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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얼마나 예수를 사랑합니까 (사 53: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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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나 예수를 사랑합니까? 
이사야 53:1-12

이 시간에 여러분이 자신에게 진지하게 물어보아야만 할 질문이 있는데, 그 질문이란 정말 여러분은 예수 그리스도를 귀중히 여기고 계십니까? 진정으로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를 뜨겁게 사랑하고 있습니까?라는 것입니다. 

저는 언제인가 술을 좋아하는 친구를 보면서, 혼자 멋쩍게 웃은 적이 있습니다. 너는 네 친구들이 술을 좋아하는 만큼, 예수를 좋아하느냐? 라는 생각이 갑자기 들었기 때문입니다. 술 마시는 사람은 밤을 새워가면서 술을 마시고, 잠자고 일어나면 속이 쓰리고 아픕니다. 그러면 지겨워서라도 술 안 마셔야 되지 않습니까? 머리가 띵하고, 몸이 천근만근인데도, 제일 먼저 찾는 것이 술입니다. 이것을 해장술이라고 합니다. 술을 좋아하는 사람은 무슨 핑계거리를 만들어서라도 술을 마십니다. 날이 꾸물꾸물하면 ‘날궂이’를 해야 한다며 술을 마십니다. 기뻐서 한잔, 슬퍼서 한잔, 속상해서 한잔, 날이 궂어서 한잔, 하여간 열심히 술을 마십니다. 

술꾼이 그런다면, 예수꾼인, 예수쟁이인 우리는 얼마나 예수를 가까이 하고 있으며, 성경 말씀을 사모하면서 살고 있는가? 생각을 해보니까, 술꾼을 따라가자면 어림도 없는 것 같아서 혼자서 웃었습니다. 나사렛 사람 예수 그리스도를 참으로 귀중하게 여기는 마음이 여러분 심령 가운데 있습니까? 있어야만 합니다.

그러면 그리스도 예수께서 가장 귀하게 여기는 것이 무엇입니까? 바로 ‘여러분’입니다. 그렇습니다, 바로 ‘여러분의 생명’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나사렛 예수께서, 오늘 예언자 미가의 예언대로, 나귀를 타시고,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고, 하나님과 동일한 본질을 지니신 분이고, 죄가 전혀 없는 분이지만, 죄인으로 정죄를 당하고, 죄인으로 십자가에서 쥭임을 당함으로써, 온 인류의 죄를 대속하기 위한 속죄제물이 되고자, 예루살렘 성에 들어가신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그런 값진 사랑과 은혜를 덧입은 우리는 신령상  형편이 어떻습니까? 본문 3절에서 이사야는 예언하기를, ‘- 사람들이 그에게 얼굴을 돌렸고, 그가 멸시를 받으니, 우리도 덩달아 그를 귀하게 여기지 않았다.’라고 합니다. 이사야의 예언처럼 엄청난 주님의 사랑과 은혜를 받은 우리까지도 예수 그리스도를 귀한 분으로, 귀하게 여기지를 않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본문 이사야 53:1-12절의 말씀을 중심으로 해서, 우리가 예수를 얼마나 사랑하고 있는지에 대하여 몇 가지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1) 성경말씀을 좋아하지 않는 것은, 예수를 귀하게 여기지 않는 것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래서 영국감리교회 교리문답서 52항에 성경이란 무엇인가? 란 질문에 대하여 답하기를, ‘신약과 구약을 포함하는 성경은 점차적으로 편찬된 책들의 모음이다. 그 안에는 하나님이 당신의 백성들 사이에서 어떻게 행동하셨고, 그들에게 어떻게 말씀하셨는지에 대하여 기록되어 있다. 저자들은 그들 자신의 언어 문화 역사적 관점 등에 따라 기록하였고, 각기 다른 방식으로 하나님에 대한 모든 방면의 믿음의 증언을 담았다. 성경은 특별히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자기 계시의 말씀이며, 아직도 성령에 의해 하나님 자신을 드러내는 수단이 된다.’라고 했고, 기독교대한 감리회 신앙고백 4항은 ‘우리는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된 하나니의 말씀인 성경이 구원에 이르는 도리와 신앙생활에 충분한 표준이 됨을 믿습니다.’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많은 신자가 텔레비전 보는 것을 성경 읽는 것보다 더 좋아합니다. 드라마를 얼마나 좋아하는지 모릅니다. 성경말씀보다는 세상의 전문가나 과학자가 말하면 그것을 더 신뢰합니다. 텔레비전 드라마를 보면서 감동을 받아서 눈물을 흘리면서도, 예수께서 나를 위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신 말씀을 읽고, 눈물을 흘렸다는 간증은 잘 듣지를 못합니다. 이런 현상들이 다 신자라고 하면서도, 예수를 귀중하게 여기지 않는 사람들 때문에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제부터는 그런 어리석은 믿음생활을 버리고, 참으로 예수를 귀중히 여기는 증거가 여러분의 삶의 자리 모든 곳에서 나타나도록 마음과 정성을 다하는 여러분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것은, 예수를 귀중히 여기지 않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예수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헨리 조지와 매닝은 깊은 영적 대화를 나눈 사이로 유명한데, 한 번은 매닝이 헨리에게 말하기를, ‘예수께서 사람들을 사랑하시기 때문에 나는 그들을 사랑합니다.’라고 했더니, 헨리 조지가 대답하기를, ‘나는 예수께서 사람들을 사랑하시기 때문에 예수를 사랑합니다.’라고 했다고 합니다. 예수의 사랑과 인간의 사랑을 어떤 방법으로 말하는가? 하는 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분명한 것은 그리스도의 사랑과 인간의 사랑은 서로 분리될 수 없는 것이고, 누구도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사람을 사랑하지 않고는, 그리스도를 사랑한다고 말할 수가 없다는 점입니다. 그리고 인간의 가장 온전한 구원자로 오신 그리스도를 사랑한다고 하면서, 사람을 사랑하지 않을 수는 없습니다. 

