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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나님을 금송아지로 만든 사람들 (출 3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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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을 금송아지로 만든 사람들 (출 32:1-6)

이스라엘 백성들이 홍해를 건넌 후 시내 산에 이르렀을 때의 일입니다. 그들은 산 아래 장막을 쳤고, 모세는 하나님께로부터 계명을 받기 위하여 시내 산으로 올라갔습니다. 모세는 그 곳에서 밤낮 40일을 머물러 있었습니다.

백성들은 모세가 오랫동안 산에서 내려오지 않자 불안해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은 모세가 분명히 산에 올라가서 죽었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들이 그렇게 생각했을 때는 그만한 이유들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첫째는 그가 하나님을 뵈었기 때문이고, 두 번째는 모세가 먹을 만한 것이라곤 아무것도 없는 (풀 한 포기도 없는)돌산인 시내 산에 올라가서 그렇게 오랫동안 있었다면 분명히 굶어서 죽었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광야에서 안내자를 잃었다고 생각하니 얼마나 당황했겠습니까? 아시다시피, 모세는 백성들 중에서 유일하게 광야에 대하여 알고 있었던 사람이었습니다. 광야에서 안내자를 잃었다고 하는 것은 곧 죽음을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백성들은 모세의 형인 아론에게 몰려갑니다. 그리고는 다음과 같이 강력하게 요구합니다.

일어나서, 우리를 인도할 신을 만들어 주십시오. 우리를 이집트 땅에서 올라오게 한 모세라는 사람은 어떻게 되었는지 모르겠습니다. (본문 1절)

아마도 거칠게 항의하는 백성들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던 것 같습니다. 아니면, 아론이 이번 기회에 자기가 백성들의 지도자가 되어 보겠다는 엉뚱한 생각을 했는지도 모릅니다. 이유야 어찌되었든, 아론은 백성들에게 금붙이를 가져오게 합니다. 그리고 그것들을 녹여서 송아지 상을 만듭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외칩니다.

이스라엘아! 이 신이 너희를 이집트 땅에서 이끌어 낸 너희의 신이다. (본문 4절)

그러면 아론이 만들어 백성들에게 소개한 “금송아지”는 하나님과는 전혀 상관없는 “다른 신”이었을까요? 아니면 “백성들을 이집트 땅에서 이끌어 낸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인간이 볼 수 있는 형상으로 만든 것”일까요?

“다른 신?” vs. “백성들을 이집트 땅에서 이끌어 낸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인간이 볼 수 있는 형상으로 만든 것?”

많은 분들이 그들이 만든 “금송아지”는 하나님과는 전혀 상관없는 “다른 신”이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성경을 좀 더 자세히 읽어보면, 그 질문에 대한 바른 대답은 후자라는 것을 곧 깨달을 수 있습니다. 그 이유는 아론이 앞에서도 인용했듯이, “이스라엘아! 이 신이 너희를 이집트 땅에서 이끌어 낸 너희의 신이다”라고 말했고, 또 아론은 그 앞에서 “하나님의 절기”를 선포하고,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는 방식인 “번제”와 “화목제”를 드렸다고 성경이 기록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아론은 이것을 보고서 그 신상 앞에 제단을 쌓고 "내일 주님의 절기(유월절)를 지킵시다" 하고 선포하였다. 이튿날 그들은 일찍 일어나서, 번제를 올리고, 화목제를 드렸다. (본문 5-6절)

백성들은 이집트 땅에서 이끌어 낸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자기들이 직접 보고 만질 수 있는 형상으로 만든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비단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만 해당되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하나님을 믿으며 신앙생활하고 있는 우리들도 금송아지를 만들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 말고 다른 신을 섬긴다는 말이 아닙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보이는 형상으로 만드는 잘못을 저지를 때가 있다는 말입니다.

