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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요 8:3-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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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요 8:3-11)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말씀은 유명한 사건입니다. 그리고 아주 통쾌한 사건이기도 합니다.  동시에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크신 은혜와 사랑을 나타내주는 감동적인 사건이기도 합니다.
  
성전마당에서 예수님이 하나님나라에 대하여 가르치실 때에 사람들이 간음을 하다 잡힌 여자를 끌고 들어왔습니다.  이 여자를 끌고 온 목적이 따로 있습니다. 예수님을 고소할 구실을 찾기 위해서입니다. 예수님을 어떻게든 책잡아서 올무로 옭아서 죽이려고 이같은 사건을 만들었던 것입니다. 그리고는 예수님께 이 여자를 어떻게 해야 하느냐?고 묻습니다.
  
이렇게 질문함으로써 예수님을 참 난처하게 만들었어요. "돌로 쳐라" 하면 당시에는 로마가 이 나라를 지배하고 있는 때인데 사형집행권은 반드시 로마 정부나 관리에게  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예수님이 "쳐라" 해서 돌로 치는 날이면은 로마의 법을 어긴 것으로 고소거리가 됩니다. 반대로 예수님이 자비로운 마음으로 "치지 말라" 하면 모세의 율법을 어기는 것이 됩니다. 이런 죄인을 모세의 율법은 돌로 쳐죽여라 했거든요.
  
예수를 메시아라고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는데 이제 "치지 말라" 그러면 '모세의 법을 어긴 사람이요, 모세의 법을 거역하라고 가르친 사람이다' 이렇게 선전을 하면 백성들이  예수님을 따르지 않게 될 것이고 "돌로 치라."하면 로마에 고발해서 손도 안대고 간단하게 처리할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꼼짝 못할 함정에 걸렸다고 생각하고 의기양양하게 "모세는 이렇게 말했는데 선생은 어떻게 말하겠나이까?" 하고 계속 다그치는 것입니다.

참으로 예수님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할 위기에 봉착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위기를  기회로 삼으셔서 오히려 소중한 교훈을 말씀하십니다. "너희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쳐라." 이 말씀에는 위기를 절묘하게 빠져나가는 지혜가 담겨 있을 뿐 아니라 아주 중요한 교훈이 담겨 있습니다.  이 말씀은 치라는 말입니까? 치지 말라는 말입니까? 죽이라는 말입니까? 살려주라는 말입니까?       
  
분명히 치라고 했으니까 죽이라는 말같지만 죄없는 자가 먼저 치라 했으니 아무도 칠 수가 없습니다. 죄인을 살려주려는 예수님의 깊은 뜻과 지혜가 담겨있습니다.  또한 죄를 심판하려고 살기가 등등해서 아우성을 치는 사람들에게 남을 정죄하기에 앞서서 먼저 네 자신의 죄가 얼마나 추하고 악한 것인지를 깨닫고 자숙하라는 교훈이 담겨 있습니다. 나아가 죄가 전혀 없이 정결하신 예수님께서 심판하실 자격과 권세가 있으시지만 정죄하거나 심판하시기 보다는 용서하여 줄테니 다시 죄의 종이 되지말고 새로운 삶을 시작하라는 중요한 진리가 담겨 있습니다. 

1. 죄는 불행한 결과를 가져다 줍니다.  
  
여인은 어쩌다가 이런 죄를 범했을까요?  본문은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간음 중에 잡힌 여자를 끌고 와서 가운데 세우고라고 기록되었습니다.  이 말씀에서 세 가지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첫째, 여인은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에 의해 붙잡혀 변명의 여지도 없이 절체절명의 순간을 맞았습니다. 
  
둘째, 끌려 온 것입니다. 영화나 뉴스를 통해 가끔 이슬람 국가에서 이런 일들이 지금도 벌어지는 것을 보게 됩니다. 아프간같은 이슬람나라에서는 차도르를 쓴 여자가 큰 광장에서 수많은 사람이 지켜보는 앞에서 돌에 맞아 죽는 일을 당하는 일들이 종종 일어납니다.  
  
셋째, 돌로 쳐죽이려고 많은 사람들이 무서운 얼굴을 하고 둘러 선 가운데에 여인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아마 여인은 평생 잊을 수 없는 상처를 받았을 것입니다. 두려움, 절망, 수모 그리고 죽음을 경험했을 것입니다. 
  
