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복음의 능력 (눅 19:1-10)

첨부 1


미국 선교사님 한 분이 아프리카에서 선교를 하시던 중에 식인종에게 붙잡혔습니다. 식인종들은 선교사님을 추장에게로 데리고 갔고, 자신은 이제 마지막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선교사님이 추장을 자세히 보니까, 왠지 낯이 익었습니다. 어디서 본 적이 있는 것 같아서 곰곰이 기억을 더듬어 보니까, 신학교에서 공부할 때에 아프리카 학생이 있었는데, 그 학생이 바로 그 추장이라는 걸 알게 됐습니다. 선교사님은 반가워서 추장에게 나와 함께 미국 어느 신학교에서 공부를 하지 않았느냐고 물었더니, 이 추장도 기억을 하고는 반가워했습니다. 

  죽을 줄로만 알았는데 추장이 신학을 공부한 사람이니까 당연히 목숨만 건지는 정도가 아니라, 하나님의 특별한 계획 가운데 놀라운 일이 있겠다 싶은 마음과 함께 하나님의 은혜가 놀랍고 감사하기만 할 따름이었습니다. 선교사님은 그래서, 이 추장에게 “당신은 나와 함께 신학을 공부했었는데, 그렇게 신학을 공부한 후에 당신의 삶에는 어떤 변화가 있었습니까?”라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추장은 물론 변화가 있었다고 대답을 합니다. “신학을 공부하기 전에는 사람을 잡아먹을 때 그냥 먹었었는데, 신학을 공부한 후로는 이제 반드시 먹기 전에 식사 기도를 하고 먹습니다.”

  이 이야기는 실제로 있었던 일이기보다는 아마도 지어낸 이야기가 아닌가 싶습니다. 하지만, 이 이야기 속에는 무서운 풍자가 담겨 있습니다. 웃어넘길 수 있는 이 이야기를 통해서 얘기하려고 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이 이야기는 우리 믿음의 사람들에게 경종을 울리는 이야기입니다. 주님을 믿으면서도 변화된 것이라고는 고작 식사 기도하는 정도밖에 되지 않는 사람들을 풍자하는 것입니다. 주님을 믿는 믿음의 사람이라면 삶에 있어서 놀라운 변화가 있어야 하는데, 변화라는 것이 그저 밥 먹을 때 기도하는 정도밖에 안 되느냐, 믿지 않는 사람과 구별되는 것이 고작 밥 먹을 때 기도하고 하지 않는 정도의 차이 밖에 없느냐고 일침을 주는 이야기입니다.

  사람은 쉽게 변하지 않습니다. 심지어는 평생동안 전혀 변하지 않는다고까지도 얘기를 합니다. 부부가 서로의 생활방식을 뜯어 고치려고 아무리 노력을 해봐도 잘 되지를 않습니다. 신혼부부들은 초반에 내 남편, 내 아내의 생활방식을 고쳐야 되겠다고 생각하고 덤벼들지만 어떻습니까? 부부싸움만 날 뿐이지 변화되지 않습니다. 치약을 중간에서부터 짜는 것, 양말 벗어서 아무 데나 던져 놓는 버릇, 변기 시트를 내리느냐 올리느냐... 이런 사소한 문제로 다투면서 상대방을 고치려고 해보지만, 서로 변화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런 문제로 싸우다가 심지어는 이혼까지 하게 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납니까? 사람을 내 노력으로 쉽게 바꿀 수 있다는 잘못된 생각 때문에 그렇습니다. ‘자꾸 잔소리하면 잔소리 듣기 싫어서라도 바뀌겠지’라고 생각하지만, 사람은 잔소리 한다고 해서 바뀌지 않습니다. 그래서, 어느 목사님이 쓰신 책을 보니까, 절대로 상대방을 뜯어 고치려고 하지 말고 그대로 수용하면서 자신이 변화되어야 한다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내 방식대로 치약은 뒤에서부터 짜도록 고치려고 들지 말고, 상대방이 치약을 중간에서부터 짜면, 자신도 중간에서부터 짜면서 그대로 받아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야 되는 이유는, 사람은 쉽게 변하지 않기 때문에, 자신이 그대로 수용하면서 변화되는 것이 훨씬 빠른 해결책이 된다는 것입니다.

