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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그리스도의 향기(3) : 덕(德) (고전 10:23-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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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의 향기3 : 덕(德) (고전 10:23-33) 
 
 
❚덕 좀 쌓으며 삽시다!

우리가 세상에 살면서 쌓아야 할 것들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돈’을 쌓으며 삽니다. 성경에도 이런 사람이 나오지요. 누가복음 12장에 보면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16~19 말씀을 봅시다.

16 또 비유로 그들에게 말하여 이르시되 한 부자가 그 밭에 소출이 풍성하매 17 심중에 생각하여 이르되 내가 곡식 쌓아 둘 곳이 없으니 어찌할까 하고 18 또 이르되 내가 이렇게 하리라 내 곳간을 헐고 더 크게 짓고 내 모든 곡식과 물건을 거기 쌓아 두리라 19 또 내가 내 영혼에게 이르되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 하리라 하되

이 사람은 전형적인 ‘돈을 쌓으며 사는 인생’입니다. 오늘날에도 이런 사람들이 많습니다. 돈이 최고다. 돈을 쌓으면 안 될 일이 없다. 마치 곡간에 곡식을 가득 쌓고 흡족해 한 부자처럼 자신의 수중에 가득 쌓인 돈과 재물을 보며 흡족해 하고 거기서 행복을 찾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돈을 쌓으며 사는 인생에 대해 하나님은 뭐라고 말씀하실까요? 20~21절 말씀을 함께 읽습니다.

20 하나님은 이르시되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준비한 것이 누구의 것이 되겠느냐 하셨으니 21 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쌓아 두고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하지 못한 자가 이와 같으니라

또 어떤 사람들은 ‘명예와 지위’를 쌓으며 살아갑니다. “돈보다 더 센 게 권력이야, 힘이야” 하면서 말입니다. 또 어떤 사람은 ‘건강’을 쌓으며 살아갑니다. 그런데 우리 예수 믿는 사람들은 ‘은혜’를 쌓으며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돈도 좋고, 명예도 필요하고, 건강도 있어야 하지만 이 모든 것보다 하나님의 은혜를 귀히 여겨서 은혜 받기를 사모하고, 은혜 쌓으며 살기를 기뻐하는 사람들이 바로 우리 예수 믿는 사람들인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예수 믿는 사람들, 그리스도인들이 꼭 쌓아야 할 것이 하나 더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오늘의 주제인 ‘덕’(德)입니다. 왜 덕을 쌓아야 할까요? 물론 예수 안 믿는 분들도 덕을 쌓으라는 말 많이 합니다. 심지어 저승에 가면 덕을 쌓는 곡간이 따로 있다고 말하면서 거기에 덕을 많이 쌓아야 후손이 잘 된다고 합니다. 그런데 특별히 예수 믿는 사람이 덕을 쌓아야 할 까닭은 대체 무엇일까요? 우리 한국교회사에는 아주 흥미로운 인물들이 많습니다만 그 중 한 사람이 바로 김익두 목사(1874∼1950)님입니다. 이분이 예수 믿기 전에는 본디 아주 유명한 깡패였습니다. 

1874년 황해도 안악군에서 태어난 김익두 목사님은 본디 부유한 양반 집안에서 태어나 남부럽지 않게 자란 분이지만 과거에 낙방하고 아버지가 돌아가시면서 집안이 몰락하자 깡패가 됩니다. 얼마나 싸움을 잘하고 사나운지 별명이 ‘안악골 호랑이’였습니다. 그런데 이런 분이 놀랍게도 예수를 믿게 되어 변화되고 목사가 됩니다. 1901년 김익두 목사가 황해도 재령읍교회의 전도사로 사역하던 시절 이야기입니다. 부흥회를 인도하러 가던 길에 어떤 사람이 술에 취해 주먹을 휘두르며 그에게 시비를 걸고 때리기 시작하는데 취객이 지쳐 주먹질을 멈추자 김 목사님은 “다 때렸느냐”고 묻습니다. 

