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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베드로의 설교 (행 3:1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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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드로의 설교 (행 3:11-26)

베드로는 입을 열기만 하면 복음이 쏟아져 나옵니다. 성전 미문에 앉은 앉은뱅이를 믿음으로 일으킨 베드로는 왜 우리 뒤에 계시는 살아 계신 하나님을 보지 못하고 우리를 주목하느냐고 말한 후에 이야기의 초점을 예수 그리스도에게로 끌고 갑니다. 결국 미문에 앉아있던 앉은뱅이를 통해서 일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선포할 기회를 포착한 것입니다. 

1. 왜 우리를 주목하느냐(11-12절) 

사람들이 심히 기이히 여기며 놀라고 있는 동안에 정작 고침을 받은 앉은뱅이 자신은 걷기도 하며 뛰기도 하고 하나님을 찬미했습니다. 사람들은 이제는 걸어다니는 과거의 앉은뱅이를 구경하려고 또한 도대체 누가 어떻게 저 나면서부터 앉은뱅이 되었고 이미 사십여세나 되어서 도저히 치유 불가능한 그를 걷게 할 수 있었을까를 주목하면서 스스로 솔로몬의 행각으로 모여들었습니다. 

오순절 성령강림으로 충만해진 베드로는 이미 오순절 성령강림을 본문으로 한 한 편의 설교로 삼천명의 회심자를 낸 초유의 설교자입니다. 사람들은 베드로에게 찬사를 보내고 있으며 주목하고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던 차제에 앉은뱅이를 일으킨 것입니다. 기대에 차서 솔로몬의 행각에 모여든 사람들에게 베드로의 두 번째 설교가 이어집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아 이 일을 왜 기이히 여기느냐 우리 개인의 권능과 경건으로 이 사람을 걷게 한 것처럼 왜 우리를 주목하느냐" 이미 그리스도께서 살아계실 때에는 이것보다 훨씬 더 큰 이적과 기사들이 많았지 않느냐? 그런데 왜 겨우 앉은뱅이가 일어난 것으로 기이히 여기느냐는 의미가 들어 있습니다. 또한 이미 요한의 그림을 통해서 살펴본 것처럼 이 사건은 나의 경건과 나의 능력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고 확고히 말합니다. 베드로는 이제 미문의 앉은뱅이를 두 번째 본문으로 잡고 설교할 발판을 만들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다음관찰로 넘어가기 전에 묵상하고 지나가야 할 것이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자기가 믿음이 좋고 대단한 영력(靈力)이 있어서 이적의 권능을 행사하는 것처럼 은근히 자신을 강조하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은 시대에 살고 있지 않습니까? 

아니 저와 여러분 역시 어떠한 결과에 대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보다는 나의 능력과 지혜로 이루어졌음을 은근히 자랑하고 싶어하는 소영웅주의자들이 아닙니까? 어쩌면 이것은 타락한 인간이 가지고 있는 지극히 인간적인 욕망인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지극히 인간적인 것이기에 그것이 옳다고 말해서는 안되는 것이기도 합니다. 

사도들의 관심은 오직 하나입니다. 어떻게 하면 이 기적의 실체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 이 땅에 진정한 희생 제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그들에게 소개하고 만나게 할 수 있을까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하면 이들로 하여금 죄를 깨닫고 삶의 방향을 돌이켜서 구원받은 백성들이 되게 할 수 있을까가 사도들의 최대 관심사였던 것입니다. 그러면서 답변하기를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 곧 우리 조상의 하나님이 그 종 예수를 영화롭게 하셨느니라"그랬습니다. 

이 말이 의미하는 바는 이중적인 것으로 과거 너희가 믿던 그 하나님, 즉 구약적인 의미에서의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영화롭게 하셨고 그 분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이 앉은뱅이가 일어났다는 간접적인 표현입니다. 즉 베드로는 자신들에게 쏟아지는 주목(spotlight)을 예수 그리스도에게로 돌리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베드로의 모습 속에서 어떻게 하면 좀 더 잘 살아볼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나의 이름을 높일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그리스도가 아닌 내가 높임을 받을 수 있을까를 고민하고 있는 우리들과는 너무나 대조적인 모습을 발견합니다. 그러므로 다시 한 번 기억하십시다. 무엇에 가장 최대의 관심을 표명하고 있느냐가 곧 그의 삶을 지배할 가능성이 많습니다. 여러분의 현재적인 삶을 지배하고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예수 그리스도가 삶의 우선순위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2. 너희가 못박은 예수 그리스도(13-18절) 

우선 우리는 13-15절 사이에서 '너희가'라는 말이 얼마나 자주 등장하고 있는가를 관찰할 필요가 있습니다. 

