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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너희가 내 안에 거하면? (요 15: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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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가 내 안에 거하면? (요 15:1-12)


같은 크기의 묘목이나 같은 종자의 곡식이라 할지라도 심긴 위치나 토양에 따라 성장하고 열매를 맺는데 큰 차이를 나타내게 됩니다. 이러한 현상은 식물만이 아닙니다. 사람의 경우도 마찬가집니다. 내가 어디에 처하여 살아가는가 하는 것은 그 사람의 장래에 중대한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인류의 조상인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의 말씀을 떠나 사탄의 편에 서서 사탄의 유혹을 따라 선악과를 먹었습니다. 그 결과 에덴동산의 행복은 산산조각이 나고 말았습니다. 뿐만 아니라 자손만대에 무서운 원죄를 유산으로 남겼습니다. 그 죄악의 쓴 뿌리는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습니다. 그 까닭에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께서 속죄 제물로 오셔야 했습니다. 

이렇게 우리의 죄 값을 담당하시고자 이 세상에 오신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시기 전 말씀하시기를“내 안에 거하라”(요한복음 15:4)“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요한복음 15:5)“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요한복음 15:7) 하셨습니다. 이렇게 거듭 거듭 “내 안에 거하라”하셨습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 거한다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일입니다. 그 곳은 세파에 시달린 지친 심령들이 쉴 수 있는 유일한 안식처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태복음 11:28). 하셨습니다.

정글 같은 치열한 삶의 경쟁에서 상처받은 우리 영혼이 쉴만한 진정한 안식처는 오직 주님의 그늘 밖에는 없습니다. 주님 외에는 세상 그 어디에도 없습니다. 이 소중한 삶의 이치를 깊이 깨달았던 다윗 왕은 고백하기를“여호와는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요새시요 나를 건지시는 자시요 나의 하나님이시요 내가 그 안에 피할 나의 바위시요 나의 방패시요 나의 구원의 뿔이시요 나의 산성이시로다.”(시편 18:2)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주안에 거하는 것은, 어린 아기가 어머니의 품안에서 안식하는 것과 같습니다. 또한 긴 항해에 지친 선원들이 항구에 정박하여 새 힘을 얻으며 바닥난 생필품을 다시 선적하며 출항을 준비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내 안에 거하라, 내 안에 거하라”거듭 말씀하셨습니다. 

1. 주안에 거한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요? 

주안에 거한다는 것은 성경의 계명을 지키는 것을 말합니다. 본문 10절 말씀에“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 같이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거하리라”하셨습니다. 계명이라 하면 너무 광범위하여 구체적으로 무엇을 가리키는지 얼른 알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은 성경 66권의 방대한 내용을 한 마디로 요약하셨습니다. 그것은 사랑의 실천입니다. 본문 12절에“내 계명은 곧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하는 이것이니라.”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사랑을 본받으라는 것입니다. 사랑하되 서로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 사랑받기만 기대하지 말고 서로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서로 사랑하려면 상대방이 지니고 있는 모습을 그대로 인정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가정에서도 그렇습니다. 한 예로, 퇴근한 남편이 양말을 벗을 때 자꾸 뒤집어 벗어냅니다. 아내가 뒤집힌 양말을 씻을 때 그 양말을 바로 뒤집으면서 이를 두고 짜증을 내며 아내의 속까지 뒤집힐 필요는 없습니다. 그럴 바에야 그 양말 바로 뒤집지 말고 뒤집힌 그대로 씻으면 됩니다. 그 다음은 남편이 알아서 할입니다. 

