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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생명보다 귀한 사명 (행 20:16-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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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보다 귀한 사명 (행 20:16-24)

주기철 목사님은 한국 교회가 낳은 순교자 중의 한 분입니다. 그는 김익두 목사님의 부흥회에 참석했다가 은혜를 받은 후 목회자의 길을 가게 되었습니다. 평양 산정현 교회에서 시무할 당시,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에 맞서 싸우던 중 1938년 검거되어 약 7년간 옥중생활을 하다가 1944년 4월 21일 47세를 일기로 순교하셨습니다. 

주기철 목사님은 ‘다섯 가지 나의 기원’이라는 제목으로 유언과 같은 설교를 하셨습니다. 
첫째 죽음의 권세를 이기게 해주시옵소서. 
둘째, 장기간의 고난을 견디게 해주시옵소서. 
셋째, 노모와 처자와 교우를 주님께 부탁합니다. 
넷째, 의에 살고 의에 죽게 해주시옵소서. 
다섯째 내 영혼을 주님께 부탁합니다. 

주기철 목사님은 자신의 목숨보다 주님께서 주신 사명을 더 소중하게 여기셨습니다. 주기철 목사님의 일사각오 신앙의 뿌리를 에스더나 다니엘 등 성경에 나오는 믿음의 선배들을 통해서 볼 수 있고 본문에 나오는 바울에게서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부르셨다고 확신합니까? 나의 생명이나 자존심보다 내게 주신 사명을 귀하게 여깁니까? 

그렇다면 다른 사람의 시선만을 의식하여 적당히 하거나 마음에 안 든다고 쉽게 포기할 수 없습니다. 우리 모두 바울을 본받고 믿음의 선배들을 본받아 일사각오의 믿음으로 주신 사명을 감당해야 합니다. 

사도행전 20장은 바울의 3차 선교여행의 귀환 경로가 소개됩니다. 드로아를 떠난 바울과 7명의 선교팀은 앗소에서 다시 만나 배를 타고 미둘레네로 가고, 거기서 떠나 이튿날 기오 앞에 이르고 그 다음날 사모에 이르고 그 다음날 에베소를 거치지 않고 아시아에서의 마지막 체류지인 밀레도에 도착하였습니다. 밀레도는 에베소 남쪽에 있는 항구입니다. 

바울이 에베소에 들르지 않은 것은 많은 성도들 때문에 오래 지체할 것 같았기 때문입니다. 그가 오순절 안에 예루살렘에 도착하려고 서두르는 이유는 마게도냐와 아가야 지방의 교회에서 마련한 연보를 예루살렘 교회에 전해줌으로써 민족과 지역을 뛰어넘어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온 교회가 하나 되기 원하는 열망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또한 오순절을 맞아 예루살렘에 모인 많은 사람에게 복음을 전하기 원했고 선교 여행의 놀라운 열매들을 예루살렘 교회에 보고하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밀레도에서 바울은 자신이 목회했던 에베소 교회에 사람을 보내어 장로들을 청합니다. 그랬더니 그들이 바울의 요청을 겸손하게 받아들여 밀레도까지 찾아옵니다. 바울이 에베소 장로들을 대상으로 말씀을 전하는데, 이는 사도행전에 기록된 그의 세 번째 설교입니다. 설교가 ‘첫날부터 지금까지’로 시작되는데 이는 약 3년에 걸친 에베소 사역을 가리킵니다. 

바울은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최선을 다해 사역했기에 장로들 앞에서 자신 있게 자신의 사역을 말할 수 있었고, 자신의 모습을 본받을 것을 기대합니다. 본문은 교회 직분자들에게만 주는 글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모든 성도들이 반드시 기억하고 실천해야 할 귀한 교훈을 담고 있습니다. 

바울은 가는 곳마다 환난과 핍박을 당했습니다. 다른 사람들 같으면 벌써 그만두었을 것 같은데 바울은 끝까지 사명을 감당하였습니다. 무엇이 바울로 하여금 그런 결단을 하게 하였을까요? 바울이 하나님을 택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그를 택하셨습니다. 그것도 바울이 하나님 보시기에 기특한 일을 많이 할 때 부르신 것이 아니라 예수 믿는 사람들이 미워 박해를 피해 도망간 성도들을 붙잡으려 다메섹까지 쫓아갔을 때 부르셨습니다. 

