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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마지막 때를 위한 우리의 믿음! (히 11: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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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때를 위한 우리의 믿음! (히 11:5-6)


우리가 자동차를 몰고 가다가 캄캄한 터널을 만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어느 누구도 그 터널 안에서 캄캄하다고 불평하고 원망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캄캄하지만 잠시 참는 가운데 통과하면 우리는 밝은 세상을 볼 수가 있습니다.  우리의 인생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근심과 걱정에 얽매이지 마십시오.  그것은 나로 하여금 또 다른 근심과 걱정에 얽매이게 만듭니다.  뿐만 아니라 근심은 자신의 마음을 상하게 하고 뼈를 마르게 한다고 했습니다.  때문에 근심과 걱정은 내 안에 있는 열정을 빼앗아 갑니다.

그러므로 마음을 즐겁게 하십시오.  그리고 다시 일어나 목표를 붙들고 힘차게 나아가십시오.  지나간 과거의 것들은 다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그 부름의 상을 위하여 좇아가십시오.  그것이 오늘 저와 여러분, 우리 모두를 향한 하나님 아버지의 뜻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믿음이 무엇입니까?  믿음은 맡기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정말 하나님의 살아 계심과 전능하심을 믿으십니까?  하나님을 믿는다면 여러분의 장래를 하나님께 맡기십시오.  우리의 모든 인생사의 문제를 하나님께 온전히 맡기십시오.  그리고 주님만을 온전히 붙잡으십시오.  그러면 우리가 알지 못하는 좋은 일이 일어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끊임없이 우리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네 길과 짐과 모든 일들을 여호와께 맡기라."(시 37:5, 55:22, 잠 16:3)

그렇습니다.  하나님께 맡기십시오.  맡기면 하나님께서 반드시 이루어주실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하나님께 맡겨야지 하면서도 맡기지를 못합니다.  이유가 무엇입니까?  언제나 선택에서 흔들리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사실 가만히 보면, 우리는 언제나 결정적인 순간에 인간적인 선택을 하게 됩니다.  그러나 기억하십시오.  믿음의 사람은 그 선택이 분명해야 합니다.  그 선택이 흔들려서는 안됩니다.

먼저 구할 것을 먼저 구하는 것, 그것이 신앙입니다.  선택의 용기가 기적을 낳습니다.  믿음의 사람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법도를 사랑하며, 하나님의 도를 행하는 일에 가장 우선 순위를 두어야 합니다.  중요한 것은 이것입니다.  그 선택이 분명한 사람은 갈등하거나 흔들리지 않습니다.  선택이 분명하지 못하니까 두 사이에서 갈등하고 흔들리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주 앞에서 예배를 드리고 말씀을 듣는 가운데 이 믿음의 선택이 보다 분명해 질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인생은 동행입니다.  그리고 인생이 아름다운 것도 동행이 있기 때문입니다.  누군가를 만나 그의 도움을 받으며 평생 그와 더불어 동행하는 여행, 그것이 바로 인생입니다.  그런 점에서 믿음의 삶도 동행입니다.  연약한 우리 인간이 하나님을 만나 그분의 도움을 받으며 평생 그분과 더불어 동행하는 여행이 바로 믿음의 삶입니다.  중요한 것은 그 동행이 영원히 함께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는 이런 여행을 성공적으로 마무리했던 한 사람의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습니다.  그가 바로 에녹이라는 사람입니다.  그의 인생 여행이 성공적일 수 있었던 유일한 이유가 있었다면 그것은 그의 믿음 때문이었다고 오늘 본문은 증언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에녹은 그의 믿음 때문에 마지막이 아름다운 인생이 될 수가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에녹의 믿음은 어떤 믿음이었을까요?  그리고 우리의 마지막 인생이 아름답기 위해서는 어떤 믿음을 가져야 할까요?

첫째로, 에녹의 믿음은 인정받은 믿음이었습니다.

