 하나이었던 하나님의 가족이 죄로 말미암아 흩어졌으나 예수께서 세상에 오셔서 흩어진 가족들을 다시 하나가 되게 하셨습니다. 죄로 멀어졌던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회복시켜 하나가 되게 하셨고, 우리끼리 서로 하나가 되도록 불러주셨습니다.   

유대인과 이방인이 하나 되게 하셨고 동과 서가 하나 되고 남과 북이 하나 되며 성별과 연령과 빈부를 초월하여 그 이름으로 하나 되게 하셨습니다. 우리를 하나 되게 하신 이 귀한 뜻을 저와 여러분이 함께 느끼고 믿으며 힘써 지킬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오늘 본문은 예수께서 하나님께 드린 기도의 한 부분입니다. 예수께서는 십자가를 지시기 바로 전 날 밤 제자들과 함께 마지막 만찬을 드신 자리에서 고별설교를 하신 후 제자들을 하나님께 맡기는  기도를 드렸습니다. 

요한복음 17장이 바로 그 기도이며, 예수께서는 이제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다시 돌아가기 전에 이 세상에 남겨두고 갈 제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셨고 또 그 제자들의 전도를 받아 믿게 될 모든 사람들을 위해 하나님과 사람들 사이의 중보자로서 기도하셨습니다. 아버지와 아들이 하나인 것처럼 이 세상에 두고 갈 제자들이 우리 안에서 하나가 되게 하시고 앞으로 믿음을 가지게 될 모든 사람들이 서로 하나가 되어 아버지의 사랑이 그들 안에 있게 되기를 간절히 기도하셨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 기도는 장차 제자들을 통해 이 땅에 세워질 교회를 위한 기도이며 교회를 향한 주님의 간절한 뜻은 주의 이름으로 서로 하나가 되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리는 것이었습니다. 자신의 몸을 십자가에서 제물로 드리기 전 날 최후의 만찬 식탁에서 드린 주님의 중보기도의 열매는 제자들을 통하여 초대 예루살렘교회로 확장되었고 2천년 기독교 역사를 거쳐 오늘 우리에게까지 계속 맺어지고 있습니다.   

영국 교인들이 부르는 찬송가 가운데 Fred Kaan (1929-   ) 이 쓴 "The church is like a table(교회는 식탁과 같다)" 이라는 가사로 시작되는 곡이 있습니다. 교회를 식탁으로 비유한 찬송입니다. 

교회가 어떤 의미에서 식탁과 같다고 하였을까요? 교회는 식탁과 같은데 그것은 사각모양이 아니라 둥근 원형으로 된 식탁입니다. 거기에는 어느 쪽이(sides) 없고 모퉁이(corners)도 없으며 첫째(first)도 나중(last)도 없고 특별히 높임을 받음도 없습니다. 이 식탁에서 사람들은 하나됨과 사랑 안에서 서로 함께 묶어져 있습니다. 

얼마나 은혜로운 내용인지요. 우리편과 상대편으로 편이 갈라져 있지도 않고 상석과 말석이라는 구별 때문에 더 높임 받고 덜 높임 받는 차별이 없는 둥근 식탁이 곧 교회의 참 모습이며 또 그래야만 합니다.   둥근 식탁에 둘러앉아 서로를 높여주고 귀하게 여기며 '우리는 이 테이블을 중심으로 하나' 라는 형제의식과 사랑 안에서 꽁꽁 묶여있는 모습 바로 그것이 교회의 모습입니다.

판문점에서 남북한 대표자들이 서로 마주 앉아 회의를 하는 사각 테이블에서는 불꽃 튀는 설전이 벌어지고 팽팽하고 서늘한 긴장감이 돕니다. 한 테이블에 앉아 있지만 우리편과 너희편이 분명하게 갈려있습니다. 한치의 양보가 없이 자기 쪽의 이익을 위하여 눈을 부릅뜨고 삿대질도 하면서 자기 주장을 합니다.  거기에는 양보도 사랑도 없습니다. 오직 적대감과 이해관계만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이며 남북통일이 우리의 소원이라고 부르짖지만 서로 다른 쪽에서 서로 다른 생각을 하며 오직 나와 내편 그리고 너와 너희편이 있을 뿐입니다.    

