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내가 세상을 이기었다 (요 16:25-33)

첨부 1


내가 세상을 이기었다 (요 16:25-33)


경주에서 진 토끼와 이긴 거북이 아들들이 만났습니다. 토끼 아들이 거북이 아들에게 경주를 제안했습니다. 토끼는 아버지의 실패를 거울삼아 열심히 결승점까지 갔습니다. 그는 거북이가 보는 데서 멋지게 골인하려고 거북이를 기다리다가 나무에 사과가 먹음직스럽게 달려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것을 따먹는 순간 덫에 걸려 나무에 매달렸습니다. 거북이가 도착해 보니 토끼가 덫에 걸려 있었습니다. 거북이는 토끼를 풀어주며 토끼에게 먼저 골인하라고 했습니다. 토끼는 감동하며 손을 잡고 함께 골인하여 공동우승을 했습니다. 

전편의 교훈은 자만과 거드름을 조심하라는 것이고, 후편은 유혹에 조심하라는 교훈입니다. 우승을 갈취도 독차지도 하지 말라는 교훈입니다. 경쟁사회 속에서 너무 승리에 집착하지 말자. 승리만이 전부가 아니다. 승리보다 더 소중한 것은 사랑이다. 사랑은 양보와 항상 함께 웃고, 함께 기쁘고, 함께 나눈다. 우리의 삶이 토끼와 거북이의 후편 삶이 됐으면 합니다

마태복음 4장, 5장, 6장을 가리켜서 산상수훈이라고 부릅니다. 산상수훈에서는 너희가 들었으니 행하라는 말씀으로 결론을 맺습니다. 듣고 행하지 않는 사람은 모래 위에 집을 짓는 사람과 같아. 바람이 불고 비가 오면 다 떠내려가고 말 것이다. 그러나 듣고 행하는 사람은 반석 위에 집을 지은 사람과 같아서 비가 오고 바람 불어도 끄떡없게 될 것이다. 내가 이제 하늘의 진리를 너희들에게 가르쳐 주었으니 이제 들은 대로 행하라고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런데 마찬가지로 요한복음 14장, 15장, 16장을 다락방에서 주신 말씀 그래서 누상보훈이라고 흔히 말하는 바 이 누상보훈의 결론이 바로 16장 30절로 33절입니다. 이 결론은 너희가 세사에서 환난을 당하겠지마는 걱정하지 말아라 두려워하지 말아라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다 그런 말씀을 이제 주십니다.

먼저 생각할 것은 기도하라는 말씀입니다.
이것을 비유로 너희에게 일렀거니와 때가 이르면 다시는 비유로 너희에게 이르지 않고 아버지에 대한 것을 밝히 이르리라 그 날에 너희가 내 이름으로 구할 것이요 내가 너희를 위하여 아버지께 구하겠다 하는 말이 아니니 이는 너희가 나를 사랑하고 또 내가 하나님께로부터 온 줄 믿었으므로 아버지께서 친히 너희를 사랑하심이라 내가 아버지에게서 나와 세상에 왔고 다시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가노라 하시니 제자들이 말하되 지금은 밝히 말씀하시고 아무 비유로도 하지 아니하시니  우리가 지금에야 주께서 모든 것을 아시고 또 사람의 물음을 기다리시지 않는 줄 아나이다 이로써 하나님께로부터 나오심을 우리가 믿사옵나이다 

갓난아이들을 보면 참으로 신기한 것이 많습니다. 그저 살겠다고 발버둥치는 모습들이 그렇게 신기할 수가 없습니다. 조금만 불편해도 무언가 조금만 마음에 들지 않아도 그저 울어 보챕니다. 어머니의 형편 같은 것은 상관도 하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아이가 하자는 대로만 해 주다가는 전혀 버릇없는 아이로 자라고 맙니다. 그래서 아이들을 잘 양육한다고 하는 것이 결코 쉬운 일만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습니다. 그런데 아이가 점점 자라면서 젖을 먹다가 이유식을 먹기 시작하고 이윽고 밥을 먹게 되는 과정에서 보면 어느 순간부터는 자기 손으로 먹겠다고 덤벼듭니다. 

