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로마를 향하여 (행 23:1-11)

첨부 1


로마를 향하여 (행 23:1-11)

데이빗 리빙스턴은 아프리카 선교의 개척자입니다. 그는 30년 동안 아프리카 내륙을 횡단하며 오지에 문명과 복음을 전파하였습니다. 그가 처음 아프리카에 간 11년 동안은 한 사람도 회심시키지 못했고 어떤 선교지도 개척하지 못했습니다. 선교사들 간의 알력에 시달렸고 가족과 환경에 매어 지냈을 뿐입니다. 

그러나 그는 기도하며 기다렸고 때가 되매 하나님께서 그의 길을 열어주셨습니다. 그는 아프리카 내부로 본격적인 탐험을 시작했습니다. 아직 선교사들의 발길이 닿지 않는 수천의 마을들을 향하여 내륙으로 들어갔고 결국은 최초로 아프리카 대륙을 횡단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는 그 과정에서 맹수와 질병과 원주민들의 위협에 끊임없이 시달렸습니다. 

그의 어려움을 듣고 친구들이 그를 도우려 편지를 보냈습니다. “자네의 고생을 조금이라도 덜어 주기 위해 우리가 자네를 도와줄 사람을 몇 명 그곳으로 보내려 하네. 그러니 그곳까지 가는 길을 상세히 적어 다음 편지에 보내 주면 좋겠네.” 

그러자 리빙스턴은 정중하게 그 제의를 거절하며 다음과 같이 답장을 보냈다고 합니다. “마음은 고마우나 이곳까지 오는 길이 있어야만 오겠다는 사람들이라면 나는 사양하겠네. 이곳에서 진정 필요한 사람은 길이 없어도 스스로 찾아오겠다는 사람이거든.”   

언젠가 한 번은 리빙스턴이 사자에 물려 큰 부상을 당했습니다. 사람들은 그가 죽었을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그 때 리빙스턴이 한 말이 있습니다. “사명자는 그 사명을 이루기까지 죽지 않는다.” 그 확신대로 그는 살아났으며 그에게 주어진 사명을 다 마칠 때까지 정글 속 탐험을 계속했습니다. 

지난 주 살펴 본 바울이 어떤 고백을 하였습니까? “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증거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행20:24) 

오늘 우리의 시대는 도전정신을 잃고 있습니다. 다른 사람이 개척해 놓은 편안한 길로만 가려고 합니다. 하나님이 쓰셨던 사람들은 길이 없던 길을 가며 길을 만들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익숙한 것은 편안하지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역량이나 달란트를 잠재우게 만듭니다. 새로운 길은 어렵고 힘들지만 우리의 인생을 투자할 만한 길입니다. 그 길은 바울이 걸었던 길이고, 리빙스턴을 비롯한 수많은 믿음의 선진들이 걸었던 길입니다.  

지금까지 살펴본 바울의 여정은 여전히 험난합니다. 그러나 그의 사역은 계속됩니다.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바울의 헌신이 어우러져 가는 곳마다 열매를 거둡니다. 바울이 복음을 들고 로마로 가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었기에 하나님은 그 뜻을 이룰 때까지 바울을 지키시고 격려하시고 힘을 주십니다. 

바울만 사명자가 아닙니다. 리빙스턴만 사명자가 아닙니다. 은혜 가운데 부름 받은 모든 성도들이 삶의 현장에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야 하는 사명자입니다. 나는 사명자라는 분명한 의식이 있으십니까? 하나님의 뜻을 알고 그 뜻을 이루려고 할 때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하나님이 택하신 사명자들에게 주시는 교훈을 본문을 중심으로 함께 살펴보고자 합니다. 

본문의 앞부분을 잠시 정리해볼까요? 예루살렘을 방문했던 사도 바울이 유대인들에 의해 붙잡혔다가 로마 당국에 죄수의 몸으로 넘겨집니다. 바울이 끌려가다가 잠시 말미를 얻어 성난 군중들 앞에서 자신의 유대적인 배경을 설명하고 그리스도를 만나 회심한 과정을 말하는데 그 말이 미처 끝나기도 전에 군중들이 다시 폭발합니다. 

