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그리스도의 뜻을 따르는 교회 (골 3:1-11)

첨부 1


그리스도의 뜻을 따르는 교회 (골 3:1-11)


생명이 존재하기 위해서는 적어도 두 가지 조건을 충족시켜야 합니다. 먼저 성장해야 합니다. 성장하지 않으면 죽기 때문에 반드시 성장해야 합니다. 그러나 성장하는 것에도 한계가 있습니다. 그 성장하는 것을 멈춰야 할 때도 있다는 말입니다. 그래야 생명이 계속 이어질 수 있습니다. 식물의 경우도 열매는 맺지 않고 계속 성장하기만 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또 동물도 몸집만 지나치게 커질 것 같으면 환경 변화 같은 것에 적응하기가 어렵습니다. 공룡이 지구상에서 멸망한 것이 바로 좋은 예일 것입니다. 그리고 모든 생명을 생명답게 만드는 것이 무엇입니까? 본질입니다. 아무리 크게 성장해도 자기 정체성을 잃어버리면 더 이상 존재 의미가 없습니다. 그렇습니다! 모든 생명은 반드시 자기 정체성을 지켜야 합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를 교회답게 만드는 것이 무엇입니까? 교인 수가 많은 것입니까? 화려한 예배당 건물을 짓는 것입니까? 아무리 화려한 건물이 있고 구름 같이 많은 교인들이 모여들지라도 그 안에 복음이 없으면 그것은 교회가 아닙니다. 그렇습니다! 교회를 교회답게 만드는 것은 양이 아니라 질입니다. 교회가 크냐 작으냐 하는 것은 그다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진짜 중요한 것은 그 교회에서 복음이 제대로 선포되고 실천되고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요즈음 한국 교회가 왜 사람들로부터 손가락질을 당하고 있습니까? 교회가 자기 정체성을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때문에 한국 교회의 가장 시급한 과제는 자기 정체성을 회복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교회가 자기 정체성 회복을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합니까? 사도 바울은 그 대답을 오늘 봉독한 본문 말씀을 통해서 우리에게 들려 주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의 것을 찾으라.”(골 3:1) 그는 일찍이 로마서 6장 말씀을 통해서 세례에 대해서 말한 바 있습니다. 세례가 무엇입니까? 그렇습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사는 것이 세례입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죽는다는 것은 또 무슨 말입니까? 그가 아주 분명히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갈 5:24) 

사도 바울은 육체와 함께 그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박은 사람은 위의 것을 찾는 삶을 살아야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위의 것을 찾는 삶이란 아래의 것을 찾는 삶에 반대되는 삶입니다. 그가 뭐라고 말하고 있습니까? “위의 것을 생각하고 땅의 것을 생각하지 말라.”(골 3:2) 그렇다면 여기서 그가 말하는 땅의 것이란 도대체 무엇을 가리키는 것입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기 전의 삶을 총칭하는 말입니다. 그는 좀 더 구체적으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음란, 부정, 사욕, 악한 정욕과 탐심이 곧 땅에 있는 지체가 찾는 일이며 그것이 곧 우상 숭배라고 분명히 말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상은 우리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 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우리가 이미 죽었다고 선포했는데 이미 죽은 지체를 또 다시 죽이라고 말하는 까닭은 무엇 때문입니까? 여기서 우리는 그리스도인의 삶의 양면성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이미’와 ‘아직 아니’ 사이에 있는 존재입니다. 우리는 오직 믿음으로 구원을 받았고 은혜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아직 죄악이 가득한 세상에서 살고 있습니다. 비록 구원을 받았지만 아직도 죄의 유혹을 받으며 살아가지 않을 수 없다는 말입니다. 때문에 우리는 죄의 유혹에 빠져들지 않도록 주의해야 합니다. 주님도 일찍이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쳐 주시면서 분명히 말씀하시지 않았습니까?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고 다만 악에서 구하시옵소서.”(마 6:13 상반절) 