13절에 너희가 ... 넘겨주고, 역시 13절에 너희가 그 앞에서 부인하였으니, 14절에 너희가 거룩하고 의로운 자를 부인하고 15절에 너희 생명의 주를 죽였도다. 그러나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셨으니 우리가 이 일에 증인이로다. 존 스톳트는 이것을 4중적인 저주라고 표현했습니다. 즉 지금 솔로몬의 행각에 모여 있는 이 사람들이 바로 베드로가 {너희}라고 표현하고 있는 그들입니다. 얼마나 강하게 죄를 책망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베드로는 그들로 하여금 자신의 경건과 능력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능력이라고 소개함으로서 그리스도를 주목하게 한 후 바로 그들의 행동이 얼마나 잘못된 것이었는가를 실감나게 지적하고 있습니다. 이들은 그리스도께서 어떻게 죽으셨으며 어떻게 부활하셨는지에 대해서 생생하게 목격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베드로의 이러한 지적은 그 십자가의 처절한 죽음과 함께 생생하게 이들에게 떠 올려졌을 것입니다. 광란한 군중들이 그렇게 외쳐대던 "바라바! 바라바!" 그 잘못된 함성이 귓전을 울리지 않았겠습니까? 베드로는 통렬한 어조로 그들의 죄를 지적하고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죄를 볼 수 있어야 은혜의 필요를 절감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나서 베드로는 그 분 예수 그리스도께서 어떻게 높아지셨는가를 이야기합니다. 15절에서 베드로 사도는 너희가 이같이 하여 예수를 죽였지만 하나님이 다시 살리셨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이 일에 대해서 자신들이 증인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면서 '형제들아!' 라는 친근한 칭호로 호칭을 바꾸면서 그들이 그렇게 영광의 주를 죽이는 일에 동참한 것이 알지 못해서라고 말하는데 이것은 그들의 죄를 감싸주거나 이해한다는 차원의 것이 아닙니다. 이 말은 그들이 왜 죄사함을 받는 것이 가능한가를 보여주고자 함이었습니다. 

비록 자신들은 무엇을 하는지 몰랐지만 하나님은 그들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알았고 그것은 예언을 성취하는 일이었습니다. 

베드로 사도는 18절까지의 설명을 통해서 솔로몬의 행각에 모인 사람들이 왜 죄인들이며 구원받아야 하는가를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제 19절부터는 그러므로 하나님께 회개하고 돌아와야 한다고 말합니다. 만약 회개하고 돌이키면 이러한 일들이 일어날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3. 회개하고 돌이켜 죄 사함을 받으라. (19-26절) 

회개하고 삶의 방향을 돌이키라는 말은 처음 설교에서 했던 말이기도 합니다. 회개가 없는 기독교는 존재할 수 없는 것이지요. 죄를 지적하지 않는 기독교 역시 존재할 수 없습니다. 회개는 죄를 아파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하기 때문입니다. 회개하고 돌이키면 어떤 일이 일어납니까? 

1) 죄 없이함을 받는다고 설명합니다. 여기서 '없이 한다'는 말은 씻어 내리다, 지우다, 말살하다 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것은 이런 배경을 가지고 있습니다. 고대에는 파피루스 위에 글을 썼으며, 잉크는 보통 산(酸)이 들어 있지 않았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것은 현대의 잉크처럼 파피루스를 부식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단지 표면에 살짝 칠해져있었던 것입니다. 거기 써있는 글씨를 지우려면 그저 스폰지로 씻어 내면 그만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죄를 없이 한다는 말은 죄의 흔적조차 지워버린다는 뜻입니다. 어떻게 하면 그렇습니까? 예, 회개하면 그렇습니다. 

2) 두 번째로 약속된 복은 "새롭게 되는 날이 주 앞으로부터 이를 것"(19절)이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새롭게'를 구 번역에는 '유쾌하게'라고 했습니다. 휴식과 위안, 원기 회복 등의 뜻을 가지고 있는 말입니다. 이것은 죄사함과 반대되는 적극적인 개념입니다. 

