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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신령한 성도가 되자 (고전 3: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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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령한 성도가 되자 (고전 3:1-9)
 
  
1 형제들아 내가 신령한 자들을 대함과 같이 너희에게 말할 수 없어서 육신에 속한 자 곧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 아이들을 대함과 같이 하노라 
2 내가 너희를 젖으로 먹이고 밥으로 아니하였노니 이는 너희가 감당하지 못하였음이거니와 지금도 못하리라 
3 너희는 아직도 육신에 속한 자로다 너희 가운데 시기와 분쟁이 있으니 어찌 육신에 속하여 사람을 따라 행함이 아니리요 
4 어떤 이는 말하되 나는 바울에게라 하고 다른 이는 나는 아볼로에게라 하니 너희가 육의 사람이 아니리요 
5 그런즉 아볼로는 무엇이며 바울은 무엇이냐 그들은 주께서 각각 주신 대로 너희로 하여금 믿게 한 사역자들이니라  
  
6 나는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으되 오직 하나님께서 자라나게 하셨나니 
7 그런즉 심는 이나 물 주는 이는 아무 것도 아니로되 오직 자라게 하시는 이는 하나님뿐이니라 
8 심는 이와 물 주는 이는 한가지이나 각각 자기가 일한 대로 자기의 상을 받으리라 
9 우리는 하나님의 동역자들이요 너희는 하나님의 밭이요 하나님의 집이니라 
 
경기도 고양시의 거룩한 빛 광성 교회가, 지난 해 창립 15주년을 맞아 여론조사 기관인 G. H. 코리아에 의뢰한 ‘교인의식 설문조사’의 결과에 따르면, 응답자 463명 중 가장 많은 66.3%가 ‘성도의 신앙 성숙’을, 교회가 최우선적으로 추구해야 할 목표로 꼽았다고 합니다. ‘교회부흥과 성장’이라는 응답은 4.1%에 그쳤다고 합니다. 그리고 “현재 한국교회의 모습이 우려스러운가?”라는 질문에, 응답자 55.9%는 ‘매우 그렇다.’ 35.9%는 ‘조금 그렇다.’고 답해, 91.8%가 우려의 입장을 나타냈습니다. 

그러나 “한국교회의 부정적인 모습이 개인 신앙 성장에 저해가 되느냐?”는 설문에는, 6.5%가 ‘매우 그렇다’, 20.9%가 ‘조금 그렇다.’고 답했으며, 18.4%는 ‘그저 그렇다.’, 34.2%는 ‘별로 그렇지 않다.’, 18.6%는 ‘전혀 그렇지 않다.’로 대답해, 한국교회의 부정적인 모습이, 개인의 신앙 성장과는 관련이 별로 없는 것으로 나타났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한국 교회의 어둡고 부정적인 면 때문에, 나 개인의 신앙이 성장하지 못한다고 핑계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오늘의 본문은 신앙인격의 성숙에 관한 말씀입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 전서 1-2장에서 ‘사람의 지혜’와 ‘하나님의 지혜’를 비교하면서, 사람의 지혜는 하나님의 지혜를 미련하게 여기나, 그러나 하나님의 지혜야말로 진정한 참 지혜인 것을 밝혔습니다. 이제 사도 바울은 한 걸음 더 나아가, 사람의 일과, 하나님의 일을 비교하면서, 그가 말하려고 하는 주제인 ‘분쟁의 문제’를 해결하려고 합니다. 분쟁의 근본 원인은 사람의 일을 과중하게 평가하기 때문인데, 사도 바울은 오늘 본문 말씀을 통하여, 모든 목회자들은 결국 하나님의 일을 하는 하나님의 일군들임을 상기시키면서, 우리의 주의와 집중을 인간 지도자가 아닌, 하나님께 둘 것을 가르쳐 줍니다.

1절에 “형제들아 내가 신령한 자들을 대함과 같이 너희에게 말할 수 없어서, 육신에 속한 자, 곧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아이들을 대함과 같이 하노라.”고 했습니다. 여기에 보면 아주 대조적인 종류의 사람들이 나오는데, 곧 ‘신령한 자’와 ‘육신에 속한 자’입니다. 고린도 교회 안에는 다양한 교인들이 있었으나, 사도 바울은 크게 세 종류의 교인들로 분류하고 있습니다. 