교회가 만일 그런 모습이라면 그것은 더 이상 교회일 수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기도하실 때 "나는 세상에 더 있지 아니하오나 저희는 세상에 있사옵고 나는 아버지께로 가옵나니 거룩하신 아버지여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저희를 보전하사 우리와 같이 저희도 하나가 되게 하옵소서" (요17:11) 하셨으며,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같이 저희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요17:21) 하셨습니다.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가 내 안에 계신 것처럼 이 마지막 만찬 식탁에 둘러앉은 나의 제자들이 아버지와 아들 곧 우리 안에 하나가 되며 제자들을 통해 세워질 교회들이 하나가 되게 해달라는 간구입니다.

어떤 모임에 초대를 받으면 테이블의 어느 좌석에 앉아야 할지 빨리 판단이 서지 않아 주춤거릴 때가 있습니다. 거기에는 눈에 보이지 않는 상석과 말석의 구분이 있기 때문입니다. 누군가 자리를 안내해 주지 않아 눈치 없이 아무 자리나 먼저 앉으면 자칫 실수하기 쉽습니다. 나보다 연장자나 지위가 높은 사람이 나중에 들어왔을 때 내가 만일 그 사람이 앉아야 할 자리에 먼저 앉아 있으면 얼마나 죄송스럽고 무안한지 모릅니다. 위아래도 모르는 무례한 사람이라는 책망을 받고 망신을 당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 자리는 가시방석처럼 마음이 참 불편한 자리입니다. 빨리 모임이 끝나고 그 자리를 떠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어느 자리에 앉아야 할지 망서려 질 때마다 영국의 전설의 왕 아더(King Arthur)가 만들었다는 원탁이 생각납니다. 기사들의 우위다툼을 멈추도록 하기 위해 높고 낮음의 차별이 없는 둥근 테이블을 만들었던 것처럼 모든 회의장에 둥근 테이블이 놓여 있다면 얼마나 마음이 편할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교회는 한쪽 구석의 모퉁이 자리나 상석과 말석의 차별이 없는 둥근 식탁입니다.  

먼저 온 사람이 한 자리 앉으면 그 곁에 있는 빈자리는 다음 오는 사람을 위하여 남아 있습니다. 먼저 된 사람은 나중 된 사람을 사랑과 이해로 품어주고 존귀하게 여김으로 높여주고, 나중 된 사람은 먼저 된 사람을 인정하고 존중함으로 높여주는 사랑이 우리를 주안에서 하나가 되게 합니다. 나의 편도 너의 편도 없이 예수 그리스도를 머리로 모시고 사는 한 몸이요 하나님을 아버지로 섬기는 한 가족입니다.

혹시 우리 교우들 가운데 나는 이 교회에서 별 볼일 없는 사람이라고 스스로 위축되어 있는 분이 있습니까?  목사의 눈에 보이는 우리 교우들 한 분 한 분이 얼마나 귀중하고 사랑스러운지 모릅니다.  오늘 예배드리러 나온 성도들 뿐 아니라 지금 출타중이라 이 자리에 없는 모든 분들, 어린아이로부터 어른에 이르기까지 오늘 처음으로 우리 교회를 방문한 분들 모든 분들이 너무나 소중하고 사랑스럽기만 합니다.   

오래 전부터 예수를 믿고 교회생활에 익숙하며 맡겨진 일에 열심을 다해 섬기는 분들을 보면 마음이 든든하여 사랑스럽습니다. 예수를 믿고 교회를 출석하기 시작한 것이 그리 오래 되지는 않지만 예수 믿는 기쁨을 알고 즐거움으로 신앙생활하는 분들을 보면 또 대견스러워 사랑스럽습니다.   

그렇다고 교회 안에 열심 있는 분들만 있나요? 솔직히 말해 어떤 분들은 목사가 보기에 걱정이 되고 아쉬움을 주는 분들도 있지요. 그런데 그런 분들은 또 그대로 마음이 쓰입니다. 조금 더 믿음생활에 열심을 내어 신앙이 자라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안타까운 마음에 그분들을 위하여 기도하게 됩니다. 그것도 역시 사랑에서 나오는 마음입니다. 