  사람은 이렇게 쉽게 변화되지 않습니다. 심지어는 주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삶의 변화는 고작 식사 전에 기도하는 정도밖에 없는 경우도 있습니다. 주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믿지 않을 때와 똑같이 혈기 부리고 성질 낼 것 다 내가면서 살아갑니다. 내 성품에는 전혀 변화 없이 예배당에 출석하고 하지 않고의 차이만 있을 뿐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믿어도 자기 성질대로 믿는다”는 말도 종종 듣게 됩니다. 성질이 괴팍한 사람은 주님을 믿어도 괴팍한 성질 그대로 믿지, 주님을 믿는다고 해서 괴팍한 성질은 죽고 주님의 성품을 가진 사람으로 살아가지 못합니다.

  이것이 우리의 모습인데, 그렇다면, 삭개오는 어떻습니까? 어떻게 보면 삭개오는 하루 아침에 변화된 것 같습니다. 천지개벽이라는 말이 딱 삭개오를 위해서 생겨난 말처럼, 그는 하루 아침에 천지개벽과 같이 변화됐습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했겠습니까? 무슨 능력이 그를 그렇게 변화시켰겠습니까? 이것이 우리가 함께 생각해 볼 주제입니다. 삭개오에게는 어떤 변화가 있었습니까? 삭개오는 주님을 자신의 집으로 모시고 말합니다. “주여 보시옵소서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누구의 것을 속여 빼앗은 일이 있으면 네 갑절이나 갚겠나이다.” 

  이 고백을 통해서 삭개오가 변화된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무엇이 변화되었습니까? 먼저는, 그의 가치관이 변화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가 지금까지 가치 있게 여기던 것은 무엇이었습니까? 재물이었습니다. 삭개오에게 있어서 그의 인생의 관심사는 돈을 모으는 일이었습니다. 순전하고 정직하다고 하는 자신의 이름까지 팔아 먹으면서, 자신들의 동족까지도 팔아가면서 재물을 얻으려고만 했습니다. 재물을 모으는 데에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습니다. 재물의 노예로 살았습니다. 그저 많은 수입을 얻으려는 목적으로 살아가다 보니까, 정상적인 수입과 부당한 수입이 구분이 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것과 자신의 것을 구분하는 일은 생각할 수도 없었고, 가난한 이웃에 대한 배려 역시 안중에 없었습니다. 재물은 단지 자신의 욕심을 채우는 수단에 불과했고, 무엇을 위한 물질인지, 누구를 위한 물질인지 조차 구별하지 못하는 가치관의 혼란에 빠져있었습니다. 

  그런 그가 주님을 만나고 난 후에 변화됐습니다. 그는 자신의자신의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다고 고백합니다. 지금까지는 우선순위가 소유에 있었지만, 이제는 가난한 자들이 소중하다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재물보다 사람을 더욱 소중하게 여길 줄 아는, 그의 가치관이 변화되었습니다. 이제는 누구의 것을 속여 빼앗은 일이 있으면 네 갑절로 갚겠다고 고백합니다. 지금까지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재물을 얻는 데에 관심이 있었지만, 이제는 정직하게 그것을 되갚으면서 자신의 이름답게 살겠다고 고백합니다. 지금까지는 자신의 이름도 팔아먹고 동족들도 팔아먹으면서 살았지만, 이제는 무엇이 더 중요한지를 깨닫고 이와 같이 고백합니다. 이제는 더 이상 재물의 노예가 아니라, 재물로부터 자유한 자임을 선언했고, 이 선언을 통해서 완전히 바뀌어진 그의 가치관을 우리는 보게 됩니다.