그런데 이 취객은 자기가 신나게 패주던 그 사람이 당대 유명한 깡패였던 ‘안악골 호랑이’ 김익두라는 사실을 알고는 얼굴이 사색이 됩니다. 취객이 “아이쿠 내가 오늘 임자 만났구나, 난 죽었다” 하는 순간 김익두 목사는 취객에게 딱 한 마디를 남기고 부흥회를 가던 길을 재촉합니다. “예수는 내가 믿고, 그 덕은 네가 보는구나!” 주먹이 약해서 참은 것 아닙니다. 성질이 너무 온화해서 참은 것도 아닙니다. 사실 김익두 목사님은 목사님 된 후에도 불같은 성질을 가진 분으로 유명합니다. 

그런데 왜 참았을까요? 나를 때린 사람, 나에게 해를 입힌 사람인데 왜 그냥 참고 넘어간 것일까요? 그 대답은 김익두 목사님의 말 속에 이미 들어있습니다. 뭐라고 했다고요? “예수는 내가 믿고, 그 덕은 네가 보는구나!” 첫째로는 내가 예수 믿기 때문입니다. 예수 안 믿었으면 그 사람 죽었지요. 둘째로는 내가 예수 믿은 덕을 저 사람이 본 것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은 덕을 쌓아야 하고, 그 덕을 남에게 베풀어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취객한테 매 맞는 일은 없겠지만 이에 못지않게 억울하고 분한 일 당할 때 많잖아요? 그럴 때 고민되지요. 

“성질 같아서는 이걸 확!” 그런데 나한테 해를 끼치는 사람, 힘들게 하는 사람, 그냥 넘어가면 내가 손해 볼 것 같은 상황이지만 우리는 참습니다. 기꺼이 손해 봅니다. 우리가 성질이 없어서 그럽니까? 아니지요. 우리도 성질로 따지면 남 못지않게 한 성질 하는 사람들 아닙니까? 우리가 바보 같아서 그럽니까? 아니지요. 우리도 똑똑하고 우리도 알 것 다 압니다. 그런데 왜 참습니까? 왜 양보합니까? 왜 그냥 넘어가줍니까? 바로 ‘덕’(德) 때문입니다. 내가 예수 믿은 덕(德)을 다른 사람들에게 베풀어야 하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여러분, 이게 바로 덕(德)입니다.

❚고린도교회와 덕

오늘은 <그리스도의 향기> 세 번째 시간으로 <덕>(德)에 대해 생각해 봅니다. 고린도교회가 지금 시끌시끌합니다. 안 그래도 가뜩이나 말 많고 탈 많은 골치 덩어리 교회가 고린도교회인데 또 문제가 생겨 온 교회가 시끄럽고 성도들은 다 시험 들게 생겼습니다.  바로 ‘우상 제물 문제’입니다. 고린도교회가 위치한 고린도 시는 그리스에서도 손꼽히는 번화한 항구도시였습니다. 사람과 돈과 물자가 넘쳐나고 그와 더불어 세계 각국에서 수입된 우상도 넘쳐나는 그런 도시였습니다. 그러다보니 고린도에 사는 사람들은 저마다 이런저런 우상을 섬기곤 했는데, 문제는 시장에서 파는 고기 중에서 이런 우상들에게 제물로 바친 고기가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수많은 우상들을 섬기는 신전에서 제물로 바친 고기는 대부분 우상을 섬기는 사제들이 먹었지만 다 먹지 못하고 남은 제물은 시장에 내다 팔았던 것입니다. 문제는 시장에 가서 고기를 사는데 이 고기가 우상 제물로 바쳤던 것인지, 아닌지 구분이 잘 안 된다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간혹 이런 경우가 있겠지요. 시장에 고기를 사러 갔는데 정육점 주인이 묻지도 않았는데 이런 말을 하는 겁니다. “이거 사실은 고린도에서 가장 인기 있는 미(美)의 여신 아프로디테(=비너스) 신전에 제물로 바쳤던 건데 좀 남아서 오늘 우리 집에 들어온 거에요. 괜찮겠지요?” 아니, 누가 물어나 봤나요? 모르고 사다 먹으면 아무 거리낌도 없을 것을 괜히 우상 제물로 바쳤던 것이라고 얘기하는 바람에 이걸 사다 먹어야 하는지 먹지 말아야 하는지 고민이 생긴 겁니다. 