물론 그러다보면 입으로 들어가는 것보다 엎지르는 것이 더 많지마는 그래도 점차 익숙해지는 것을 보게 됩니다. 처음에는 뒤집지도 못하던 것이 어느 순간부터 기기 시작하다가 이윽고는 무언가를 집고 일어서기를 계속합니다. 그러던 어느 순간부터는 드디어 혼자 힘으로 한 발 두 발 걷기를 시작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렇게 헤서 아이는 점차 자기 힘으로 움직이고 자기 힘으로 살아가는 법을 배워나가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네 신앙생활은 어떠한가요? 아이는 자기가 배가 고프든가 무언가가 불편하든가 하면 우는 것으로 자기 의사표현을 합니다. 조금 기분이 좋기라도 하면 방긋하며 웃어서 보는 이의 마음을 기쁘게도 합니다. 생각해 보세요. 아이라고 해서 생각이 없는 것이 아니랍니다. 아이도 우리가 몰라서 그렇지 자기 딴에는 다 생각이 있단 말입니다. 보세요. 며칠 전 딸네 집을 들렀습니다. 딸이 허리를 많이 아파해서 물리치료라도 받게 하고픈 마음에 어린 손녀딸 잠깐 봐줄 테니 병원 다녀오라고 그래 손녀딸을 외할머니에게 맡겨놓고 병원으로 갔습니다. 

제가 딸네 집에 들어가 보니 외손녀가 외할머니가 안아주는데도 불구하고 마구 울어대고 있습니다. 아무리 달래도 그냥 울어대니 그것처럼 난감한 일도 없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그렇게 울던 아이가 제가 집에 들어가니까 제 얼굴을 힐끗 보더니 울음을 뚝 그치고 할머니 품으로 파고듭니다. 그래도 저보다는 할머니가 더 믿을만하다 생각이 든 모양입니다. 그리고는 언제 울었느냐는 듯 가끔 제 눈치만 보면서 잘 놉디다. 그러다가 할머니가 피곤해서 잠시 눈을 감으니까 슬그머니 저한테 기어와서 제 손을 잡는 것 아닙니까? 보세요. 아이도 다 생각이 있다고요. 

이 어린 아이도 자기가 기댈만한 언덕이 어딘가를 압니다. 그리고 그 안전하게 기댈만한 곳을 찾는데 우리는 어떻습니까? 지금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하시는 말씀이 바로 그것입니다. 지금까지는 내가 너희들과 함께 있었다. 내가 너희를 위해 모든 것을 다 베풀었다. 너희를 위해 내게 중보자가 되어 주었다. 하지만 말이다. 앞으로는 그럴 필요가 없다. 너희가 직접 내 이름으로 아버지 앞에 기도하면 된다. 왜냐하면 나는 너희를 떠나 아버지께로 갈 것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주님이 말씀하십니다. 지금까지는 예수님께서 하나님과 제자들 사이에서 중보 기도자가 되어 주셨습니다. 대언자가 되어 주셨습니다. 그러나 앞으로는 너희가 두려워 할 것이 아니라 내 이름 즉 예수의 이름으로 직접 하나님 아버지께 기도를 드리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히브리서 7:25에 보면 “그러므로 자기를 힘입어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들을 온전히 구원하실 수 있으니 이는 그가 항상 살아 계셔서 그들을 위하여 간구하심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롬 8:34에도 보면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고 말씀합니다. 또한 롬 8:26은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고 하여 성령께서도 우리를 위한 중보자로서의 역할을 감당하신다고 말씀합니다. 

그러니까 우리들에게는 두분 하나님 즉 성령 하나님과 성자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한 귀한 중보자가 되어 주신다고 하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모릅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혼자 버려져 있는 것이 아닙니다. 아무도 나를 돌아보는 사람이 없는 것 같아도 항상 하나님의 눈은 사랑하는 자녀된 우리들에게 향하여 있다고 하는 것을 우리는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주님이 우리의 모든 일상적인 기도까지도 대신해 주신다는 말로 자칫 잘못 이해하여 그렇다면 나는 아무런 기도도 할 필요가 없다. 

주님이 다 내 대신 기도해 주신다. 그러니 나는 주님께만 매달려서 그냥 불로소득을 얻듯이 하여도 된다는 그런 생각을 해선 안 됩니다. 물론 부모가 자녀들을 위해 필요한 모든 것을 공급해 주고 준비해 주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모는 자녀가 필요한 것을 부모에게 요청해 주기를 바랍니다. 물론 육신의 부모는 자녀들의 마음을 완전하게 다 알지는 못합니다. 그래서 아이가 무엇 때문에 힘들어 하고 무엇을 하고 싶어 하고 무엇을 갖고 싶어하는지 무엇을 먹고 싶어하는지를 놓칠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 아버지는 우리의 속 깊은 것 까지도 다 아신단 말입니다. 주께서 우리를 아는 것이 내가 나를 아는 것보다 더 잘 아신단 말입니다. 요한 일서 2:1에도 보면 “나의 자녀들아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씀은 너희로 죄를 범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만일 누가 죄를 범하여도 아버지 앞에서 우리에게 대언자가 있으니 곧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시라”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혹시 죄를 범하게 되었을 때 그 죄를 범한 나를 위해서 하나님 보좌 우편에서 주님이 우리의 대언자로서 하시는 일은 내 죄를 위해 십자가에 대신 죽어 주신 예수께서 나를 위한 중보자가 되어 주시고 대언자가 되어 주신다는 이야기요 또한 우리의 연약함을 돕는다는 이야기이지 일체의 기도를 우리를 대신해서 해 주신다는 말씀이 아닙니다. 