이처럼 사람들은 각자의 독특한 개성과 습관이 있습니다. 그것은 다른 것 일뿐 틀린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다른 것을 틀린 것으로 착각할 때가 많습니다. 자기 자신의 생각을 표준으로 여기고 그 잣대에 의하여 다른 사람을 판단하기 쉽습니다. 이것은 착각입니다. 이러한 생각 까닭에 갈등이 생기고 분쟁이 일어나게 됩니다. 아무 것도 아닌 것 때문에 가장 소중한 사랑을 잃게 됩니다. 이 얼마나 어리석고 비생산적인 일입니까? 진리가 아닌 것 때문에 진리가 손상을 입습니다. 이러한 경우를 가리켜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하루살이는 걸러내고 약대는 삼키는도다”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택한 민족인 이스라엘 사람들이 예수님을 배반하고 십자가에 못을 박아 죽인 원인이 무엇입니까? 자기들이 정한 관습을 예수님께서 따르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좀 더 자세히 말씀드리면 예수님이 안식일을 바로 지키지 않는다는 것이었습니다. 예로, 안식일에 병을 고치시는 것, 안식일에 제자들이 밀밭 사이로 지나가다가 시장한 제자들이 밀 이삭을 잘라 비벼 먹었습니다. 이것을 본 이스라엘 사람들은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될 노동을 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안식일을 범하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 어디에도 그것을 노동이라 명시한 곳이 없습니다. 

그런데도 예수님이 안식일을 범했다고 하는 것은 유대인 스스로 정한 규율에 위배되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그들의 관례 일뿐 성경적인 것이 아닙니다. 자기들이 정한 관습을 따르지 않는다 하여 주님을 미워했으며 끝내 죽였습니다. 자기들의 습관을 따르지 않는다 하여 성경 최고의 계명인 사랑의 법을 어겼습니다. 사람을 살려야할 사명을 받은 종교 지도자들이 도리어 사람을 죽였습니다. 가장 정성스럽게 주님을 섬겨야할 사람들이 배반하고 죽였습니다. 왜 그랬습니까? 자기들의 습관을 절대적인 것으로 착각했기 때문입니다. 비 진리 까닭에 진리를 짓밟았습니다. 비 본질 까닭에 본질을 버렸습니다.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도 이러한 어리석음을 범할 가능성이 많습니다. 이처럼 자기의 생각만이 절대적인 것으로 착각하는 까닭에 가정의 평화가 깨어지고, 교회의 화평이 깨어지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이것이 성경 최고의 진리인 사랑의 법을 어기고 맙니다. 그러므로 진리가 아니면 상대방의 모습을 그대로 인정해야 합니다. 이것이 삶의 지혜요 사탄의 유혹을 이기는 방법입니다. 그것은 다른 것일 뿐 틀린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다른 것을 틀렸다고 단정하면 그것은 범죄의 시작입니다. 이에서 판단과 미움이 싹트고, 분쟁이 야기되고, 단결을 해치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주된 적이 무엇인지 분별해야 합니다. 우리들의 주된 싸움의 대상이 무엇입니까? 험한 세파입니다. 죄악입니다. 우리들의 가족과 친구와 이웃들을 불신앙으로 사로잡고 있는 사탄입니다. 이러한 적들과 싸워서 이기기 위해 우리들은 사소한 것 까닭에 힘을 분산시키면 안 됩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당부하시기를“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요한복음 15:12)하셨습니다. 이렇게 서로 사랑하는 것이 주안에 거하는 것입니다. 

2. 주안에 거함의 결과는 무엇입니까?

예수님은 주안에 거하는 사람들에게 너무도 귀한 축복을 약속하셨습니다.

첫째, 보호의 약속입니다.
본문은 주님과 우리의 관계를 포도나무에 비유하여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포도원 주인이신 농부로, 예수님은 포도나무의 줄기로, 주님을 믿는 성도는 포도나무 가지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맺히는 열매는“서로 사랑하라”하신 사랑의 실천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주를 섬기는 성도들에게 기대하시는 열매입니다. 이렇게 사랑의 열매를 맺으면 농부되신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며 보호의 약속을 하셨습니다. 본문 2절에“무릇 열매를 맺는 가지는 더 열매를 맺게 하려하여 이것을 깨끗케 하시느니라.”(요한복음 15:2) 하셨습니다. 

깨끗케 하신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봄이 되면 농부들은 포도나무의 가지의 묵은 껍질을 벗겨줍니다. 그 껍질 안에 벌레들이 기생하여 포도나무를 해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포도나무를 깨끗케 하신다는 것은 관리와 보호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농부들은 언제나 좋은 열매 맺는 과일이나 곡식은, 다음해에 더 많은 열매를 맺도록 하기 위해 깊은 관심을 기울여 그 농작물을 특별관리 합니다. 사랑의 열매를 맺는 성도들을 향한 하나님의 심정이 이와 같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누구나 하나님의 특별한 관심과 보호를 기대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바라시는 열매를 맺혀야 합니다. 그것은 곧 사랑의 실천입니다. 