바울은 예수님이 인간을 구원하러 오신 구주라는 것을 꿈에도 생각지 못하였습니다. 도리어 조상들의 가르침과 율법에 대한 열심으로 예수 믿는 자들을 붙잡아서 옥에 가두거나 죽이는 것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으로 생각하였습니다. 

그런데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만난 체험이후 그는 회심하였고 자기를 이방인의 사도로 부르신 것에 대한 확신을 갖게 되었습니다. 전에는 율법에 대한 열심을 자랑하던 교회의 핍박자였으나 이후로는 주님과 주님의 몸 된 교회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조금도 아까운 것으로 여기지 않고 복음을 전하는 위대한 전도자가 되었습니다. 

소명은 하나님의 주권적인 부르심입니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삶의 다양한 영역으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그 부르심에 합당한 삶을 살 수 있을까요? 즉 가정, 직장, 학교 등 삶의 현장에서 어떻게 하나님의 거룩한 부르심에 응답할 수 있을까요? 

우리 중에는 사장도 있고 가정주부도 있습니다. 고용주도 있고 피고용인도 있습니다. 부모가 있고 자녀도 있습니다. 선생도 있고 학생도 있습니다. 우리의 사명이 무엇이든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는 자로서 “주께 하듯”(골 3:18-24) 섬김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에 제대로 응답하기 위하여 필요한 것은 사명에 대한 확신과 그 사명에 진실한 자세, 그리고 우리의 재능에 대한 인식입니다.


사역의 자세

바울은 철저하게 하나님 중심으로 사역했습니다. 하나님의 뜻이면 기꺼이 따를 각오가 되어 있었습니다. 바울은 자신의 사역을 정리하면서 믿는 자들이 어떤 자세를 가지고 섬겨야 할지를 가르쳐줍니다. 

1) 겸손 

고린도 후서 12장을 보면 바울은 자신에게 있는 육체의 가시를 없애달라고 주님께 세 번이나 간절히 기도하였습니다. 바울이 기도하면 앉은뱅이가 일어나고 귀신이 쫓겨나가고 죽은 유두고가 살아났습니다. 능력 많은 바울, 누구보다도 응답 받는 기도의 비결을 잘 알고 있을 바울이 기도하였으나 응답을 받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귀한 진리를 깨달았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약한데서 온전하여진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에게 가시를 주신 것은 그가 교만하지 않고 계속 하나님의 은혜에 머물도록 하기 위함이라는 것입니다. 

그 가시가 하나님의 사랑의 표시인 것을 비로소 깨닫고 바울은 크게 기뻐하였습니다. 가시의 내용은 사람마다 다르지만, 하나님이 주신 가시는 우리로 하여금 겸손하게 하고, 하나님께 부르짖게 하여 하나님의 은혜에 계속 거하게 합니다. 즉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고난을 주시는 것은 우리를 계속 사용하시기 위함입니다. 나는 연약하지만 주님이 능력 주시니 감당합니다. 나는 부족하지만 주님이 채워주시니 주의 일을 합니다. 내 잔이 넘치나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를 지속적으로 받는 성도의 자세입니다. 

바울의 고별 설교 가운데 겸손이란 단어가 눈길을 끕니다. 겸손은 고대 그리스-로마 문화에서 추구한 아름다운 덕목은 아니었습니다. 겸손은 종이나 가지는 자세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 섬기는 지도자로서 겸손을 추구했습니다. 겸손으로 번역된 원어를 직역하자면 ‘겸비한 생각’입니다. 이것은 높은 데 마음을 두지 않고 낮은 데 두며 복음을 위해 자신의 권리와 영광을 포기하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는 겸손하면 ‘나는 부족하다, 아무 것도 할 줄 모른다’라고 말하며 무조건 사양하는 것을 생각하기 쉽습니다. 성경이 말하는 겸손은 자기의 권리를 주장하거나 자기의 영광을 추구하지 않는 자세를 말합니다. 자기를 낮추는 겸손에는 희생이 반드시 따르게 마련입니다. 예수님이 겸손한 자세로 철저하게 섬김의 삶을 살았더니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이셔서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이 모두 무릎을 꿇게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겸손한 자에게 함께 하시고 은혜를 베푸십니다. 바울이 예수님의 겸손을 본받아 에베소 교회에서 모든 겸손으로 섬겼습니다. 이제 우리도 그 겸손을 본받아 섬겨야 합니다.