그러기에 일상적인 기도 우리의 모든 필요를 따라서 주님 앞에 구하는 기도는 우리가 해야 될 우리의 몫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나의 필요 가족의 필요 이웃의 필요 교회의 필요 국가의 필요를 하나님 앞에 날마다 구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주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문에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 라고 기도하라 하셨는데 이는 날마다 우리에게 있어야 될 것들 내 삶에 영육 간에 필요한 것들뿐만 아니라 우리들에게 필요한 것들 그러니까 이웃들에게 마땅히 있어야 될 것들 교회와 나라에 마땅히 있어야 될 것들 하나님 나라를 이루어 나가기 위해서 있어야 될 것들을 주 앞에 기도하라는 말씀입니다. 

물론 우리가 기도하는 것만 주님이 응답하시는 것은 아닙니다. 때로는 우리가 미처 기도하지 못한 것까지라도 주님은 허락하여 주십니다. 그래서 에베소서 3:20~21에서 “우리 가운데서 역사하시는 능력대로 우리가 구하거나 생각하는 모든 것에 더 넘치도록 능히 하실 이에게 교회 안에서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이 대대로 영원무궁하기를 원하노라 아멘” 하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있어 기도하라고 하신 주님의 말씀대로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고 다만 악에서 구하시옵소서” 하는 기도와 더불어 용서와 사랑의 실천을 위한 기도 그리고 일상에 필요한 모든 것들이 우리에게 있기를 위해서 날마다 하나님 앞에 엎드리는 하나님의 사람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다음으로 생각할 것은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고 하는 약속의 말씀입니다.
14장에서는 성령의 내주를 말씀하셨습니다. 예수께서 떠나신 뒤에도 제자들만 혼자 남는 것이 아니라 그들 속에 성령이 들어와 내주하시게 될 것이다. 또 성자가 성령을 통해서 내주하실 것이요 성령과 성자를 통해서 성부 하나님이 너희들 속에 내주하실 것이다. 그래서 성부, 성자, 성령 삼위 하나님이 내주하심으로 너희가 평안함을 얻게 될 것인데 이 평안함은 세상이 주는 평안과는 다르다. 

그리고 나서 15장에서는 주님과 우리의 관계는 내주의 관계다. 예수는 내 안에 계시고 너희는 주 안에 거하는 내재적인 관계 내주의 관계가 이루어지는 것이요 그럴 때 너희들과 다른 사람사이의 관계는 사랑의 관계가 될 것이다. 그러므로 사랑하라 이것이 나의 계명이다. 그런데 그럴 때 너희는 사회 속에서는 환난을 당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나서 이제 16장에 와서는 내가 떠나면 성령이 너희들에게 오시게 될 것이다. 성령 강림의 예고를 하시고 그 다음에 내가 떠나도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나는 다시 부활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나서 이제는 시간이 됐다. 떠나가자 이제 떠나가는데 점점 내가 붙잡히게 될 시간이 가까워 온다. 이제 내가 사로잡히게 되면 너희들은 다 나를 두고 도망하게 될 것이다. 그래서 동서 사방으로 다 흩어지게 될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혼자 있는 건 아니다. 아버지께서 언제나 나와 함께 계신다고 말씀을 하십니다. 

사실 우리 신실한 그리스도인이라면 고독이라고 하는 것이 있을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임마누엘 하나님이 언제나 나와 함께 계시는데 무슨 고독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존 번연이 12년 동안 감옥생활을 하는데 그러나 그는 오히려 감옥에 갇혀 있는 12년 동안 말로 다할 수 없는 은혜를 체험하고 계시를 받고 환상을 보고 영감을 받아서 천로역정이라고 하는 위대한 책을 쓰게끔 되었습니다. 바울 사도도 감옥에 갇혀 있는 동안 오히려 깊은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들어가게 되고 그래서 그곳에서 옥중 서신이라고 불리는 에베소서 빌립보서 골로새서를 기록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놀라운 기적을 많이 일으켰던 엘리야 선지자는 그러나 끊임없이 이어지는 죽음의 위협 속에 그만 살 희망조차 잃어버리게 되었을 때에 그러나 주의 인도하심을 따라 시내산에 이르게 되었고 아무도 없는 혼자 버려진 것과 같은 그 상황 속에서 하나님의 세미한 음성을 들을 수가 있었습니다. 사도 요한은 어땠습니까? 저는 밧모섬에 귀향살이를 하고 있었습니다. 모든 다른 제자들은 다 순교의 피를 흘리며 죽어갔는데 혼자서만 살아 있습니다. 