마치 옆집에서 찾아와 “이거 오늘 우리 집에서 고사 지낸 시루떡인데 맛있게 드세요.” 하는 것과 마찬가지 상황입니다. 그냥 아무 말 없이 “떡 좀 드세요” 하고 가져오면 “옆집에 새로 이사 왔다고 떡 돌리나보다” 하고 먹을 텐데 괜히 고사떡이라고 말하는 바람에 먹자니 찜찜하고 안 먹자니 아까운 상황이 된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럴 때 먹습니까? 안 먹습니까? 사람마다 다르겠지요. “어떻게 뻔히 알면서 고사떡, 귀신한테 바쳤던 떡을 먹냐?”는 분도 있겠고, “뭐가 문제냐? 기도하고 감사함으로 먹으면 돼지.” 하는 분도 있을 겁니다.

고린도교회에도 이런 두 가지 의견이 크게 갈라진 것입니다. “아무 문제없다. 우리는 예수 믿고 자유를 얻었는데 뭐가 문제냐? 그냥 감사함으로 기도하고 먹으면 그만이다.” 맞습니까? 예, 맞는 얘기입니다. 틀림없어요. 우리는 자유를 얻은 사람들입니다. 귀신은 아무 것도 아니잖아요? 그냥 하나님이 주신 음식인 줄 알고 “안 그래도 떡 먹고 싶었는데 이게 웬 떡입니까? 하나님 감사합니다.” 기도하고 드시면 됩니다. 예수 믿는 사람은 일부러 길일을 피해서 손 있는 날 이사하세요. 그날은 이사비용이 더 쌉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은 일부러 흉가를 사세요. 흉가라고 집값도 쌀 테고 기도하고 들어가 살면 “내 주 예수 계신 곳이 그 어디나 하늘나라”인데 뭐가 문제입니까? 

그런데 고린도교회 한 편에서는 이런 사람들이 나온 것입니다. “절대 안 된다. 우상에게 바친 제물은 부정한 것인데 예수 믿는 사람들이 어떻게 그런 음식을 먹을 수 있냐?” 우리가 볼 때는 그리 심각한 문제도 아닌데 당시 고린도교회 성도들은 무지 고집이 셋나 봅니다. 절대 양보 안 하고 자기 주장만 앞세우면서 고기 안 먹는 사람들은 먹는 사람들보고 “믿음도 없는 순 사이비 성도”라고 손가락질 하고, 고기 먹는 성도들은 안 먹는 성도들보고 “율법에 사로잡혀 사는 순 골통”들이라고 비난했던 것입니다. 

이 우상 제물 문제로 인해 안 그래도 골치 아픈 문제가 많던 고린도교회가 이 문제로 얼마나 큰 홍역을 치르게 되었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이 문제에 대한 보고를 받고 고린도교회에 보낸 첫 번째 편지(고린도전서)에서 이렇게 기록합니다. 고린도전서 8:1 말씀입니다. 같이 읽읍시다.