이것을 그림 언어로 설명하면 이런 것입니다. 어떤 아이가 있었습니다. 아마 쐐기골처럼 시골마을에 살았던 아이였던 것 같습니다. 어느 날 아버지가 조그만 손도끼 하나를 선물로 주셨습니다. 그래서 그걸 가지고 나무도 좀 찍어보고 멀리 송판을 세워놓고 던져 보기도 하면서 좋아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아이는 아버지가 키우는 강아지를 향해서 도끼를 한 번 던져보았습니다. 설마 정확하게 맞을까라는 생각으로 무심코 던진 도끼가 정확하게 강아지를 가격하고 강아지는 죽고 말았습니다. 아버지의 대노한 얼굴이 눈앞에 어른거리면서 아이는 초주검이 되었습니다. 아이는 무서움을 무릎 쓰고 강아지를 땅을 파고 묻었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심술궂은 누이가 본 것입니다. 그래서 무슨 일만 생기면 "너 땅에...." 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일이 이쯤 되고 나니까 누나가 해달라는 것은 심부름부터 심지어는 용돈도 상납하는 경우가 생긴 것입니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면서 아이는 도저히 고통을 견디지 못하고 아버지에게 정직하게 고백했습니다. 

그러니까 아버지 말씀이 "이 녀석 그럴 줄 알았다. 강아지가 없어진 후부터 네가 우울해서 무슨 사단이 있는 줄 알았다. 다만 네가 스스로 잘못을 빌 때까지 기다리고 있었다. 이제 됐으니 편안하게 생활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 때 아버지의 방을 나서는 아이의 홀가분한 마음이 바로 새롭게 되는 마음입니다. 다시 말해서 회개함으로 느끼는 자유스러운 마음이 바로 유쾌하게 되는 마음인 것입니다. 

이미 여러분은 회개하시면서 이 마음을 맛 보셨을 줄 압니다. 그리고 지금도 그 유쾌한 마음을 간직하시면서 살아야 합니다. 


3) 마지막 세 번째는 무엇입니까? 본문 20, 21절을 보시면 쉽게 이해하실 수 있습니다. "너희를 위하여 예정하신 그리스도 곧 예수를 보내실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저와 여러분이 아시는 대로 베드로가 지금 설교하고 있는 시점은 예수께서 오셨습니까? 오시지 않았습니까? 이미 오셔서 온갖 고난과 수욕을 당하시고 십자가에서 예언을 성취하셨으며 부활하시고 승천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일에 대해서 자신들이 증인이라는 사실을 이미 베드로 사도는 천명한 바 있습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말하는 예정하신 그리스도를 보내신 다는 말씀은 다시 오실 그리스도로 보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그 때 피조물들의 탄식이 그치고 자연이 고통 속에서 회복되며 새 하늘과 새 땅의 아름다움을 누리게 될 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사실은 21절에 잘 나타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영원 전부터 거룩한 선지자의 입을 의탁하여 말씀하신 바 만유를 회복하실 때까지는 하늘이 마땅히 그를 받아두리라"그랬습니다. 여기서 만유를 회복하실 때라는 말을 이해하실 수 있으시겠습니까? 그 때는 주님이 다시 오셔서 모든 눈물을 씻어 주실 재림의 시기를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베드로 사도의 논증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습니다. 베드로 사도는 이 만유를 회복하심은 구약에 이미 예언된 사실임을 천명하기 위해서 세 사람을 예로 등장시킵니다. 모세와 사무엘 이후의 선지자들과 아브라함이 그들입니다. 연대기적인 언급은 아닙니다만 베드로 사도가 언급한 순서대로 간략히 확인할 필요가 있습니다. 

모세 - 22-23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주 하나님이 너희를 위하여 너희 형제 가운데서 나 같은 선지자 하나를 세울 것이니 너희가 무엇이든지 그 모든 말씀을 들을 것이라. 누구든지 그 선지자의 말을 듣지 아니하는 자는 백성 중에서 멸망 받으리라 하였고"그랬습니다. 

이 말씀은 신 18:15절 이하 특히 18-19절의 인용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선지자는 세례 요한에게 물었던 "그러면 네가 선지자냐?"라고 하는 의미의 선지자입니다. 정관사가 붙어 있는 선지자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말하는 선지자는 그리스도를 일컫는 말이었다는 것입니다. 