독일의 문학가 헤르만 헤세의 작품가운데“어거스터스”라는 것이 있습니다. 이 작품은 행복과 사랑의 본질을 말하고 있습니다. 어떤 부자가 기다리던 아들을 낳고 이름을 어거스터스 라고 지었습니다. 그때 한 노인이 찾아와 어머니에게 말했습니다.“아기의 출생을 축하합니다. 내가 축하의 선물로 당신의 소원을 한가지 들어주겠소. 

아이를 위한 소원이 무엇입니까?”어머니는 노인에게 소원을 밝혔습니다.“이 아이가 자라서 누구에게나 사랑을 받도록 해주십시오”그 어머니의 소원대로 어거스터스는 성장하면서 많은 사람들로부터 사랑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의 삶은 행복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다른 사람들의 사랑을 받을 줄만 알았지 사랑을 베풀 줄을 몰랐습니다. 인생의 말년은 점점 더 외롭고 비참해져갔습니다. 그때 노인이 다시 어거스터스를 찾아서“네 소원이 무엇이냐. 한 가지만 더 들어주겠다.”늙은 어거스터스는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말하기를“세상의 모든 사람을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이 되게 해주십시오.”라고 했습니다.

사랑의 본질은 받는 것이 아니라 주는 것임을 나타내는 의미입니다. 사람이 사랑을 받는다는 것은 좋은 일입니다. 사람은 사랑을 받을 때보다 사랑을 베풀 때에 더 큰 행복을 느끼도록 창조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창조의 원리를 따라 사랑을 베풀며 살아가는 사람에게 하나님의 관심과 보호가 있습니다. 사랑의 열매를 더 많이 거두시기 위함입니다. 

복음성가가운데“당신은 사랑 받기위해 태어난 사람”이라는 찬양이 있습니다. 
당신은 사랑 받기위해 태어난 사람
당신의 삶속에서 그 사랑 받고 있지요
당신은 사랑 받기위해 태어난 사람
당신의 삶속에서 그 사랑 받고 있지요

이 찬양의 가사는 절반의 사랑만 노래한 것 같아요. 2절에는 “당신은 사랑 하기위해 태어난 사람”이라고 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생각을 합니다. 성경은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 사랑을 하면 모두가 사랑을 받습니다. 반면 모두가 사랑받기만 원한다면 사랑하는 사람은 누구입니까? 우리는 사랑받기만 위해 태어난 것이 아니라 사랑하기 위해, 사랑주기 위해 태어난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둘째, 기도 응답의 약속입니다. 
본문 7절 말씀에“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하셨습니다. 기도의 응답이란 하나님에 대한 요구의 충족을 말합니다. 농부의 관심은 좋은 과일나무와 좋은 곡식에 있습니다. 그 농작물에 필요한 것이 무엇인가에 대해 유심히 관찰합니다. 병충해가 우려되면 농약을 뿌립니다. 잡초가 돋아나면 김을 매거나 아니면 제초제를 뿌려 그 잡초를 제거합니다. 왜 그렇게 할까요? 더 많은 열매를 기대하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주안에 거하며 계명을 지키며 사랑을 실천하는 사람이 기도할 때 하나님은 그들의 필요에 응답하시는 것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바라는 소원이 있습니다. 그러나 내 소원을 구하기 전 먼저 주안에 거해야 합니다. 그 후에 응답이 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정하신 기도 응답의 순서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태복음 6:31,33)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지혜로운 사람의 기도는 일방적으로 내 소원만 아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내게 무엇을 원하시는가에 관심을 기울어야만 합니다. 기도는 하나님과의 대화입니다. 대화는 일방적인 것이 아닙니다. 대화란 상방을 전제로 한 말입니다. 그러므로 기도의 대화자이신 하나님의 뜻을 기울이는 것이 필요합니다. 

셋째, 기쁨을 주신다는 약속입니다.

