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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바르게 믿어야 합니다! (마 24:23-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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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르게 믿어야 합니다! (마 24:23-28)


설교가 늘 부담스러운 어떤 목사님이 있었습니다.  총동원 주일에 마을 주민들을 초청하여 숲 속에 천막을 치고 예배를 드렸습니다.  목사님이 준비된 설교를 읽어내려 갑니다.  그날 초청 되어온 한 사람이 뒤에서 큰 소리를 질렀습니다.
"안 들려요!"
그랬더니 역시 새로 나온 주민 한 분이 앞에서 뒤를 보고 외쳤습니다.
"차라리 안 듣는 게 나아."

오늘은 특별히 우리 교회가 소속된 대한예수교 장로회 통합측이 교단적으로 이단경계주일로 정한 주일입니다.  따라서 통합측에 소속된 모든 교회들이 이단에 관한 말씀을 전하도록 요청을 받았습니다.  그만큼 지금 우리 사회와 교회에서는 이단의 문제가 심각하다는 것입니다.

사실 이단들은 어제 오늘의 문제가 아니라 기독교 이천년의 역사 속에서 끊임없이 일어났습니다.  다시 말해서 기독교는 어느 종교보다도 많은 이단들을 일으켰고, 그 이단들은 그 어느 종교보다도 강력한 세력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아이러니 하게도 가장 활기 있고, 헌신적이고, 그리고 급속하게 성장하는 기독교인들은 어느 시대나 할 것 없이 이단들이라고 불리는 자들이었습니다.

특별히 조사에 의하면 오늘 한국 사회에 만연되고 있는 신흥종교 및 사이비 이단 종교 집단은 388개인데, 이 중에 96개가 기독교 계통이라고 합니다.  더구나 안타까운 것은 이단에 빠지는 불특정 다수가 한 달에 만명 정도라고 합니다.  특별히 정통 교회에서 매년 7, 8만 명이 안상홍증인회 하나님의 교회에 넘어가고 있다고 합니다.  이와 같은 현상은 이만희의 신천지도 결코 예외가 아닙니다.  그들의 주장에 의하면 매년 만 명이 넘는 기성교회의 교인들이 신천지로 넘어가고 있다고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이단을 왜 경계해야 합니까?  이 질문에 대해서 사도 바울은 디도서 1장 11절에서 이렇게 대답하고 있습니다.  "마땅하지 아니한 것을 가르쳐 가정들을 온통 무너뜨리는도다."  그러니까 이단은 하나님과 구원, 교회, 신앙생활, 그리고 종말에 대하여 "마땅하지 않은 것을 가르쳐서" 가정을 파괴하는 집단이라는 것입니다.  무엇보다 이단은 2천년의 역사 속에서 교회가 지켜왔던 성경적인 올바른 신앙관을 거부하고 있습니다.  그럼으로써 그들은 교회 안에 가만히 들어와서 공동체의 하나됨을 무너뜨리고 있습니다.  사실 오늘 한국 교회는 이런 이단들로 인해서 많은 폐해와 어려움을 당하고 있습니다.

얼마 전에 어떤 목사님이 제게 전화를 걸어왔습니다.  자기 교회에 언양에서 이사를 온 집사님이 등록을 했는데 인터넷에 검색을 해 보아도 그런 교회가 없다면서 언양에 그런 교회가 있느냐고 물었습니다.  들어보니까 저희 통합측에 속한 교회였습니다.  사실 요즘은 교인이 이사를 와서 등록을 해도 걱정이 먼저 된다고 합니다.  저 사람이 신천지에서 온 사람은 아닌지 하고 말입니다.

이단들 가운데는 우리 나라에서 만들어진 것들도 있지만 외국에서 만들어져서 이 땅에 들어와 자리를 잡고 있는 것들도 많이 있습니다.  요즘은 '안상홍증인회 하나님의 교회'가 아니라 '전능하신 하나님의 교회'라고 하는 것이 중요 신문들에 전면 광고를 하면서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교회'는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대로 안상홍의 부인인 장길자를 '어머니 하나님'으로 믿는 이단종파입니다.  이에 반해 '전능하신 하나님 교회'는 중국에서 발생한 새로운 이단종파로 중국에서는 일명 '동방번개'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들은 지도자인 양상빈이란 여성을 그리스도로 믿고 있는 이단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런 이단들이 한국에만 들어오면 쉽게 자리를 잡고 성장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유독 한국에서 이런 이단들이 쉽게 자리를 잡고 있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첫째로, 저는 그 원인을 한국의 종교적 심성이라고 할 수 있는 샤머니즘적 바탕에 있다고 생각을 합니다.