본문 5절 마지막에 보면 "증거를 받았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증거라는 말은 히브리서 11장에서 가장 많이 등장하고 있는 단어인데, "good report"라는 단어로 번역될 수도 있습니다.  믿음으로 좋은 성적을 내는 인생을 살 수가 있었다는 말입니다.  다시 말하면 믿음으로 하나님께 인정을 받을 수가 있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표준새번역 성경에서는 "인정을 받았다"고 번역을 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에녹이 하나님께로부터 어떤 인정을 받았습니까?  오늘 본문의 내용을 보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라 하는 증거를 받았다"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라는 인정을 받았다는 말입니다.  한 마디로 그의 믿음은 인정받은 믿음이 되었습니다.

동양권의 전통 윤리, 특별히 유교 윤리에서는 인생을 가장 가치 있고, 훌륭하게 산 사람은 부모를 기쁘시게 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을 가리켜서 효자, 효녀라고 불렀습니다.  이것이 바로 효의 덕행이었습니다.  기독교의 윤리에서도 부모를 기쁘시게 하는 것을 여전히 소중한 가치로 받아들입니다.  그렇지만 기독교의 윤리는 한 걸음 더 나아가 부모를 기쁘시게 하는 그 이상의 더 큰 덕목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들은 어떻게 하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로서의 삶을 살 것인가를 매 시간마다 때마다 결단해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서 그렇게 살아드려야 합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들 주변의 이웃들이 사는 삶의 모습을 보면, 부모를 기쁘게 하는 사람도 찾아보기가 어렵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사는 사람을 찾아보기도 어렵습니다.  오늘 우리가 살아가는 이 시대는 온통 자기만을 기쁘게 하려는 사람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오늘 우리의 시대는 병적인 이기주의적 시대입니다.  그래서 모두가 자기 자신을 기쁘게 하려는 일에만 몰두해 있습니다.  이런 시대의 모습은 현대인들에게 독특한 질병을 안겨다 주었습니다.  그 병은 바로 왕자병과 공주병입니다.

왕자병을 테스트하기 위해서는 이런 질문을 던져본다고 합니다.  "당신은 언제부터 왕자병에 걸렸습니까?"  그러면 이렇게 대답을 한다고 합니다.
"태자 시절부터입니다."

공주병을 테스트할 수 있는 방법 가운데 하나는 공주병 증세가 있는 사람 앞에 총을 갖다 들이대도 결코 두려워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이유는 자기 앞에 "받들어 총!" 하는 줄 알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이런 시대 속에서 사람들은 모두가 자기 자신을 기쁘게 하기 위해서 몰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상한 것은 사람들이 결코 행복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정확하게 오늘 현대인들이 불행한 이유를 말한다면 그것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그들은 자기 자신 이외에는 사랑과 섬김의 대상을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참된 행복이라는 것은 자기를 기쁘게 하는데 있지 않습니다.  진정한 행복은 내가 사랑하고 섬길 수 있는 대상을 발견할 때, 거기에 진정한 행복이 있습니다.  효자는 부모를 사랑하고 섬기면서 자기 존재의 의미를 확인합니다.  동일하게 참된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분을 섬기면서 내가 존재하고 있는 의미를 확인합니다.  그리고 거기에서 진정한 행복의 의미를 깨닫게 됩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가 무엇으로 어떻게 해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가 있겠습니까?  우리는 때로 어떤 엄청난 업적을 세워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그렇지만 오늘 본문은 매우 단순하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믿음으로!"  에녹은 믿음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했다고 말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그냥 하나님을 믿고 그 하나님을 따르면 하나님은 정말로 행복해 하십니다.  그럴 때에 하나님은 기뻐하십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서 히브리서 기자는 믿음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라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본문 6절의 말씀을 다같이 읽도록 하겠습니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보십시오.  성경은 우리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한 방법으로 무슨 거창한 전제 조건을 제시하지 않았습니다.  여기에 보면 두 가지만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계신다는 것을 믿고, 마음으로 하나님을 찾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알아서 나에게 상급을 주신다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이 살아 계심을 분명히 믿습니다.  그렇다면 그 믿음을 입술로만 고백하지 말고 내 삶의 현장에서 그분의 존재를 인정하십시오.  그리고 마음 깊은 곳에서 부지런히 하나님을 신뢰하고 그분을 따르는 자가 되십시오.  그러면 하나님은 그런 우리의 모습을 보시고 기뻐하실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알아서 상급을 주실 것입니다.