2) 눈물 

바울은 생명의 말씀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영혼을 대할 때마다 안타까움을 가졌습니다. 그런 슬픔과 그치지 않는 마음의 고통이 로마서 9:1-2에 잘 표현됩니다. 

“하나님 아버지, 내 동족은 이스라엘 백성입니다. 그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신분이 있고, 하나님을 모시는 영광이 있고, 하나님과 맺은 언약들이 있고, 율법이 있고, 예배가 있고, 하나님의 약속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예수님을 영접하지 않습니다. 만일 내 동족이 구원만 얻는다면 내가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떨어져 나가는 한이 있더라도 나는 괜찮습니다.” 

복음을 거부하는 동족 유대인들에 대한 안타까움이 바울로 눈물을 흘리게 하였습니다. 빌립보 교회를 위해서도 눈물을 흘린 적이 있습니다. “내가 여러분에게 여러 번 말하였고, 지금도 눈물을 흘리면서 말하지만, 많은 사람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원수로 살아가고 있습니다”(표준, 빌 3:18). 

눈물은 사랑의 표시입니다. 그런데 바울이 눈물을 흘리며 잃어버린 영혼들을 향하여 눈물짓는 것을 어디서 배웠습니까? 물론 주님입니다. “예수님은 세상에 계실 때 자기를 죽음에서 구원해 주실 분에게 크게 부르짖으며 눈물로 기도와 소원을 올렸고 경건한 복종으로 하나님의 응답을 받으셨습니다”(현대, 히 5:7). 

양들에 대한 뜨거운 애정, 영혼에 대한 뜨거운 관심, 이것이 목자의 마음입니다. 그 마음을 주님이 가지셨고, 그 마음을 바울이 본받았습니다. 바울은 아시아에서 삼 년 동안 밤낮 쉬지 않고 각 사람을 눈물로 훈계하였습니다. 여기서 ‘눈물’은 원어에는 복수형인 ‘눈물들’로 되어 있습니다. 

즉 사도 바울은 에베소 교회에서 목회할 때 많은 눈물을 흘렸음을 알 수 있습니다. 자신의 죄와 부족 때문에 흘린 눈물이 아니라 성도들을 위하여 흘린 눈물이며, 자신을 비방하고 음해하려는 자들 때문에 흘린 눈물입니다. 많은 눈물이 있어야 교회가 바로 되고 참된 목회가 됩니다. 이제 저와 여러분이 바울의 심정을 갖기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눈물에 약하신 분입니다. 성도들이 눈물을 흘리며 간구하는 것을 들으십니다. “여호와여, 나의 기도를 들으시고 나의 부르짖음에 귀를 기울이소서. 내가 울부짖을 때 나의 눈물을 외면하지 마소서”(현대, 시 39:12).


3) 인내 

마라톤에 참여한 선수가 오르막길이라 힘이 든다고, 더워서 땀이 난다고 천천히 걷거나 포기한다면 좋은 성적을 낼 수 없습니다. 경기에 임하는 선수가 어떠한 어려움 속에서도 인내함으로 목표를 향하여 달려가듯이 신앙의 경주에 나서는 성도 역시 '인내'가 필요합니다. 왜냐하면 성도가 경주해야 할 경주에는 많은 시험과 환란, 모진 핍박과 조롱 등 시련이 놓여 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그것을 영적 전투라고 부릅니다. 

엡 6:11, 마귀의 궤계를 능히 대적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으라. 엡 6:12,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에게 대함이라. 

히 12:1,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경주하며.”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우리의 모든 죄를 담당하시고 돌아가셨습니다. 인내로서 감당하실 수 있었던 것은 그의 고난을 통하여 하나님의 선하신 뜻이 이루어진다는 믿음을 있으셨기 때문입니다(히 11:2). 

이 고난이 끝나고 나면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시고 높이실 것을 소망 중에 바라보았기 때문입니다. 

갈 6:9,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피곤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 

예수님을 본받아 바울도 인내하였습니다. 바울은 온갖 시험을 참으며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신앙생활 제대로 해보려고 할 때 뜻하지 않은 일들이 벌어집니다. 가까운 사람에게 상처를 받기도 하고 사역의 방해를 받기도 합니다. 

