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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안식일에 손 마른 사람을 고치신 예수님 (마 12:9-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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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식일에 손 마른 사람을 고치신 예수님 (마 12:9-21)
 
언젠가 생명의 삶에서 읽은 유기성 목사의 사랑의 목사라는 글이 생각이 납니다. 

늘 웃는 얼굴에 사랑이 넘치는 한 목사님이 계셨습니다. 그런데 그 목사님은 원래부터 그렇게 사랑이 넘치는 분은 아니셨습니다. 그분이 학창시절 젊을 때는 아주 비판적인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교회 안에서 율법적이고 무서운 사람으로 정평이 나있었습니다. 

그는 자기가 출석하는 교회에서 존경하는 어른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비판적인 눈으로 봤기 때문에, 저 집사님은 아직도 담배를 못 끊었구만, 저 장로님은 새벽기도도 안 나오니까 은혜가 안되는구만 또 저런 중직자를 세우는 목사는 필시 사기꾼이구만. 이렇게 판단했습니다. 그러니까 그는 스스로가 율법적인 사람이 되어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한 번은 자기 친한 친구가 생활고에 비관하면서 또 엎친데 덮친 격으로 여자친구에게 실연을 당했습니다. 그러니까 이 마음의 고통이 너무 크니까 그만 약을 먹고 음독자살을 시도했어요. 그러나 자살은 실패로 돌아가고 겨우 생명을 건졌어요. 

그런데 이 목사님은 학창시절에 그 친구를 찾아가서 책망을 합니다. “너 정말 예순 믿는 사람 맞어? 예수 믿는 사람이 어떻게 자살을 할 수 있어 이 못된 놈아” 하면서 욕을 한 바탕 해주고 돌아옵니다. 그는 전혀 위로를 해주는 사람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던 중에 이 목사님이 시험에 빠지는 일이 있었습니다. 그는 꿈을 가지고 신학교에 입학을 하려고 준비를 했고 또 합격을 했습니다. 그런데 부모가 신학교 가는 것을 반대합니다. 그리고 등록금을 안주니까 신학교에 입학을 할 수가 없어요. 그는 그 때부터 시험에 듭니다. 방황합니다. 좌절합니다. 크게 낙심에 빠지면서 도대체 하나님이 뭐냐. 하나님을 부인하는 상황에까지 이르게 됩니다. 

그렇게 예수를 누구보다도 잘 믿는 것 같았는데 남을 판단하고 정죄하던 그가 한 번의 시험에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그는 몇 년 동안 방황합니다. 그러다가 다시 예수님께로 돌아옵니다. 

그 때서야 자신의 교만을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자신이 얼마나 많은 사람을 실족하게 하고 얼마나 많은 사람에게 상처를 주었는가를 생각하면서 그는 통곡하며 회개하게 됩니다. 

그 후 하나님의 은혜로 그는 신학교에 다시 입학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목사가 되었는데 그는 아주 사랑이 많은 목사가 되었습니다. 그의 인생의 그 뼈아픈 실패의 경험이 그를 사랑의 목사로 변화시켰다 하는 것입니다. 

우리도 예수님을 믿고 영적인 눈이 띄이면 분별력이 생깁니다. 옳고 그름을 분별하는 능력이 강해져요. 그런데 만약에 그 사람에게 예수님의 사랑이 없으면 그는 가장 무서운 사람이 될 수가 있어요. 그 분별력을 가지고 모든 것을 판단하는 사람이 돼 버려요. 그래서 우리에게는 예수님의 긍휼의 마음, 그 사랑의 마음이 꼭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혹 여러분 우리는 이런 전철을 밟은 적이 없는가 하는 것입니다. 