“이러한 놈은 없이하자”는 소리가 여기저기서 나옵니다. 하나님이 자기들만 선택하였다고 생각하는 유대인들에게 바울이 하나님의 뜻에 따라 이방인들에게 구원을 전한다고 하니 도저히 참을 수 없었습니다. 분노하여 옷을 벗어 던지고 티끌을 공중에 날리며 소란을 벌이니 치안을 맡은 천부장이 바울을 영문 안으로 데리고 갑니다. 
  

바울이 공회에 섭니다.

바울이 그냥 석방된다면 유대인들이 폭동이라도 일으킬 기세였으므로 천부장은 실상을 파악하고자 산헤드린 공회 소집을 요청합니다. 천부장이 공회를 소집할 권한이 없었지만 바울을 제거하기 원했던 유대교 지도자들인지라 그 요청을 쉽게 받아들였을 것입니다. 

산헤드린 공회는 대제사장과 서기관 그리고 장로들로 구성된 유대인 최고 의결기관입니다. 그 당시 예루살렘은 로마의 식민지였기에 공회에서 정치나 사회문제는 다룰 수 없었고 오직 종교나 풍습에 관한 내용만을 다루었습니다. 누구든지 그곳에 서면 두려움을 느끼게 되는데 바울은 자신의 죄를 들추어내기 위하여 혈안이 되어 있는 사람들 앞에 오히려 당당합니다. 바울은 공회원들을 “형제들”이라고 부르며 변론을 시작합니다. “오늘까지 나는 범사에 양심을 따라 하나님을 섬겼노라”고 입을 엽니다.

‘섬겼다’는 단어는 ‘시민으로서 의무를 다하다’는 뜻이 있습니다. 즉 모든 일에 선한 양심을 따라 하나님 나라의 시민처럼 살았다는 것입니다. 바울의 말은 공회에 모인 사람들의 심기를 불편하게 했습니다. 바울이 양심에 거리낄 것이 없이 올바로 하나님 앞에서 살았다면 바울에게 대적하는 자신들은 하나님을 대적하고 산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너무나도 당찬 바울의 진술을 들으면서 화가 치민 대제사장은 그의 입을 치라고 명령합니다. 

아나니아는 주후 47-59년에 재위했던 대제사장입니다. 유대인 역사가 요세푸스는 그를 세속적이고 탐욕적이며 성질이 급하고 난폭한 사람으로 묘사했습니다. 바울은 주저 없이 그를 ‘회칠한 담’ 즉 위선자라고 부르고 하나님이 그를 치실 것이라고 선포합니다. 하나님의 뜻이 담긴 율법으로 통치해야 할 사람이 앞장서서 율법의 참된 정신을 훼손하고 공정한 재판의 절차를 무시했기 때문입니다(레 19:15). 

그의 정체를 알고 난 뒤 자신의 발언에 대한 해명을 했지만 사실상 “하나님이 너를 치시리로다”는 바울의 말은 그대로 이루어졌습니다. 아나니아는 주후 59년 대제사장직에서 면직되고 66년에 로마에 반기를 든 무장 세력에 의하여 피살을 당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영감을 받은 주의 종의 말은 그냥 땅에 떨어지지 않습니다.   

이때 곁에 선 사람들이 대제사장에 대한 바울의 과격한 언사를 나무랍니다. 대제사장에게 할 행동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에 바울은 그가 대제사장인줄 몰랐다고 응수합니다. 바울의 말 속에는 하나님의 율법을 노골적으로 어기는 자를 어떻게 대제사장으로 생각할 수 있겠느냐는 은근한 책망이 담겨 있습니다. 

바울은 “너는 재판장을 모독하지 말며 백성의 지도자를 저주하지 말지니라”(출 22:28)의 말씀을 인용하면서 사과합니다. 불의에 맞설 때라도 법과 질서를 존중히 여기는 마음이 필요합니다.
  