죄는 어떤 변명과 합리화를 끌어다 붙인다고 해도 이처럼 엄청난 불행을 불러옵니다. 많은 학자들은 본문의 이 여인이 당시에 가난하여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불가피하게 몸을 파는 창녀였을 것이라고 해석합니다.  왜냐하면 간음은 남녀가 함께 행하는 죄인데 여자만 붙잡혀 온 것을 보아 바리새인들이 힘없는 여인을 미리 타켓을 삼아 함정을 판 것이라고 짐작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아무튼 죄의 삯은 사망입니다. 죄는 파멸을 가져다 주고 불행을 불러오며 모든 것을 삼킵니다.  죄는 누구에게 변명할 여지도 없게하고, 또 동정을 받을수도  없는 죽음을 불러오는 불행의 씨앗입니다.  죄는 일단 드러나게 되면 얼굴을 들수없게 수치를 가져다 주는것이 죄의 속성입니다.

오늘날에도 TV나 신문지상에 각종  죄들이 들어날때 보면 모두들 얼굴을  들지  못하고 부끄러워  카메라를 피하려고  옷깃을 새우고 숨거나 손으로 얼굴을  가리우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죄는 드러나게 마련이고, 드러나면 얼굴을  들수없이 부끄러워지는 그것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습니다.
  
우리는 이 여인을   보면서, 부끄러운 자신의 얼굴을 보아야  하겠습니다.  우리가 이 여자보다 낳을 것이 하나도  없음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이렇게 보면 영적으로 생각해 볼때, 이 여자의  부끄러운 모습은 곧 우리  자신들의 부끄러운 모습이라고 볼 수 밖에 없습니다.  주님앞에 설때, 이 세상에서  행한 모든 것이 낱낱이 들어난다고 했으니, 그때 누가 감히 얼굴을 들수 있겠습니까?  그렇다면 개처럼 끌려온  이 여자에게서  나 자신의 부끄러운 죄의  모습을 보아야 하겠습니다.
  
아무리 나의 겉모습이 그럴싸해도, 아무리  나의 걸친 옷이 화려하다 해도, 현장에서 잡혀온 이 여자의 부끄러움이 내 속에  있지 아니한가? 깊이 반성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앞에 나온 우리들의  모습은 언제나 겸손한  모습이요, 통회자복하는 모습이어야  함은  두말할 나위 없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의인은 없나니...하나도 없다]고 하였습니다.  여러분! 죄는 드러나게 마련이요, 드러난 죄는 부끄럽게  만드는 것입니다.  수치를 당하기전에 하나님앞에서 통회자복하고 죄를 버리는 결단을 하시기 바랍니다. 
  
  
2. 서로 돌을 던지지 말아야 합니다. 
  
7절을 보면 '그들이 묻기를 마지 아니하는지라'고 기록되었습니다. 아마도 돌을 들어 여인을 치고 싶어서 예수님께 빨리 대답하라고 재촉함이 분명합니다.  참 무섭지 않습니까? 이런 사람들은 아무도 못말립니다.  피를 봐야만 직성이 풀립니다.  불쌍한 여인을 정죄하고 돌을 쳐 죽임으로 자신은 그녀와는 다른 의로운 사람이라는 것을 확인하고 싶은 교활한 본능이 이들로 무섭게 변하게 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 사람들 역시 죄에서 자유로운 사람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단 죄가 드러나지 않은 것뿐입니다. 그래서 아무도 이들의 죄를 눈치채지 못했습니다. 이들은 모두 감쪽같이 자신의 죄는 숨기고 여인의 죄를 비난하고 정죄하며 흥분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대답대신 땅바닥에 뭐라고 글씨를 쓰시는 것입니다.  뭐라고 쓰셨을까요?  알 수 없습니다. 단 성경학자들의 추측은 '아마 너희중에 죄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고 썼을 것이다.' 라는 견해가 우세합니다. 왜냐하면 글을 읽을 줄 아는 사람이 많지 않은 시절이니 그렇게 써 놓은 글을 본 지식층이 먼저 자신의 추함을 깨닫고 자리를 빠져나가고 난 후에 글을 모르는 사람과 거리가 떨어져 있어 읽지 못하는 사람들도 대답을 재촉하다가 "너희 중에 죄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고 말씀하시자 부끄러워 자리를 빠져나갔습니다. 