특히 목사와 같은 저에게 이런 율법적인 영향을 받기가 쉽습니다. 또 교회 신앙생활을 오래하신 이런 중직자들이 자칫 하면 이런 위험에 빠질 수도 있습니다. 내 안에 예수님의 사랑은 없고 그런 율법과 계명만 남아서 남을 판단하고 정죄하는데 열심을 낼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마태복음 12장에는 2개의 사건이 소개됩니다. 먼저는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밀밭 길을 지나가십니다. 그날이 마침 안식일이었어요. 제자들이 몹시 배고파합니다. 제자들이 배고프니까 지나가 던 밭의 밀을 한 움큼 뜯어가지고 그것을 비벼서 먹어버렸어요. 

사실 유대인들의 안식일에는 밀을 따는 것 까지는 노동이 아닌데 그것을 비비면 타작행위가 되는 거예요. 노동이 되는 거예요. 그러니 그것을 바라보던 바리새인들이 오케이 잘 걸렸다하면서 예수님께 항의를 하는 거예요. 당신의 제자들이 안식일에 노동을 했다. 밀밭을 지나가다가 밀을 뜯어가지고 그것을 타작을 하듯이 손으로 비볐다는겁니다. 그러면서 예수님을 비난하게 되죠.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존경하는 인물들 중에 조상 다윗이 있지 않느냐. 다윗이 도망을 치다가 성전에 들어갔는데 배가 고파서 먹을게 없었다. 그 때 그는 성전에 놓여있는 진설병, 제사장만 먹을 수 있는 진설병을 감히 먹었다. 그래도 너희들은 그를 비난하지 않지 않느냐. 그건 하나님도 이해하신다. 굶주린 자에게 먹을 것을 주는 것은 제단에 진설병이라도 가능하다.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바로 나는 성경보다 큰 사람이고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이라고 설명하십니다. 그러나 바리새인들이 그것을 가지고 이해가 될 리가 없죠. 그들은 또 예수님을 뒤 따라 다니면서 감시를 합니다. 

예수님이 그 다음 주에는 회당에 들어가셨는데 마침 회당에는 손 마른 사람이 앉아있었어요. 이 손 마른 사람이 누가복음에 보면 오른 손이 말랐어요. 오른 손에 피가 마르고 신경이 안통해서 움직이지 못하고 일도 못하는 사람이에요. 전설에 의하면 그 사람이 석수장이예요. 돌을 깎는 사람인데 오른 손을 못 쓰니 일할 수가 없고, 일을 할 수 없으니 가난하고 생계가 곤란하겠죠? 불쌍한 사람이예요. 

예수님 그 사람을 고치려고 다가 갔을 때 바리새인들이 그걸 주목하고 보다가 이거 기회다 예수님께 묻습니다. “안식일에 병 고치는게 옳으니까?” 자 예수님은 곤란에 빠졌습니다. 사랑이 많으신 예수님 이 남자를 보고 그냥 지나간다고 하면 말이 안 되고 또 안식일에 병을 고치면 안되는데 그걸 노동행위로 보는데 병을 고치면 또 비난을 받을테고 이 곤란에 빠졌어요. 

그 때 예수님께서 한 예를 드십니다. 너희들도 안식일에 양이 웅덩이에 빠지면 어떻게 하느냐. 너희들도 구덩이 빠진 양을 구출해 내지 않느냐. 하물며 사람은 양보다 몇 곱절 중요한 존재인데 이 사람을 고통에서 해방시키는 것이 당연한 일이지 않겠느냐 하면서 네 손을 내밀라 했더니 이 손 마른 사람이 손을 내밀었어요. 그 즉시로 깨끗함을 입은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 때에 이 바리새인들이 안색이 변했어요. 어떻게 안식일에 병을 고칠 수 있느냐. 말도 안 된다 하면서 그들이 뭐라고 말합니까? 자 그들의 행동을 보시죠. 

13절 14절 말씀. “이에 그 사람에게 이르시되 손을 내밀라 하시니 그가 내밀매 다른 손과 같이 회복되어 성하더라 바리새인들이 나가서 어떻게 하여 예수를 죽일까 의논하거늘” 

그들은 어떻게 예수를 죽일까를 가지고 고민하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이 참 안타까운 일이죠. 예수님은 자기를 따라온 많은 사람들의 병을 고쳐주시고 이 일을 남에게 발설하지 말라고 끝까지 경고하십니다. 