우리 그리스도인은 과연 어떤 사람입니까? 십자가를 바라볼 때 우리는 의인이라고 생각하게 됩니다. 주님이 이미 십자가 위에서 우리를 대신해서 죽으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지금 우리 자신을 보면 여전히 죄인입니다. 항상 죄의 유혹에 노출된 채 살아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십자가를 바라보면 구원을 받은 몸이지만 우리 자신을 보면 죄인이라는 말입니다. 우리는 죄인임과 동시에 의인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살아가야 하는 존재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구원을 받았지만 그 구원이 아직 완성된 것은 아닙니다. 때문에 우리는 ‘이미’와 ‘아직 아니’ 사이에 있다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여기서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계속해서 닮아가야 할 대상은 누구입니까? 지극히 당연한 말 같지만 우리는 창조주 하나님을 닮아가야 합니다. 애당초 그 귀한 형상대로 인간을 창조하신 창조주 하나님을 닮아가야 마땅하지 않겠습니까? 하나님을 닮아가되 하나님의 넓고 자비로운 마음을 닮아가야 합니다. 아울러 그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가야 합니다. 특히 그 주님의 사랑의 마음을 닮아가야 합니다. 그래야 비로소 진정한 그리스도인이라 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끝으로 사도 바울은 놀라운 선언을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닮아가고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삶을 사는 우리에게 있어서 그 어떤 차별도 있어서는 아니 된다고 분명히 말하고 있습니다. “거기에는 헬라인이나 유대인이나 할례파나 무할례파나 야만인이나 스구디아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 차별이 있을 수 없나니 오직 그리스도는 만유시요 만유 안에 계시니라.”(골 3:11) 

그 당시 유대인들은 자기들만 의인이요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자부심 하나로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이방인인 헬라인을 죄인과 동의어로 사용할 정도였습니다. 물론 이방인 중에도 유대교에 입교하는 사람들이 더러 있었습니다. 그들은 반드시 할례를 받아야 했습니다. 할례가 도대체 무엇입니까?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는 것을 공인하는 일종의 의식에 불과합니다. 하여간 할례자와 무할례자는 유대교인과 비유대교인을 구별하는 중요한 기준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들 사이에도 차별이 있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야만인과 스구디아인 사이에도 차별이 없다고 하고 있습니다. 또한 종과 자유인의 차별도 있을 수 없다고 하고 있습니다. 당시 로마 사회는 종과 자유인 사이의 신분 차별이 철저했습니다. 그런데 그는 인위적으로 설정된 사람과 사람 사이의 온갖 장벽의 철폐를 선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닮아가며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로 태어난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그 어떤 차별도 있어서는 아니 된다는 선언이 아닐 수 없습니다. 

사도 바울은 교회 안에 그 어떤 차별도 있어서는 아니 되는 이유를 교회의 머리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가 과연 어떤 분이신가 하는 것을 밝힘으로써 설명하고 있습니다. “오직 그리스도는 만유시요 만유 안에 계시니라.” 그렇습니다! 그것이 바로 차별하지 말아야 할 이유입니다. 그는 그리스도와 만물 사이의 관계를 보는 시각을 완전히 바꿀 것을 지시하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우리는 그리스도를 어떤 존재로 보았습니까? 예수를 믿는 사람들, 즉 교회와의 관계에 국한시켜 생각하지 않았습니까? 따라서 그리스도는 교회가 독점할 수 있는 그 어떤 존재로만 생각했습니다. 교회에 의한, 교회를 위한, 교회의 그리스도로 제한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이 뭐라고 말하고 있습니까? 그리스도는 만유시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가 그렇게 우주적인 존재시라면 그리스도의 구원 역사 또한 인간의 차원을 넘어 우주적인 차원으로 확장되어야 마땅하지 않겠습니까? 이제 우리는 그리스도를 말 그대로 만유의 구주로 믿고 그 뜻을 따를 수 있어야 합니다. 만유시요 만유 안에 계시는 그리스도를 분명히 알고 그 주님의 우주적인 구원 역사에 동참하는 삶을 살아야 하겠다는 말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더 늦기 전에 교회의 모습을 회복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교회인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사는 역사가 시작되어야 합니다. 더 이상 땅의 것을 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비록 땅에 살고 있지만 오직 위의 것을 생각하고 위의 것을 찾아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기 위해서 더 열심히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온유하고 겸손하신 그리스도의 모습을 닮아가야 하겠다는 말입니다. 우리 주위의 온갖 차별의 장벽을 다 걷어내고 참 사랑을 실천하는 가운데, 특히 소외된 지극히 작은 자들을 사랑으로 섬김으로 말미암아 교회의 머리이신 주님의 뜻을 이루어 드리는 충성스러운 주님의 제자들이 다 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