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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나님의 은사와 소명 (롬 11:25-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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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은사와 소명 (롬 11:21-29)

은사든 부르심을 말할 때 그것이 특별한 사람에게만 해당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유명한 목회자나 사도, 그들은 정말 하나님의 부르심과 소명을 받아서 그런 일을 하지만, 일반인은 특별한 소명도 없고 은사도 없이 산다고 생각하는 듯합니다. 그 대신 일반인들은 운명이라는 것을 더 친숙하게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누구는 재벌이 될 운명을 가지고 태어났다든가, 누구는 인복이 있다든가, 누구는 운이 좋아서 로또에 당첨이 됐다든가…. 왜 사람들은 하나님에게 기대를 걸기보다는 오늘의 운세 · 손금 · 관상 이런 데에 관심을 갖고 매력을 느끼느냐? 

그 이유는 그쪽이 더 확률이 높고 친서민적이고 대중적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나폴레옹은 말하기를 ‘나는 운을 다스리는 법을 배웠다.’고 했는데, 자신의 성공의 비결이 거기에 있다고 이해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나폴레옹도 자신의 운을 영원히 다스리지는 못했습니다. 

운명. 모든 사람은 운명적인 무엇인가를 소원합니다. 영화 <엽기적인 그녀>를 보면 전지현이 차태현에게 말하는 대사가 있습니다. ‘나는 너를 사귈 생각 없어. 뭔가 운명적인 느낌이 없잖아?’ 저는 이 시대를 사는 젊은이가 애정, 사랑보다 운명에 비중을 둔다는 사실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사랑이란 감정만 가지고는 불충분하다는 얘기입니다.

프랑스의 전 대통령 사르코지는 말하기를 ‘내가 정치를 선택한 게 아니고 정치가 나를 선택했다.’라고 했는데 이것 역시 자신의 운명, 역사적 소명에 대한 신념을 말하는 것입니다. 아무나 나는 프랑스의 대통령이 되겠다고 소원해서 대통령이 될 수 있는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그것보다는 나라가 나를 필요로 하고, 나라가 나를 부르고, 나에게 그런 운명이 있다고 생각할 때 더 거기에 추진력과 담대함이 생길 수가 있는 것입니다. 

윈스턴 처칠도 자신의 운명을 믿었습니다. 그는 말하기를 ‘내가 어렸을 때 누가 나에게 말해주기를 장차 영국이 국가적인 위기를 당하게 될 텐데 자네가 영국을 구원하게 될 것이다.’ 처칠은 이 말을 예언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랬기에 영국이 2차 대전 중에 절체절명의 위기에 처했을 때 처칠은 그의 특유의 낙관주의로 영국을 승리로 이끌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처럼 사람들이 운명에 비중을 두는 이유는 삶에 있어서 우리의 선택, 우리의 노력만으로는 부족하고 뭔가 위로부터 부여된 더 강력한 명분이 필요하다고 느끼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왜 옛날 사람들은 배우자를 스스로 선택한 것이 아니고 부모가 정해준 배필과 결혼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배우자를 스스로 선택하는 시대보다 더 성공적인 결혼생활을 영위할 수 있었느냐? 

그것은 인생에는 나의 선택보다도 더 강력한 권위가 존재하고 그것이 내 인생에 더 큰 힘이 돼 줄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어려움에 봉착했을 때 견딜 수 있는 힘이 되었으리라고 보는 것입니다. 

그러나 운명, 또는 운이라는 개념은 비인격적이고 매우 무작위적인 것입니다. 저는 영화 <포레스트 검프>를 감동적으로 보고 잘 만든 영화라고 생각했지만 그럼에도 그 영화를 보면 상당히 냉소적인 내용을 담고 있는데, 인생은 우연한 것이다, 무작위적인 것이라는 강한 메시지를 담고 있습니다. 그 영화를 보면 깃털이 바람 부는 대로 날다가 무작위로 어느 사람에게 떨어지는 장면이 나오는데 그 깃털이 상징하는 것은 운명이라는 거예요. 운명이 우연히 무작위로 누구에게 임한다는 말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렇게 가르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비인격적인 힘이 아니에요. 하나님은 운과 같은 분이 아니에요. 하나님은 인격체이십니다. Person. 하나님은 우리의 삶에 인격적으로 개입하십니다. 이것은 우연도 아니고, 운도 아니고, 인격적인 하나님의 지혜와 섭리와 계획과 선함과 사랑에 의한 것입니다. 우주만물은 우연히 존재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만드신 것입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인간이 존재하는 것도 하나님이 창조하셨기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우리의 인생 자체가 하나님의 부르심에 의한 것이지, 우리가 이 땅에 우연히 태어난 것이 아니에요. 우리는 부르심을 말할 때 목사의 부르심이라든가 선교사의 부르심만을 생각하려고 하지만 우리의 인생도 하나님의 부르심에 의한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인생을 선택하지 않았지만 하나님이 선물로 주셨습니다. 당신의 섭리에 의하여. 그렇기 때문에 모든 사람의 삶에는 선한 목적이 있고 그 목적을 발견해야 되는 것입니다. 쓸모없는 인생은 아무도 없습니다. 지금까지는 쓸모없다고 생각했을지라도 하나님 앞에 나오면 쓸모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우리는 ‘왜 사느냐?’라고 묻지 말고 ‘무엇을 위하여 살아야 되느냐?’라고 물어야 됩니다. 