자 여러분 어떻습니까. 혹 우리들이 자칫하면 바리새인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은 안식일지만 굶주려가는 자들을 먹이시고 싶어 하셨어요. 안식일이지만 고통당하는 자들은 자유케 하고 싶어 하셨어요. 왜 안식일이라는 것은 원래 자유와 해방과 쉽과 쉬는 날이거든요. 병든 사람이 고침 받는 것이 바로 안식일에 의미예요. 그런데 안식일에 병을 고치면 안된다니요. 이 말이 됩니까.

바리새인들도 처음에는 아주 신앙이 에센스파라고 해서 아주 거룩하고 정경한 사람들이었어요. 하나님을 철저하게 섬기는 사람들이었는데 역사가 오래되다보니까 그들의 본래의 마음은 다 잃어버리고 껍데기만 남았어요. 형식적이고, 외형적이고, 남에게 드러내기 좋아하고 자랑하기 좋아하고 자기 의를 들어내고 남을 정죄하고 판단하는 사람이 되고 말았다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 같은 사람이 조심해야 해요. 어릴 때부터 예수 믿고 신앙생활한 사람들, 이렇게 목사가 돼서 매일 말씀을 가까이 하는 사람들이 오히려 이런 위험에 빠질 수 있어요. 자칫하면 내 안에 예수님의 긍휼과 자비의 마음이 없이 남을 판단하는 그런 판단의 안경만 낄 수 있다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이 두가지 비슷한 사건을 통해서 예수님이 진정 무엇을 원하시는지 깨달을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이 원하시는 것이라면 그것이 우리의 삶의 원리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요? 

첫째 예수님은 생명을 원하십니다. 한 번 따라 해보시죠. 예수님은 생명을 원하십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생명에 관심이 있으시고 생명을 소중히 여기십니다. 그래서 굶주린 자를 먹이십니다. 병든 자를 치료하십니다. 비록 안식일일지라도 굶주린 자가 배를 채우는 것에 대해서 예수님은 탓하지 않으셨습니다. 이 동일한 본문이 누가복음에는 이렇게 소개가 됩니다. 

우리 누가복음 6장 9절을 읽어볼까요.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너희에게 묻노니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과 악을 행하는 것, 생명을 구하는 것과 죽이는 것, 어느 것이 옳으냐 하시며” 예수님의 관심은 어떻게 안식일에 사람을 살릴까 하는 것이었는데 바리새인들의 관심은 안식일에 어떻게 사람을 죽일까 하는 것이 그들의 관심이었어요. 여러분의 관심은 생명을 구하는 것에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 생명은 육신적 생명이고 동시에 영적 생명이기도 하는 거예요. 생명을 구원하는 것. 그것이 바로 예수님의 관심이예요. 

요한복음 10장 10절에 주님이 말씀하셨어요. “인자가 온 것은 양들에게 생명을 주기 위함이다. 그리고 또 풍성히 얻게 하려 함이라.” 

예수님은 생명을 주는 것이 그분의 소원이었어요. 우리는 예수님이 귀히 여기는 생명을 존중히 여겨야 합니다. 그래서 나 자신도 생명을 존중히 여겨야 해요. 왜? 하나님이 주신 생명이니까요. 자살은 절대 안 되는 것이죠. 동시에 타인의 생명도 존중히 여길 수 있어야 해요. 어떤 분들은 자기 인권은 존중하는데 남의 인권은 무시해 버릴 수 있어요. 그러면 안 되지요. 내 인권이 귀하면 남의 인권도 존중해줘야지요.