(1) 자기 눈에 보여야만 존재한다고 믿는 것. 이것은 “미성숙”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입니다. 발달심리학자들이 설명하는 어린이들의 성장과정이 있습니다. 그것은 점점 나이가 들수록 자기 눈에 보이지 않는 것도 존재한다는 것을 알아가는 과정이라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어린이들이 아주 어릴 때는 엄마가 눈에 보여야만 엄마가 있다는 것을 안다는 것입니다. 엄마가 눈에 보이지 않고 손으로 만져지지 않으면, 그 아이에게 엄마는 세상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고 합니다. 그래서 그렇게 슬피 운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엄마가 다시 나타나면 그 아이는 마치 “부활한?”엄마를 보듯이 반긴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점점 나이가 들어갈수록 엄마가 한동안 보이지 않아도 엄마는 어딘가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들의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눈에 보이는 것만 믿는 것. 또 눈에 보이고 피부로 느껴질 때에만 하나님의 살아계심과 역사하심을 믿는 것. 이것은 미성숙한 신앙의 모습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신앙이 그렇게 미성숙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애굽 사람들에게 10가지 재앙을 내리실 때에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믿었습니다. 하나님께서 홍해를 가르셨을 때에 그들은 하나님의 놀라운 능력에 감격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불기둥과 구름기둥으로 저들을 인도하시고, 마라에서 쓴물을 단물로 바꾸어 주시고, 만나와 메추라기로 그들을 먹여 주시고, 바위에서 물이 솟아나게 하시고, 아말렉과의 전쟁에서 승리하게 해 주실 때에는 하나님께서 살아계심을 믿었습니다. 

그리고 엄마를 바라보고 방긋방긋 웃는 어린아이처럼 저들은 하나님의 은혜에 감격하고 감사했습니다. 그런데 잠시라도 하나님의 손길이 느껴지지 않을 때면, 마치 엄마가 잠시 보이지 않으면 엄마가 세상에 존재하고 있지 않다고 생각하며 울며 보채는 어린아이처럼,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께서 살아계시지 않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처럼 행동했습니다. 의심하고 불평하고 원망했습니다.

비록 모세가 40일 동안 보이지 않더라도, 하나님의 존재가 없어진 것이 아님을 이스라엘 백성들이 깨달아야 했었습니다. 비록 광야에 대하여 비교적 잘 알고 있는 모세가 산에 가서 죽었다고 생각 되더라도, 그들은 당황하거나 조급해하지 말았어야 했습니다. 왜냐하면 그 동안 광야에서 백성들을 실제로 인도했던 것은 하나님께서 보내주신 불기둥과 구름기둥이었지 광야지리를 알고 있었던 모세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얼마 전 제가 “하나님의 침묵”이란 제목으로 설교할 때에 인용했던 글을 다시 한 번 상기시켜 드립니다.

나는 태양이 비치지 않을 때에도 태양이 있는 것을 믿는다.
나는 사랑을 느낄 수 없을 때에도 사랑이 있는 것을 믿는다.
나는 하나님께서 침묵하실 때에도 하나님께서 살아 계심을 믿는다.

하나님께서 침묵하실 때에도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믿는 것! 이것이 성숙한 신앙입니다. 우리들 모두 그러한 성숙한 신앙을 갖게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2) 지금까지 이스라엘 백성들이 금송아지를 만든 이유가 저들의 신앙이 미성숙하였기 때문이라고 말씀 드렸습니다. 그런데 저들이 금송아지를 만든 또 하나의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그들이 너무 조급하였기 때문이었습니다.

물론 그들의 마음이 왜 조급해졌는가를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닙니다. 광야에 버려진 듯한 느낌. 지도자를 잃은 듯한 느낌. 앞길이 캄캄하게 막혀진 듯한 느낌. 하나님의 임재가 전혀 느껴지지 않는 듯한 상황. 그래서 그들은 조급한 마음에 무리를 지어 아론에게 달려갔던 것입니다.

