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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약할 때 강해지는 우리 (고후 12: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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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할 때 강해지는 우리 (고후 12:1-10)


고린도 교회에 들어와서 신자들에게 사도 바울을 악평하며 그의 사도적 귄위를 부인하는 자들은 자기들이 환상이나 계시를 통해서 받은 지식을 가지고 있다고 자랑한 것 같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비록 자기 경험을 말하며 자랑하기를 싫어했지만 그의 대적자들이 그들이 자처하는 대로 지극히 큰 사도가 아니라는 것을 밝히기 위하여 부득이 그 또한 그들이 자랑하는 환상과 계시 이상의 영적 체험을 했음을 말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자기가 주님에 의해 사도로 부르심을 받은 사실을 변호하지 않을 수 없을 때만 어리석어 보이는 자기 자랑을 하곤 했습니다. 

실제로 그는 다메섹으로 가는 길에서 신비스러운 빛으로 둘러싸인 가운데 주님의 음성을 듣는 놀라운 체험을 한 이후 여러 차례에 걸쳐 환상과 계시를 경험했던 것입니다. 바울은 본문 1-4절에서 쓰기를 “무익하나마 내가 부득불 자랑하노니 주의 환상과 계시를 말하리라. 내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한 사람을 아노니 그는 십사 년 전에 셋째 하늘에 이끌려 간 자라(그가 몸 안에 있었는지 몸 밖에 있었는지 나는 모르거니와 하나님은 아시느니라). 내가 이런 사람을 아노니 (그가 몸 안에 있었는지 몸 밖에 있었는지 나는 모르거니와 하나님은 아시느니라.) 그가 낙원으로 이끌려 가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말을 들었으니 사람이 가히 이르지 못할 말이로다.” 합니다. 

여기서 바울이 자기가 아는 “한 사람”, “이런 사람”이라고 3인칭으로 말하는 그 사람은 바로 자기 자신을 가리켜서 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가 경험한 일들은 너무나 신비스러워서 그것이 어떻게 이루어졌는지 그 자신조차 정확히 기술할 수 없음을 말합니다. 아무튼 그는 무아지경의 황홀감 속에서 셋째 하늘에 이끌려가 낙원을 체험했으며 거기서 사람의 언어의 한계를 초월하는 놀라운 계시를 받았음에 틀림없습니다. 옛날 사람들 생각에는 첫째 하늘은 새들이 날고 구름이 끼는 하늘이고, 둘째 하늘은 별들이 있는 하늘이며, 셋째 하늘은 하나님이 거하시는 하늘로 여겨졌습니다. 그리고 낙원은 하나님과 그의 구원 받은 백성이 거주하는 초지상적 장소를 일컫는 말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사도 바울은 셋째 하늘과 낙원을 동의어로 사용한 것입니다. 본문 4절을 다시 보면 “그가 낙원으로 이끌려 가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말을 들었으니 사람이 가히 이르지 못할 말이로다.” 합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 다른 사람들에게 전할 수 없는 천상의 광경을 바울에게 보여주신 뜻은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바울이 주의 일을 하면서 온갖 실패와 재난과 신체적 학대를 당할 때 그가 목격한 하나님의 낙원에 대한 소망으로 인내하며 극복할 용기를 주시기 위함이었다고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이렇게 소개한 그의 신비스러운 환상과 계시의 체험은 그 누구의 영적 체험보다도 자랑스러운 것이고 그것을 있는 그대로 이야기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도 아니겠지만 바울은 그것을 자랑하기를 매우 자제하려 했습니다. 왜냐하면 그런 자랑은 잘못하면 교인들의 관심이 하나님이 아닌 바울 자신에게로 쏠리게 할 위험이 있기 때문이며, 바울의 자랑을 듣는 사람들은 그들이 실제로 바울을 보고 듣는 것 이상으로 그를 생각하게 될 수도 있을 것이기 때문이었습니다. 