고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여행하는 교황'이란 별명을 가졌습니다. 요한 바오로 2세는 처음 신부 서품을 받았을 때부터, 부지런히 사람을 찾아다녔습니다. 직공, 노동자, 상인, 불구자에서 어린아이에 이르기까지, 도움이 필요한 사람을 두루 찾아다니며, 사랑을 베풀었습니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주교(主敎) 시절 교우들에게 말하기를, ‘우리의 보물은 가난한 사람들이다.’라고 했답니다. 가장 귀중한 보물, 목숨을 걸고 지켜야 할 보물, 언제나 나에게서 떼어놓지 않아야 할 보물은, 바로 가난한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사랑은 나보다 연약한 자를 사랑하는 데서부터 시작된다는 점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연약한 형제를 사랑하는 것이 예수를 귀중하게 여기는 것입니다. 

예수를 사랑하고, 사람을 사랑하는, 그리스도인은 환난과 고통의 역사 속에서도 낙관적으로 세상의 파도와 싸워나갈 수가 있습니다. 설교가 필립 브룩스는 인간을 세 종류로 분류했는데, (1) 피상적인 낙관주의자, (2) 염세주의자, (3) 진정한 의미에서의 낙관주의자가 있다고 하면서, 어떤 측면에서 인간은 이 세 과정을 차례로 겪는다고 합니다. 사람은 모두 어린 시절에는 낙관주의자로 출발을 합니다. 어린 시절은 마냥 즐겁기만 하고, 흥미롭고, 아름답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피상적인 낙관입니다. 성장하면서 사람은 예기치 못한 실패, 좌절, 소외, 아픔을 체험하면서 염세주의자로 변합니다. 사실 피상적 낙관주의자 보다는 염세주의자 혹은 비관주의자가 인생의 진실에 더 가까운 존재입니다. 하지만 염세주의자의 삶속에는 진실은 있어도 희망은 없습니다. 그러다가 '나사렛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복음을 듣고,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깨닫고, 예수를 구세주로 믿고 의지합니다. 그러면 그 사람은 갑자기 낙관주의적 삶을 살게 됩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인이 되자마자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을 깨닫게 되었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된다.’는 것을 믿게 된 것입니다. 

