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네게 지시하는 곳으로 가라 (창 12:1-3)

첨부 1


네게 지시하는 곳으로 가라
창세기 12:1-3

빌리 그레이엄 목사님을 도와 선교활동을 했던 한국계 여성 맹인 성악가 킴 웍스라는 분이 있습니다.
그가 오래 전에 세종문화회관에서 공연을 하면서 이런 간증을 했었습니다. 
 
“저는 소경이었기 때문에 사람들의 인도를 받습니다. 그때 사람들은 십미터 전방에 무엇이 있다고 알려주는 것이 아니라, 앞에 층계가 있으니 발을 올려 놓으라 말하고, 앞에 흙탕물이 있으니 피하라고 합니다. 저는 저를 인도하는 사람을 신뢰하고 한 걸음 또 한 걸음 옮기면 언제나 목적지에 도착하게 됩니다.”
 
그러면서 그는 말하기를 “저는 인생이 그와 같다고 생각합니다. 믿음으로 산다는 것이 그와 꼭 같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나를 부르시고 나를 인도하시는 주님을 신뢰하고 한 걸음 또 한 걸음을 옮기다 보면 주께서 나를 위하여 예비하신 그 영광스런 목적지에 도착하는 것을 확실히 믿습니다.”

우리는 인생에서 누군가의 인도를 받고 있고 그들과 함께 갑니다.
그때 우리는 그 권위와 말에 순종하면서 갑니다.
우리가 그렇게 할 수 있는 것은 신뢰 때문입니다.
믿음이 없으면 함께 할 수 없고 그 말을 따를 수 없습니다.
그러나 신뢰하고 따를 때는 내가 가고자 하는 곳으로, 그 차원으로 인도함을 받을 수 있습니다. 

신앙의 삶에 있어서는 더더욱 그렇습니다.
나를 부르시고 인도하시는 하나님을 믿고 그 말씀에 따라 걸음을 옮길 때 그분께서 예비하신 영광스러운 목적지에 도달하게 됩니다.
그것이 최종적인 능력이요 축복입니다.

오늘 본문은 바로 그것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명하십니다.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 (창 12:1절)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신 곳은 바로 갈대아 우르입니다.
이곳은 지금의 이라크의 텔 델 무카야르라는 지역으로, 유프라테스 강가이면서 위쪽에는 티그리스 강이 흐르고 있습니다.
비옥하고 당시 문명이 가장 발달한 도시입니다.
바로 메소포타미아 지역입니다.
고고학자들에 의하면 아브라함이 살던 그 당시 갈대아 우르는 이미 도로가 정비되어 있었고, 상하수도를 사용했으며 우마차를 이용한 교통수단이 있었다고 합니다. 
당시 세계 문명권 중에 가장 발전된 도시가 바로 이곳입니다.
당시 이곳의 문명이 얼마나 찬란했었는지에 대해서 TV에 방영되었던 적이 있습니다.
황금으로 번쩍이던 도시였습니다.

이러한 도시에 살고 있는 아브라함을 신대륙도 아닌 가나안으로 끌어내십니다.
이 땅은 가나안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비옥하고 좋은 땅입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했습니다. 
이 아브라함에 대해 히브리서 11장에서는 이렇게 요약하고 있습니다.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여 장래 기업으로 받을 땅에 나갈새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갔으며” (히 11:8절) 
여기서 우리는 아브라함의 믿음과 순종을 볼 수 있습니다. 

1. 아브라함의 위대한 역사는 ‘믿음으로’ 시작되었습니다.

아브라함이 그러한 결단을 내리고 하나님을 따를 수 있었던 것은 먼저 그의 믿음 때문이었습니다. 
갈대아 우르에 있는 아브라함을 하나님께서 찾아오셨습니다.
사실 아브라함은 믿음의 가정에서 태어나지 않았습니다.
여호수아 24장 2절에 보면 “아브라함의 아비 나홀의 아비 데라가 강 저편에 거하여 다른 신들을 섬겼으나” 라고 하고 있습니다.
전승에 의하면 아브라함의 아버지 데라는 우상 만드는 사람이었다고 합니다.

갈대아 우르는 달 신을 섬기는 도시로 고고학자들의 발굴에 의하면 그것을 상징하는 우상들이 많이 출토되었다고 합니다.
그러한 환경에서 아브라함은 자라면서 영적인 갈등을 많이 느꼈던 것 같습니다.
내려오는 이야기에 의하면 어느 날 밤 아브라함은 아버지가 만들어 놓은 우상을 모조리 다 부셔버렸다고 하니까요.