저에게는 죽음조차도 허락되지를 않았습니다. 야 나야 말로 정말 버려진 자로구나. 하나님이 나 같은 것은 순교자가 될 가치조차 없다고 생각하시는 모양이로구나. 그러기에 이렇게 버려져 귀향살이로 생을 마치게 되는 것 아니겠는가 한없는 비탄에 빠질 수도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혼자 버려진 것같은 바로 그곳에서 요한은 놀라운 하나님의 이상을 보게 됩니다. 그리고 그 신비를 우리들에게 기록한 글이 바로 요한 계시록인 것이요 하나님이 여전히 나를 버리시지 않았다. 

하나님은 오히려 침묵하시며 나를 지켜보고 계셨어. 사실은 주님이 여전히 변함없이 나와 함께 계셨어 하는 것을 깨닫게 되었을 때 그는 다시 펜을 들어 주옥과 같은 편지들 요한 일, 이, 삼서를 써서 교회들에 보내고 다시 펜을 들어 요한복음 지금 우리가 살펴보고 있는 이 글들을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 글을 쓰고 있는 요한의 감격을 우리 음미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아마도 주님이 이 말씀을 주실 때만 해도 요한 스스로도 건성으로 들었을 것입니다. 아니 어쩌면 그 깊은 뜻을 알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밧모섬의 유배 생활 중 임마누엘 하나님을 삶 깊이 깨닫게 되었을 때 비로서 이 주님의 말슴의 참된 의미를 피부로 느끼면서 이 글을 쓰고 있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제자들이 다 주님을 버리고 도망간다고 해도 아버지께서 항상 나와 함께 계신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비록 세상에 내 곁에 아무도 없는 그런 지경에 놓여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고 하더라도 그러나 사실은 아버지 하나님이 나와 함께 계시다고 하는 이 사실을 우리는 깨달을 수 있어야 됩니다. 하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예수님과 함께 계셨던 것처럼 저와 우리 모두 가운데 함께 계신 임마누엘 하나님이십니다. 언제나 우리와 동행하시되 우리 앞서 행하시며 우리의 형편과 사정을 알아서 우리의 필요를 따라 채워 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광야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만나와 메추라기로 먹여 주시던 하나님, 반석을 터뜨려 물을 먹여 주시던 하나님, 이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하지만 우리가 궁금해하는 것이 또 하나 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는데 왜 우리에게는 그토록 어렵고 힘든 일들이 많이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사실 어떤 분들을 지겹도록 고통 가운데 살아갑니다. 그렇다고 어떤 벗어날 희망이 보이는 것도 아닙니다. 그런 일들이 끊임없이 계속된다고 할 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신앙을 지키고 기뻐하며 감사하며 살아갈 수 있는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까요? 

하지만 여기서 우리가 한 가지 기억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너희가 심은 그대로 거두리라고 하시는 말씀입니다. 너희가 육체를 위하여 심으면 육체의 것으로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으면 성령으로 말미암아 열매를 맺게 될 것이라는 말씀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내가 심은 것은 생각지 않고 어째서 이런 어려움이 내게 있는가 어째서 내게는 이런 일들만 있는가 하면서 탄식을 합니다. 하지만 탄식하고 불평과 원망으로 심어서 거둘 수 있는 것은 망하는 일밖에 없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왜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하고 광야에서 망했습니까? 그것은 그들이 감사할 줄 모르고 항상 원망만 한 까닭입니다. 보십시오. 원망과 불평을 심으면 거두는 것은 망하는 것뿐이요 고통뿐이라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감사와 찬양을 심으면 영광과 존귀와 부귀와 장수와 평안을 거두지만 불평하고 원망하고 시비함으로 거둘 수 있는 것은 멸광과 좌절뿐이요 고통뿐이라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그렇다면 왜 우리들에게 그런 고통의 날들이 있는가 하면 바로 우리 연약함을 깨닫도록 하기 위함이요 그런 고통 가운데서도 함께 하시며 지키시는 주님을 깨닫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보십시오. 바울이 3차 전도 여행을 마치고 예루살렘으로 돌아갑니다. 그런데 성령께서 저에게 알게 하시기를 예루살렘에 가면 너를 기다리는 것이 있는데 그것은 환난과 핍박이다. 이게 무슨 말씀입니까? 그러니까 너 가지 말라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그런 핍박 가운데서도 내가 너를 지켜 주겠다. 내가 너와 함께 하겠다. 그러니 너는 담대하라. 
지금 주님이 제자들에게 주시는 말씀도 마찬가지입니다.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할 것이나 담대하라 내가 너희와 함께 하겠다. 너희를 혼자 버려두지 않겠다고 하시면서 봐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어. 그러니 너희도 이길 수 있어.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하면 담대한 마음으로 기도하도록 하려므나. 그 기도가 무엇입니까? 바로 아버지의 품에 안기는 것입니다. 아버지의 손을 잡는 것입니다. 나는 아버지만 믿습니다 하는 것입니다. 집을 나갔던 아들이 어려움이 생기니까 깨닫게 된 것이 무엇입니까? 자기가 아버지의 품을 벗어났다고 하는 것이 잘못임을 깨달았던 것입니다. 그리고 자기가 스스로 그 길에서 벗어나려고 온갖 모진 일을 다 했어도 자기 힘으로는 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그가 한 일이 무엇입니까? 아버지께로 돌아가자.