이런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신뢰와 믿음이, 사람을 모든 역경 속에서도 참고, 의지하고, 바라고, 견디게 하는 것입니다. 사랑 때문에 모든 것을 견딥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모든 것을 견디게 하는 사랑의 하나님을 만난 적이 있는지, 자신의 신령상 형편을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 것은, 곧 예수를 사랑하지 않는 것임을 명심하기 바랍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사랑이 많은 분을 보세요. 그런 분은 공통적으로 사람을 가리지 않고 두루두루 좋아하고 아껴줍니다. 성격이 까다로운 사람까지도 한결같이 자상하게 대해줍니다. 허물이 좀 있고, 괴팍한 부분이 있어도, 긍정적으로 생각을 하고, 이해하며 따뜻하게 대해줍니다. 예수께서 허물과 죄가 많은 사람을 품어주셨듯이, 연약한 이웃을 향해서 따뜻한 사랑을 베풀어줍니다. 그렇게 하는 것은 오직 예수를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대상을 가리지 않고 사랑하는 사람은 곧 내가 예수를 사랑하는 사람이란 증거를 보여주는 사람입니다. 이제부터 그런 증거를 보여주며 사는데 마음과 정성을 다하는 여러분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 세상을 사랑하는 사람은 예수를 귀하게 여기지 않습니다.
그렇습니다, 세상을 사랑하면 우리의 가장 소중한 친구인 예수를 사랑할 수가 없습니다. 예수께서 여러분의 심령의 문을 두드릴 때에, 세상을 사랑한 사람은 이미 그 심중에 다른 것이 들어와 있기 때문에 예수를 영접할 수도 없고, 사랑할 수도 없는 것입니다. 

소설가인 토마스 하디 작품 가운데 “귀향”이라는 작품이 있는데, 그 이야기 가운데 유스테이샤는 자기 시어머니가 오셨는데, 그 때 마침 자신의 옛 애인이 집에 찾아와 있었습니다. 그래서 시어머니에게 문을 열어줄 수가 없었습니다. 마음으로는 시어머니에게 문을 열어주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이미 그의 집에는 옛 애인이 와 있기 때문에, 문을 열어 주지 못합니다. 시어머니는 밖에서 하루 종일을 기다리다가, 해가 저물어서 집으로 돌아가다가 뱀에 물려서 죽고 맙니다. 이처럼 사람은 사랑을 하고 싶어도 두 가지를 다 사랑할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마태복음 6:24절에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기를, ‘아무도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한다. 한쪽을 미워하고 다른 쪽을 사랑하거나, 한쪽을 중히 여기고 다른 쪽을 업신여길 것이다. 너희는 하나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 없다.’라고 하셨습니다.

사람은 나사렛 예수와 세상을 겸하여 사랑할 수가 없고, 섬길 수도 없습니다. 여러분의 마음 안에 세상에 속한 것이 자리를 잡고 있으면, 하늘의 주인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와 예수의 영인 성령을 영접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까 썩어질 재물과 세상에 속한 것에 대한 집착과 이생의 자랑인 명예욕과 육체의 쾌락을 즐기려는 욕망에 집착을 하게 되면, 그런 마음에 아무리 원한다고 할지라도 성령과 예수를 모실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악한 영과 성령이 한 곳에 거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의 마음을 세상에 속한 것이 장악을 하고 있으면, 거룩한 예수의 영이 오는 것이 부담이 됩니다. 그래서 예수를 귀중히 여기지를 않고, 멸시하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마음에 세상 것이 자리를 잡고 있으면, 아무리 예수께서 여러분에게 영적인 부요함을 주시겠다고 할지라도, 여러분은 대답하기를, ‘주님 나는 하늘에 있는 내세에 부유함 따위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지금 잡을 수 있는 재물을 원하고 있습니다. 그 돈이 나에게 큰집과 큰 사업을 하게 할 것입니다. 난 내 손가락에 끼울 수 있는 반짝반짝 빛이 나는 보석반지를 원합니다. 나는 내세에 있을 영광보다, 현실에서의 영화가 좋습니다. 영적인 복은 죽기 직전에 필요한 것입니다.’라고 합니다.