우상의 허구, 세상의 허구, 영적인 갈망 가운데 있던 이러한 아브라함을 하나님께서 찾아오셨습니다. 
 “…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하란에 있기 전 메소보다미아에 있을 때에 영광의 하나님이 그에게 보여 가라사대 네 고향과 친척을 떠나 내가 네게 보일 땅으로 가라 하시니” (행 7:2~3절)
하나님께서 찾아오셨을 때 그는 인격적인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그리고 그분의 말씀을 들었고 그 말씀에 순종했습니다.
아브라함의 믿음의 근거는 하나님의 말씀이었습니다. 

우리의 믿음의 근거는 바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체험, 신비, 이성이 아니라 하나님 말씀 그 자체입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롬 10:17절)
그 말씀이 진리이고 그 말씀이 생명이며, 그 말씀이 우리의 인생의 빛이 되고 등불이 되기 때문에, 최종적으로 하나님 나라로 인도하는 말씀이기 때문에 그 말씀에 근거하여 우리는 믿음을 가지는 것입니다. 

 2. 아브라함의 위대한 역사는 ‘순종으로’ 시작되었습니다.

믿음이 온전한 믿음이 되기 위해서는 믿음의 행위가 따라야 합니다.
그것은 바로 순종입니다.
곧 그 말씀대로 행하는 것입니다. 
순종은 믿음의 결실이요 열매입니다.
믿음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 뿐 아니라 행하는 것입니다.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 하는 이 말씀이 하나님의 말씀임을 믿을 뿐 아니라 그렇게 따르는 것입니다.
그것이 믿음입니다.
그렇게 할 수 있는 것은 믿음으로 이제 하나님의 약속과 축복, 비전을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히브리서 11장에서 믿음에 대해서 이렇게 정의합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 (히 11:1절)
“실상”이라는 말은 huipostasis(휘포스타시스) 라는 말로 “아래로부터 받혀준다” 는 뜻입니다.
집의 기초 역할과 같이 곧 바라는 것들의 바로 그 기초라는 말입니다.
희망의 기초입니다.
“증거”라는 말은 elechos(엘렉코스) “확신”이라는 말입니다.
보지 못하는 것들의 내적인 확신을 의미합니다.    

노아가 하나님께로부터 홍수의 심판에 대비해 배를 만들라는 명령을 받았습니다.
노아가 사는 곳은 바다에서 수백 Km 떨어져 있는 곳이요, 또 비가 내릴 징조라고는 전혀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노아는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합니다.
무려 120년을 이 일에 매달립니다.
왜요?
하나님의 말씀을 믿음으로 보았고 알았으며 확신했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할 수 있었던 것도 바로 이 믿음 때문입니다. 
 “믿음으로 저가 외방에 있는 것 같이 약속하신 땅에 우거하여 동일한 약속을 유업으로 함께 받은 이삭과 야곱으로 더불어 장막에 거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의 경영하시고 지으실 터가 있는 성을 바랐음이니라” (히 11:9~10절)
아브라함은 믿음으로 약속과 축복, 하나님의 영광의 나라를 보고 순종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에게 바로 이 믿음과 순종이 필요합니다.
순종은 맹목적인 복종이 아닙니다.
말씀이 있고, 약속이 있고, 축복이 있기에 하나님 앞에 겸손히 듣고 따르는 것입니다. 
이것이 기초가 되지 않으면 우리는 하나님 앞에 그렇게 온전히 반응할 수 없습니다.
내 생각에 옳고, 내게 유익한 것만을 위해 가게 되지요.
그리할 때는 결국 우리의 선택은 하나님의 뜻보다는 내 뜻이 앞서게 되고 결국은 하나님의 말씀과 동떨어진 삶을 살 수밖에 없습니다.
사람의 말이 아닌, 하나님의 말씀이 믿음의 근거라는 사실을 우리가 믿는다면 우리는 그 말씀 앞에 온전히 순종할 수 있습니다. 

3. 우리는 이것을 훈련해야 합니다.

우리가 아브라함처럼 되기를 소원한다고 단번에 되어 지는 것이 아닙니다.
배우고 싶은 사람에 대해 한 번 들었다고 금방 그렇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끊임없이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는 훈련을 해야 합니다. 