우리들도 조금만 어려운 일을 당해도 조급해 할 때가 많습니다. 마음이 조급해지니, 하나님의 때와 하나님의 방법을 기다리지 못합니다. 그리고는 우리 나름대로 방법을 찾아 나섭니다. 우리들의 온갖 지혜를 동원해 봅니다. 조급하고 다급한 마음으로 사람을 의지하기도 합니다. 세상적인 방법을 동원해 보기도 합니다. 하나님께 의지하며 하나님의 도움을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내가 갖고 있는 것이 무엇인가를 생각하며 내 방법을 총동원 해보려고 합니다. 이 모든 우리들의 노력들은 곧 금송아지를 만드는 것들임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들에게 다음과 같이 명령하십니다. 너희는 가만히 있어 내가 하나님 됨을 알찌어다. (시 46:10)

아무리 어려운 일을 당하더라도 당황하지 말라는 말입니다. 우리들에게 닥친 시련과 고통이 아무리 크게 보일지라도, 하나님은 그것들보다 훨씬 더 크시고 위대하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믿고, 하나님의 도움을 잠잠히 기다리는 믿음이 우리들에게 있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꿀벌을 키우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초보자들은 벌통 주위에서 있다가 벌이 옷 속에 들어가거나 몸에 붙으면 깜짝 놀라 날뛰며 벌을 떼어내려고 발버둥을 친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당황하면 벌에 쏘여 퉁퉁 붓곤 한답니다. 그런데 노련한 사람은 벌들이 아무리 바글거려도 절대로 당황하지 않는답니다. 간혹 얼굴에 망을 쓰기도 하지만 그것마저 쓰지 않을 때도 많다고 합니다. 조금도 서두르지 않고, 손이나 팔에 벌이 달라붙어도 그저 그대로 둔 채로 일을 다 마칩니다. 그러면서도 거의 벌에 쏘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어려움을 당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많은 벌들이 얼굴 주위에서 앵앵거리며 맴돌듯이, 우리들 주변에 많은 어려움이 앵앵 거리며 우리들을 위협할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당황하면 벌들에게 쏘이듯이 어려움이 우리들을 덮칠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급박하고 어려운 상황이라도 하나님의 도우심을 믿고 인내하고 잠잠히 기다리면 절대로 어려움은 우리들의 삶을 무너뜨리지 못할 것입니다. “너희는 가만히 있어 내가 하나님 됨을 알찌어다.” 라고 말씀하신 하나님의 말씀처럼 우리들은 결국에 가서는 신실하신 하나님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언젠가 한번 소개한 적이 있습니다만, 박 순애씨가 쓴 “절대 희망”이란 책이 있습니다. 고통스러웠던 자신의 삶을 돌이켜 보면서 쓴 신앙 간증입니다. 물론 책 내용도 매우 감동적이었지만, 저는 특히 그 책 제목이 참 인상적이었습니다. “절대 희망” 어려운 중에도 희망을 가져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그 희망은 상황에 따라서 포기할 수도 있는 그런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끝까지 기다리며 가져야 하는 희망이라는 것입니다. 절대로 포기해서는 안 되는 희망, 어떠한 상황에서라도 절대로 가져야 하는 희망. 끝까지 기다리면 반드시 이루어지는 희망. 이것이 바로 성도들이 가져야 하는 희망인 것입니다.

우리들에게도 그러한 인내가 있기를 바랍니다. 소망 중에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는 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은 우리들의 기다림을 절대로 헛되게 하실 분이 아니십니다.

“여호와의 구원을 바라고 잠잠히 기다림이 좋도다.”

이러한 믿음의 성숙함과 인내심이 있을 때에 우리는 하나님을 금송아지로 만드는 잘못을 범하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우리들을 항상 지켜보시는 하나님의 인자하신 눈빛과, 항상 우리들을 돌보아 주시는 하나님의 인자하신 손길이 성도님들의 날마다의 삶 속에 충만 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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