그렇습니다. 우리의 기도가 무엇입니까? 우리와 함께 하시는 아버지의 품에 안기는 것이 곧 기도입니다. 하나님께 나의 아픔을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나의 힘듦을 알려드리는 것입니다. 나좀 붙들어 주세요. 나 좀 도와주세요. 아이가 혼자 놀다가도 무언가 놀라거나 힘들거나 무섭거나 하면 엄마에게로 달려오지 않습니까? 아니 그 전에 엄마 하고 부르지 않습니까? 

주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겠다고 하시는 말씀이 우리의 삶에서 핍박을 없애 주겠다는 말씀이 아닙니다. 고통을 없애 주겠다는 뜻이 아니라 고통 가운데 내가 너와 함께 하겠다는 것입니다. 내가 함께 네 고통을 짊어지겠다는 말씀입니다. 네 고통을 내가 나누어지겠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주님께 우리의 어깨를 내어 드리십시오. 내 아픔을 아뢰란 말입니다. 불평을 하면 그 불평을 하는 순간 내 마음이 그리고 내 삶이 불평스러운 것으로 도배가 되고 맙니다. 왜 그렇습니까? 

어느 마을에 고지식한 농부가 살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그는 읍내에 있는 어떤 음식점을 찾아갔습니다. 그 음식점은 개구리 요리를 전문적으로 하고 있었습니다. 농부는 음식점 주인에게 이렇게 물었습니다. 
“실례합니다. 제가 개구리 수천 마리를 한꺼번에 잡아올 수 있습니다. 그러면 그것들을 좀 사주시겠습니까?” 
음식점 주인은 의아스러운 듯이 그에게 물었습니다. 
“사주는 것은 별문제가 아닙니다. 그런데 어디서 그 많은 개구리를 잡아올 수 있습니까?”
농부는 대답을 했습니다.

“예, 우리 집 밭에 딸린 작은 연못이 하나 있습니다. 그 속에는 개구리들이 가득 차 있습니다. 아마도 개구리들이 수만 마리가 살고 있을 것입니다. 그 녀석들이 밤낮 없이 울어대는 통에 시끄러워서 살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제가 이번 기회에 다 잡아버리려고 합니다.” 
음식점 주인은 알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농부는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는 연못 속에 있는 개구리들을 몽땅 다 잡아버리기 위해서 양수기를 동원했습니다. 그는 양수기로 연못 속의 물을 퍼 올리기 시작했습니다. 

며칠 뒤에 농부는 다시금 읍내의 음식점 주인을 찾아왔습니다. 그는 멋쩍은 듯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죄송합니다. 제가 생각을 잘못했습니다. 우리 밭의 연못 속에는 겨우 개구리 두 마리가 있었을 뿐입니다. 그 두 마리가 그렇게 시끄럽게 울어대리라고는 미처 상상을 못했습니다.” 
그렇습니다. 두 마리의 개구리가 문제입니다. 어느 모임이든지 두 사람만 불평을 해 대보십시오. 정신이 없어집니다. 그 모임의 분위기를 완전히 망쳐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부정은 너무나도 쉽게 전염이 되기 때문입니다. 부정적인 말, 불평하는 말을 우리는 쉽게 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다른 사람에게 쉽게 그것이 전염되기 때문입니다. 다른 사람의 신앙에 불이익을 주기 때문입니다. 