본문 5-6절을 봅니다: “내가 이런 사람을 위하여 자랑하겠으나 나를 위하여는 약한 것들 외에 자랑하지 아니하리라. 내가 만일 자랑하고자 하여도 어리석은 자가 되지 아니할 것은 내가 참말을 함이라. 그러나 누가 나를 보는 바와 내게 듣는 바에 지나치게 생각할까 두려워하여 그만두노라.” “내가 이런 사람을 위하여 자랑하겠으나” 한 것은 사도 바울이 경험한 그 놀라운 환상과 계시는 진정 자랑할 만한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나 거기서 자랑이 되는 것은 바울 자신이 아니라 하나님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자랑이 되어야 할 일에서 바울이 자랑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나를 위하여는 약한 것들 외에 자랑하지 아니하리라.” 합니다. 즉 바울이 자기의 약한 면을 자랑한다면 그것은 한편으로는 바울 자신이 자만하지 않게 할 것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그의 약함에도 불구하고 그를 강하게 만드신 하나님이 자랑이 되게 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6절 하반절에서 “그러나 누가 나를 보는 바와 내게 듣는 바에 지나치게 생각할까 두려워하여 그만두노라.” 한 것은 고린도 교회 신자들이 바울이 고린도 교회에서 행하는 목회를 통해 그를 보고 들은 바로 그를 평가하지 않고 그것을 넘어서서(지나치게) 그가 정확한 말로 옮길 수도 없는 그 특별한 영적 체험 때문에 그를 과대평가할 것을 두려워하여 그 체험을 이야기하기를 그만두겠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그의 대적자들의 자랑을 듣고 고린도 교회 신자들이 자기를 과소평가하는 것도 원치 않았지만, 자기의 자랑을 듣고 자기를 과대평가하는 것도 원치 않았던 것입니다. 

바울이 “내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한 사람을 아노니 그는 십사 년 전에 셋째 하늘에 이끌려 간 자라. 내가 이런 사람을 아노니 그가 낙원으로 이끌려 가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말을 들었으니 사람이 가히 이르지 못할 말이로다.” 한 데서 보듯이 자기 자신의 체험을 이야기하면서도 그 체험의 주인공을 3인칭으로 불러 “한 사람”, “이런 사람”이라 하며 “나”라고 1인칭으로 부른 자기 자신과 애써 구별하려 한 것도 자랑할 만한 것은 오직 하나님께 속한 것이며 자기 자신에게는 오직 약함이 있을 뿐임을 밝히고자 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여기서 사도 바울은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많은 큰 계시를 주신 일 때문에 자기가 교만해질까봐 자기에게 또 주신 약함 즉 육신의 가시를 언급합니다. 본문 7절입니다: “여러 계시를 받은 것이 지극히 크므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시려고 내 육체에 가시 곧 사탄의 사자를 주셨으니 이는 나를 쳐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라.” 그 육체의 가시가 무엇인지에 관해서는 바울 자신이 언급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여러 가지 견해가 있습니다. 많은 사람이 바울의 육체에 심한 고통을 주는 어떤 질병이라 추측합니다. 그것이 말라리아였다고 보는 사람도 있고, 간질병이었다고 보는 사람도 있으며, 심한 눈병이었다고 보는 사람도 있습니다. 심지어는 바울의 볼품없는 외모와 어눌한 말솜씨라고 보는 사람도 있습니다. 

또 사탄의 괴롭힘으로 보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리고 바울의 적대자들과 그들로부터 오는 박해를 말한 것으로 보기도 합니다. 어느 견해가 옳다고 단정적으로 말할 수 없습니다. 어쩌면 그 모든 것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 가시가 정확하게 무엇이었느냐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주심으로써 하나님께서 바울이 스스로를 부끄럽게 여기며 자만하지 못하게 하셨다는 사실입니다. 

바울에게 있었던 육체의 가시는 그것이 외적인 것이었든 내적인 것이었든 참기 힘들게 고통스러운 것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기에 그는 하나님께 그 가시를 없애달라고 세 번이나 간구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 간구를 들어주시지 않았고, 그래서 바울은 그의 육신의 약함을 오히려 기뻐하며 자랑하기로 했음을 토로합니다. 본문 8-9절입니다: “이것이 내게서 떠나가게 하기 위하여 내가 세 번 주께 간구하였더니 나에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그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 바울은 자기의 간구에 대해 하나님께서 응답하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하셨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바울에게 베푸신 은혜가 족하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바울에게 그 이상의 은혜를 베푸실 뜻이 없으시다는 말씀입니다. 왜 그러셨겠습니까? 