우상의 제물에 대하여는 우리가 다 지식이 있는 줄을 아나 지식은 교만하게 하며 사랑은 덕을 세우나니

여기서 가장 중요한 말이 덕(德)입니다. 이 ‘덕’이라는 말이 고린도전서에 8번이나 나오는데 어떤 문제가 생기고 갈등이 생길 때마다 바울은 계속 이 ‘덕’을 강조한 것입니다. 그래서 우상제물 문제가 생겼을 때도 사도 바울은 이 ‘덕’을 언급한 것이지요. 그렇다면 우리는 깨닫게 됩니다. “아, 사람들 사이에 문제가 생길 때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이 바로 ‘덕’이로구나!” 라고 말입니다. 특히 교회 안에서 일어나는 모든 문제나 갈등은 다 이 덕으로 해결할 수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여러분이 교회 밖에 나가서도 가정 안에서, 직장에서, 사람들 사이에서 골치 아픈 문제가 생기고 갈등이 생기면 정말 힘들거든요. 세상에서 제일 해결하기 힘든 게 사람 사이 문제 아닙니까? 전에 있던 교회에서 동물병원을 하는 집사님에게 심방을 갔는데 제가 “집사님, 말 못하는 개나 고양이 같은 동물 고쳐주려면 참 힘들지요?” 하고 물었더니 그 집사님 뜻밖의 대답을 합니다. “에이, 목사님 모르는 소리 마세요. 개나 고양이는 차라리 편합니다. 문제는 사람이에요. 개나 고양이를 데리고 온 주인 말이에요. 

그 사람들 대하는 게 얼마나 골치 아픈지 몰라요. 차라리 저보고 개나 고양이만 대하라고 하면 이 일 할 만하겠어요.” 그런데 이와 똑같은 얘기를 법원 판사나 변호사들이 합니다. “나는 웬만하면 교회에 관계된 사건은 안 맡으려고 합니다. 교인들이 더 무서워요. 더 고집 세고, 말 안 듣고, 더 막무가내고요.” 여러분, 현실이 이렇습니다. 그래서 이 복잡하고 어려운 인간 사이의 문제들, 특히 더 골치 아프고 해결하기 힘든 교회 안에서의 갈등을 해결할 열쇄가 바로 뭐라는 겁니까? ‘덕’이라는 것입니다.

❚미숙과 성숙 사이

고린도전서 8:1을 다시 보면 이 ‘덕’에 상대 되는 표현이 ‘지식’입니다. 여기서 “우상의 제물에 대하여는 우리가 다 지식이 있다”는 말은 우상 제물 문제에 대해서는 우리가 다 나름의 생각이 있다는 것입니다. ‘지식’이라는 말을 다른 표현으로 바꾸면 ‘자기주장’입니다. 소위 똑똑하다는 사람들 모이면 늘 싸우기 마련입니다. 제일 잘 싸우는 사람들이 누구냐? 학자들, 똑똑한 사람들, 많이 배운 사람들입니다. 좀 못나고 모자란 사람들 모이면 다들 그런가보다 하고 잘 안 싸워요. 

왜 그렇지요? 지식을 가졌다는 사람들은 자기주장이 강해서 “네가 맞냐? 내가 맞냐?” 따지고 고집부리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이 ‘지식’ 대신, ‘내 주장’이나 ‘고집’ 대신 ‘덕’을 세우라고 말씀한 것입니다. 제아무리 똑똑하고 잘 나도 자기주장만 앞세우고 교회에 분란을 일으키는 사람은 미숙한 사람, 어린아이와 같은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교만한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정말 성숙한 사람은 지식이나 자기주장이 아닌 덕을 앞세운다고 말합니다. 진짜 성숙한 사랑이 뭔지 아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교회와 성도들 사이에 ‘덕’을 세우는 아주 구체적인 방법을 말해줍니다. 혹시 고린도교회 성도들 가운데 나는 믿음의 자유가 있어서 얼마든지 우상 제물로 바쳤던 고기를 먹을 수 있다는 사람이라면 아무 것도 따지지 말고 먹으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딱 두 가지 경우에는 먹으면 안 된다고 합니다. 첫째는 오늘 본문인 고린도전서 10:25~28에 나옵니다. 함께 읽습니다.