백설공주와 우거지를 비교해 보십시오. 백설공주가 겉으로 보기에는 그럴 듯하고 순진해 보입니다. 그러나 실상은 문제가 많습니다. “백”방으로 “설”쳐대는 “공”포의 “주”둥이기 때문입니다. 그 한 사람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마음의 상처를 받습니다. 그런 사람은 도무지 도움이 되지를 않습니다. 우리는 그런 사람을 가까이해서는 안됩니다. 부정은 쉽게 전염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거지는 그와 정반대입니다. 겉보기에는 수수합니다. 그러나 실상은 어떻습니까? “우”아하고 “거”룩하고 “지”성미가 넘칩니다. 이런 사람은 조용합니다. 겸손합니다. 조용히 자기의 일에 충실합니다. 우리는 이런 사람을 늘 가까이해야 할 것입니다. 

더 나아가 우리는 우리의 말이 항상 감사의 말, 믿음의 말이 되도록 하여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 말에 권능이 있기 때문입니다. 너희 말이 내 귀에 들린 대로 내가 시행하리라고 주님이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니까 불평을 터뜨리면 더 큰 불평거리가 열매 맺습니다. 하지만 그러기에 더욱 주님이 나와 함께 하심에 감사하고 찬양하면 그 불평거리가 감사거리로 바뀌더란 말입니다. 그러므로 언제 어디서 무엇을 하든지 어떤 형편에 있든지 간에 주님을 바라보시며 임마누엘 하나님의 놀라우신 은혜를 체험하는 성도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마지막으로 주님은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말씀하십니다.
“이것을 너희에게 이르는 것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두려워하지 말라.”는 말이 성경에 365번 나옵니다. 일 년을 365일 “두려워하지 말라.”는 말씀은, 우리 인생길에 어떤 어려움이나 장애물도 없을 테니 두려워하지 말라는 얘기가 아니라,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 인생길을 걸으시면서 갈 길이 험난할 때에도 계속 앞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돌보아 주시기 때문입니다. 
찰스 코우만이란 사람의 이야기입니다. 

그는 애벌레가 나비가 되기 위해서 고치 구멍을 꿇고 나오는 광경을 긴 시간 관찰하고 있었습니다. 나비는 작은 고치 구멍을 뚫고 나오려 몸부림을 치고 있었습니다. 코우만은 긴 시간 애를 쓰고 있는 자비가 안쓰러워서 가위를 가져다가 고치 구멍을 조금 뚫어주었습니다. 나비는 고치에서 쉽게 빠져 나왔습니다. 그는 이제 나미가 화려한 날개를 펼치면서 창공을 날아다니겠지 하고 기대하고 있었는데 나비는 날개를 질질 끌며 바닥을 왔다 갔다 하다가 죽어버리는 것이었습니다. 그 나비는 땅을 박차고 하늘을 향해 날아갈 만한 힘을 갖지 못했던 것입니다. 나비는 작은 고치 구멍을 빠져 나오려 애쓰는 가운데 날개 힘을 키우게 되어 있는데, 코우만이 값싼 동정으로 그 기회를 제거해 버린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를 믿기 때문에 세상으로부터 환영을 받기보다는 알게 모르게 저들의 비난거리가 되고 또 이런 저런 이유로 인해서 당하게 되는 어려움들이 참 많이 있습니다. 남들처럼 꾀를 부릴 수도 없습니다. 내가 잘되기 위해서는 상대방을 적당히 속이기도 해야 되는데 그럴 수도 없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주님이 세상을 이기었기 때문입니다. 
이 예화는 고통이 생에 왜 필연적이며, 성장 과정의 한 부분인지를 알려주는 사례입니다. 
고통을 통해서 하나님과 진정한 관계를 맺을 수 있다는 말이 무슨 의미를 갖는 지 아십니까?
삶에 고통이 없다면 과연 우리는 어떻게 살아갈 수 있을까요? 과연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모시며, 이 세상은 우리가 영원히 머물 수 있는 곳이 아니요. 여인숙에 불과하다는 생각을 가지고 살지는 않을 것입니다. 

누가복음 15장에 나오는 돌아온 탕자의 비유에서 집을 떠난 둘째아들이 만약 굶주림의 체험을 하지 않았다면 집으로 돌아올 생각을 전혀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가지고 간 돈을 엄청스럽게 많은 돈을 벌었다면 아버지가 그리웠겠습니까? 돈으로 부족한 것 없이 먹고 살면서 아버지 집에서는 상상도 못할 신나는 삶을 살았다면 아버지의 품이 그리웠겠습니까? 먹을 것이 없어 돼지들이 먹는 짬밥이 아니라 산해진미로 진수성찬으로 날마다 호의호식하는 생활을 했다면 “아버지 집에서는 하인들도 배부르게 먹고 산다는 생각”을 할 수 있었겠습니까?