저는 목회자의 이런 마음이 자녀를 돌보는 부모의 마음과 같다고 생각합니다.  목회자의 연령이 많고 적음에 관계없이 모든 목회자들이 부모의 심정을 가지고 성도들을 말씀으로 양육하고 돌아보게 됩니다. 모든 자녀가 다 사랑스럽고 소중한 것처럼 우리 교우들이 모두 귀한 분들입니다. 목사가 보기에 여러분이 모두 소중하고 귀한 분들이라면 하나님께서 보시기에는 얼마나 소중한 사람들일까요? 저와 여러분들을 사랑하시기 때문에 가장 아끼고 사랑하시는 독생자를 아낌없이 우리에게 주신 것 아니겠습니까?  이 사랑을 순전한 마음으로 받으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은 하나님께 값지고 소중한 분들입니다.

요즘 저는 목회자로서 새로운 경험을 하고 있는 중입니다. 전에 부목사로 봉사할 때는 그래도 교인 수가 제법 많은 교회에 있었기 때문에 한 사람 한 영혼의 소중함에 대하여 지금보다 더 절실하게 느끼지는 못했던 것 같습니다. "개척교회를 섬기면서 한 영혼이 이렇게 소중한 줄 비로소 깨닫게 됩니다" 라고 고백하던 어느 목사님처럼 전에 큰 교회에서 섬길 때는 몰랐던 한 사람의 소중함을 이곳에 와서 깊이 느끼고 있습니다.  이곳의 특수한 환경 때문에 한 곳에 오래 머물지 못하고 또 다른 생활 터전으로 옮겨가야만 하는 교우들을 떠나보내면서 영혼 사랑이 더욱 간절해집니다.    

제가 이곳에 온지 이제 겨우 만3년 되었는데 그 사이에 우리 교회 성도들 가운데 저보다 나중에 오신 분들이 먼저 오신 분들보다 더 많습니다. 그만큼 교우들의 이동이 많습니다. 전에 부교역자 생활을 할 때는 떠나는 일에 익숙했던 사람이었는데 그래서 떠날 때마다 정들었던 교우들의 마음을 아프게 해드렸는데 이제는 떠나 보내는 일로 제 마음이 아파집니다.    

전에 어느 교회에 부임했을 때 "저는 우리 교회에 오시는 부목사님들에게는 정을 안주기로 작정했습니다. 정들만 하면 훌쩍 떠나 사람 마음 아프게 하니 아예 처음부터 정을 안주는 편이 좋아요" 하던 분의 음성이 귀에 쟁쟁합니다. 그런데 그 분이 워낙 다정한 분이라 결국은 저희들이 떠날 때 또 힘들어하시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이제 이곳에서 담임목회 2년이 되고 그 동안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만나 믿음의 교제를 나누며 정들었던 교우들이 한 분, 한 가정씩 타지로 떠날 때마다 소중한 동역자를 떠나 보내는 아쉬운 마음으로 가득합니다. 그렇지만 서운한 마음과 함께 하나님께 감사한 마음 또한 있습니다. 비록 짧은 기간이었지만 외국에 나와 살면서 동일한 하나님을 섬기며 신앙의 진보를 위하여 서로에게 유익을 끼치는 동역자가 되어 하나님의 교회를 위해 함께 헌신할 수 있었다는 것이 감사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타국에서 나그네로 살면서 만나는 외로움과 고달픔을 서로 위로하며 영원한 하나님 나라를 향하여 달려가는 길에 동행이 되었다가 이제 더 성숙한 그리스도인이 되어 또 다른 지역으로 파송한다고 생각하니 헤어짐의 섭섭함이 있지만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대한 감사가 더 크게 자리를 잡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 교회를 떠나가는 분들을 통해 하나님께서 하실 일들을 생각하니 그분들이 그렇게 귀하게 보이며 다음에는 또 어떤 분들을 우리 교회로 보내 주실까 하는 기대가 저절로 생기고 우리교회를 찾는 새 얼굴들이 소중하게 보입니다. 이런 마음을 가지게 되니 떠나는 분도 귀하고 오시는 분도 귀하며 우리 교회에 오래 남아 자리를 굳게 지키며 함께 섬기는 분들이 또 귀하게 보이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보실 때 모든 성도들이 사랑스럽고 귀하다는 말씀입니다.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서 서로 하나가 되어 묶어진 우리는 하나님의 가족이며 교회는 가족 사랑을 나누는 그 집의 둥근 식탁입니다.