기억하십시오.  오늘 본문은 단순히 믿음만 가지고 나오기만 하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다고 약속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행위가 좀 부족하여도 그냥 믿고 신뢰하고 주님을 따라가기만 하면 된다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말해서 믿음만이면 됩니다.  이것은 루터와 칼빈을 비롯한 종교개혁자들이 붙잡았던 신앙입니다.

그런데 큰믿음교회의 변승우라는 사람은 예수를 믿고 고백하면 구원받는다는 이 성경적인 가르침을 이단 사설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는 믿음에 행위가 수반하지 않는다면 그 믿음은 구원받을 수 없는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그는 진짜 구원받은 사람도 진짜 버림을 받을 수 있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의 주장은 분명히 성경적인 가르침에서 벗어난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통합측을 비롯해서 한국교회는 큰믿음교회의 변승우씨를 이단으로 규정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하는 집회는 참석하지 못하도록 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만약에 변승우씨의 말대로 한다면 우리는 얼마만큼의 선행을 해야 구원받을 수가 있습니까?  우리가 얼마 정도의 헌금을 드려야 구원이 확정되었다고 안심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의 가르침은 중세 로마카톨릭 교회가 교인들에게 면죄부를 팔면서 행위의 신앙을 가르쳤던 것과 다를 바가 하나도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행위는 신앙이라는 이름으로 많은 사람들에게 공포와 불안을 조장하게 될 것입니다.

오늘 성경의 본문을 잘 보십시오.  성경은 에녹이 어떤 행위를 했고, 그가 어떤 업적을 쌓았는지에 대해서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에녹은 그냥 믿음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라는 인정을 받았다고 오늘 본문은 증거하고 있습니다.  기억하십시오.  우리는 믿음으로만 구원을 받습니다.  믿음으로만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함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 이후의 삶은 믿는 자에게서 나타나는 믿음의 열매일 뿐이지 그것이 구원의 조건이 될 수는 없습니다.

그렇다면 좀 더 구체적인 질문으로 에녹은 어떻게 하나님을 믿음으로 삶을 살아갔을까요?  오늘 본문인 히브리서에서는 이 질문에 대한 해답을 찾기가 어렵습니다.  그렇지만 창세기 5장에 나타난 에녹에 관한 내용을 보면, 에녹은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았다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에녹의 믿음은 하나님께 인정을 받은 믿음이었을 뿐만 아니라 두 번째로, 에녹은 하나님과 동행하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내 인생의 마지막 때를 위한 믿음, 그것은 하나님과 동행하는 믿음이어야 합니다.  창세기 5장 22절에 보면 이렇게 기록되어져 있습니다.  앞에 스크린에 있는 내용을 다같이 읽도록 하겠습니다.
"므두셀라를 낳은 후 삼백 년을 하나님과 동행하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에녹은 하루 이틀이 아니라 줄곧 계속해서 300년을 하나님과 동행했다고 했습니다.  만약에 누군가가 저에게 "그리스도인의 삶이 무엇입니까?  도대체 그리스도인들의 신앙생활이 무엇입니까?"라고 묻는다면 저는 단순히 이렇게 대답을 하고 싶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입니다."

내 인생의 도상에서 어느 날 내가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내가 주인인 줄을 알고 살다가 하나님이 내 인생의 주인인 것을 깨달았습니다.  주인 되신 하나님을 나의 하나님으로 만났습니다.  그렇다면 이제 주인 되시는 그분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며 그를 따라가는 것이 마땅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문제는 하루 이틀이 아니고 어떻게 한 평생을 일관성 있게 흔들림이 없이 계속해서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이 가능할 수가 있겠습니까?  에녹의 인생을 통해서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 수 있게 만든 이유를 적어도 두 가지로 추정해 볼 수가 있습니다.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할 수 있었던 첫째 이유는, 그가 하나님의 뜻에 순종했기 때문입니다.

일찍이 아모스 선지자는 3장 3절에서 이런 말을 했습니다.  "두 사람이 뜻이 같지 않은데 어찌 동행하겠으며."  그러니까 두 사람의 뜻이 맞아야 동행할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뜻이 다르다면 한 걸음도 함께 걸어갈 수가 없습니다.