공회에서 소동이 벌어집니다. 

공회의 분위기로 보아 바울이 어떤 변증을 해도 그것이 제대로 먹혀들기 어렵다고 판단하고 거기서 빠져나갈 궁리를 합니다. 그때 바울은 공회의 구성원이 서로 대립해온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임을 주목합니다. “나는 바리새인이요 또 바리새인의 아들이라” 하면서 자신은 바리새인의 조상에서 피를 받았고 철저하게 바리새파의 교육을 받았다고 하면서 바리새파에 속한 공회원들의 마음을 잡으려고 합니다. 자신은 죽은 자의 소망인 부활을 전하다가 심문을 받게 되었다고 합니다. 

여기서 바울이 그리스도의 부활만을 말하지 않고 죽은 자들의 종말론적인 부활에 대해서도 말하고 있음에 주목해야 합니다. 모든 사람의 부활에 대해 말함으로써 바리새파의 호응을 기대하였습니다. 바울의 의도대로 이 발언은 사두개인들을 자극했습니다. 사두개인들은 구약 중에서도 모세오경만 정경으로 인정하며 “부활도 없고 천사도 없고 영도 없다”고 믿는 그룹입니다. 

반면에 바리새인들은 율법을 연구하고 그 말씀대로 살려고 하였기에 유대인 대중들에게 존경을 받았는데 “부활도 있고 천사도 있고 영도 있다”고 믿었습니다. 바울이 부활을 언급하자 사두개인들은 ‘부활? 말도 안 돼. 그런 것이 어디 있어. 죽으면 그만이지’하며 흥분합니다. 이 말을 듣고 바리새인들은 ‘부활이 없기는 왜 없어’하며 맞받아칩니다. 졸지에 공회가 두 그룹으로 나뉘어 서로 손가락질하고 목소리를 높입니다. 

그때 바리새파에 속한 유력한 서기관 몇 사람이 일어나 발언합니다. “우리가 이 사람을 보매 악한 것이 없도다 혹 영이나 천사가 저더러 말하였다면 어찌하겠느냐” 부활 문제로는 바울을 정죄할 수 없다고 바울을 지지하고 나섭니다. 이 진술은 가말리엘이 베드로와 요한의 문제에 관해 공회에서 말했던 중립적인 발언을 떠올리게 합니다(5:35). 

바울의 문제로 모였는데 바울은 빠지고 엉뚱하게 두 그룹 사이에 교리논쟁이 크게 벌어졌고 과격해진 논쟁은 소동으로 발전했습니다. 결국 천부장이 바울을 그 가운데서 데리고 나와야 했습니다. 사도행전에서 산헤드린은 늘 이런 한심한 모습으로 그려집니다. 예수님께서 뱀같이 지혜롭고 비둘기같이 순결하라(마 10:16)고 하셨는데 바울은 상황을 지혜롭게 파악하고 적절하게 대처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미 말씀하셨습니다. “사람들이 너희를 끌어다가 넘겨 줄 때에 무슨 말을 할까 미리 염려하지 말고 무엇이든지 그 때에 너희에게 주시는 그 말을 하라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요 성령이시니라”(막 13:11). 바울은 성령님이 주신 지혜로 산헤드린의 위협에서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지혜의 근원이신 하나님만이 우리에게 참 지혜를 주십니다.
 

주님께서 바울을 위로하십니다.

공회원들끼리 벌이는 격렬한 논쟁의 와중에 바울이 다시 부상을 당할 것을 염려한 천부장이 그를 무리 가운데서 빼내어 영내로 들어가라고 부하들에게 명령합니다. 일단 위기는 넘겼지만 바울은 공회 앞에서 복음을 전할 기회를 놓치게 된 것을 아쉽게 생각하였을지 모릅니다. 현재 죄수의 상태로 있는 자신의 장래에 대하여 걱정도 하였을 것입니다. 위기와 고통을 당할 때마다 주님이 나타나셨습니다. 그 밤에 나타나신 주님은 다메섹 도상에서처럼 앞에서 계신 것이 아니라 바울 곁에 서서 말씀하십니다. 다정한 격려의 제스처입니다. 