그러나 성도들은 자기에게 주어진 신앙의 코스를 여전히 믿음으로 달려가야 합니다. 어떠한 어려움이 있어도 내게 주어진 이 경주를 끝까지 마치고야 말리라는 결단과 인내가 있어야 합니다. 인내는 분명 고통이요 힘겨운 것입니다. 그러나 사명을 인내로 감당할 때 하나님이 도와주십니다. 믿음은 인내를 만들어내고 우리를 성숙하고 온전하게 만듭니다(약 1:4). 


4) 성실 

바울은 복음을 전하다가 때로 위험에 처한 적도 많았습니다. 그러나 자신을 먼저 생각하느라 복음을 증거하는데 소홀히 하거나, 예상되는 핍박 때문에 용기를 잃고 사명을 중단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에베소에서도 사람들에게 유익이 된다면 공중 앞에서나 집에서나 장소를 가리지 않고 가르쳤습니다. ‘공중 앞에서’는 회당과 두란노 서원에서의 사역을 가리킵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회당에서뿐만 아니라 산과 들과 바닷가에서 무리들을 가르치시고 길 가시면서도 가르치시고 또 집에서 식사하실 때도 가르치신 것을 생각나게 합니다. 바울은 유대인이나 헬라인을 구분하지 않고 하나님께 대한 회개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증거했습니다.

26절에 보면 바울이 모든 사람의 피에 대하여 내가 깨끗하다는 고백을 합니다. 

무슨 뜻입니까? 에스겔 3장 17-19절을 보면“인자야 내가 너를 이스라엘 족속의 파수꾼으로 세웠으니 너는 내 입의 말을 듣고 나를 대신하여 그들을 깨우치라 가령 내가 악인에게 말하기를 너는 꼭 죽으리라 할 때에 네가 깨우치지 아니하거나 말로 악인에게 일러서 그 악한 길을 떠나 생명을 구원케 하지 아니하면 그 악인은 그 죄악 중에서 죽으려니와 내가 그 피 값을 네 손에서 찾을 것이고 네가 악인을 깨우치되 그가 그 악한 마음과 악한 행위에서 돌이키지 아니하면 그는 그 죄악 중에서 죽으려니와 너는 네 생명을 보존하리라.” 

선지자는 사람들이 듣든지 안 듣든지 하나님의 말씀을 남김없이 다 전해야 합니다. 만일 전하지 아니함으로 말미암아 사람들이 회개치 못하여 죄 중에 죽는다면, 하나님께서는 그 피값을 그 선지자에게서 찾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바울은 그런 선지자 의식을 가지고 만나는 사람들에게 열심히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였습니다. 

바울이 에베소에서 혼신의 힘을 다해 말씀을 전했기에 전도자로서는 심판의 책임이 없다는 말입니다. 말씀을 듣고 회개하면 구원을 받을 것이요, 말씀을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돌이키지 않으면 그 사람은 그의 죄로 인하여 죽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순종의 책임은 바울에게서 그 메시지를 들은 사람들에게 넘어갑니다. 

바울이 예수님을 철저하게 본받아 겸손하고 눈물을 흘리며 인내하면서 성실하게 말씀을 전할 수 있었던 이유가 무엇일까요? 

1) 성령의 인도하심

성령에 매였다는 것은 성령의 인도함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행 2:3절에 보면 성령에 충만한 사람은 성령이 시키는 대로 움직이는 사람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기 위하여 골고다에 오르셨습니다. 그 길은 성령이 이끄시는 길이었는데 고난의 길이었습니다. 바울도 예수님이 가신 고난의 길을 걸었습니다. “안디옥과 이고니온과 루스드라에서 내가 겪은 박해와 고난을 함께 겪었습니다. 나는 그러한 박해를 견뎌 내었고, 주께서는 그 모든 박해에서 나를 건져 내셨습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려고 하는 사람은 모두 박해를 받을 것”(딤후 3:11-12) 이라고 합니다. 

성령께서 바울에게 어느 도시에서나 결박과 환난이 있을 것을 미리 알려주셨습니다. 그렇게 하신 이유는 바울이 더욱 깨어서 하나님만을 의지하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바울은 두려워하기는커녕 하나님이 인도하시는 곳이면 어디든지 가겠다고 하는 굳은 결의를 보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처한 상황이 어렵습니까? 이런 상황에서 누구를 의지하시렵니까? 마땅히 의지할 분을 의지하면서 주님의 인도하심과 위로를 경험해야 합니다.