1. 육에 속한 사람

2:14절에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들을 받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것들이 그에게는 어리석게 보임이요, 또 그는 그것들을 알 수도 없나니, 그러한 일은 영적으로 분별되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육에 속한 사람은 교회는 다니지만, 하나님의 계심도 믿지 아니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지 아니하며,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지 않고, 성령이 계신 것도 믿지 아니하는 교인을 말 합니다. 그러니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육에 속한 사람을 자연인

(φυχ?κο?-natural man)이라고도 하며, 구원받지 못한 자를 말합니다. 이런 교인들의 특징은, 성령의 일을 받지 아니 합니다. 육에 속한 사람은 복음을 받아드리지 않습니다.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하는 자가, 바로 육에 속한 사람들의 특징인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자신의 마음이 다른데 빼앗겨 있거나, 아니면 자신을 더 신뢰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경고가 들리지 아니하는 것입니다. 

1912년 세계최대의 해난사고가 일어나, 513명의 승객과 승무원이 사망했습니다. 바로 당시 영국의 최대 호화 유람선 타이타닉호의 침몰 사건입니다. 이 배는 침몰하기 직전에 무려 5번이나 경고를 받고, 6번째 “빙산을 조심하시오!” 라는 경고 전문이 왔을 때에는 귀찮다는 듯이 “조용히 해, 나는 바쁘단 말이야” 하고는 “하나님도 이 배는 가라앉게 할 수 없다.”고 선장은 코웃음 쳤다고 합니다. 그러나 불과 35분 뒤에, 이 배는 빙산과 충돌하여 바다 속에 가라앉고 말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육체의 본능만을 따라 살면 파멸의 빙산에 부딪치니, 인간들에게 제발 주의하라고 경고하지만, 현대인들은 자신을 너무 신뢰하기 때문에, 셀 수 없는 하나님의 경고를 무시하다가 결국은 파멸을 당하고 마는 것입니다. 

2. 육신에 속한 사람 

육신에 속한 자(σαρκινοι?)란, 육으로 만들어진 인간, 즉 재료적인 면에서 육적으로 된 자연인과는 구분되는 말입니다. 자연인이라고 하면 말할 것도 없이 중생하지 못한 인간, 본래적인 인간, 본성적인 인간을 뜻합니다. 그런데 3절에 나오는 ‘육신에 속한 자’(σαρκικο?)란, 윤리적인 면, 도덕적인 면에서 육적으로 사는 사람을 의미합니다. 사람은 아무리 거듭나고, 성령을 따라 산다 할지라도, 여전히 재료적인 면에서 육의 사람임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윤리, 도덕적인 면에서까지 육신에 속한 자, 곧 육신의 지배를 받고 사는 인간이 되면 아니 됩니다.

사도 바울은 육신에 속한 그리스도인을 가리켜 어린아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어린아이 같은 고린도 교인들을, 젖으로 먹이고 밥으로 아니 했다고 했습니다. 어린아이들이란 말에는 좋은 의미와 나쁜 의미가 있습니다. 좋은 의미로는 “악에는 어린아이가 되라.” “갓난아이들 같이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는 말씀 등에서, 무사기하여 순전하고 겸손한 아린아이의 좋은 성품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본문에서 고린도 교인들이 어린아이와 같다 함은, 영적으로 유치함을 뜻하는 좋지 않은 의미로 쓰이고 있습니다. 어린아이의 특징은 자기가 하기 싫으면 안합니다. 그러나 어른은 자기가 하기 싫어도 해야 될 일은 합니다. 어린아이는 자기 입맛에 맞지 않으면 먹지 않습니다. 그러나 어른은 입맛에 안 맞아도, 건강에 좋다면 뭐든지 먹습니다.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성숙치 못한 그리스도인들은, 자기에게 맞지 아니하거나 자기 수준을 넘어서는 것은, 감당치 못하고 시험에 듭니다. 그래서 신앙이 자라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육신에 속한 그리스도인의 특징 가운데 하나는, 자기중심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미국의 클린턴 대통령이 부인 힐러리 여사와 함께 시골 길을 가다가, 한 주유소에 들러서 기름을 넣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주유소에서 기름을 주유하고 있던 사람이, 대학 시절에 힐러리와 아주 친하게 지내던 보이 프렌드였습니다. 너무 반가워서 둘은 오랫동안 정담을 나누었습니다. 