한국인들의 심성은 매우 종교적입니다.  다시 말해서, 한국인들의 심성 밑바탕에는 어느 민족보다 뛰어난 종교적 심성이 깊이 자리를 잡고 있습니다.  이러한 종교적 심성은 한국이 위치하고 있는 지리적 상황도 무시할 수가 없습니다.  군사적으로 지정학적으로 요지에 위치한 나라로서 주변 강대국들의 끊임없는 침략을 당해야만 했던 한국 백성들은 자신들의 약소함을 종교적인 심성으로 위로를 받아 왔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한국 백성들에게 있어서 종교는 그들의 삶, 그 자체였다고 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한국인들의 종교적 심성의 기본적인 바탕은 우리가 인정을 하든 하지 않든 샤머니즘적입니다.  이 샤머니즘은 한국에서의 종교적 바탕을 이루면서 외래 종교들을 쉽게 받아들였습니다.  그리고 외래 종교들과 혼합을 통해 변형하면서 오랜 역사 속을 흘러왔습니다.  한국의 건국 신화인 단군신화 자체가 샤머니즘의 소산이라는 점에서도 샤머니즘이 얼마나 한국의 정신적 바탕이 되어 있는가를 단적으로 알 수 있습니다.  샤머니즘은 항상 민중의 생활을 지배해 왔으며 타종교와의 혼합 속에 한국 문화의 운명을 좌우해 왔다고 할 수가 있습니다.  쉽게 말해서 종교적 심성을 샤머니즘에 둔 한국 사람들은 다른 종교들을 쉽게 받아들이거나 자신이 믿는 종교를 쉽게 버릴 수 있는 특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샤머니즘은 그 자체적으로는 문화적 꽃을 피울 수 있는 요인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그 단적인 증거가 오늘날에도 볼 수 있는 무당 신앙입니다.  이것은 고금을 통해 아무런 종교적 발전을 보지 못한 원시적인 것이 그대로 반복되고 있는 것입니다.  수천 년을 지난 오늘에도 거기에는 교리도 없고 논리도 없습니다.  그렇지만 샤머니즘은 다른 종교와 쉽게 혼합되면서 독특한 문화를 발전시켜 왔습니다.  그 대표적인 것이 신라의 화랑도나 고려의 팔관회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두 번째로, 한국에서 이런 이단들이 쉽게 자리를 잡고 있는 요인으로는 도교와 정감록 사상입니다.

고려 시대에 불교가 타락하면서 이성계를 중심으로 한 조선은 불교를 억압하고 유교를 장려했습니다.  그래서 조선은 민속신앙화된 불교와 함께 무교 자체도 또한 금지시켰습니다.  그런데 유교가 조선의 백성들에게 종교적 심신을 만족시켜 주지 못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유교라고 하는 것은 본래 대중의 신심을 만족시킬 만한 종교적 요소가 아주 약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유교의 경전이라고 할 수 있는 사서오경과 같은 책들이 한문으로 되어 있어서 이것을 읽을 수 없었던 대중들은 자연히 무종교 상태로 방치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더구나 조선 중엽 이후에 당쟁당파 싸움이 심해지고 사회가 불안에 빠지게 되면서 사람들은 무당을 찾아 운명을 점치고 제재초복을 비는 등 국가의 상하가 온통 무당 신앙에 의존하는 현상이 강하게 자리를 잡게 됩니다.