우리 사회에 4대 악 중에 하나가 학교 폭력입니다. 아이들이 친구들에게 왕따를 당합니다. 그리고 친구들이 괴롭히지요. 동급생이나 상급생이 괴롭힙니다. 그런데 괴롭히는 아이들을 보면 꼭 1:1이 아니라 떼를 지어서 괴롭혀요. 한 아이를 놓고 여러 명이 대들어서 구타를 하고 왕따를 시키고 물건을 뺏어요. 참 비겁한 일이지요. 그래서 그들은 폭력을 한 번 두 번 세 번 당하다 보면 아이들이 세상을 살기 싫은 거예요. 학교도 가기 싫은 거예요. 밥도 먹기 싫은 거예요. 그래서 우울증에 걸려서 결국은 유서를 써서 자살하는 경우가 많잖아요. 

작년 만해도 대구 지역에서 10명의 아이들이 자살을 했어요. 학교 폭력을 감당하지 못해서. 그런데 더 안타까운 것이 있어요. 학교도 무관심하고 부모들도 무관심하고 친구들도 무관심해요. 학생들에게 설문 조사를 해봤어요. ‘너희 친구들이 폭력을 당하는 것 봤느냐? 봤다는 거예요. 어떻게 했느냐? 선생님께 가서 얘기했다! 몇 명 안돼요. 경찰서에 가서 신고했다! 거의 없어요. 모르는 척 했다! 대부분이예요.

친구들이 그렇게 폭력을 당하는데 모르는 척 하고 지나갔습니다. 내일이 아니니까 괜히 달려들었다가 나까지 손해를 볼까봐.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삶도 그렇지 않습니까? 여러분들도 남의 일에 잘 끼어들지 않지요. 괜히 끼어들었다가 손해나 보지요. 남이야 죽든지 말든지 내 일이 아닌데!! 자 여러분 결국 그들도 내 자식들이고 내 형제들이요. 이웃들이라는 것을 생각해야 해요. 다른 사람의 고통에 대해서도 우리가 관심을 가져야 해요. 

누가복음 10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선한 사마리아인에 대해 이야기 해줍니다. 어떤 사마리아인이 예루살렘 지역으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나 거반 죽게 된 유대인을 만나게 됩니다. 그냥 지나갈 수 있지요. 또 자기도 강도를 만날까봐 두려울 수 있어요. 근데 이 사마리아인은 그 사람을 보고 달려가 상처를 싸매주고 자기 나귀에 태워주고 치료를 해주고 여인숙까지 안내를 해주고 치료비를 물어줍니다.

여러분! 죽어가는 사람의 생명을 구해낸 거예요. 예수님은 그것을 보시고 ‘너희도 바로 이와 같이 하라.’ 이렇게 하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왜? 생명은 존귀하기 때문에! 나의 생명이든 남의 생명이든 모두 중요한 거예요. 

출애굽기 1장에 보면 유대인들이 이주를 해 와서 고센 땅에서 너무너무 엄청난 민족으로 발전해 갑니다. 애굽의 바로가 보고 겁이 나고 두려워져요. 아니 이들이 이렇게 거대해지면 우리를 이렇게 집어 삼키면 어떻게 해야 하나? 그래서 히브리 산파들에게 명령합니다. 유대인 여자들이 아이를 낳게 되면 남자 아이이면 목을 졸라 죽여라! 여자 아이면 살려두라!

그런데 히브리 산파들은 그렇게 할 수 없었어요. 출애굽기 1장 17절에 보니까 “그러나 산파들이 하나님을 두려워하여 애굽 왕의 명령을 어기고 남자 아기들을 살린지라.” 왕의 명령을 어겼어요. 그리고 더 높으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해서 그들은 생명을 살려 내셨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생명을 원하십니다. 여러분 이웃의 생명도 존귀하게 여기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두 번째로 예수님은 긍휼과 자비를 원하십니다. 생명을 원하시는 예수님은 우리에게 자비를 원하십니다. 