그리고 다시 차를 타고 가는 중에 클린턴이 말했습니다. “여보, 만일 당신이 저 남자랑 결혼을 했더라면, 지금쯤 당신도 주유소에서 기름을 넣고 있었을 것이요.” 한마디로 신랑 잘 만났다는 거지요. 그때 힐러리 여사가 빙그레 웃으면서 “아니죠. 그렇게 됐으면 저 친구가 대통령이 되었겠지요.”라고 했다고 합니다. 이렇듯 사람들은 자기중심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자기중심적인 삶은, 아직도 육신에 속한 사람이라고 할 수 밖에 없습니다.

모든 그리스도인은 누구나 성령의 모태를 통하여 중생의 과정을 거쳐야 합니다. 성령으로 말미암아 중생했을 때, 이 사람은 영적으로 신생아요, 갓난아이라 할 수 있습니다. 제가 신학도 시절, 일본인 ‘아베 테스’라는 평신도 선교사가 총신대학교를 방문한 적이 있었습니다. 당시 70세 고령에 완전한 백발이었는데, 자신의 나이가 13살이라고 소개하더라고요. 이유인즉 예수 믿고 중생 한지 12년이 되었기 때문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어린아이는 귀엽고 사랑스럽습니다. 그러나 어린아이 상태가 언제까지 계속되면, 결코 귀엽고 사랑스러울 수가 없습니다. 여기 20세 된 사람이 있다고 합시다. 그런데 일어서지도 못하고, 앉지도 못하고, 숟가락질도 못하고, 떠먹여주어야 한다면, 불쌍한 자식은 될지언정, 사랑스러운 자식은 될 수 없는 것이지요?

마찬가지로 중생한 신자라면, 반드시 성장이 있어야 합니다. 달이 가고 해가 갈수록 믿음이 무럭무럭 성장하는 성도들은, 주님께도 기쁨이 되겠지만, 주의 종들에게도 얼마나 큰 기쁨과 위로가 되는지 모릅니다. 만일 주의 종들이 성장하는 성도들의 모습을 전혀 볼 수 없다면, 그의 사역에서 맛보는 기쁨과 위로는 반감되고 말 것입니다. 그러므로 3년 5년 10년이 되어도 변화가 없고, 성장이 없는 그리스도인이라면, 그의 영적 부모를 몹시 슬프게 하는 신자들인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오래 동안 영적으로 유치한 어린아이와 같은 고린도 교인들, 때문에 많은 슬픔을 맛보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고후 2:4절에 “내가 마음에 큰 눌림과 걱정이 있어, 많은 눈물로 너희에게 썼노니.”라고 했습니다.

3. 영에 속한 사람

영에 속한 사람이란 ‘신령한 자’(πνευματικο?)라고 하는데, 본래는 성령을 받아서 거듭난 자를 의미하지만, 본문에서는 영적으로 장성한 신자를 의미합니다. 영에 속한 사람은 육체의 소욕을 따라 살지 않습니다. 육체의 소욕이 무엇입니까? 갈 5:19-21절에 “육체의 일은 분명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우상 숭배와 주술과 원수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 냄과 당 짓는 것과, 분열함과 이단과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요”라고 했습니다. 영에 속한 사람은 성령을 따라 살고, 성령의 열매를 맺는 사람을 말합니다. 

성령의 열매가 무엇입니까?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라고 했습니다. 영에 속한 사람의 또 다른 특징이 무엇입니까? 고전 2:15절에 “신령한 자는 모든 것을 판단하나, 자기는 아무에게도 판단을 받지 아니하느니라.”고 했습니다. 영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뜻을 잘 분별하기 때문에, 사람들에게 판단을 받지 않습니다. 세상 사람들에게 비난 받거나, 지탄받을 일을 하지 아니한다는 말입니다. 결국 영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따르는 자입니다. 성경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고, 그 뜻에 순종하며 삽니다. 오늘 우리들도 영에 속한 사람들이 되어, 하나님의 뜻을 잘 분별하고 순종하는 온전한 성도, 즉 성숙한 그리스도인들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미국의 ‘로리 베스 존스’라는 기업경영 컨설팅 회사의 여사장이, <JESUS C.E.O > 즉 ‘최고 경영자 예수’ 라는 책을 펴내어, 세계적인 베스트셀러가 되었습니다. 거기에 보면 “예수님은 내면의 닻을 갖고 계셨다.” 라는 말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다른 사람에게 의존하거나, 외부적인 장치로부터 동의를 얻지 않았다. 