그 쓸모를 억지로 창조하려고 해도 안 됩니다. 내가 스스로 억지로 선한 일을 함으로 내 쓸모를 창조하려고 하면 안돼요. 억지로 자선사업을 한다든가 그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부르심을 찾아야 됩니다. 부르심은 하나님이 부여하시는 것이지 내가 의무적으로 만드는 것이 아니에요. 억만장자들을 보면 자선의 밤 행사를 많이 하는데 거기에는 부르심보다는 사교적인 성격이 더 강하게 부각됩니다. 부자라고 그의 소명이 자선활동에만 있는 것이 아니에요. 아브라함은 부자였지만 자선 활동했다는 성경구절 없습니다. 그보다 더 중요한 일을 했지요. 

우리의 인생뿐만이 아니고 우리가 그리스도인이 된 것도 하나님의 부르심에 의한 것입니다.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였노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이 의미하는 것은 우리의 구원이 나로 말미암지 않고 나의 선택, 나의 의지, 나의 노력에 좌우되지 않고 하나님의 예정과 은혜로 말미암는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만세 전에 하나님이 우리를 예정하셨다고 했습니다. 아브라함이든 모세든 엘리야든 다윗이든 베드로든 요한이든 바울이든, 그들에게 나타나는 현저한 공통점은 그들이 하나님을 찾아간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그들을 찾아오셔서 부르셨다는 사실이에요. 하나님이 주도하셨어요. 그것이 타종교와 분별되는 아주 중요한 면입니다. 

타종교에서는 인간이 신을 찾아가요. 인간이 진리를 찾아갑니다. 그러나 성경에서는 하나님이 찾아오세요. 하나님이 우리의 문을 두드리세요. 하나님이 독생자를 보내주셨어요. 구원은 하나님으로 말미암습니다. 

또한 하나님의 부르심이 뜻하는 것은 소위 개천에서 용이 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선택은 인간의 혈통이라든가 가문이라든가 과거의 경력을 좇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미련한 자를 택하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시고 하나님이 약한 자들을 택하여 강한 자를 부끄럽게 하신다’고 했습니다. ‘나중 된 자가 먼저 되고 먼저 된 자가 나중되리라’고 하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과거만 봐서는 도저히 미래가 없을 것처럼 보이는 사람, 시쳇말로 팔자가 사나운 사람을 주님이 선택하여 은혜를 베푸십니다. 막달라 마리아 같은 사람이 그 전형적인 예입니다. 과거가 어찌됐든, 과거에 어떤 허물이 있던, 바울처럼 교회를 핍박한 과거가 있었던 사람도 주님이 붙드시면 과거를 더 이상 묻지 않습니다.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는 과거를 세탁하는 것이 가능합니다.

그 전형적인 예가 저에요. 그렇다고 제가 과거에 범죄자였다는 얘기는 아니에요. 저는 조상 중에 예수님을 섬기는 분이 없었습니다. 목사도 없고 집사도 없고 아무도 없었어요. 주님을 섬기는 분이 가족 중에 없었습니다. 나중에 아버님은 장로님으로 섬기다가 돌아가시고 어머님은 권사님이 되셨지만, 처음에 안 그랬습니다. 이민을 가면 다 교회를 다니니까 구원은 받을 수 있었을지라도 목사가 되는 것은 아무도 예측할 수 없었던 일이에요. 