사무엘 이후의 선지자들 - 이것은 아주 포괄적인 언급입니다. 그러나 주된 언급은 사무엘로부터 시작된 바 다윗의 왕국을 세우시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언급일 것입니다. 

예를 들자면 삼하 7:12절에는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네 수한이 차서 네 조상들과 함께 잘 때에 내가 네 몸에서 날 자식을 네 뒤에 세워 그 나라를 견고케 하리라" 

이 말이 의미하는 바는 이 말을 듣고 있는 청중들에게 "너희는 선지자들의 자손이요 하나님이 너희 조상으로 더불어 세우신 언약의 자손"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아브라함 - 이와 같은 논증은 아브라함을 언급함으로 더욱 확실해 집니다. 아브라함과 맺은 약속 "땅위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받으리라"(창12:3; 22:18; 26:4)하셨고 하나님께서 그 약속의 성취로서 예수 그리스도를 '너희에게 먼저 보내셔서' 너희로 하여금 돌이켜 각각 그 악함을 버리게 하셨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유대인들이 받은 특권이 있다는 사실을 확인합니다. 그들은 분명히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먼저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것을 잘 순종하지 못한 것입니다. 뒷날 사도 바울을 통해서 하나님은 누구든지 믿음으로 말미암아 아브라함의 영적 자녀가 될 수 있음을 말씀해 주셨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이 설교를 듣는 청중이 누구였는가를 다시 확인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들은 거의가 유대인들이었고 그들은 지금 베드로 사도가 열거한 구약의 예언을 소유한 주인공들이었습니다. 그들은 누구보다도 그러한 예언들에 대해서 잘 알고 있었지만 바르게 이해하지 못해서 예언을 성취하는 자들이 된 것입니다. 

따라서 이들은 회개하고 돌이켜야할 필요가 있는 사람들이며 죄 없이함을 받아야 했습니다. 그래야만 새롭게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 설교의 모든 무게 중심은 회개하고 돌이켜 죄없이 함을 받는 것에 있습니다. 베드로 사도는 미문의 앉은뱅이가 일어난 사건을 본문으로 잡아서 구약의 예언들 즉, 고난받는 종, 모세와 같은 선지자, 다윗의 계통으로 오신 왕, 아브라함의 씨로 예수 그리스도를 소개한 후 이들이 왜 구원받아야 하는 사람들인가를 설득력 있게 제시하고 있는 것을 발견합니다. 


맺는 말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처음에 궁극적인 관심에 대한 이야기를 한 바 있습니다. 우리가 가진 궁극적인 관심은 우리의 1차 대화 소재가 될 가능성이 많다는 것이 우리가 내린 결론이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성령 충만한 베드로의 1차적인 관심은 사람들이 죄 없이함을 받는 것이며 새롭게 되는 날을 소유하게 되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성령 충만한 삶에 대해서 어느 정도 힌트를 얻을 수 있습니다. 사실 과거 성령 충만하기 전의 베드로는 이렇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성령 충만이란 모든 삶의 중심이 그리스도가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인이라면 마땅히 이러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여러분 이러한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보너스가 있습니다. 그것은 말씀을 깨닫는 은혜입니다. 날마다 그리스도를 묵상하고 착념하는 사람들에게는 말씀을 깨닫는 은혜! 그래서 말씀이 꿀송이 같다는 고백이 저절로 나올 수밖에 없다는 말씀입니다. 베드로 사도의 말씀인용과 전개는 얼마나 탁월한 것입니까? 그는 논리 훈련을 받은 사람도 아니고 말 그대로 무식한 갈릴리 사람이며 어부인데도 말입니다. 이것이 믿는 자들이 받는 보너스가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물어야 하고 제기해야할 질문은 이것입니다. 우리의 궁극적인 관심이 무엇인가? 우리는 무엇을 생각하고 살아가는가? 어떤 상황 앞에 닥쳐졌을 때 우리가 가장 먼저 하는 말이나 행동은 무엇인가? 하는 것 말입니다. 

여러분들의 마음속에는 무엇이 가득 차 있습니까? 우리가 받은 구원과 우리가 누릴 천국에 대한 소망으로 충만해지기를 축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충만해 지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날마다 우리가 가진 유쾌함이 하나님 앞과 사람 앞에서 드러나게 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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