예수님의 행위는 제자들의 생각에 기반을 두지 않으시고, 가이사가 웃든지 찡그리든지 어떠한 경우에도 개의치 아니하였다. 예수님은 어떤 상황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내면의 닻’을 갖고 계셨다.> 오늘 나의 내면의 닻은 무엇입니까? 누가 뭐라고 해도 흔들리지 않는 나를 지탱시켜줄 수 있는, 나의 내면의 닻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또한 예수님의 마음만이 나를 이 세상 거친 세파에 떠내려가지 않게 하고, 소망의 항구에 나를 붙들어 매어놓을 줄 믿습니다. 

백화점 왕 ‘존 와나 메이커’가 한번은 기자들과 인터뷰를 하게 되었습니다. 와나 메이커는 자신이 지금까지 투자한 일에 성공하지 못한 일이 없다고 했습니다. 그러자 한 기자가 물었습니다. “당신이 투자한 일들 중에, 가장 기억나는 일이 어떤 것이 있습니까?” 와나 메이커는 “내가 투자한 일들 중에 가장 기억나는 일은, 내가 열세 살 때 2달라 50센트로 성경을 산일입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때 기자 중 한 명이 “나도 성경을 샀는데 왜 성공하지 못합니까?”라고 물었습니다. 와나 메이커는 “나는 성경 속에 있는 말씀을 따랐고, 당신은 따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라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우리 모두가 성령 충만을 받아 영에 속한 사람이 되어,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하며 사는 성숙한 그리스도인이 되기를 바랍니다.

고린도 교인들이 영적으로 어린아이와 같이 유치하고, 육신에 속한 자가 되어, 육적 원리를 좇아 사는 한 가지 증거가 무엇입니까? 3절에 “너희는 아직도 육신에 속한 자로다. 너희 가운데 시기와 분쟁이 있으니, 어찌 육신에 속하여, 사람을 따라 행함이 아니리요.”라고 했습니다. 고린도 교인들은 안타깝게도 육적으로 행하는 자들이었는데, 그 증거가 그들끼리 시기하고, 분쟁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시기와 분쟁은 유치한 사회에서 하는 것이고, 성화 되고 영화된 높은 수준의 성도들에게는, 있을 수 없는 일들인 것입니다. 그래서 보통 사람들의 수준보다 훨씬 더 높게 살아야 할 그리스도인들이, 오늘날 세상 사람들과 똑같이 살며, 똑같이 행동한다면, 이것은 너무도 부끄럽고 너무도 죄스러운 일인 것입니다. 

고린도 교회의 분쟁의 핵심이 무엇입니까? 4절에 “어떤 이는 말하되, 나는 바울에게라 하고, 다른 이는 나는 아볼로에게라 하니, 너희가 육의 사람이 아니리요.”라고 했습니다. 고린도 교회의 분쟁의 초점은, 교인들이 단순한 인간에 불과한 지도자에 대한 자랑 때문에 생겨난 데 있었습니다. 불가에서 흔히 쓰는 말 가운데 “손가락으로 달을 가리키면 달을 봐야지, 손가락은 왜 보는가? 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처럼 베드로, 바울, 아볼로 혹은 루터나 칼빈은 우리가 바라보아야 할 신앙의 대상이 아니라, 그 신앙의 대상인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손가락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고, 우리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 바라보아야 합니다. 5절에 “그런즉 아볼로는 무엇이며, 바울은 무엇이뇨? 저희는 주께서 각각 주신대로 너희로 하여금 믿게 한 사역자들이니라.”고 했습니다. 아볼로나 바울이 아무리 훌륭해도, 그들은 하나님의 종이요, 하나님이 쓰시는 도구에 불과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만 높여야지, 그의 종들을 따라가며 당파를 만드는 것은 큰 잘못이란 것입니다. 