  주님을 만나면 바로 이와 같은 변화가 있게 됩니다. 사도 바울 역시 그랬습니다. 이전에 그는 율법에 대해서 열심이 있는 자였습니다. 그는 율법을 지키고 사는 데에 최고의 가치를 두고 살았습니다. 하지만, 주님을 만나고 난 후에 그는 복음 안에서 변화되어졌습니다. 복음 안에서 눈을 뜨고 보니까, 이전에는 그렇게 중요하게 생각하던 것들이 더 이상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그 유익하던 것들이 주님을 만나고 난 후에는 오히려 해가 될 뿐이었고, 그 가치 있던 것들이 오히려 배설물과 같이 아무 가치 없는 것으로 여겨졌습니다. 주님이 최고의 가치가 됐고, 복음이 그의 인생의 최고의 가치가 되어서 그 가치 있는 것을 위해서 그의 삶을 드렸던 것을 우리는 기억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떻습니까? 우리는 주님을 만나고 난 후에 무슨 변화가 있었습니까? 주님을 믿기 때문에, 그 믿음 안에서 내게 변화된 것은 무엇입니까? 내가 갖고 있던 가치관이 변화되었습니까? 우리는 주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여전히 예전과 같은 가치관을 갖고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여전히 물질이 최고인 것처럼 여기면서 살아갑니다. 돈만 있으면 다 될 것처럼 생각하면서 살아갑니다. 하지만, 물질이 최고의 가치가 될 수 없다는 것을 삭개오가 우리들에게 증명해 줍니다. 그는 부자였지만 그에게는 진정한 기쁨이 없었습니다. 물질이 많다고 해도 그 물질이 주는 즐거움은 주님을 만났을 때의 기쁨과는 비교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세상 사람들과 같이 물질이 최고의 가치가 되어서 이 가치를 위해서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삭개오가 주님을 만나기 이전에 갖고 있던 최고의 가치가, 오늘날 주님을 믿고 있는 우리들이라고 하면서도 그것을 최고의 가치로 여기면서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삭개오는 주님을 만나기 전에는 물질이 최고였고, 가난한 이웃들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었습니다. 고통 당하는 이웃들을 돌아볼 줄 몰랐습니다. 그런 그가 주님을 만나고 난 후에는 그들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그들의 신음 소리가 귀에 들어왔습니다. 물질보다 사람을 더 중요하게 여기는, 그의 가치관이 변화됐습니다. 우리는 이와 같이 이웃을 대하는 우리의 가치관에도 변화가 있습니까? 우리의 이웃을 바라보는 시각이 변화되었습니까? 삭개오는 이렇게 주님을 만난 이후에 물질과 이웃에 대한 가치관이 변화된 변화된 모습을 우리들에게 보여줍니다.

  삭개오는 또한, 관계에 있어서도 변화되었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지난 시간에 삭개오가 주님께로 나아가는 데 장애가 되었던 것 2가지를 찾아봤었습니다. 삭개오가 주님께 나아가는 데에 장애가 되었던 것은 3절 말씀에서 찾아볼 수 있는 것과 같이 하나는 그의 작은 키였고, 또 하나는 많은 사람들이었습니다. 말씀에는 이렇게 표면적으로 나타난 두 가지 장애를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표면적으로는 드러나지 않지만, 삭개오에게 있었던 또 하나의 장애물이 있었음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그것은 삭개오의 마음의 장애였습니다. 

  삭개오는 겉으로는 세리장이고 또한 부자여서 아무런 문제 없이 풍요로운 삶을 살아가는 것 같았지만, 그의 내면은 그렇지 못했습니다. 그는 깨어진 마음을 갖고 있었고, 상처난 마음을 소유하고 있었습니다. 세리장이라는 직함 때문에 사람들이 자기에게 굽실거리기는 하지만, 그것이 결코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삭개오는 알았습니다. 겉으로는 공손한 척 하지만, 실제로는 자신을 싫어하고 미워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대놓고 앞에서는 손가락질을 못하는지도 모르지만, 뒤에서는 험담을 하고 욕을 하고 저주를 퍼붓는다는 것을 그는 알았습니다. 삭개오에 대해서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하고 있었는지는 7절 말씀을 통해서 엿볼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삭개오의 집에 유하시겠다고 말씀하시고 삭개오가 주님을 영접할 때에 사람들이 뭐라고 말합니까? “뭇 사람이 보고 수군거려 이르되 저가 죄인의 집에 유하러 들어갔도다 하더라.” 사람들은 수군거렸습니다. “죄인의 집에 주님이 들어가시다니! 저 더러운 죄를 지은 저 죄인 삭개오의 집에 어떻게 주님이 들어갈 수 있단 말인가!” 그들은 삭개오를 죄인으로 정죄했습니다. 그랬기 때문에, 그는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에 있어서 그 관계가 깨어진 상황에 있었습니다. 주님께 당장에라도 찾아가고 싶어도, 그런 사람들의 시선 때문에, 자신들을 욕하는 사람들 때문에 그 마음의 짐으로 인해서 주님께 나아가지를 못했습니다. 이것이 또 하나의 장애였습니다.