바울이 마지막으로 쓴 편지가 디모데 후서 4장을 보면 로마 감옥에 갇혀서 그동안의 사역을 돌아보며 주님은 어떤 분이신지 묵상을 할 때 “주께서 내 곁에 서서 나를 강건케”(4:17) 하신다는 고백을 합니다. 물론 주님이 육체적으로 바울 곁에 계신 것은 아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승천하시면서 제자들에게 “내가 세상 끝날 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마 28:20) 약속하셨습니다. 

주님이 승천하셨는데 어떻게 우리와 함께 계십니까?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이미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리니”(요 14:16) 보혜사의 뜻이 무엇입니까? “곁에 있도록 부름 받은 이.” 주님이 우리 곁에 있도록 하나님의 부름을 받아 이 땅에 오셨습니다. 

예수님이 공생애 사역을 마치시자 예수님의 뒤를 이어 또 다른 분이 오셨는데 그분이 바로 성령님이십니다. 이제는 성령이 우리 곁에 계시며 우리의 발걸음을 인도하십니다. 바울이 험난한 사역 가운데 낙심하지 아니하고 담대하게 일을 수행할 수 있었던 것은 사람들은 자기 곁을 떠날지라도 주님이 성령을 통하여 곁에 계시며 주님의 인도하심을 체험하였기 때문입니다. 

언제나 곁에 계신 주님 때문에 바울은 고독한 상황, 위험한 상황에서도 실망하지 않고 담대할 수 있었습니다. 바울 곁에 계셨던 주님이 바로 우리가 믿고 섬기는 주님이십니다. 무슨 일을 혼자하려면 두렵고 떨릴 수 있으나 주님이 곁에 계신다는 믿음을 가질 때 담대할 수 있습니다.  

바울도 인간인데 계속되는 위험 속에 어찌 염려가 되지 않겠습니까? 한 위험이 지나면 또 다른 위험이 다가옵니다. 그럴 때 “담대하라 네가 예루살렘에서 나의 일을 증언한 것 같이 로마에서도 증언하여야 하리라” 하신 주님의 말씀은 바울에게 큰 힘이 되었을 것입니다. 바울의 결박과 환난은 결국 예루살렘을 넘어 로마까지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간섭이고 섭리이기 때문입니다. 

그가 로마에 갈 때까지는 아무도 그의 생명을 해하지 못하게 하실 것입니다. 주님께서 바울을 지키실 것이고 그의 궁극적인 목적지인 로마까지 인도하실 것입니다. 그렇지만 바울이 로마까지 가는 동안 위험이 계속될 것을 암시합니다. 반면에 공회원들은 장차 하나님 앞에 섰을 때 부끄러움을 당할 것입니다. 그들은 이미 복음을 들었기에 몰라서 믿지 못했다고 핑계를 댈 수 없을 것입니다. 

성도들에게도 문제 다양한 방법으로 예상치 않게 그리고 피할 수 없이 다가옵니다. 그 문제가 구체적으로 무엇이든지 간에 그것을 인하여 불안해하거나 섭섭해하거나 깊은 고민에 빠지기도 합니다. 그것을 인하여 다른 사람을 원망할 수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주님은 그저 멀리 계시는 분, 무관심한 분으로 보이기 쉽습니다. 

이 자리에 계신 분들은 지금 어떤 고난을 지나고 계십니까? 우리에게 가장 큰 문제는 우리를 둘러싼 상황이나 문제 자체가 아니라 바로 믿음 없는 우리 자신입니다. 문제만 바라보면 문제가 점점 더 커 보이고 나중에는 그 문제에 눌리게 됩니다. 그러나 고난은 우리의 삶의 일부임을 알아야 합니다. 고난을 통하여 성도들은 하나님을 경험하는 기회를 가집니다. 삶의 현장에서 때로 위기를 경험하는 성도들이 어떤 자세를 취해야 하는지 본문을 중심으로 살펴봅니다. 
 