사람이 종교적 심성이 없이 살 수는 없습니다.  때문에 민중들의 종교적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새로운 활력을 가지고 등장하게 된 것이 무교와 도교였습니다.  실제로 조선 중기까지 지식인들이 공직에 나가거나 권력과 재산이 있을 때에는 유교적 입장을 취했지만 야인으로 물러날 때, 그리고 세속적으로 실패했을 때에는 도교에서 위안을 찾는 자들이 많았다고 합니다.  그만큼 조선 말기에 도교가 민간신앙에 미친 영향은 아주 컸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길선주 목사님을 비롯한 구한말의 대부분의 목회자들이 도교 출신들이었다는 사실이 이와 같은 사실을 증명해 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도교의 중심에 자리를 잡고 있는 것이 '정감록'입니다.  원본도 저자도 알 수 없는 이 책은 정체 불명의 말세예언을 추종하는 민간신앙을 지칭하는 예언서로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정감록'의 원전이라고 할 수 있는 '감격'이라는 책에는 조선의 선조인 한륭공의 두 아들인 이심과 이연이 조선 멸망 후에 일어설 정씨의 조상이라는 정감이 금강산에서 마주앉아 대화를 나누는 형식으로 엮어져 있습니다.

이 책의 내용은 허무맹랑한 도참설과 풍수설에서 비롯된 예언이라고 합니다.  그렇지만 당시 오랜 왕정에 시달리면서 조정에 대해 실망을 느끼고 있던 민중들에게 끼친 영향은 아주 컸다고 할 것입니다.  실제로 광해군과 인조 이후의 모든 혁명 운동에는 거의 빠짐없이 정감록의 예언이 거론되기도 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반면에 어리석은 백성들은 이 책의 예언에 따라 남부여대(男負女戴)하고 십승지지(十勝之地)의 피난처를 찾아 나서는 웃지 못할 희극을 수 없이 연출시켰다고 합니다.  여기에서 남부여대라는 말은 가난한 사람들이 살 곳을 찾아 이리저리 떠돌아다님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이고, 십승지지라는 말은 풍수지리설에서 말하는 피난과 보신의 10가지 장소를 의미합니다.

이런 정감록의 사상이 알게 모르게 우리 한국인들의 심성에 자리를 잡고 있습니다.  더구나 사회가 힘들고 어려울 때 사람들은 정도령이 나타나서 세상을 뒤엎어 줄 것을 갈망하게 됩니다.  뿐만 아니라 남부여대(男負女戴)하고 십승지지(十勝之地)의 피난처를 찾아서 이단에 빠져들어 가기도 하는 것입니다.

결국 오랜 고난의 역사를 지나오면서 샤머니즘과 도교에 기반을 두고 있는 정감록이 한국인들의 심성에 자리를 잡고 있고 그것이 신앙생활에도 적잖은 영향을 주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샤머니즘과 정감록이 우리들의 신앙생활에 영향을 주고 있는 것이 무엇일까요?  크게 세 가지로 생각해 볼 수가 있습니다.

그 하나는 눈에 보이는 어떤 현상적인 것에 지나치게 집중한다는 것입니다.

무당은 현란한 굿을 통해서 사람들의 정신을 빼앗습니다.  무당은 굿을 통해 죽은 사람을 불러오고, 악귀를 쫓아낸다고 합니다.  그러나 사람이 죽으면 그 즉시 천국과 지옥으로 갑니다.  그의 영혼이 이 땅에 다시 올 수는 없습니다.  무당이 죽은 사람을 흉내내는 것은 귀신의 장난일 뿐입니다.  그래서 성경에서는 이런 자들은 돌로 쳐죽이라고 명령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들에게는 알게 모르게 이런 무당적인 기질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를 믿는다고 하지만 여전히 눈에 보이는 어떤 현상적인 것을 추구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꿈과 환상에 아주 민감합니다.  일반적으로 정상적인 사람은 잠을 잘 때 3개 이상의 꿈을 꾼다고 합니다.  다만 그 꿈을 기억하지 못할 뿐입니다.  그러니까 꿈을 꾸는 것은 정상적인 현상입니다.  그런데 그 꿈에 지나치게 민감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이 교회에 들어오니까 기도가 안 된다든지, 혹은 이 집에 무슨 어려운 일이 있느냐고 하면서 사람들의 마음을 혼란스럽게 합니다.  기도는 될 때도 있고 안될 때도 있습니다.  귀에 걸면 귀걸이고, 코에 걸면 코걸이라고 이것 저것 갖다 맞추면 세상에 어려운 일이 없는 집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사실 예수라는 이름만 바뀌었을 뿐이지 무당이 하는 것과 똑같은 흉내를 내는 사람들이 교회 안에 많이 있습니다.  어딘가 이사를 가거나 무슨 일을 할 때에 무당을 찾아가서 점괘를 보는 것처럼 하나님의 응답을 받아야 한다면서 기도를 받으러 다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런 이상한 능력을 행하는 사람들을 믿음이 대단히 좋은 사람으로 생각하기도 합니다.