자! 우리 오늘 성경 마태복음 12장 7절 말씀을 같이 읽어보죠. “나는 자비를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노라 하신 뜻을 너희가 알았더라면 무죄한 자를 정죄하지 아니하였으리라.” 아멘 

오늘 본문은 아닙니다만은 나는 자비를 원하고 형식적인 제사를 원하지 아니한다. 호세아 6장 6절의 말씀을 예수님이 인용하신 것이예요. 그렇습니다. 이웃을 사랑하지 않는 형식적인 예배 하나님이 받으시지 않는 다는 거예요. 

다른 사람을 사랑하고 다른 사람에게 긍휼과 자비를 베푸는 사람의 예배를 진정으로 받으신다는 거예요. 나는 자비를 원하지! 제사를 원하지 아니한다! 이 자비라는 말을 국어사전에서 찾아보면 ‘남을 크게 생각하고 가엾게 여기는 마음, 남의 고통에 동조하는 마음, 타인을 향해 측은히 여기는 마음, 타인의 고통을 함께 아파하고 배려하는 사랑의 마음’을 자비라고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오늘 예수님은 이 오른 손 마른 사람을 볼 때 자비심을 느끼셨어요. 불쌍히 여기셨어요. 저 사람이 저 손을 다쳐서 얼마나 고통스러울까?! 그냥 갈 수 없었어요. 자기를 죽일 까 위협하는 바리새인들이 옆에 있지만 그냥 지나가실 수 없어요. 예수님은 비겁한 사람이 아니거든요. 결국 예수님은 그에게서 고통을 해결해주셨다는 것입니다. 

고통당하는 사람을 예수님은 보고 그냥 지나가실 수 없는 자비의 주님이셨다! 마가복음 5장에 보면 가다라 지방에 가셨을 때 어떤 사람이 귀신 들렸을 때 고통을 당합니다. 귀신이 그를 붙들어 매니까 그는 괴성을 지르고 무덤 사이에 살고 짐승처럼 살아갑니다. 그것을 보고 예수님은 그냥 가실 수가 없어요. 왜? 저 하나님의 형상을 타고 오는 아름다운 인생이 저 짐승처럼 마귀의 지배를 받는 것을 보고 있을 수가 없어요. 그래서 그들에게서 귀신을 내 쫓으시니까 귀신이 돼지 떼에 들어가 돼지 떼 들이 바다에 들어가 몰살당했더라. 

여러분 주님은 바로 긍휼과 자비의 모습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계셔요. 또 우리가 그런 삶을 살기 원하십니다. 저와 여러분이 이웃들에게 긍휼과 자비를 행하는 분들이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주님은 그것을 원하세요.

제가 예전에는 동의보감을 지은 허준이라는 드라마가 나와서 한 7, 8년 전에 본 기억이 나요. 그 때는 사실은 예진아씨가 너무 예뻐서 봤어요. 그런데 이번에 보니까 새로 구암 허준이라고 하더라구요. 지금은 허준의 삶이 너무 아름다워서 보고 있어요. 기회만 되면 구암 허준을 보는데 제가 봐도 은혜가 돼요. 현대 의사들이 저런 의원이 돼야 하는데 아니 우리 목회자들이 저런 허준을 보고 배울 것이 참 많은데 하는 생각이 들어요. 왜냐하면 그 허준은 그 병자를 있는 그대로 인정해주니까요. 돈이 없는 사람도 외면하지 않습니다. 거절하지 않습니다. 그들을 다 받아 줍니다. 대단하죠. 결코 한 사람이라도 돈이 없다고 돌려보낸 적이 없어요. 박대한 일이 없어요. 

그가 처음에 의원 시험을 보러 가는데 허준이 의사라는 것을 알고 누가 아파요. 그래서 그 사람을 고쳤더니 그 소문을 듣고 많은 사람들이 몰려 왔어요. 밤새도록 진료하다가 결국 의원 시험을 놓쳐 버리고 말았어요. 아마 그것은 거의 실제적인 일이었을 거예요. 그것은 꾸며 낸 이야기가 아닌 거 같아요. 그만큼 병자들을 사랑하고 아꼈던 긍휼한 사람, 자비의 사람 우리 조상 동의보감의 저자 허준이라는 거예요. 참 우리 조상 가운데 그런 분이 있다는 것이 너무 감사한 생각이 들어요.