2) 생명보다 사명을 귀하게 여김

바울에게 있어 삶의 목표는 무엇입니까? 살든지 죽든지 어떤 상황에 처하든지 자기의 삶을 통하여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에베소 장로들에게 말해줍니다. “결박과 환난이 나를 기다린다 하시나 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증거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20:23-24) 않는다고 말합니다.

‘마친다’라는 말은 ‘완성한다’의 의미가 있습니다. 바울은 결박과 환난을 자신의 삶과 사명을 완성하는 것으로 보았습니다. 바울에게는 주님 안에서 품은 원대한 계획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예루살렘과 로마를 거쳐 세상 끝으로 여겨지는 스페인까지 이르러 복음을 전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설사 거기까지 이루지 못하고 예루살렘에서 무슨 일을 만나더라도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면 바울은 기꺼이 그것을 받아들이고자 했습니다. 목숨이 아깝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그런데 바울은 자기 생명보다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주신 사명을 더 귀하게 여깁니다. 

바울이 풍성한 사역의 열매를 거둘 수 있던 비결은 그가 큰 능력을 가졌거나 학식이 뛰어났다거나 또는 기도생활을 열심히 했다는데 있지 않습니다. 물론 이런 것들이 귀하고 사역에 필요한 요소이지만, 가장 중요하고 본질적인 것은 자기 목숨을 돌아보지 아니하고 복음을 전한 것, 곧 ‘죽으면 죽으리라’는 순교적 신앙을 가지고 복음을 전한 것입니다.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전 15:31)고 한 바울의 고백은 단지 영적인 의미에서 자기 부인이나 겸손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문자적인 의미에서 실제적인 죽음을 뜻하는 것이었습니다. 바울은 부활의 신앙을 가지고 날마다 죽음을 각오하고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했습니다. 사람들이 복음을 받아들일 것인가 받아들이지 않을 것인가 하는 결과에 신경을 쓴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말씀을 다 전하는데 혼신의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한 가지 주목해야 할 것은 바울은 자신이 전한 복음에 대해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이라고 말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은혜,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죄인들을 값없이 의롭다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 이것이 바울이 전한 복음의 핵심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은혜로 우리를 택하시고 그 은혜로 우리를 구속하시고 그 은혜로 살게 하신다는 겁니다. 

존 비비어가 쓴 순종이란 책에 이런 글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늘 이곳에서 저곳으로, 저곳에서 이곳으로 자꾸만 옮겨 다닌다. 은혜를 찾아, 역사를 찾아, 좋은 가르침을 찾아 찾아다니느라 바쁘다. 하지만 그들은 자라지 않는다. 지식은 늘지만 성장은 없다. 

시 92:18절에 하나님의 집에 심긴 자들은 번성하리라고 말한다. 식물을 자꾸 옮겨 심으면 그때마다 뿌리가 점점 작아진다. 뿌리가 작아지듯 옮겨 다니는 사이 우리 믿음도 작아져 버린다. 그러다가 열매가 없어지고 결국은 죽고 만다. 하나님이 무엇인가 할 일을 주시거든, 하나님이 이제 그만하라고 하실 때까지 계속하자. 끝까지 순종하자.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항상 나보다 남을 낫게 여기는 겸손함, 눈물을 흘리며 영혼을 사랑함, 어떤 형편과 처지에서도 인내함, 온 힘을 다하여 사명을 감당하는 성실함은 예수님의 모습이었습니다. 바울도 예수님을 본받아 그런 삶을 살았습니다. 

바울은 생명을 내건 복음의 전달자였습니다. 사명에 대한 분명한 확신과 자기 인생에 대한 진지한 각오가 있었습니다. 우리는 궁극적으로 주님 앞에 설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모든 일을 다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남은 것은 의의 면류관을 받는 일뿐입니다. 이것은 의로우신 재판장이신 주님이 재림하시는 날에 나에게 주실 것이며 나에게만 아니라 주님이 다시 오시기를 사모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주실 것”(딤후 4:7-8)라고 바울은 그의 마지막 서신에서 말합니다. 

바울과 같은 열정으로 하나님을 섬기고 이웃을 섬겨야 합니다. 나보다 남을 낫게 여기는 자세를 통하여 공동체의 하나됨을 이루어야 합니다. 주신 사명을 잘 감당하면서 주님의 마음에 합한 자로 주님의 칭찬과 상급을 받으시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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