교회는 식탁과 같은 두 번째 이유가 있습니다. 만찬회를 위해 잘 차려진 어떤 식탁은 의례에 따라 좌석이 준비되어 있습니다.   초청된 사람들의 이름표가 서열에 따라 식탁에 놓여졌고 아무나 그 자리에 앉을 수 없습니다. '그들' 과 '우리'로 나누어져 먹고 마시며 절차에 따른 공식적인 대화를 나눕니다.   거기에는 초청된 사람이 아닌 불청객은 들어갈 자격이 없습니다.  

그러나 교회는 마치 누구에게나 활짝 열려진 집(open house)에 차려진 식탁과 같습니다. 그 식탁은 복잡한 의례와 절차에 따른 자리 배정이 없고 누구나 들어와 함께 먹고 마시며 삶을 나눌 수 있도록 열려진 초청의 자리입니다. 문이 열려진 집의 그 식탁에서는 더 이상 '그들' 과 '우리'의 구분이 없고 '우리' 만이 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한 가족, 한 몸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 식구, 우리 교회, 우리 교우라고 부릅니다.   

예수님은 교회를 위해 하나님께 기도하실 때 "저희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하시며 우리가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 되심 안에 들어와 있기를 구하셨습니다. 예수께서 세우신 교회는 누구에게나 열려진 집의 식탁입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을 당신의 풍성한 식탁으로 초청하십니다. "너희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아 오라 돈 없는 자도 오라 너희는 와서 사 먹되 돈 없이 값없이 와서 포도주와 젖을 사라" (이사야 55:1) 하시며 하나님을 멀리 떠났던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을 생명의 자리로 초청하셨던 하나님은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에 보내심으로 우리를 그 생명의 자리로 초청하셨습니다.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 (요7:37,38) 하신 주님은 자신의 생명을 우리에게 영원한 양식과 생수로 제공하셨습니다.   

복음서를 주의 깊게 살펴보면 예수님은 먹고 마시는 자리에서 사람들을 자주 만나 대화를 나누셨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가나 혼인잔치에서 물로 포도주를 만드신 이적으로부터 시작하여 갈릴리 해변에서 떡과 물고기로 사람들을 배불리 먹이셨고, 여리고 성의 세리장 삭개오의 집에 들어가 먹고 마시며 사람들에게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하셨고, 죽었다가 나흘만에 살아난 나사로의 집에서도 마르다가 준비한 음식을 드시며 거기에 모인 제자들에게 복음을 전하셨습니다. 그리고 잡히시기 전날에도 제자들과 함께 유월절 잔치 음식을 드시며 마지막 설교를 하셨고 제자들을 격려하시며 위하여 기도하셨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은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하시며 모든 사람을 위해 준비해 놓으신 식탁으로 초청하셨고 당신을 찾아오는 모든 사람에게 하나님 나라를 열어 보이셨습니다. 지금도 주님은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 (계3:20) 하시며 마음 문을 굳게 잠가두고 있는 사람들을 찾아와 두드리며 기다리십니다. 사람들이 그 마음의 문을 열기만 하면 주께서 그에게로 들어가실 뿐 아니라 이미 열려 있는 당신의 집으로 그들을 초청하여 더불어 하나가 되어 먹고 마시며 교제하십니다.  이제 더 이상 그들이 아닌 우리가 되어 함께 즐거운 잔치에 동참하게 됩니다.    

교회가 바로 이 열린 집의 식탁이며 이 식탁은 누구나 들어와 먹고 마시며 삶을 나누는 초청의 상징입니다. 우리 교회가 이렇게 열려진 집의 식탁과 같은 교회이길 바랍니다. 누구나 접근할 수 있고 들어올 수 있으며 기쁨과 슬픔, 즐거움과 어려움을 함께 나누는 열린 집으로서 이 집을 찾는 모든 나그네들에게 생명의 양식과 생수를 풍성하게 공급하는 식탁, 모가 나지 않고 높고 낮음이 없으며 너와 내가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서 하나로 만나 우리가 되는 둥근 식탁을 만들어 가는 일에 우리 함께 기도하며 힘쓰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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