허준은 그런 말을 했어요. “의원은 병을 고칠 뿐 병자의 신분을 보지 않는다. 의원은 병을 돌볼 뿐 물질이나 명예를 탐하지 않는다.” 어떻게 우리 목회자들이 꼭 들어야 할 이야기들이더라구요. 목회자는 사람의 영혼을 봐야 하지 그의 부유함이나 가난함을 보지 않는다. 이것을 볼 때 마다 저는 은혜를 받아요. 여러분도 시간이 되면 함께 봤으면 좋겠어요. 그 삶의 인격이 너무 훌륭해요.

예수님은 그 누구도 거절하지 않으셨다. 손 마른 사람! 거절하지 않으시고 위협 가운데서도 그를 치유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안식일이었으니까요. 그런데 그들을 돌려보내지 않으시고 다 치료해주셨어요. 

우리 15절 말씀을 같이 읽어볼까요? “예수께서 아시고 거기를 떠나가시니 많은 사람이 따르는 지라 예수께서 그들의 병을 다 고치시고” 바로 그 날이 안식일인데 예수님을 따르는 수많은 병자들을 예수님은 성경에 보니까 다 고치셨다. 한 사람도 그냥 돌려보내지 않으시고 그들을 다 고치셨어요. 전 이것이 예수님의 사랑이라고 생각합니다. 

또한 예수님은 상한 갈대도 꺽지 아니하시고 꺼져 가는 심지도 끄지 아니하시는 그런 사랑의 주님이셨어요. 

여러분 성경 20절 말씀 한 번 읽어볼까요? “상한 갈대를 꺽지 아니하며 꺼져가는 심지를 끄지 아니하기를 심판하여 이길 때까지 하리니” 아멘! 이 17절부터 21절까지는 이사야 42장의 말씀을 저자가 인용한거예요. 왜냐하면 이 말씀이 바로 예수님의 삶을 미리 예고하고 있거든요. 거절하지 않으시고 긍휼과 자비로 살아가시는 예수님의 성품을 이사야 선지자가 예언하고 있고 그것을 저자가 여기에 기록하고 있습니다. 

어떤 분이냐 19절에 보니까 “그분은 다투지도 아니하고 둘레지도 아니하고 길에서 큰 소리를 치지도 아니하고 그리고 상한 갈대를 꺽지 아니한다! 여러분 혹시 갈대 아세요? 갈대의 순정! 갈대의 마음은 여자의 마음 이예요? 남자의 마음 이예요? 여자의 마음이 갈대 같은 가요? 요즘은 남자들이 지조가 없어서 아마 갈대일지 몰라요. 갈대라는 것은 약하거든요. 바람에 쉽게 흔들려요. 갈대는 약한 것의 표상이예요. 

그런데 갈대인데 어떤 갈대에요? 상한 갈대 상처 입은 갈대 병든 갈대는 더 약해요.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상한 갈대조차도 꺾지 않으신다는 것은 조심조심 다루신다는 거예요. 또한 더 나아가서 예수님은 상한 갈대와 같은 영혼들을 받아주시고 치료하신다는 것입니다. 

상한 갈대와 같은 영혼은 연약한 인간입니다. 고통과 좌절로 인해서 심령이 산산이 부서져 쇠잔해져있는 영혼 그것을 바로 상한 갈대라고 말합니다. 깨어지고 무너진 영혼들 고통과 연단속에 있는 영혼들을 예수님은 결코 외면하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꺼져가는 심지를 끄지 않으신다. 시골에서 등불을 켜보면 등불이 깜박깜박하면 뭐에요? 기름이 바닥나서 불이 깜빡깜빡 바람에 흔들리는 그런 인생 실패한 인생 소망이라고는 없는 인생 겹겹이 어려움이 찾아오는 인생 그런 인생조차도 예수님은 어절하지 않으시고 그를 용납하시고 치료하십니다. 