그리고는 예수님이 다시 허리를 굽혀 글을 쓰시는데 궁금해서 다가가 읽어 보니 바로 자기들의 부끄러운 죄를 낱낱이 기록하시는 것입니다. 그러자 남은 사람중에서도 어른 부터 시작하여 부끄러움을 느끼고 하나 둘씩 자리를 뜨게 되었습니다. 결국 감정적이고 흥분을 잘 하는 사람들이 자기 죄를 깨닫고 모두 떠나갈 수 밖에 없었다는 것입니다. 

요즘 중국에서는 공개 사죄의 바람이 불고 있다고 합니다. 옛날 문화혁명때 사회적 분위기에 휩쓸려 다른 사람을 마구 고발하였는데  수십년이 흘렀지만 뉘우치고 신문에 사과문을 싣는다는 것입니다. 어떤 이는 자기의 선생님을 고발하고, 어떤 이는 자기의 부모를 고발하고, 그래서 인민재판을 받게하여 죽음으로 몰아넣고 가족들도 두려움에  떨게 하였다는 것입니다. 남에게 돌을 던지는 행동이 잘못인 것을 깨닫고 뉘우치는 바람이 불고 있습니다. 
  
우리나라도 돌을 내려놓는 운동이 일어나야 합니다. 자신의 죄와 잘못은 눈감고 서로 죄와 허물을 찾아 사정없이 돌을 던지려는 사람들이 우리 사회에 너무 많습니다. 가정에서도 서로 돌을 던집니다. 학교에서 스승과 제자사이에 돌을 던집니다. 사회에서도 돌을 던지려고 허물을 찾기에 눈이 빨갛습니다. 심지어 교회에서도 돌을 던집니다.  말에 돌이 들어 있습니다. 인터넷에도 돌이 들어 있습니다. 눈에서도 돌이 나옵니다. 마음에 돌이 있으면 손에서 돌이 나갑니다.  서로 비난하고 서로 욕하고 서로 고발하고 어떻게든지 죽이려고 덤벼들고 있습니다. 돌을 내려놓지 않으면 다 망합니다. 그러나 돌을 내려 놓으면 하나님의 은혜가 임합니다. 
 
남을 마구 비난하고 정죄하며 욕하고 싶은 유혹이 오면 먼저 "너희중에 죄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해야 합니다.  먼저 '나도 죄인'임을 생각하는 것이 냉정을 찾는 비결입니다. 나 자신을 먼저 돌아보아야 합니다. '내가 이렇게 마구 정죄할 수 있는 사람인가?' 정죄하고 비난하고 싶은 사건 앞에서 자신을 먼저 살필 줄 알아야 합니다.

"서부전선 이상 없다"는 소설에 보면 1차 대전을 배경으로 하고 있는데 독일 소년, 아주 어린 소년 일곱명이 전쟁에 나가고 싶어서 자원합니다. 3년 동안 이 어린 소년들이 군인으로서 용감하게 싸우다가 여섯사람이 죽고 한사람이 남습니다. 

그런데 주인공이 적과 마주서서 총을 쏩니다. 무자비하게 총을 난사합니다. 한참 쏘다 보니까 조용해졌어요. 웬일인가 하고 살펴보았더니 다 죽어버렸어요. 그래서 시체들을 확인하다가 지금 비참하게 죽어가는 사람을 보다가 깨닫고 절규합니다. "이제 나는 비로소 당신들이 나와 꼭 같은 인간임을 깨달았노라. 너희들이 죽은 것처럼 나도 죽을 수 있고, 당신들에게도 어머니가 있어서 당신들을 보내면서 괴로워했고 지금도 조마조마 기다리고 있고, 당신들에게도 나처럼 사랑하는 사람이 있고, 당신들이 죽음을 두려워하면서 죽어가는 것처럼 나도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있소.  당신들이 용서를 바라는 것처럼 나도 용서받아야 할 사람이요." 같은 인간임을 깨닫고 절규합니다. 

누가 누구를 비난합니까? 누가 누구를 비방할 수 있습니까? 비난하기 전에 자신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현대인의 결정적인 죄가 이것입니다. 자기 자신을 모른다는 것입니다. 자기 눈에 들보가 있는 줄 모르고 남의 눈에 티를 탓하고 있는 것이에요.  바로 이것이 현대인의 불행의 원인입니다. 오늘 비난하기 좋아하는 이들에게 예수님 말씀하십니다. "너희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쳐라."  