예수께서 여러분에게 강물 같이 넘치는 평화를 주시겠다고 하는데도, 여러분은 그리스도 예수에게 대답하기를, ‘나는 주님 안에서 누리는 평강 같은 것은 싫습니다. 세상에서 넉넉한 생활이 좋습니다. 할 수 있는 것은 다 한 번 해보고 싶습니다. 로또가 당첨되면 다 망한다는데, 망할 때에 망하더라도 돈벼락 한 번 맞아 보았으면 좋겠습니다.’라고 합니다 

이처럼 말로는 표현하지 않더라도, 마음은 이미 세상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이런 마음에서부터 도망을 치는 여러분이 되기 바랍니다. 세상에 속한 것을 사랑하고, 버리지 못하는 한, 그 사람은 하나님 나라 시민이 아니라 마귀의 자식이요, 세상 사람인 것입니다. 세상에 속한 사람은 구원을 받지 못하고, 영생을 얻지 못하며,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가 없으며, 영광 가운데 나타나는 그리스도를 영접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사도 요한은 요일 2:15-17절에서 말하기를, ‘여러분은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마십시오. 세상을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그 안에 아버지의 사랑이 없습니다. 세상에 있는 모든 것, 곧 육신의 욕망과 눈의 욕망과 살림살이의 자랑거리는 아버지께로부터 나온 것이 아니라, 세상으로부터 나온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도 사라지고, 이 세상의 욕망도 사라지지만,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사람은 영원히 남습니다.‘라고 하셨습니다. 요즘 한국의 그리스도인은 마음을 예수님보다 세상적인 것에 너무나 많이 빼앗긴 것 같습니다. 

세상의 것으로는 만족할 수 없습니다. 가지면 가진만큼 욕망도 커집니다. 하지만 그리스도가 여러분 안에 들어가시면 참된 만족을 얻습니다. 가끔 과거에 큰 죄를 지은 사람이 간증하는 것을 보면, 마치 영웅담을 이야기하는 것처럼 자신의 지은 죄를 이야기합니다. 듣는 재미는 있을지 모르나 그런 간증은 들으면 해롭습니다. 진실로 자신이 지은 죄에 대하여, 슬퍼하고 애통하며, 세월을 돌이켜 지워버리고 싶은 마음이 간절해야만 합니다. 과거의 지은 죄 때문에 슬퍼하고 애통해야만 합니다. 사단에게 속아서 산 세월을 억울하게 여겨야만 합니다.
 
우리가 지은 죄 때문에 예수께서 얼굴에 침뱉음을 당했습니다. 우리가 지은 죄 때문에 예수께서 등에 채찍질을 당했습니다. 우리가 지은 죄 때문에 예수께서 머리에 가시관을 써야만 했습니다. 우리가 지은 죄 때문에 예수께서 손과 발에 못이 박히고, 십자가에 달려서 그 모진 고난을 당하셨습니다. 이런 엄청난 죄를 짓고도 뻔뻔스럽게 울지 않고, 애통하지 않는 것은, 마음이 강팍하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에게는 마음에 자신이 지은 죄에 대한 애통함이 있어야만 합니다. 내가 지은 죄 때문에 예수께서 십자가 고난을 받고자 예루살렘에 입성하시고, 십자가 처형을 당하신 것을 가슴 아프게 여겨야만 합니다. 그리고 예수께서 나를 위하여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그 사랑과 은혜를 생각하고 감사해야만 합니다. 멸망의 길을 가고 있는 나를, 예수의 십자가에서 흘리신 보혈로 씻어주고, 구원받게 하신 그 은혜를 생각하고 감사와 영광을 주님께 돌리기 바랍니다. 이제부터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존귀한 분으로 모시고 뜨겁게 사랑하는 여러분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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