목사가 되는 것은 누가 권장한다거나 추천해서 될 수 있는 일이 아니에요. 누구도 저에게 목사 되라고 권장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만류했습니다. 목사 될 성격이 아니라고 말했어요. 맞는 지적이에요. 그렇기 때문에 부르심을 신뢰할 수 있는 것입니다. 안 될 것 같은 사람을 되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부르심이에요. 그것이 하나님의 은혜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신뢰해야지 사람의 타고난 천성을 신뢰하는 것이 아니에요. 사람이 착하기 때문에 기독교인이 되는 게 아니고 착하기 때문에 하나님을 섬기는 종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은 무엇을 하고 살 것이냐? 이건 젊은이들만의 고민이 아니고 은퇴한 분들의 고민이에요. 많은 분들이 ‘나는 은퇴하면 전원에 돌아가서 농사나 짓고 살 것이다.’라고 말씀하시는데 소가 웃습니다. 농사는 쉬운 게 아닙니다. 젊었을 때부터 배우고 익혀서 할 수 있는 것이지, 일평생 도시에서 다른 일 하다가 은퇴한 후에 여유롭게 농사를 짓는다는 것은 천만에 말씀이에요. 그러므로 사람이 무엇을 하고 살 것이냐? 인간의 부르심과 은사에 대하여 고민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제가 오래 전 초등학교 수련회에 가서 초등학생들을 대상으로 강의 하면서 이런 말을 했습니다. 
‘첫째로, 하고 싶은 일을 하라! 
둘째로, 잘 할 수 있는 것을 하라! 
셋째로, 해서 자립할 수 있는 것을 하라! 
넷째로, 남에게 도움이 되는 일을 하라! 
다섯 번째로,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일을 하라!’

그 때는 제가 초등학생들을 대상으로 말하기 때문에 아무 부담 없이 이런 말을 했는데 곰곰이 생각해 보면 이만 저만 부담되는 말이 아닐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두 번째도 통과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아요. 그 말은 첫 번째로 하고 싶은 일을 하라고 했는데 하고 싶은 일이 없는 사람들이 세상에 많고 하고 싶은 일이 있더라도 그것을 반드시 잘한다는 보장이 없어요. 

게다가 그것으로 자립? 그리고 나아가서 사람들에게 도움? 그리고 하나님에게 영광? 이 다섯 가지를 다 할 수 있다는 것은 기적이에요. 첫 번째, 두 번째, 세 번째까지 진행 못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 말씀은 유효합니다. 우리에게는 하나님이 주시는 은사와 부르심이 있습니다. 그것을 믿어야 됩니다. ‘하나님의 은사와 부르심에는 후회하심이 없느니라’ 

마이클 잭슨이 크리스천이었는지는 저도 잘 모르지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자기의 재능이 어디서 왔느냐 하는 것을 알더라는 것입니다. 마이클 잭슨에게 ‘그 아이디어가 어디서 났느냐? 그 악상이 어디서 떠올랐느냐?’ 물어보면 항상 하늘을 가리켰어요. 하나님이 그 재능을 주었다는 말입니다. 자신의 재능이 하나님으로부터 말미암았다고 믿는다면 그 자체가 보배로운 것입니다. 그 이상 무엇을 요구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이 나에게 재능을 주셨다고 믿고 내가 그것을 행함으로 하나님을 경험할 수 있다고 믿는다면 그 자체가 값진 것입니다. 

80년대에 등장했던 <불의 전차>라는 영화는 실화를 바탕으로 한 영화인데 스코틀랜드의 육상선수가 자기 경기가 주일에 있다는 이유 때문에 경기 참석을 거절했어요. 주일을 범할 수 없다고 해서 주일에 예선이 있는데 참석하기를 거부했어요. 그래서 영국의 왕과 올림픽위원회가 모여서 고민고민 하다가 원래 뛰기로 한 100미터가 아니라 다른 사람이 뛰기로 해했던 400미터를 출전하는 것으로 해서 겨우 금메달을 딸 수 있었다는 실화를 바탕으로 한 영화인데 이 영화에 이런 대사가 나옵니다. 

주인공이 원래는 중국에 선교사로 가려고 했던 사람인데 그 사람이 올림픽 육상선수로 출전한 것입니다. 그래서 그의 가족은 그가 선교사 준비를 하지 않고 운동하는 것을 못마땅하게 생각합니다. 그 가족에게 자기 입장을 설명하기 위해서 이 크리스천 운동선수가 이런 말을 합니다. 

‘하나님은 나를 중국선교를 위해 만드셨다. 그러나 동시에 하나님은 나를 빠르게 만드셨다. 나는 뛸 때 하나님의 기쁨을 느낀다.’ 

위대한 말이에요. 그냥 운동이 아니고, 자기의 실력을 증명하기 위한 게 아니고, 자신의 재능이 하나님이 준 것이고 그것을 사용할 때 하나님을 느낀다는 말이에요. 이런 확신을 가진 사람을 이길 수가 없습니다. 왜 뛰느냐? 뛰어서 밥이 나오느냐 떡이 나오느냐? 그게 문제가 아니고 ‘이게 하나님이 내게 주신 은사요, 나는 뛸 때 기쁘다. 하나님의 기쁨을 느낀다.’ 그것으로 충분한 의미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사와 부르심에는 후회하심이 없다고 했습니다. 한번 준 부르심은 취소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당신의 마음을 되돌리지 않습니다. 크리스천이 한번 구원 받으면 영원히 구원 받는다고 말하는 이유도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부르심을 후회하지 않으시기 때문이에요. 우리를 당신의 자녀로 택하셨다가 도중에 취소하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은 후회하심이 없습니다. 