  그는 부당한 방법까지도 동원해서 부자가 되었지만, 외적인 풍요로움과는 상관없이 영적인 공허함이 그에게 있었습니다. 주변사람들의 따가운 눈초리와 따돌림 속에서 그는 사회적인 고독감을 느끼면서 살았습니다. 그런 그에게 어떤 변화가 찾아옵니까? 삭개오가 변화된 가치관 속에서 믿음으로 고백했을 때에 주님은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임이로다.”라고 선포하셨습니다. 이제까지는 사람들이 삭개오를 이방인 대하듯이 했습니다. 손가락질 하면서 아무도 그의 집에 찾아와 주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런 그에게 주님은 삭개오 또한 하나님의 택한 백성이요 자녀임을, 그들의 형제임을 선포하셨습니다. 주님이 그를 인정해 주시고 하나님의 사랑 받는 자녀임을 보증해 주셨습니다. 주님을 통해서 그는 이제 그 고독함과 공허함에서 해방될 수 있었습니다. 

  또한, 삭개오는 그의 신분에 있어서도 변화되어졌습니다. 지금까지 살아온 삭개오의 삶은 죄인의 삶이었습니다. 사람들에게서 세금을 과하게 부과시켜서 착취를 하는 것은 분명히 죄였고, 그런 죄를 저지르며 살아온 그는 죄인이었습니다. 그러면서도, 그는 자신이 죄인인 줄 몰랐습니다. 남들이 자신을 향해서 죄인이라고 손가락질을 해도 삭개오는 죄의식을 느끼지 못했습니다. 죄인이면서도 자신의 죄인됨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그러던 그가 주님을 만나고 난 후에 갖게 된 변화는 자신의 죄인됨을 깨달았다는 것입니다. 자신의 죄에 대해서 애통하는 마음이 생겼습니다. 자신의 죄를 회개해야 되겠다는 마음이 생겨났습니다. 그래서, 그는 속여 빼앗은 일에 대해서 그는 네 갑절로 갚겠다고 고백을 합니다. 이것은 그의 회개가 매우 철저한 것임을 말해줍니다. 왜냐하면, 율법에 의하면 사람이 도적질한 것을 고백하면 그는 원주인에게 불법적으로 취한 그 액수에다 1/5을 더해서 보상하도록 되어 있었습니다. 그리고, 2배 내지 4배로 갚는다는 것은 도적질한 것이 탄로나고 여러 사람들 앞에서 도둑으로 인정되었을 때에 취하는 행동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율법으로 본다면, 삭개오는 자신이 속여 취한 것에 대해서 20%만 더 얹어서 갚아주면 되는 일이었습니다. 그렇게 해도 율법적으로 아무런 문제가 없고, 그렇게 해도 충분히 칭찬 받을만한 일이 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그는 4배로 갚겠다고 고백합니다. 율법이 요구하는 액수의 20배를 갚겠다고 말합니다. 주님이 그렇게 하라고 시키지도 않으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삭개오가 이와 같이 고백한 것은 그는 율법에 개의치 않고, 자신의 잘못을 고백하고 인정하면서 자신의 불의를 철저하게 뉘우치는 행동임을 알 수 있습니다. 

  자신의 죄인됨을 깨닫고 죄악된 삶에서 온전히 벗어나기 위해서 스스로 결단하고,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으려고 애쓰는 그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이런 그에게 주님이 말씀하십니다.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다.” 삭개오의 고백을 들으신 주님은 구원을 선포하셨습니다. 지금까지는 사람들로부터 죄인으로 정죄 받는 사람이었지만, 이제는 구원 받은 하나님의 백성임을 선포하셨습니다. 삭개오는 죄인에서 하나님의 자녀로 그의 신분이 변화되어졌습니다.

  삭개오에게는 이와 같은 변화들이 있었습니다. 주님을 만나고 난 후에 그는 그의 가치관이 변화되었고, 그의 관계가 변화되었고, 자신의 신분이 변화되었습니다. 이 변화를 가능케 한 것은 무엇이었습니까? 그렇게도 변하지 않는 사람을 한 순간에 바꾸어 놓은 것은 무엇이었습니까? 주님과의 만남이었습니다. 주님과의 인격적인 만남이 삭개오를 한 순간에 변화시켰습니다.