이것이 바로 주님의 마음이에요. 그래서 예수님은 죄에 억눌려있어 고통가운데 있는 인간들을 찾아오셔서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 십자가에서 자신의 몸을 내어던지고 비를 흘려주셨어요. 재생할 수 없는 상한 갈대와 같은 타버린 심지와 같은 인생들을 예수님은 받아주셨어요. 

그래서 성경을 보면 남편이 5명이나 있는 여인도 외면하지 않으시고 용납하시잖아요. 간음하다 현장에 잡힌 여인 돌로 쳐 죽여야 함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그 여인을 용서해주시잖아요. 손가락질 받는 창기와 죄인들도 예수님의 친구로 받아주셨어요. 문제 삼지 않으셨어요.

가능성 없는 사람들에게 가능성을 주시고 절망하는 영혼들에게 희망을 주신 분이 바로 주님이세요. 찬송가 96장은 예수님의 삶을 우리에게 노래하고 있어요. 

“예수님은 누구신가 우는 자의 위로와 없는 자의 풍성이며 천한 자의 높음과 잡힌 자의 놓임 되고 우리 기쁨 되시네. 예수님은 누구신가 약한 자의 강함 과 눈먼 자의 빛이시며 병든 자의 고침과 죽은 자의 부활되고 우리 생명 되시네.“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분이십니다. 우리를 받아주시는 주님께 우리의 인생을 의탁하고 맡길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예수님은 사람을 차별하지 않으십니다. 누구에든지 거절해주신 적이 없습니다. 여러분 혹 누군가에게 거절당하신 적이 있으신가요? 아픔이 있죠. 상처가 있죠.

올 초에 1월 4일날 강연 100도씨라는 프로가 있는데 김희야씨라는 분이 나와서 강연을 했어요. 나이가 40대 쯤 되는데 이 분은 태어날 때부터 얼굴에 붉은 홍점이 있어요. 이것을 가지고 태어나니까 사람들에게 혐오감을 주는 거예요. 그것 때문에 많은 상처를 받았는데 이 여인은 안면장애를 극복하고 당당해요.

대구에서 공방을 운영하고 있고 사람들과 잘 만나고 예수님 잘 믿는 삶을 살고 있습니다. 사실 이 여인은 몇 번의 거절을 경험합니다. 첫 번째는 자신이 태어나니까 보육원에 버려져있었어요. 얼굴에 홍점이 있어서 그런지 엄마가 못 키우겠어서 보육원에 버렸어요. 엄마에게 거절 당합니다. 

두 번째 거절은 보육원에서 성장을 하는데 초등학교를 갔어요. 미술시간인데 크레파스와 도화지가 있어야 하는데 아무도 챙겨주는 사람 없어 준비를 못했어요. 선생님이 미술도구 없는 사람일어나라 하니까 희야가 일어났어요. 그러자 선생님이 강단으로 나오라고 한 후에 아이들에게 희야의 얼굴을 그리라고 말했어요. 

그 후 선생님이 다 그린 사람 들어봐 하니까 40명이 그림을 일제히 드는데 희야의 얼굴을 새빨갛게 그려 놓았어요. 희야는 어릴 때 사람들이 왜 나를 피해가고 비웃을까 몰랐는데 친구들이 그린 그림을 보고 그 이유를 알게 됩니다. 희야는 거절감을 경험하고 큰 상처를 받게 됩니다. 

세 번째 거절은 보육원마다 아이들을 후원하는 후원자가 있는데 후원자가 와서 내가 후원하는 희야 얼굴 좀 보자하고 찾아왔는데 희야 얼굴을 보고 기절을 하는 거예요. 그리고 이런 아이 후원하기 싫다. 하고 후원을 끊어 버렸어요. 세 번째 상처를 받았어요. 