그 아들이 집으로 돌아온 것은 배가 고팠기 때문입니다. 그 아들이 아버지가 그리웠던 것은 가진 것이 다 떨어졌기 때문입니다. 그 아들이 아버지가 그리웠던 것은 아버지만이 이 난국을 해결해 줄 수 있는 유일한 분이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 아들이 아버지가 그리웠던 것은 자기는 아직도 아버지의 아들이라는 자랑스러운 존재임을 망각하지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 아들은 하루하루 산다는 것이 죽은 것보다 못한 처절한 고통스러웠기에 고통을 통해서 하나님 아버지께 마음을 열게 된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에게 돌아오게 되는 것도 고통 때문입니다. 고통 앞에서 우리 자신이 얼마나 무능한지를 깨닫고, 또 고통 앞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이 별로 없다는 것을 깨달을 때 하나님께 살려 달라 외치는 것입니다. 이렇게 고통은 세상사에 정신을 뺏기고 있는 인간들을 일깨워 하나님과의 진정한 관계를 재정립하도록 도와주는 도구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이 고통을 해결할 수 있겠습니까?
고통을 해결할 것인가에 대답은 간단합니다. 

우리는 고통을 해결할 수 없습니다. 슬프게도 고통은 해결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고통은 받아들이느냐 받아들이지 않느냐 하는 문제이지, 해결하느냐 해결하지 못하느냐 하는 문제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고통은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고통을 받아들일 때 우리는 고통 안에서 쉴 수 있게 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고통을 받아들일 때 고통 한복판에서도 평화를 누리게 됩니다. 어려운 삶 속에서도 희망을 갖게 된다. 하지만 고통을 받아들이지 않을 때 우리는 절망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 고통은 끊임없이 우리를 괴롭힐 것입니다. 고통을 가슴에 품고 살아간다는 것은 예수께서 우리에게 당부하신 말씀, “누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기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합니다.”를 실천하는 위대한 성도가 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십자가를 지고 목적지를 향해 걸어가고 있었습니다. 주위를 보니 다른 사람들도 십자가를 지고 가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십자가를 지고 가시는 예수님의 모습도 보였습니다. 지고 가는 십자가가 다들 커서 그런지 모두가 땀을 뻘뻘 흘리며 지고 가고 있었습니다. 이 사람도 자기의 십자가를 열심히 지고 가려고 했지만, 시간이 갈수록 무거워져 도저히 감당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예수님께 청했습니다. 
“예수님, 이 십자가가 저에게는 너무나 벅차고 무거우니 조금만 잘라주십시오.” 
예수께서는 기꺼이 그 사람의 요구대로 그가 진 십자가의 밑 부분을 잘라주었다. 
“그래, 이만하면 되겠느냐?” 

훨씬 가벼워진 십자가를 지고 걸어가면서 예수님께 고맙다는 인사까지 했습니다. 그런데 얼마 후 그는 다시 예수께 십자가를 조금만 잘라 달라고 했습니다. 예수께서는 이번에도 두말없이 그의 부탁대로 잘라 주었습니다. 이제 그의 십자가는 땅에 끌지 않아도 될 정도로 가뿐하고 작아졌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자 다시 무거움을 느끼자 그는 다시 예수께 가서 마지막 부탁이니 아주 짧게 십자가를 잘라 달라고 했습니다. 예수께서는 그의 부탁대로 십자가를 잘라주었는데, 이제는 하도 작아서 십자가를 지고 가는 것이 아니라 손가락으로 뱅글뱅글 돌릴 수 있는 정도가 되었습니다. 그는 콧노래를 부르고 휘파람을 불면서 십자가를 가지고 갔습니다. 그러면서 땀을 뻘뻘 흘리며 십자가를 지고 가는 이들을 보며 미련하다는 생각까지 하게 되었습니다. 

“나처럼 주님께 십자가를 잘라 달라고 할 것이지, 자기들이 뭐 성인이라고.” 
한참을 걸어가니 깊은 골짜기가 나타났는데 그 골짜기에는 다리가 없었습니다. 그 때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각자 자기가 지고 온 십자가를 다리 삼아 놓고 건너가십시오. 남의 십자가는 사용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의 십자가는 너무 작아서 걸쳐볼 생각도 할 수 없었습니다. 염치없지만 그는 앞서 가는 예수님을 소리쳐 불렀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과 다른 일행은 너무나 멀리 가 그의 절망적인 소리는 가 닿지도 못하고 메아리만 되돌아올 뿐이었다고 합니다. 그 사람은 멀리 가 계시는 예수님을 향하여 울부짖습니다. 