조지 바로우 라는 분은 “우리는 일찍 이 진리를 배우고 훈련해야 된다”고 했습니다.
가능한 한 빨리 이 진리를 온전히 깨닫고 하나님 앞에 순종하는 훈련을 해야 합니다. 

사실 아브라함도 단번에 순종한 사람은 아닙니다.
히브리서의 말씀은 그의 생애 전체를 돌아봤을 때 그의 생은 믿음과 순종의 삶이었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의 면면을 보면 온전치 못한 믿음의 때가 있었음을 봅니다.
하나님께서 친척본토 아비 집을 떠나라고 하셨는데, 그가 떠날 때 아버지와 조카 롯을 데리고 떠납니다.
그리고 온전히 가나안까지 가지 못하고 중간지인 하란에서 오래 머물게 됩니다. (갈대아 우르 떠날 때 60세, 하란에서 떠날 때 75세 - 약 15년간의 공백이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왜 하란에서 머물렀을까요?
하란은 갈대아 우르와 비슷한 땅입니다. (달신, 땅의 풍요)
곧 하나님을 섬기지만 아직도 아브라함의 마음속에는 버릴 수 없는 인간적인 끈끈한 욕망이 자리잡고 있고, 그것의 지배를 받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안에서 인생의 방향이 변했고 가치관도 변했습니다.
주님 안에서 생애 비전도 발견하고 목표도 가지고 갑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인격의 밑바탕에서 나를 붙들고 있는 그 끈끈한 소유욕과 이기심이 여전합니다.
그래서 우리의 발걸음이 하란에 붙들려 있습니다.
온전히 순종하지 못하고 세상에 발을 두고 거기서 갈등하고 헤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기다리십니다.
그 기다림 속에서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계속적인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그분 앞에 나아갈 때 그분의 가치와 방법과 능력으로 한발한발 더 다가가게 되고  약속의 땅 가나안, 곧 천국을 향해 가게 됩니다.  
아브라함의 순종은 바로 그러한 차원에서 이루어진 것입니다.
이 과정이 훈련입니다.
이 훈련의 장에서 우리가 의식하면서 나아갈 때 우리는 가장 어려울 때도 믿음으로 순종하게 됩니다. 
 
믿음의 순종은 능력입니다.
약해서, 할 수 없어서 하는 것이 아닙니다.
무엇보다도 그것이 더 옳기 때문에,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뜻이기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1) 여기에 하나님의 능력, 하나님의 역사가 나타납니다. 
아브라함의 순종으로 만백성이 구원의 길로 갈 수 있는 길이 열렸습니다.
예수님의 하나님 아버지에 대한 순종이 있었기에 인류의 구원의 역사는 이루어지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역사가 이루어지는 이면에는 반드시 순종이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일을 하실 때는 사람을 통해서 하시기 때문에 이 과정에 믿음의 사람들이 있고, 그 믿음의 사람은 반드시 순종이라는 과정을 거쳐서 그 일을 이루게 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일, 하나님의 역사에 참여하기 위해서 반드시 이 과정을 거쳐야 합니다. 

2) 순종은 복의 역사를 이룹니다.
아브라함이 복의 근원이 된 것은 그의 순종에서입니다.
아브라함은 가나안 땅 곧 젖과 꿀이 흐르는 땅, 곧 하나님께서 항상 돌아보시며 함께 하시는 땅을 얻었습니다.
실제로 아브라함은 부자가 되었습니다.
목축이 많아 롯과 헤어져야 했고, 318명의 종들과 함께 롯을 구해오는 아브라함의 세력은 막강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그가 복의 근원이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친척 본토 아비 집을 떠났지만 더 많은 사람들, 후손들, 땅을 얻었습니다.
그리고 최종적으로 하나님 나라를 얻었습니다. (히 11:13절)

오늘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  
그 말씀을 믿음으로 볼 때 우리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될 것입니다.
그 음성 가운데서 내가 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말씀하실 것입니다.
우리의 삶의 방식의 선택, 가치와 우선 순위의 선택, 아니면 선교지에 대한 비전, 혼동하고 방황하는 우리에게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그 말씀에 순종하십시오.
그 말씀에 순종할 때 능력이 되고 역사를 이루게 됩니다.
온전한 축복의 삶을 이루게 됩니다. 
최종적으로는 하나님의 나라가 있습니다.
완성된 축복의 삶, 축복의 나라, 하나님 나라를 향하여 하나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 음성을 듣고 그분의 약속과 축복을 바라보면서 여러분의 삶의 방향을 바로 잡는 이 시간이 되길 축원합니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