오늘 우리의 시대에서 결혼이 파경을 맞는 이유에는 여러 가지 복합적인 원인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따지고 보면 가장 근본적이고 보편적인 이유는 뜻이 맞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또 따지고 보면, 뜻이 틀리지 않고 절대적으로 맞는 부부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부부는 일심동체라고 말하지만 그런 부부는 전설의 고향에서도 나오지 않습니다.  어떤 부부도 자연인 그대로 두 사람의 뜻이 자동으로 일치하는 경우란 결코 있을 수 없습니다.  단지 사랑하면 뜻을 따라 주고 맞추어 주는 것입니다.  둘 중에 한 사람만이라도 기꺼이 상대방을 기쁘게 하고자 하는 동기를 가지고 상대방의 뜻을 따라준다면 대부분의 경우 결혼의 파경은 막아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물론 두 사람이 서로가 서로를 피차에 기쁘게 하고자 하는 동기를 가지고 산다면 건강한 부부관계를 만들어갈 수가 있을 것입니다.

저는 하나님과의 관계도 마찬가지라고 생각을 합니다.  에녹을 보십시오.  오늘 히브리서 본문에서 믿음으로 에녹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라는 증거를 받았다고 했습니다.  어쩌면 에녹에게 있어서는 하나님의 뜻을 따라가는 것이 그렇게 어렵지 않았을 것입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데 하나님의 뜻을 따라가는 것이 어려울 이유가 없을 것입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뜻에 순종함이 그에게는 기쁨이었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소원하십니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정말 사모하십니까?  그렇다면 중요한 것은 이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이 내 인생에서 가장 소중한 삶의 동기가 되셔야 합니다.  그리고 그 뜻을 따라갈 준비만 되어 있다면 우리도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 수 있다고 믿습니다.

하나님과 가장 완벽한 의미에서 동행하는 삶을 살았던 분은 예수님이셨습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시기 전, 영원 전부터 아들이신 예수님은 본질적으로 한 분이신 성부 하나님과 같이 있었고 동행하셨습니다.  그는 이 땅에 오셨어도 매 순간 순간마다 성부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사셨습니다.  예수님이 그렇게 사실 수 있었던 가장 중요한 이유는 하나님의 뜻이 그의 존재 이유이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아버지의 뜻을 떠나서는 스스로 아무 것도 하지 않는다."  심지어 예수님은 요한복음 4장 34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앞에 있는 스크린의 내용을 다같이 읽도록 하겠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며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이것이니라."

예수님에게는 하나님의 뜻을 행하며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그 일을 이루어 가는 것이 그렇게도 중요하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이 하나님과 동행할 수 있었던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었을 것입니다.  때때로 인간의 육신을 입고 오신 예수님은 고난과 시련 앞에서 편한 것을 원하셨을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의 뜻과 아버지의 뜻이 일시적으로 충돌하는 것을 경험하기도 하셨을 것입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그런 모습의 인간 예수님을 볼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겟세마네 동산에서 십자가를 앞에 두고 이렇게 기도하십니다.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  그래서 마침내 자신의 뜻을 넘어서서 아버지의 뜻을 받아들일 수가 있었던 예수님, 그렇기 때문에 아버지 하나님과 줄곧 동행하는 삶을 살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이 하나님과 동행했던 삶의 비밀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또한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한 비밀이었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또한 여러분과 제가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 속에 들어가는 비밀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내 뜻을 부인하고 하나님의 뜻을 위해서는 어떤 대가라도 지불할 수 있다는 각오를 하십시오.  그 각오만 되어 있다면 사랑하는 여러분, 저와 여러분의 삶에는 하나님과의 동행이라는 멋진 삶이 펼쳐질 것을 믿습니다.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할 수 있었던 두 번째 이유는, 그가 하나님의 심판을 준비했기 때문입니다.

창세기에 5장에 보면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게 된 전기가 있습니다.  창세기 5장 22절에 보면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앞의 스크린에 있는 내용을 다같이 읽도록 하겠습니다.
"므두셀라를 낳은 후 삼백 년을 하나님과 동행하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그러니까 에녹이 아들을 낳기 전에 하나님과 동행했다는 기록이 없습니다.  그가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게 된 인생의 터닝포인트는 아들 므두셀라를 낳은 후였습니다.  우리가 가정할 수 있는 것은 에녹에게 있어서 그의 아들 므두셀라의 출생이 그로 하여금 하나님과 동행하는 어떤 결정적인 동기였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의 아들 므두셀라가 태어났을 때 어떤 일이 일어났을까요?