1) 선한 양심을 따라 삽니다

바울이 공회원들 앞에서 자신을 변호할 때 전혀 주눅 들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범사에 양심을 따라 하나님을 섬겨왔기 때문입니다. 양심은 우리가 아는 최고의 표준을 따르려는 내적 능력을 말합니다. 때문에 양심은 최고의 표준이 무엇을 요구하는지 끊임없이 우리를 일깨워줍니다. 즉 양심은 영혼의 눈입니다. 항상 하나님을 향하고 있는 양심은 언제나 우리를 하나님의 완전함으로 향하게 하고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지시해줍니다. 

대신 우리는 양심에 부끄러움 없이 순종해야 합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뜻을 받들어 섬기는 일에는 자신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바울의 눈에는 모든 상황이 아들 예수님을 통하여 하나님이 하신 일을 증거할 기회로 보였습니다. 그리고 어떤 상황에서도 말씀에 순종했습니다. 상황에 따라 신앙 양심을 저버리고 세상과 타협하지 않습니까? 말씀에 순종하지 못한 것을 합리화하려고 할 때는 없습니까? 윤동주 시인의 말처럼 하늘을 우러러 부끄러움이 없어야 합니다.  

2) 하나님의 시선을 의식합니다

사도행전에는 3명의 아나니아가 등장합니다. 

첫째, 아나니아는 다메섹 도상에서 시력을 잃은 바울을 찾아와 안수하며 기도해주던 경건한 인물입니다. 

둘째 아나니아는 교회에서 존경받는 바나바를 흉내 내다가 성령을 속인 죄로 부인과 함께 죽임을 당했습니다. 

세 번째 아나니아가 본문에 나오는 대제사장입니다. 그는 당시 유대 종교 지도자들의 타락상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인물로서 아주 잔인하고 탐욕스러운 인물로 알려져 있습니다. 바울이 회심할 때 그를 안수해 준 경건한 아나니아는 하나님의 시선을 의식하였기에 말씀대로 순종하였습니다. 

그러나 나머지 두 아나니아는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들의 시선만을 의식하다가 비참한 최후를 맞고 말았습니다. 연약한 인생이다 보니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시선보다 아무래도 다른 사람의 시선을 의식하게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불꽃같은 눈으로 우리를 지켜보신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지켜보실 뿐 아니라 그 대가를 치르게 하십니다. 

마태복음 23장에는 종교지도자들을 향한 예수님의 책망이 나옵니다.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천국 문을 사람들 앞에서 닫고 너희도 들어가지 않고 들어가려 하는 자도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도다”(마 23:13). 

바리새인들은 겉으로는 하나님을 경외한다고 말하면서 속으로는 사람들에게 환심을 사기 위해 경건을 가장한 행동을 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잘못된 지식과 가르침을 전함으로 자신들뿐 아니라 다른 사람까지도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그들에게 거룩한 분노하시며 화가 있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외식이란 겉을 꾸미는 것을 말합니다. 외면보다 중요한 내면을 살피지 못하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 모두는 종교지도자들을 향한 예수님의 책망을 귀담아 들어야 합니다. 자기는 물론 다른 사람들까지도 하나님의 복을 받지 못하게 하는 자들이 아닌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요즘 신문 광고를 보면 외모를 아름답게 꾸며준다는 성형 광고가 얼마나 많습니까? 겉을 꾸미는 노력의 일부만이라도 속을 다듬는 데 쓴다면 우리의 내면이나 인생이 얼마나 아름다워질까요? 아름답게 보이는 행실과 말과 삶 속에 무엇이 담겨있는 지를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사람들의 칭찬과 박수 소리에만 신경을 써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의 시선을 항상 의식하며 주님만 알아주시면 된다는 자세로 나아갈 때 주님이 함께 하십니다.   