  삭개오의 변화를 통해서 우리가 생각해 봐야 할 것은 이런 변화와 구원의 관계에 대한 것입니다. 변화가 곧 구원을 받는 조건, 구원의 길인가 하면 그렇지 않다는 것을 우리는 분명히 인정합니다. 구원을 받는 길은 오직 주님을 영접하고 주님을 믿는 데에 있습니다. 하지만, 구원 받은 사람이라면 어떠해야 합니까? 구원만 받았을 뿐 아무런 변화도 없어야 합니까? 구원 받았는데도 아무런 변화가 없는 것이 정상입니까? 변화는 구원의 조건이 되지는 못하지만, 구원 받은 사람이라면 마땅히 삭개오에게 있었던 것과 같은 그러한 변화가 있어야 합니다. 

  주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다른 사람들이 봤을 때 아무런 변화의 모습이 없다고 해서, ‘저 사람은 변화된 것이 없으니까 구원 받지도 못했을 거야.’라고 말할 수 없는 것은 분명합니다. 하지만, 내가 진정으로 주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삭개오와 같은 변화된 삶이 없다고 한다면, 이에 대해서 우리는 스스로 심각하게 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주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내게 아무런 변화가 없다고 한다면, 내게 무엇이 문제인지를 우리는 깊이 고민해 봐야 합니다. 

  주님을 만났던 삭개오는 주님 안에서 온전히 변화된 모습을 보여줍니다. 이것이 복음의 능력입니다. 복음의 능력은 어떤 사람도 다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살인자도, 강도도 어떤 죄인도 하나님의 자녀로 변화시킬 수 있는 능력이 있습니다. 복음이 변화시키지 못할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전혀 변화될 것 같지 않은 사람도, 사람이 아무리 변하지 않는다고 하지만, 복음의 능력은 변화시키는 힘이 있습니다. 복음은 이 세상의 그 모든 것을 다 변화시키고도 남음이 있는 큰 능력을 갖고 있습니다. 이 능력 가운데 나아간다면 변화되는 것이 마땅한 모습입니다.

  복음의 능력으로 변화된 이야기가 있습니다. 김해영 선교사님의 간증입니다. 이 분은 척추장애인으로 전국장애인기능대회에서 기계편물 금메달을 따고, 세계장애인기능대회에서도 금메달을 수상했습니다. 이 분은 초등학교를 겨우 졸업했지만, 미국에서 석사 과정까지 공부를 마치고 아프리카로 가셔서 선교하고 계시는 분입니다. 이 분은 지극히 가난한 집에서 2남 3녀의 맏이로 태어났습니다. 그리고, 딸로 태어나서 별로 사랑도 받지 못했습니다. 아버지가 술 마시고 와서 홧김에 자신을 떠밀었는데 그 일로 인해서 그는 척추장애인이 되고 말았습니다.

  어머니는 늘 입버릇처럼 '쓸데없이 태어난 가시나'라고 말하면서 타박했고, 키는 자라지 않아서 134㎝에 불과했습니다. 초등학교 2학년 때부터 내 명의 동생들을 뒤치다꺼리를 하면서 아버지 술심부름을 다녔습니다. 너무 가난해서 학교에서 가져오라고 하는 준비물을 마련하지 못했고, 육성회비를 내는 날은 아예 학교에 갈 수 없었습니다. 아버지는 그렇게 술만 마시다가 알콜중독 상태에서 자살하고 말았고, 어머니는 우울증 환자가 됐습니다. 엄마의 학대를 받으면서 겨우 초등학교를 졸업했고, 칼을 들고 죽이겠다고 달려드는 어머니를 피해서 월급 3만원을 받고 식모살이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다가 무료 직업훈련원에서 양재 편물을 배워서 기계편물 3급 자격증을 땄다고 합니다. 그곳에서 그는 좋은 선생님을 만나서 주님을 영접하게 됐습니다. 복음 안에서 새로운 삶을 살게 됐습니다. 그의 인생관이 달라지고 비전이 달라졌습니다. 공장에서 일을 하면서 교회에 나가는데, 척추장애로 인해서 허리통증이 심했지만, 새벽기도와 금요철야까지 빠지지 않고 참석했습니다. 그때 사모님이 처음으로 자신의 생일을 챙겨 줬고, 그 교회를 떠나던 날에 그의 손을 잡고 기도해 주셨다고 합니다. 