심지어 어떤 사람들은 자신이 고린도전서 12장에 나오는 은사들 가운데 몇 가지의 은사를 받았다고 자랑하기도 합니다.  이런 사람들은 입신이나 예언, 방언 등 극단적인 신비주의 신앙 형태를 강조하면서 그것을 믿음의 척도로 삼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의 은사는 고린도전서 12장에 나오는 은사만이 전부가 아닙니다.  고린도전서 12장에 기록된 은사는 그 당시 고린도교회 안에서 일어났던 은사들을 나열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사도 바울이 강조하고 있는 것은 그와 같은 아홉 가지의 은사들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것들 보다 더 크고 좋은 은사가 있는데 그것은 바로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사랑의 중요성을 강조하기 위해서 당시에 고린도 교회에 분쟁의 중심에 있었던 은사들의 종류들을 나열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들은 은사를 이야기할 때 고린도전서 12장이 표준 참고서가 되고 있습니다.

교회 역사를 보면 두 종류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하나는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가에 관심을 갖는 사람이고, 또 다른 하나는 예수님이 어떤 일을 하셨는가에 관심을 갖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이 어떤 일을 하셨는가 하는 것에 관심을 갖는 사람은 언제나 이적과 현상만을 추구했습니다.  그러나 초대교회 이래로 교회가 정말 중요하게 여겼던 것은 예수님이 어떤 일을 하셨는가 하는 것이 아니라 그 일을 하신 그가 누구이신가 하는 것입니다.  오병이어를 행하시고, 죽은 자를 살리신 그 사건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그 일을 행하신 그분이 누구이시냐 하는 것입니다.  그분은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그분은 우리를 구원하실 구주이십니다.

그러므로 성경에 바탕을 둔 기독교적 신앙은 이적과 현상을 쫓아가는 신앙이 아닙니다.  그것은 속된 말로 무당 신앙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기독교에 이적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기독교에도 이적과 기적은 있습니다.  지금도 일어납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기적과 이적을 부인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 이전에 정말 중요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입니다.  나의 구원자이신 예수님만을 바라보고 그분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살아갈 때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 가운데 기적이 일어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당 스타일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교회 안에서 어떤 기적적인 일들이 일어나지 않거나 솰랄라라 하면서 뜨겁게 기도하고 뒤로 넘어지는 그런 이상한 현상들이 보이지 않으면 또 다른 곳을 찾아갑니다.  마치 정감록에서 남부여대(男負女戴)하고 십승지지(十勝之地)의 피난처를 찾아가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리고 그런 사람들을 보십시오.  그들의 삶에서는 전혀 그리스도의 향기를 맡을 수가 없습니다.

요즘 이단들을 보십시오.  그들이 주장하고 강조하는 것은 눈에 보이는 현상적인 것들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천국과 지옥을 경험하는 입신, 예언과 방언 등 신비적인 사상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심지어 기도할 때 어떤 떨림이나 체험을 강조하기도 합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어떤 이단 교주는 자신은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어떠한 내용으로 설교하라고 지시한다고 강조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로부터 듣지 않으면 설교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들이 이렇게 강조하는 이유는 그렇게 함으로써 자신에게 어떤 초월적인 권위를 부여하는 효과를 주기 위해서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런 교회와 이단들에 사람들이 몰려들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유가 무엇입니까?  눈에 보이는 어떤 신비적인 현상을 따라가고자 하는 사람들의 종교적 심성 때문이라고 해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여러분, 표적과 현상을 보여주기를 요구하는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을 향해 말씀하시는 예수님의 음성을 들으십시오.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선지자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일 표적이 없느니라."