뉴베리(Newberry)라는 성경학자는 특별히 에녹의 아들의 이름에 주목합니다.  '므두셀라'라는 이름에는 "그가 죽으면 심판이 온다."라는 뜻이 있습니다.  '므두셀라'라는 이름의 본래 뜻은 "창 던지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고대 부족국가에서 부족들이 싸움을 하게 되면 제일 앞장을 서는 사람은 창을 가장 잘 던지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생각을 했습니다.  저 앞에 오는 창을 잘 던지는 사람만 처치하면 저 부족은 끝장이 난다.  그래서 '므두셀라'라는 이름의 뜻에는 보편적으로 이런 뜻이 붙어 다녔다고 합니다.  "저가 죽으면 끝이 난다.  그가 죽으면 심판이 온다."

아마 우리는 다음과 같은 광경을 연상해 볼 수가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어느 날 에녹을 불렀을 것입니다.  "에녹아!"  "예, 하나님!"  "이 세상이 악해졌지?"  "그렇습니다."
"이 세상에 나의 심판이 이제는 불가피하다.  그런데 심판이 가까웠다는 징조를 너에게 주마.  너에게 아들이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의 이름을 '므두셀라'라고 지을 것이다.  그가 죽으면 심판이 온다는 뜻이다."

드디어 어느 날 에녹은 아들을 낳았습니다.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을 기억하고 있었을 에녹은 그 아들의 이름을 '므두셀라'라고 지었습니다.  "그가 죽으면 심판이 온다."

그때부터 아들을 볼 때마다, 혹은 '므두셀라'라고 아들의 이름을 부를 때마다 이 에녹은 계속해서 다가오는 하나님의 심판을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 아들의 존재는 아버지에게는 심판이라는 메시지를 던지고 있었을 것입니다.  "심판!  심판!"

그런데 오늘 성경은 말하기를 에녹은 므두셀라를 낳은 후 하나님과 동행했다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심판이라는 진지한 메시지를 받아들이자 마자 에녹의 삶은 바뀌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다가오는 심판의 자리에서 부끄럽지 않기 위하여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게 된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속된 말로 우리가 인생을 왜 개판으로 삽니까?  저는 그것이 하나님의 심판을 믿지 않기 때문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내가 토해 놓은 모든 말과 생각들, 그리고 내가 취한 낱낱의 행동들이 어느 날 하나님 앞에서 반드시 심판된다.  이 심판의 사실을 우리가 정말로, 정말로 믿는다면 어떻게 그렇게 살 수가 있겠습니까?  이 심판을 믿지 않기 때문에 개판으로 사는 겁니다.

물론 구원받은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정죄의 심판이나 멸망의 심판은 없습니다.  앞에서 말했듯이 큰믿음교회의 변승우씨는 진짜 그리스도인도 지옥에 갈 수 있다고 말하고 있지만, 그러나 아닙니다.  진짜 그리스도인에게는 지옥에 가야 할 멸망의 심판은 없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에게도 심판은 있다고 성경은 말하고 있습니다.  그것을 성경은 상급의 심판이라고 말합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후서 5징 10절에서 말하기를 우리도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드러나 각각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고 했습니다.  기억하십시오.  어느 날 우리의 살아왔던 삶을 결산하는 심판은 반드시 있습니다.  우리가 이것을 참으로 믿는다면 어떻게 적당히 살아갈 수가 있습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밤에 내 인생이 끝난다, 그리고 나는 하나님 앞에서 내가 살아온 모든 삶의 내용을 결산해야 한다는 사실을 참으로 믿는다면 우리의 삶은 좀 진지해지지 않겠습니까?