3.  예수님의 온전한 용서를 받아들여야 합니다. (11)
  
예수님은 홀로 남은 여인에게 말씀하십니다. "사람들이 어디에 있느냐? 너를 정죄한 자가 없느냐?" "주님, 한 사람도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 말씀이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라. 다시는 죄를 범치말라" 하고 자유하게 해 주었습니다. 

여러분,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않는다, 이게 무슨 말입니까?  예수님은 죄가 없습니다. 심판할 자격이 있고 심판주이십니다. 예수님은 죄가 없으니까 돌로 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라." 너의 모든 죄를 다 용서하노라. 너는 이제 깨끗함을 받았노라.  여기에 구원이 있습니다. 여기에 놀라운 은총이 있는 것입니다.  
  
이 여자는 이제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예수님의 참 모습을 보게 되었습니다. 감격이 밀려옵니다. 감동에 사로잡힙니다. 감사함에 발아래 엎드리게 됩니다. 한 사람이 죄 용서를 받고 구원받아 새롭게 태어나는 아름다운 순간입니다.  
  
여러분 이 사건을 통해 한 여인이 하나님의 위대한 사랑과 온전한 용서를 경험합니다.  그렇게 죄인인 한 여인이 구원받고 새로운 삶을 시작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이 여자와 같이 인간의 처절한 죄의 현장에서 붙잡혀 멸망할 위기에서 용서를 받은 경험이 있으면 생생하게 이해가 되고 감격이 생생합니다.  그렇지 않고는 인생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자신이 얼마나 큰 죄를 용서받고 하나님의 큰 사랑을 받으며 사는지 옳게 파악하지도 못하고 있을 뿐입니다.  그러기에 남의 작은 허물만 보면 쉽게 돌을 들수 있는 용기가 생깁니다.
  
저들 눈에는 구원의  은총이란 말은 도저히 이해되지도  않거니와, 하나님이란 존재 자체도 보이질 않습니다.  그러기에  종교의 이름을 내세워 함부로 정죄하고 재판하고 죽이고 하며 불의를 일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죄의 용서를 경험하고 받아들인 사람만이 알고 감동하고 감격합니다.  여러분, 예수님의 용서를 경험하고 은혜 충만하여져서 서로 용서할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한국 기독교회사에서 1907년은 아주 중요한 해입니다. 평양에서 부흥운동이 크게 일어나 강력한 성령의 역사가 온 나라에 확산되었기 때문입니다. 수많은 기적의 역사가 일어나고 수많은 이들이 회개하고 하나님께 돌아왔습니다. 

그런데 그 부흥운동은 하디선교사가 집회를 인도하면서 자신이 선교사로 오게 된 동기를 반성하고 회개하던중에 뜨거운 성령의 임재를 경험합니다. 그리고 길선주 목사님이 모든 교인들앞에서 공개적으로 회개하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나는 죄인입니다. 내가 예전에 친구가 가족에게 전해 주라는 돈을 가로챈 나쁜 놈입니다."  

그러자 봇물이 터져 나오듯 교인들도 공개적으로 회개하기 시작했습니다. 살인, 강간, 간음, 도적질, 질투 등의 온갖 더러운 죄를 고백하며 자복하였습니다. 그리고는 강력한 성령의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온갖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온 나라에 부흥의 불길이 들불처럼 번졌습니다. 
  
여러분, 생각해 보세요. 지금 이 나라가 왜 이처럼 시끄럽습니까? 모두가 비판하고 모두가 죽여라고 소리를 지릅니다. 비난의 소리가 들립니까? 죽여라 죽여라 하는 소리가 들립니까?  누가 누구를 비판합니까?  냉정하게 자신을 돌아봅시다. 죄에서 얼마나 깨끗하고 자유로운지를 돌아봅시다.  그리고 먼저 회개합시다. 남의 허물을 들추어내며 돌을 던지기보다 나의 죄를 깨닫고 회개하기 시작할 때 예수님을 만납니다. 

하나님의 큰 용서가 임하고 내 가정에 축복이 임하고 우리 나라가 아름답게 변하고 우리 교회에 다시 부흥이 임합니다. 여러분의 손에 들려 있는 돌을 내려 놓기 바랍니다. 마음의 돌도 내려놓기 바랍니다. 입에 있는 돌도 제하기 바랍니다. 그리고 겸손히 죄를 고백하며 용서받고 새롭게 되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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