남편과 아내로서의 부르심도 마찬가지입니다. 배우자가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는 그 부르심은 후회하심이 없습니다. 유효하다는 사실입니다. 성격차가 있고 이런 일, 저런 일이 있더라도 적어도 하나님이 보시기에 남편과 아내로서의 부르심에 대하여는 후회하심이 없습니다. 

우리 인생도 마찬가지에요 우리 인생도 우리가 선택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주신 것이고 하나님의 부르심에 의한 것이기 때문에 우리가 도중에 임의로 포기할 자격이 없습니다. 하나님이 포기하지 않는데 사람이 임의로 포기하면 안 됩니다. 내 인생에 하나님의 부르심이 있습니다. 그것을 발견하기 위하여 애써야 됩니다. 

이것을 믿지 못하면 인생은 무의미할 것입니다. ‘이런들 어떠하리, 저런들 어떠하리 ~’ 이방원이 그 시를 만들었다고 하지만 이방원 자신은 인생을 그렇게 믿었으리라고 보지 않습니다. 만일 이방원이 ‘이런들 어떠하리 ~’ 이렇게 생각했다면 그 많은 대가를 치르면서 조선왕조를 세우지 못했을 것입니다. 정몽주를 회유하기 위해서 그런 말을 한 것뿐이지, 본인도 ‘이런들 어떠하리 ~’ 라고 생각한 사람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부르심과 은사는 빵과 버터와 같습니다. 항상 따라다닙니다. 은사를 통하여 부르심을 알 수 있고 부르심이 있는 곳에는 은사가 따라옵니다. 부르심은 있는데 은사가 없다? 하나님은 그런 분이 아니에요. 하나님이 우리에게 어떤 일을 맡기고 그 일을 이룰 수 있는 능력을 주시지 않는 분이 아닙니다. 부르심이 있다면 그것을 감당할만한 능력을 주십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주신 능력이든 재능을 통하여 거기에 하나님의 부르심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지혜가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버터가 빵을 위한 것이고 빵이 있는 곳에 버터가 있는 것처럼 하나님의 은사와 부르심도 함께 따라다닙니다. 하나님의 지혜가 여기에 있어요. 하나님은 무엇을 하고 싶은 소원을 주시면서 그것을 할 수 있는 능력을 안 주는 분이 아니에요. ‘너희 마음에 소원을 두고 그 뜻을 행하게 하시느니라’고 했습니다. 

저는 어렸을 때부터 말을 잘했습니다. 그래서 장차 정치인이나 법조인이 될 줄 알았어요. 그런데 하나님은 저를 목사로 만드셨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계획이 있었는데 당시에는 몰랐다는 얘기지요. 믿음을 갖고 하나님 앞에 나오고 하나님 앞에 순종하게 되면서 하나님의 계획한 것을 비로소 발견할 수 있었고 그것을 이루는 데 많은 세월이 걸립니다. 그것을 익히고 제대로 감당하는데 많은 시간이 걸립니다. 왜 우리가 일찍 신앙을 얻고 일찍 신앙을 배워야 될 필요가 있느냐? 사람이 어떤 선한 일을 하려고 하던 그것을 배우고 익히는데 많은 세월이 필요하고 시행착오가 필요하고 훈련을 받아야 됩니다. 그러므로 하루가 귀중합니다. 일 년이 귀중합니다. 

하나님의 나라에는 쉼이 없어요. 하나님이 쉬지 않습니다. 하나님 섬기는 일을 쉴 수 없습니다. 예배하는 일을 쉴 수 없습니다. 예배를 쉬게 되면 우리의 신앙이 녹슬기 시작합니다. 하나님 섬기는 일을 쉬게 되면 우리의 은사가 녹슬기 시작합니다. 후회하는 건 아니에요. 은사를 거둬가지는 않지만 은사가 녹슬고 믿음이 녹슬어요. 하나님 섬기는 일을 쉬려고 생각한다는 것은 벌써 시험을 받고 있다는 얘기에요. 

믿음의 일은 쉴 수가 없어요. 믿음은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시는 날까지 지켜야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신뢰해야 됩니다. 하나님의 은사와 부르심에는 후회하심이 없습니다. 우리도 후회하면 안 되는 것입니다. (김영준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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