에녹은 므두셀라를 낳은 후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았다.  이것이 가상적인 추측이 아니라는 성경적인 증거는 많이 있습니다.  신약성경의 유다서에 보면, 14절과 15절에 아담의 칠대손 에녹이 자기 동시대의 사람들에게 설교를 했는데 그 주제가 심판이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경건하지 않은 말을 한 사람들, 경건하지 않은 모든 행동들에 대해서 하나님이 심판하신다고 에녹이 설교를 했다는 것입니다.  에녹은 심판을 믿었습니다.  그리고 심판을 전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심판의 메시지 앞에서 자신의 삶을 바꾸어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았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심판이라는 명제는 우리로 하여금 인생을 진지하게 만듭니다.  그래서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할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 앞에서 부끄럽지 않는 삶을 살기를 소망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런 질문을 던져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 아들이 죽었을 때 정말 심판이 왔는가?

창세기 5장에 보면 므두셀라는 969세를 살았습니다.  어떻게 그렇게 오랫동안 살 수 있는가를 생각하지 말고, 성경이 말하고자 하는 의미가 무엇인가를 생각해야 합니다.  므두셀라는 969세를 살았습니다.  그런데 창세기 5장 25절에 보면, 므두셀라가 187살에 라멕을 낳았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28절에 보면, 라멕은 182세에 노아를 낳았습니다.  그러니까 노아가 태어났을 때 므두셀라는 369세였습니다.  므두셀라의 총 수명은 969세입니다.  그런데 창세기 7장 11절에 보면, 놀라운 사실이 기록되어져 있습니다.

앞의 스크린에 있는 창세기 7장 11절을 다같이 읽도록 하겠습니다.
"노아가 육백 세 되던 해 둘째 달 곧 그 달 열이렛날이라 그 날에 큰 깊음의 샘들이 터지며 하늘의 창문들이 열려."

노아가 태어났을 때 므두셀라는 369세였다고 했습니다.  그러면 노아가 600세 되던 해 므두셀라의 나이는 얼마였습니까?  계산이 되지 않습니까?  369 더하기 600을 하면 되지 않습니까?  얼마입니까?  969세였습니다.  그러니까 노아가 600세 되고 므두셀라가 969세가 되어 그가 죽던 그 해에 하늘의 창문들이 열려 심판이 시작되었다는 것입니다.

므두셀라라는 이름은 "그가 죽으면 심판이 온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므두셀라가 죽던 그 해에 심판의 약속을 지키셨던 것입니다.  그러고 보면 므두셀라가 969세를 오래 살았다는 것은 성경에서 가장 오래 살았던 사람은 누구인가 라는 퀴즈에 대답하기 위해서 오래 산 것이 아닙니다.  이 사람의 오래 삶이 하나님의 심판을 지연시키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심판을 약속해 놓으시고 기다리고 계셨습니다.  사람들이 회개하고 주 앞으로 돌아와 주를 믿고 주와 더불어 동행하는 삶을 보기를 원하셨던 하나님의 인내와 기다리심이 므두셀라가 살았던 삶의 의미였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에녹은 자기의 아들 므두셀라라는 이름이 갖고 있는 심판의 진지한 메시지를 받아들이자 마자 자신의 삶을 변화시켜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시작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주님과 동행하면 주님께서 인도해 주시지 않겠습니까?  주님이 인도하시는 삶보다 더 복된 인생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기억하십시오.  어느 날엔가 우리 모두는 심판대 앞에 서야 합니다.  그날 부끄러움 없이 서기를 소망하신다면 에녹처럼 이제는 제발 우리의 삶을 바꾸어서 하나님과 동행하기를 사모하십시오.  주와 동행하시면 주가 인도하시는 복된 인생의 길을 걸어가게 될 것입니다.

주님과의 동행은 단순히 이 땅에서의 삶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주님과의 동행은 저기 저 영원한 천국에서 계속될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 주님께서는 내가 넘어질 때마다 일으켜 세우셔서 심판대 앞에 당당하게 설 수 있도록 도와주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 그분을 의지하십시오.  그분만을 바라보십시오.  그분만을 신뢰하십시오.

예수 그리스도, 그는 이미 십자가에서 우리의 허물과 죄를 담당하시고 죽으신 후 다시 부활하셨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내 곁에 서셔서 기쁜 마음으로 내 인생길에 아름다운 동행자가 되어주십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부디 에녹의 주님이 여러분과 저의 주님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에녹의 믿음이 우리의 믿음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에녹처럼 인정받은 믿음, 동행하는 믿음의 주인공이 되셔서 마지막이 아름다운 인생들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오주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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