  "주님, 이 딸이 이제 이곳을 떠납니다. 어디를 가든지 함께해 주시길 바랍니다. 이 두 손으로 만든 옷이 세계 최고의 옷이 되게 해 주시고, 이 기술로 다른 사람들을 돕게 해주시고, 또한 하나님의 일꾼으로 살아가도록 도와주시길 기도합니다." 이 기도가 자신의 비전이 되어서 세계장애인기능대회에서 금메달을 목에 걸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아프리카에 가서 학교를 세워서 질병과 가난 속에서 아무런 희망도 없이 살아가는 아이들에게 14년 동안 편물을 가르치면서 선교를 하고 계시다고 합니다. 

  이 선교사님의 간증을 보면, 참 비참하고 고난의 세월이었지만, 복음이 그를 변화시켰다고 고백합니다. 자신 뿐만 아니라, 그 가족 식구들이 다 주님을 만나고 영접해서 변화되었다고 합니다. 동생들 중에서 두 명은 그 선교사님과 같이 선교사가 되었습니다. 그 어머니는 전혀 학교 공부를 하지 못한 무학이었고, 우울증을 갖고 있었고, 그 맏딸은 장애인이었고, 남편은 자살로 사별했고, 청과물 시장 일용 노동자로 사는 인생이었지만, 이 어머니 역시 주님을 만나고 변화되어졌습니다. 다섯 자녀들 중에서 세 명의 선교사를 둔 어머니가 되었고, 국민훈장을 수상하고, 미국 유학까지 하고 훌륭한 인생을 살아가고 있는 딸을 둔 어머니가 됐습니다. 주님을 믿고 한 사람 뿐만 아니라, 그 가정이 변화가 되었고, 그 선교사님을 통해서 아프리카가 변화되고 세상이 변화가 된 놀라운 간증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 

  이 모든 것을 가능케 한 것은 바로 복음의 능력이었습니다. 복음의 능력은 모든 것을 변화시키는 능력이 있습니다. 그런데도! 우리가 주님을 믿고 있다고 하면서도 아무런 변화가 없다고 한다면 무엇이 문제이겠습니까? 분명히 복음 자체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누가 문제입니까? 우리가 문제입니다. 주님을 믿고 복음 안에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고 하면서도 아무런 변화가 없다면, 우리가 과연 진정한 복음의 능력을 체험한 자들인지를 의심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주님을 믿고 있다고 하면서도, 여전히 세상 사람들과 같은 가치관을 갖고 살아간다면, 과연 내가 복음의 능력을 체험한 것인지 의심해 봐야 합니다. 믿음 생활을 하면서도 하나님과의 관계, 이웃과의 관계가 회복되지 못했다면 복음의 능력을 체험한 것인지 점검해 봐야 합니다. 내 안에 믿음이 있고 내가 하나님의 자녀라고 하면서도, 내 신분에 맞게 변화되지 못하고, 여전히 죄의식 가운데 살아가고 있다면, 복음의 능력 아래 나아가야 합니다. 복음의 능력은 반드시 우리를 새롭게 할 것입니다. 

  원하기는, 복음의 능력으로 우리의 삶 또한 삭개오와 같이 변화되게 해달라고 구할 수 있는 우리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복음은 우리를 바꿔놓을 능력이 충분합니다. 복음의 능력은 온 세상을 변화시키고도 남음이 있습니다. 이 복음의 능력을 신뢰하고 의지하면서, 먼저, 나를 복음의 능력으로 변화시켜 달라고 구할 수 있는 우리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내 성품도 복음의 능력으로 변화시켜 주시고, 내 가치관, 인생관도 변화시켜 주셔서 복음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로 지어진 우리들의 신분에 맞게 살아가게 해달라고 구하는 우리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이렇게 구하며 나아갈 때에 복음의 능력은 우리를 변화시키셔서 하나님이 기뻐 받으시는 아름다운 삶이 되게 해주실 줄로 믿습니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