“예수님! 너무 하십니다!”
혹 우리가 그 사람처럼 “주님! 너무하십시다!” 라는 말을 하는 신앙생활을 하고 있지는 않는지요?
10명의 불평꾼들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믿음의 사람 여호수아와 갈렙은 새로 자라난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끌고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 가나안 땅을 정복합니다. 어떻게 그게 가능했을까요? 그들은 승리의 주님이 함께 계심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니 그들은 우리의 밥이라”
그러기에 그들을 향해 하나님이 말씀하십니다. 

“네 평생에 너를 능히 대적할 자가 없으리니 내가 모세와 함께 있었던 것 같이 너와 함께 있을 것임이니라 내가 너를 떠나지 아니하며 버리지 아니하리라”
그렇습니다. 어린 다윗은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으로 나아가 골리앗을 물리쳤습니다. 어떻게 그가 그렇게 할 수 있었을까요? 여호와 닛시 승리의 하나님이 함께 계심을 그는 믿었습니다.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으로 네게 가노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그렇습니다. 그러기에 주 안에서는 우리가 이기지 못할 일이 없습니다. 
혹시 지금 어떤 어려움이 여러분들에게 있습니까? 담대하시기 바랍니다. 아무리 험한 고통과 시련이 여러분에게 있다고 하더라도 아무리 풍랑이 험하게 휘몰아친다고 할지라도 염려할 것이 없습니다. 능력의 주님이 함께 하시기 때문이요 주님은 세상을 이기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이 믿음으로 오늘을 살아가며 풍랑 속에서도 주님만 바라보고 걸어가는 성도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교회라는 말이 복음서에서는 마태복음 16장에서 처음 베드로의 신앙고백과 더불어 나타납니다. 그 고백의 장소는 가이사랴 빌립보입니다. 갈릴리에서 북쪽으로 약 45분쯤 자동차를 타고 올라가면 헐몬산 기슭의 바니아스라는 곳에 이릅니다. 헐몬산 자락에서 나오는 이곳의 풍부한 물은 시내를 이뤄 갈릴리 호수로 흘러 들어갑니다. 거기서 조금만 더 올라가면 가이샤랴 빌립보란 곳에 이르게 됩니다. 본래 이곳 주민들은 풍요와 다산의 신인 바알신을, 헬라계 거주민들은 산림과 야수의 신인 판신을 섬겼습니다. 당시 헤롯왕은 로마정권에 아부하기 위해 로마황제 숭배 신당을 세워두었다고 합니다. 이것은 이 장소가 당시 우상의 땅이었음을 시사합니다. 

왜 예수님은 제자들을 이곳까지 오게 했을까요? 3년간의 제자훈련이 거의 마감돼 가는 시점에서 주님은 제자들을 이 의미있는 장소로 데리고 오셔서 졸업종합고사를 치르게 하셨습니다. 그때 출제하신 문제 중 하나가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라는 것이었습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이같은 베드로의 대답에 대해 예수님은 “복이 있다”는 칭찬과 더불어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알게 하신 것”이라 하셨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바로 이것입니다. 이 신앙고백을 통해서 예수님은 자신의 교회를 세울 것임을 보이셨습니다. 이것을 위해서 주님은 이 땅에 오셨던 것입니다. 베드로의 고백을 통해서 예수님이 바알신과 판신, 그리고 로마황제와는 비교가 되지 않는 하나님의 아들이심과 더불어 이 신앙을 고백하는 교회공동체는 신들과 로마황제와 비교되지 않는 존귀한 존재라는 것을 선포하시려는 의도가 계셨을 것입니다. 
이런 면에서 주님의 교회는 주님의 승리를 경축하는 공동체요, 자유케 하는 열쇠꾸러미가 맡겨진 공동체인 것입니다. 이 공동체는 사도행전 2장에서 발견됩니다. 

예수의 수난과 십자가의 죽으심, 부활, 그리고 승천 후에 성령의 강림으로 역사에 출현된 공동체입니다. 그리고 주님의 교회는 음부의 권세를 이기고 묶여있는 영혼들을 풀어내어 자유케 하는 교회, 즉 주님의 사역을 재현하는 교회였습니다. 주님께서 제자들을 이끌고 오셔서 시험을 치르신 장소, 그리고 장차 세우시고자 하시는 교회에 대한 설계도를 발표하신 장소가 바로 가이샤라 빌립보입니다. 오늘 우리 교회가 나아가야 할 자리가 바로 그 자리입니다. 그리고 우리 모두 주님께서 말씀하신 교회에 대한 그 음성을 다시 들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 자신을 다시 살펴야 합니다. 우리가 바로 그 주님의 교회인지를 말입니다.

승리의 주인이 되시는 주님이 말씀하시기를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하시는 것입니다. 이 담대함으로 세상을 이기는 성도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