분문 10절~12절 말씀에“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 같이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거하리라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함이니라.”하셨습니다. 주님의 계명을 지켜 사랑을 실천하면 그리스도의 기쁨이 우리에게 주어진다는 약속입니다. 주시되 충만한 기쁨이라고 하셨습니다. 기쁨이 무엇입니까? 다른 말로 표현한다면 행복입니다. 어떤 사람이 행복합니까? 주안에 거하는 사람입니다. 사랑을 실천하는 사람입니다. 이러한 삶을 살아가는 사람에게는 기쁨이 충만하게 됩니다. 그 까닭이 무엇일까요? 주안에 살아가는 사람에게는 언제나 주님께서 내 안에 계신다고 하셨습니다. 주님께서 내 안에 계시면 성령께서 주시는 기쁨이 있습니다. 

또한 주안에 살아가는 사람에겐 영혼 구원에 대한 감격의 기쁨이 있습니다. 그리고 조금 전 드린 말씀 같이 하나님께서 보호하시고 지키심을 알기에 하나님의 사랑에서 오는 넘치는 기쁨이 있습니다. 
기도 응답의 기쁨이 있습니다. 
또한 사랑을 실천하는 사람은 누구나 그를 귀하게 여깁니다. 이로 인해 자신의 존재가치를 확인하게 될 뿐만 아니라, 이때에 느끼는 삶의 보람으로부터 오는 기쁨이 있습니다. 이러한 기쁨은 세상으로부터 오는 그 어떠한 것과도 비교할 수가 없습니다.

아메리카 신대륙을 발견한 사람은 크리스토퍼 콜럼버스입니다. 그가 신대륙을 발견한 것은 황금을 얻기 위한 노력의 결과였습니다. 부모님이 지어준 그의 이름의 뜻은 황금과는 전혀 다른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크리스토퍼”란“그리스도를 마음속에 간직하고 사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나 그는 그리스도 밖에서 행복을 찾고자 황금에 대한 욕망으로 가득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콜럼버스는“내가 진정한 기독교인이 될 것인가? 아니면 황금을 쫓는 인생을 살 것인가?”하고 번민하다가, 이러한 갈등의 해답을 얻기 위해 간절한 마음으로 하나님께 기도를 드렸습니다. 

기도하는 가운데 그는 명쾌한 해답을 얻었습니다.“이제부터 부모님이 지어주신 이름에 걸맞게 살자!”그때부터 콜럼버스는 신앙 안에서 전혀 새로운 삶을 살았습니다. 그가 세상을 떠나기 전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습니다.“나는 진실한 마음으로 주님을 섬기며 살아온 14년 동안만 크리스토퍼 콜럼버스였다. 그 기간이 내 일생 중 가장 행복하고 보람 있는 세월이었다.”라고 했습니다.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들이 행복하게 살아가기를 바라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말씀하시기를“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 같이 너희도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거하리라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함이니라.”(요한복음 15:10~11) 하셨습니다. 계명을 지켜 주안에서 살아간다는 것이 쉽고 단순한 것은 아닙니다. 

이 길은 좁은 길입니다. 길이 좁아 함께 가지 못해 쓸쓸하고 외로울 때가 있습니다. 길이 좁으므로 많은 것을 가지고 가지 못하고 짐을 단순하게 해야 할 때도 있습니다. 

이 길은 가시밭길입니다. 그러므로 때로는 이 사람, 저 사람에게 찔려 마음의 깊은 상처를 받을 때도 있습니다. 

이 길은 십자가길입니다. 예수님은 인류구원을 위해 십자가를 지시고자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이처럼 십자가란 사명 감당을 말합니다. 내게 주어진 사명을 감당하려할 때 힘이 들고 어려울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나 혼자 십자가를 지는 것은 아닙니다. 주님이 함께 하십니다. 이런 말이 있습니다.“십자가를 지고가라. 그리하면 십자가가 너를 지고 가리라.” 

하지만 주안에 거함의 결과는 너무도 소중합니다. 
주안에 거하면 만복의 근원이신 하나님의 사랑과 보호를 받습니다. 
주안에 거하면서 기도하면 하늘이 움직이는 기도응답이 있습니다. 
주안에 거하면 기쁨이 주어집니다. 우리가 그토록 원하는 행복입니다. 이 행복은 세상의 것과 같지 않습니다. 하늘로부터 내려오는 기쁨과 행복입니다.

주안에 거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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