20살이 됐는데 이 얼굴로 취직할 수도 없고 이 원장님이 너는 보육교사해라 어린이들을 돌봐주는 일을 했어요. 그리고 친구가 소개시켜줘서 남자친구를 만났는데 홍반점 때문에 화장을 짙게 하고 머리를 내리고 만났어요. 일년동안 교제했어요. 희야 씨는 늘 기도했어요. 하나님 이 분이 제 겉모습이 아닌 속 모습을 보게 해주세요. 

그런데 어느 날 오른 쪽 안면에 진통이 와요. 병원에 가보니까 암이 온 얼굴에 다 퍼졌어요. 그래서 얼굴뼈를 다 제거해야 해요. 코뼈 까지 제거해야 해요. 그러면 얼굴이 아주 흉하게 일그러진다는 거예요. 재생도 안돼요. 그런데 살기 위해서 수술을 하게 됐어요. 지금 얼굴도 그런데 얼굴이 더 흉해진다니까 남자친구를 만날 수 없잖아요. 그래서 남자친구에게 이별을 통보했어요. 그리고 수술대에 올라갔어요. 

수술이 끝나고 눈을 떠보니까 자기 앞에 누군가가 서있어요. 보니까 남자친구에요. 그는 왜 알리지 않았냐고 하면서 얼굴이 일그러지고 코가 무너진 그 모습 그대로를 사랑해주었어요. 그 남자는 얼마나 미남인지 딸들은 얼마나 예쁜지 몰라요. 

그녀는 처음으로 남자친구가 자신을 받아줌을 경험합니다. 그리고 그 남자친구와 결혼했어요. 행복하게 살아갑니다, 부모님들도 자기를 기쁘게 받아줬어요. 그는 가끔 아이를 데리고 시장에 가면 사람들이 그래요. 당신 얼굴이 이런데 왜 이렇게 예쁜 애를 데리고 시장을 가느냐고 애 상처받는다고 자기는 상처받지 않게 키운다고 해요. 그래서 아이에게 감사를 가리킵니다. 뒤에서 넘어져도 엄마 나 피나 아파 이러지 말고 엄마 이것 밖에 안다쳤어. 얼마나 감사해? 이렇게 감사를 가리킵니다. 상처 받지 않는 아이로 키웁니다.

아이는 엄마가 운동회에 와도 학예회에 와도 스스럼없습니다. 자랑스럽게 여깁니다. 아이들을 하나님 사랑으로 잘 키웠어요. 그는 자신을 낳아준 엄마의 얼굴을 모르지만 엄마에게 감사해요. 자신에게 생명을 줘서 엄마에게 미안하데 자기가 이렇게 얼굴이 못나서 참 저는 다른 거 몰라도 이 김희야씨 간증이 최고의 설교더라고요. 영상을 잠시 보도록 하겠습니다.

(영상)

네. 정말 감동적인 이야기입니다. 저는 김희야씨를 받아준 남편을 생각하면서 예수님도 우리를 차별없이 받아주셨다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지 몰라요. 오늘도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방황하며 살아가는지 몰라요. 제가 얼마전 인터넷에서 봤더니 인도 소녀의 사진이 인터넷에 올라 왔는데 그게 또 가슴에 감동을 주더라고요. 

(사진)

이 아이가 고아원에 사니까 엄마가 없어요. 그래서 땅바닥에 엄마 그림을 그려놓고 거기에 누워있는 거예요. 저는 우리 예수님이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내게 오너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받아줄 것이다. 용납할 것이다. 얼마나 감사한지 몰라요. 상처가 없는 사람이 어디에 있습니까? 우리 마음의 상처를 주님께 내어 놓고 주님의 치료하심 주님의 은혜와 사랑 앞에 내 모든 것을 내어 놓는 우리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영무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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