두 번째로, 샤머니즘과 정감록이 우리들의 신앙생활에 영향을 주는 것은 예언 신앙입니다.

조선 후기에 들어오면서 대부분의 양반들은 지배자와 폭군처럼 행세를 했습니다.  정치가 부패하여 나라의 기강이 문란해지고, 양반관료들의 횡포에 시달리다 못해 집을 버리고 유랑걸식을 하는 사람들이 부지기수로 늘어갔습니다.  때문에 도저히 먹고 살 길이 없는 농민들의 일부분은 화적떼가 되기도 했던 시대였습니다.  그러한 민중들에게 한 가닥 희망을 준 것이 정감록이고, 정도령이었습니다.  정감록은 민간 신앙에 전해져 오는 일종의 허무맹랑한 예언서입니다.

그런데 정감록 신앙에 영향을 받은 우리는 예언에 아주 민감한 반응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시대가 암울하고 자신의 생활이 힘들고 어려우면 찾아가는 곳이 있습니다.  바로 무당입니다.  무당에게 가서 점을 보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무당은 과거를 맞출 수는 있지만 미래는 맞추지 못합니다.  아무리 용한 무당이라고 할지라도 미래는 한 걸음도 맞추지 못합니다.  그렇게 잘 맞추면 자신의 인생은 왜 바꾸지 못합니까?  만약에 하나님께서 저에게 미래를 알 수 있는 은사를 주셨다고 한다면 저는 먼저 그 은사를 가지고 제 인생을 바꿀 것입니다.  그러나 무당을 보십시오.  제대로 사는 무당이 있습니까?

기억하십시오.  미래는 하나님께 속한 것입니다.  그 미래를 볼 수 있는 자는 아무도 없습니다.  육신의 몸을 입고 오셨던 예수님께서도 세상에 계실 때에는 미래를 알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이 염려할 것이요 한 날의 괴로움은 그 날로 족하다"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모세 오경에 보면 그와 같이 미래를 알려고 하는 자를 죽이라고 했습니다.

아니, 그렇다면 제게 반문할 것입니다.  "목사님, 고린도전서 12장 10절에 보면 예언의 은사가 있잖아요?"  예, 맞습니다.  고린도전서 12장 10절만이 아니라 14장에도 예언이 나옵니다.  그러나 이 예언은 우리의 밑바탕에 자리를 잡고 있는 샤머니즘적인 그런 예언이 아닙니다.  대부분의 신학자들은 여기에서 말하고 있는 '예언'은 '설교' 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세 번째로, 샤머니즘과 정감록이 우리들의 신앙생활에 영향을 주는 것은 정도령 신앙입니다.

"시대가 혼탁하고 어지러울 때 정도령이 나타난다.  그리고 그가 세상을 개벽시켜서 새로운 세상을 만들 것이다."  이러한 정도령 신앙은 오늘 한국 교회에 특별히 자칭 예수라고 주장하는 자들이 많이 나오게 하는 요인이라고도 생각을 해 봅니다.