만일 하나님께서 바울에게 더 은혜를 베푸셨다가는 그가 교만해져서 자기의 약함을 잊어버리고 자신의 능력을 과신하게 됨으로써 하나님의 능력이 온전히 드러나지 못하게 될 것을 하나님께서 아셨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래서 계속해서 말씀하시기를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셨을 것입니다. 이 말씀은 바울이 자기가 약한 것을 알고 전적으로 하나님께 의지할 때 하나님의 능력이 온전히 나타날 수 있으며 모든 영광이 하나님께 돌려질 수 있으리라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바울이 9절 하반절에서 “그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 한 것은 그가 단순히 자기의 약함을 인정하고 겸손해지겠다는 자세를 넘어서서 자기의 사역이 자기가 하는 것이 아니라 주께서 친히 역사하시기를 원하는 간절한 마음의 표명인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 한 것이 그 뜻입니다. 

자기의 간절한 기도에 대한 하나님의 대답을 듣고 그 뜻을 확실하게 이해하기에 이른 사도 바울은 이제 자신의 모든 약함과 그로 인하여 겪는 어려움들을 오히려 기뻐하기로 마음과 생각을 확정지을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그가 진정 강해질 수 있는 길임을 깨닫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렇게 정리된 바울의 생각을 보여주는 것이 본문 10절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박해와 곤고를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한 그 때에 강함이라.” 

오늘 본문이 보여주는 사도 바울의 글을 통해서 우리는 그의 위대함이 어디 있는 것인지를 봅니다. 바울은 그의 사역 속에서 자기가 강해지고 자기가 드러나는 것을 원치 않았습니다. 그는 자기의 사역 속에 주님께서 함께하시고 주님의 능력이 항상 머물며 드러나기를 원했습니다. 자기가 강해지면 주님의 능력이 온전히 나타나지 않을 것을 알았습니다. 그러면 자기가 약해질 수밖에 없음을 안 것입니다. 그러나 반대로 자기가 약해질 때 주님의 능력이 온전히 나타나고 그래서 자기가 강해질 수 있음을 안 것입니다. 

교회 안에서 보면 성격 강하고 자랑거리가 많은 사람이 교회를 위하여 유익하지 않음을 종종 봅니다. 그런 사람들은 오히려 교회 안에서 시기와 긴장과 분란을 일으키며 많은 교인들을 시험 들게 할 때가 많습니다. 자기를 약하게 여기며 겸손하고 무슨 일이든 늘 하나님을 의지하여 행하는 이들이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고 아무에게도 상처를 주지 않으며 교회를 편안하게 하고 덕스럽게 하는 것을 봅니다. 

자기자랑을 하며 자신을 과신하지도 말아야 하겠지만 늘 자신 없어 하고 소극적이며 회피적인 것도 좋지 않습니다. 왜 나에게는 아무 재주도 능력도 없나 하고 열등감이나 무기력증에 사로잡혀 있어도 안 될 것입니다.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빌4:13)는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내가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아니라, 나는 할 수 없지만 하나님은 무엇이든 다 하실 수 있고,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하신다면 내가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믿음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온전히 일하시는 것보다 더 확실한 것은 없습니다. 

사도 바울처럼 자신의 약함을 아는 우리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사도 바울처럼 자신의 약함을 부끄러워하거나 비관하지 않는 우리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사도 바울처럼 모든 일에 있어서 전적으로 하나님만을 의지하는 우리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사도 바울처럼 자신의 약함 속에서 하나님의 강하심을 확신할 수 있는 우리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약할 때 진정 강해질 수 있는 우리입니다. 우리에게 있는 온갖 약함을 하나님께서 그의 권능을 온전히 나타내실 기회로 삼을 줄 알아야 할 것입니다. 우리의 약함으로 하나님께서 강해지시고, 우리가 아무 것도 아님으로 하나님께서 모든 것이 되시며, 우리가 우리를 완전한 비움으로써 하나님께서 우리를 온전한 채우시는 놀라운 역사를 날마다 체험하는 우리의 삶이 되기를 하나님께서는 원하시리라 믿습니다. (이수영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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