25 무릇 시장에서 파는 것은 양심을 위하여 묻지 말고 먹으라 26 이는 땅과 거기 충만한 것이 주의 것임이라 27 불신자 중 누가 너희를 청할 때에 너희가 가고자 하거든 너희 앞에 차려 놓은 것은 무엇이든지 양심을 위하여 묻지 말고 먹으라 28 누가 너희에게 이것이 제물이라 말하거든 알게 한 자와 그 양심을 위하여 먹지 말라

어떤 경우 먹으면 안 됩니까? 만약 내가 어떤 불신자의 초청을 받아 집에 갔는데 음식을 대접하면서 “이건 우상 제물로 바쳤던 고기인데 혹시 괜찮으시겠어요?” 하면 먹지 말라는 것입니다. 왜요? 내 신앙으로나 양심으로나 전혀 거리낌이 없지만 24절과 28절에 보면 내 유익이나 양심이 아니라 누구의 유익과 양심 때문이라고요? ‘남의 유익’ ‘그 사람의 양심’입니다. 나를 초청한 그 사람, 그 불신자의 양심 때문에 혹시 거리낌이 없게 하기 위해 내가 안 먹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둘째는 어떤 경우입니까? 고린도전서 8장을 봅시다. 9~12절을 읽습니다. 

9 그런즉 너희의 자유가 믿음이 약한 자들에게 걸려 넘어지게 하는 것이 되지 않도록 조심하라 10 지식 있는 네가 우상의 집에 앉아 먹는 것을 누구든지 보면 그 믿음이 약한 자들의 양심이 담력을 얻어 우상의 제물을 먹게 되지 않겠느냐 11 그러면 네 지식으로 그 믿음이 약한 자가 멸망하나니 그는 그리스도께서 위하여 죽으신 형제라 12 이같이 너희가 형제에게 죄를 지어 그 약한 양심을 상하게 하는 것이 곧 그리스도에게 죄를 짓는 것이니라

어떤 경우입니까? 나는 먹을 수 있어요. 나는 얼마든지 먹을 수 있는 믿음도 있고, 자유도 있어서 양심에 아무 거리낌도 없어요. 하지만 혹시 내 옆에 믿음이 약한 사람이나 양심에 가책을 받는 사람이나 초신자가 있다가 내가 그 우상 제물을 먹는 것을 보고 시험 들고 실족하면 안 되잖아요? 그러니까 그런 일이 없도록 나는 먹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게 바로 ‘덕’입니다. 그런데 한 발 더 나가, 그럴 때만 안 먹는 것이 아니라 13절에 뭐라고 했습니까?

그러므로 만일 음식이 내 형제를 실족하게 한다면 나는 영원히 고기를 먹지 아니하여 내 형제를 실족하지 않게 하리라

내 신앙 때문이 아니라 남(그리스도께서 위하여 죽으신 형제, 11절)의 신앙 때문에, 내 양심이나 유익이 아니라 남의 양심이나 유익 때문에 영원히 안 먹을 수도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것이 바로 ‘덕’입니다. 난 할 수 있지만 남을 위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그리스도의 향기를 내기 위해 참을 수 있는, 영원히 안 할 수 있는 그게 바로 덕이란 말입니다. 그게 이게 바로 김익두 목사님이 말씀하신 ‘예수 믿은 덕’입니다. 그 덕을 내가 보는 것이 아니라 네가 본다는 것입니다.

말씀 맺겠습니다. “목사님, 저는 도저히 못 참겠어요. 도저히 그냥 넘어갈 수가 없어요.” 간혹 듣는 얘기입니다. “그래도 참으세요. 그냥 넘어가세요.” 내가 성질 없어서 그런 게 아니에요. 내가 바보라서가 아니에요. 바로 ‘덕’ 때문입니다. “나도 내 맘대로 하고 싶어요. 내 뜻대로 하고 싶어요. 나도 큰소리치고 고집부리고 싶어요.” “그래도 참으세요.” 내가 고집 없어서가 아니에요. 나도 한 고집 해요. 그런데 왜 말 안하고 참습니까? 바로 ‘덕’ 때문입니다. 기억하십시오. 하나님은 똑똑한 성도보다 성숙한 성도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능력 있고 잘 난 성도보다 사랑을 품은 성도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대단한 성도보다 덕을 세우는 성도를 원하십니다. 여러분이 그런 성도 되기 바랍니다. 여러분의 향기를 통해 우리 하나님이 영광 받으시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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