조사에 의하면, 지금 우리 나라에 자칭 하나님이라고 주장하는 사람이 21명이나 됩니다.  자신을 예수라고 주장하는 사람은 50명이 넘는다고 합니다.  죽은 문선명의 통일교, 정명석의 JMS, 신천지의 이만희 등 거의가 교주 중심의 신앙집단을 형성하고 있습니다.  앙상홍증인회 하나님의 교회에서는 안상홍을 재림 예수로, 그의 두 번째 부인인 장길자를 성령의 신부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신천지의 이만희는 자신을 철장으로 만국을 다스릴 재림주와 보혜사 성령이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한국에서 자칭 재림 예수라고 허무맹랑한 말을 해도 그들을 따르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은 그 밑바탕에 정도령 신앙이 자리를 잡고 있기 때문입니다.  저들은 세상의 개벽을 꿈꾸는 자들입니다.  기존 교회나 정통 신앙에서는 만족을 얻지 못한 사람들이 거기로 찾아갑니다.  현재 자신의 힘과 노력으로는 어떻게 할 수가 없기에 저들을 재림 예수로 받아들여서 세상의 천지개벽을 꿈꾸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성경을 조금만 바로 알아도 그것이 얼마나 잘못된 신앙인가를 알 수가 있습니다.  범죄한 우리 인간은 하나님을 볼 수가 없습니다.  구약 시대에 모세와 엘리야 등 몇 사람이 하나님을 보았다고 하지만 그것은 하나님의 옷자락을 끝을 본 것입니다.  하나님의 옷자락을 조금 보고서도 죽게 되었다고 두려워했습니다.  범죄한 인간이 하나님을 보면 죽는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범죄한 인간을 구원하시고자 하나님께서 자신을 인간에게 딱 한 번 보여주신 사건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이 땅에 육신의 몸을 입고 오신 사건입니다.  그 사건을 사람들은 초림 예수님이라고 말합니다.  이 땅에 육신을 입고 오신 예수님은 죄는 없으시고 그의 육신은 분명 우리와 똑 같은 분이셨습니다.  우리들처럼 성장하고, 아파하고, 배고파하며, 피곤해 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를 위하여 십자가에서 고난을 당하시고 죽으신 후 우리를 의롭게 하시고자 부활하셨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40일 동안 제자들과 함께 계시다가 제자들이 지켜보는 가운데서 하늘로 올라가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승천하시는 모습을 보고 있던 제자들에게 흰 옷 입은 두 천사가 말을 합니다.  "너희 가운데서 하늘로 올려지신 이 예수는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

사랑하는 여러분, 예수님은 다시 오십니다.  반드시 오십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다시 오심은 예수님께서 처음 이 땅에 오실 때와 같은 그 모습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지켜보았던 부활하신 그 몸으로 다시 오십니다.  그러니까 인간으로 태어나 인간들 속에서 성장하면서 생활하는 그런 예수가 아닙니다.  다시 오실 예수님은 부활하신 그 몸으로 이 땅에 오십니다.  그리고 그의 오심은 세상의 마지막 날 심판의 날이 될 것입니다.  이것이 성경이 우리들에게 가르치고 있는 바른 신앙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예수를 뜨겁게 믿어야 합니다.  그러나 그 이전에 참으로 중요한 것은 성경에 바탕을 두고 바로 믿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 많은 사람들은 눈에 보이는 현상을 쫓아갑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께서는 말세에 이런 일들이 일어날 것을 예견하시고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본문 23절을 다같이 읽도록 하겠습니다.
"그 때에 사람이 너희에게 말하되 보라 그리스도가 여기 있다 혹은 저기 있다 하여도 믿지 말라."

그러니까 마지막 때가 되면 스스로 자신을 예수라고 하는 사람들이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들을 따라가면 안됩니다.  그것은 자신을 망하게 할 뿐 아니라 가족 전체를 망하게 합니다.

종교개혁자 칼빈은 우리가 성경을 읽거나 신앙생활을 함에 있어서 기준은 오직 믿음과 사랑이라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유일한 구원자로 믿는 믿음이 중요합니다.  그리고 그 믿음 안에서 이웃과 성도들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면서 섬길 수 있어야 합니다.  기억하십시오.  사랑이 없는 은사는 아무 것도 아니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이제 올바른 믿음에 굳게 서십시오.  미혹의 영들이 하나님의 자녀들을 유혹하고 있습니다.  그 유혹에 넘어가지 않기 위해서는 이단들을 멀리하십시오.  사도 바울이 그 많은 세월동안 눈물로 훈계하였습니다만 그 영향력보다 이단자들의 이상한 말 한 두 마디에 귀가 솔깃해진 교인들도 있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 우리는 정신을 바짝 차리고 마음을 굳게 하셔야 합니다.

우리는 성경이 가르치는 바른 믿음의 도를 위하여 이단과 힘써 싸워야 합니다.  경계하는 것도 싸우는 것입니다.  말세가 되면 될수록 이단자들은 더 많을 것이며 활동도 더 많아질 것입니다.  그러나 믿음 위에 굳게 서서 구원의 도리를 굳게 잡고 기필코 승리하고 성공하기를 축복합니다. (오주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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