6-7절에 “나는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으되, 오직 하나님께서 자라나게 하셨나니, 그런즉 심는 이나 물주는 이는 아무것도 아니로되, 오직 자라나게 하시는 이는 하나님뿐이니라.”고 했습니다. ‘나는 심었고’라는 말씀은, 사도 바울이 최초로 복음의 씨를 고린도 교회에 뿌린 것을 말합니다. 그리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으되’ 라는 말씀은, 사도 바울이 복음의 씨를 뿌리고 설립한 고린도 교회에 가서, 아볼로가 성경을 가르치며 양육한 것을 말합니다. 

‘오직 하나님께서 자라나게 하셨나니’라는 말씀은, 밭에서 일할 때 어떤 사람은 씨를 뿌리고, 또 어떤 사람은 물을 주지만, 곡식이나 초목을 성장시키는 일은 하나님께서 하시듯이, 신앙의 성장도 열매도 하나님께서 맺게 하신다는 말씀입니다. 인간은 많은 일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절대로 생명을 창조할 수가 없습니다. 인간의 힘으로는 아직도 피 한 방울 만들 수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전도자가 말씀의 씨를 뿌리고 가르치고는 하지만, 그를 거듭나게 하시고, 성장케 하시는 분은 하나님께서만이 하실 수 있는 일인 것입니다. 사실은 인간이 심은 씨앗도 하나님의 것이며, 땅과 물도 하나님의 것입니다. 

그리고 씨를 뿌리고 가꾸고 하는데 사용된 우리의 힘마저, 하나님께서 주신 것입니다. 그러니 복음의 씨를 뿌린 자나, 물을 주듯이 양육한 인간을 높이지 말고, 오직 하나님만 높이고 찬송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전도자들에게 주어지는 위로와 보상이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8절 에 “심는 이와 물주는 이가 한가지이나, 각각 자기가 일한 대로 자기의 상을 받으리라.”고 했습니다. 이러한 보상의 원리는 성경에 분명히 나타나 있습니다. “각 사람의 행한 대로 갚으리라.” 계 22:12절에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내가 줄 상이 내게 있어, 각 사람에게 그가 행한 대로 갚아 주리라.”고 했습니다. 

모든 사람의 모든 일은 각기 보답을 받습니다. 그래서 복음의 씨를 뿌린 전도자가 받을 상급이 있고, 물을 주듯이 가르치고 양육한 자가, 각각 자기의 일한 대로 자기의 상을 받게 됩니다. 그리고 9절에 “우리는 하나님의 동역자들이요,”라고 했는데, 전도자들이 하나님의 동역자라고 하는 말씀은, 얼마나 위대하고, 영광스러운 말씀이며, 얼마나 위로가 되는 말씀입니까?

1988년 46세의 폴란드의 철도회사 직원이 차량을 연결하려다가, 머리를 다쳐 혼수상태에 빠져 움직이지도 못하고 말도 못했습니다. 19년이 지나 65세가 된 ‘얀 그르제부스키’ 씨가 의식을 회복했습니다. 눈을 떠보니 세상이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공산주의가 무너졌고, 자유의 세상이 되어 있었습니다. 그는 “내가 혼수상태로 들어갔을 때는, 가게에 홍차와 식초뿐이었습니다. 고기는 조금씩 배급해 주었고, 휘발유를 사려고 장사진을 이루고 있었습니다. 지금 깨어나 보니 길거리에 가득 찬 사람들이, 휴대전화를 들고 전화를 하며 걸어 다니고, 상점에는 물건들이 가득 차 있었습니다. 

그런데 한 가지 놀라운 사실은, 사람들이 다 자기 밖에 모르는 사람들로 변해있었습니다.”라고 술회했습니다. 세상이 문명화 되면 사람들의 인격도 진보할 줄 아는데, 반대로 점점 자기 밖에 모르는 사람들이 됩니다. 갈수록 이기주의화 되어가는 세상에서, 예수님을 닮아간다는 게 그리 쉬운 일은 아닙니다만, 우리 모두 성령의 능력으로, 점점 예수님을 닮아가는 신령한 성도들이 되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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