3) 지혜를 구합니다.

대제사장의 방해로 공회에서 변론이 방해를 받자 바울은 공회가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로 구성된 것을 알고 그들을 교리 논쟁으로 끌어들입니다. 바울은 자신이 바리새인임을 밝히고 부활에 대하여 언급하니 공회는 바울을 제쳐두고 자기들끼리 격렬한 논쟁을 벌입니다. 그 틈을 타 바울은 위기에서 벗어납니다. 

바울은 순간적으로 하나님께서 주신 지혜를 사용하였습니다. 영적 싸움이나 하나님의 일을 하는 데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고난을 당할 때도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피할 길을 찾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뱀 같이 지혜롭고 비둘기 같이 순결하라”(마 10:16)고 권면하셨습니다. 

우리가 어려움에 있을 때에는 문제에만 온통 신경을 쓰기 쉽고 무엇을 어떻게 해야 좋을지 우왕좌왕 할 때가 많습니다. 이럴 때 필요한 것이 하나님의 지혜입니다. 이 지혜를 구하는 것이 기도입니다. 누구에게 구합니까?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해야 합니다(약 1:5). 시련의 날에 성도의 바른 자세는 인내 속에 기도하는 것이요 믿음으로 기도할 때 주님의 능력을 경험하게 됩니다. 

4) 사명을 붙들어야 합니다.

바울은 이방인의 사도로 부름을 받았습니다. 그 사명을 감당하는 동안 누구보다도 많은 고난을 당하였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수시로 그에게 나타나셔서 그의 사명을 확인시켜 주셨습니다. 바울의 생애가 철저하게 하나님의 계획 속에서 이루어지고 있음을 알려주었습니다. 주님의 위로가 주어졌기에 바울은 위기의 상황에서도 흔들리지 않고 사명을 감당합니다. 하나님이 주신 사명을 아는 자는 지금의 고난도 지나가는 과정으로 생각하면서 최선의 삶을 살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향하여 놀라운 계획을 가지고 계십니다. 

세상의 여러 가지 시련 속에서도 용기를 잃지 않는 비결은 우리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계획이 이루어지기 전까지 주님께서 우리를 떠나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믿는 믿음입니다. 우리의 부족함과 한계를 인정하고 주님께 나아갈 때 위로를 주시고 환난 가운데 피할 길을 마련해주십니다. 시험을 이길 능력은 주님에게서 나옵니다. 주님의 말씀을 들은 바울은 용기가 생겼고 주님이 주신 사명을 완수하려는 열정이 생겼습니다. 우리 모두 주님의 말씀을 붙들어야 하고 주님의 발 앞에 엎드려야 합니다. 

바울이 이방인의 사도가 된 것은 그가 자원했기 때문입니까 아니면 누가 시켜서 된 것입니까 어머니가 서원기도해서 된 것입니까?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 은혜로 부름을 받았기에 바울은 로마에 이를 때까지 하나님의 뜻에 따라 충실하게 주신 사명을 감당하기만 하면 됩니다. 주님이 그의 곁에서 그를 위로하시고 그를 지켜주셨습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은 우리를 은혜로 부르셨습니다. 우리의 배후에서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하여 우리를 위하여 싸우시고 일하십니다. 놀랍지 않습니까? 감사하지 않습니까? 각자 생각해 보세요. 로마로 가야 하리라 그 말씀이 바울의 비전이 되었습니다. 

바울은 순종하여 로마를 향하여 나아갔습니다. ‘나의 로마’가 어디입니까? 나를 향한 주님의 뜻이 무엇입니까? 은혜로 나를 부르신 주님, 그 뜻을 이루어지기까지 나를 붙들어 주옵소서.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 곁에서 위로하시는 주님의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어떤 형편과 처지에서도 염려하지 않고 좌절하지 않고 주님을 붙들면서 회복을 경험하고 주님의 주신 사명을 향하여 담대하게 나아가며 이름 없이 빛도 없이 수고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