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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비판하지 말라 (마 7: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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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판하지 말라 (마 7:1-6)

(마7:1-6)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 너희의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을 받을 것이요. 너희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니라.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보라. 네 눈 속에 들보가 있는데 어찌하여 형제에게 말하기를 나로 네 눈 속에 있는 티를 빼게 하라 하겠느냐. 외식하는 자여. 먼저 네 눈 속에서 들보를 빼어라. 그 후에야 밝히 보고 형제의 눈 속에서 티를 빼리라.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며 너희 진주를 돼지 앞에 던지지 말라. 저희가 그것을 발로 밟고 돌이켜 너희를 찢어 상할까 염려하라. 

1. 본문, ‘비판하지 말라.’에서 ‘비판’이라는 단어는 헬라어로 ‘크리노’(κρ?νω)인데, 이 단어에서 영어 ‘비판하다.’(criticize)라는 단어가 나왔습니다. 그런데 영어 성경은 모두 ‘비판하다.’는 ‘criticize’가 아니라 ‘판결’을 뜻하는 ‘judge’ 라는 단어로 번역되어 있습니다. 헬라어 ‘크리노’(κρ?νω)는 ‘판단하다’, ‘심판하다.’는 뜻입니다. 이 단어가 쓰인 성경 구절은 오늘 본문을 포함해 이렇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을 뜻할 때 사용된 단어입니다.

(롬2:16) 곧 내 복음에 이른 바와 같이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사람들의 은밀한 것을 심판하시는 그날이라  

(롬3:6) 결코 그렇지 아니하니라. 만일 그러하면 하나님께서 어찌 세상을 심판하시리요 . 

(행23:3) 바울이 가로되 회칠한 담이여. 하나님이 너를 치시리로다. 네가 나를 율법대로 판단한다고 앉아서 율법을 어기고 나를 치라 하느냐.  

(요18:31) 빌라도가 가로되 너희가 저를 데려다가 너희 법대로 재판하라. 유대인들이 가로되 우리에게는 사람을 죽이는 권이 없나이다. 

이웃, 형제에 ‘판단하지 말라.’는 의미로 사용되었습니다. 입법자와 재판자는 오직 한 분 하나님, 능히 구원하기도 하시며 멸하기도 하시는 하나님뿐이시기 때문입니다. 

(롬14:10-13) 네가 어찌하여 네 형제를 판단하느뇨. 어찌하여 네 형제를 업신여기느뇨. 우리가 다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리라. 기록되었으되 주께서 가라사대 내가 살았노니 모든 무릎이 내게 꿇을 것이요. 모든 혀가 하나님께 자백하리라 하였느니라. 이러므로 우리 각인이 자기 일을 하나님께 직고하리라. 그런즉 우리가 다시는 서로 판단하지 말고 도리어 부딪힐 것이나 거칠 것으로 형제 앞에 두지 아니할 것을 주의하라. 
 
(약4:11-12) 형제들아 피차에 비방하지 말라. 형제를 비방하는 자나 형제를 판단하는 자는 곧 율법을 비방하고 율법을 판단하는 것이라. 네가 만일 율법을 판단하면 율법의 준행자가 아니요 재판자로다. 입법자와 재판자는 오직 하나이시니 능히 구원하기도 하시며 멸하기도 하시느니라. 너는 누구관대 이웃을 판단하느냐.

또한 ‘크리노’(κρ?νω)는 ‘고소하다.’는 의미로 사용되기도 했습니다. 사도 바울이 예수 그리스도를 전한다는 이유로 고소되어 ‘심문받았다’는 의미로 사용되었습니다.

(행23:6) 바울이 그 한 부분은 사두개인이요 한 부분은 바리새인인줄 알고 공회에서 외쳐 가로되 여러분 형제들아 나는 바리새인이요 또 바리새인의 아들이라 죽은 자의 소망 곧 부활을 인하여 내가 심문을 받노라  

(행26:6) 이제도 여기 서서 심문 받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 조상에게 약속하신 것을 바라는 까닭이니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크리노’(κρ?νω)를 ‘송사’(고발, 법에 소송을 걸다.)라는 뜻으로 사용하셨습니다.

(마5:40) 또 너를 송사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도 가지게 하며 

사도 바울도 그러한 의미로 ‘크리노’(κρ?νω)라는 단어를 사용했습니다
.
(고전6:6) 형제가 형제로 더불어 송사할 뿐더러 믿지 아니하는 자들 앞에서 하느냐

이처럼 신약성경에서 ‘크리노’(κρ?νω)는 거의 모두가 다 순전히 재판의 의미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엄격히 말하면, ‘비판하지 말라’는 한글 번역은 잘못된 것입니다. 따라서 오늘 본문 ‘비판하지 말라’는 뜻은 남을 ‘판단하지 말라’, ‘정죄하지 말라.’, ‘심판하지 말라.’입니다. 


2. 한번은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붙잡힌 여자를 끌고 예수께 왔습니다. 그리고는 이렇게 말합니다. “선생님, 모세의 율법에 의하면 이 여자는 돌로 쳐 죽여야 합니다. 선생께서는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예수님을 궁지에 몰아넣기 위한 수법이었습니다. 법대로 하자면 간음한 여인에게 사형을 선고해야 하며, 또한 사형을 선고하게 되면, 당시 유대인들에게는 원칙적으로 사형을 집행할 권한이 없었음으로 예수가 만약 사형을 선고하게 된다면 그것은 로마 총독의 권한 침해라는 구실로 고발당하게 될 것이고, 반대로 그 여인을 사랑으로 용서하라고 하면 유대의 율법을 위배하는 것이며, 그렇게 되면 예수의 사랑의 정신은 무력한 것이 될 것이기 때문에 그러한 ‘법과 사랑의 딜레마(dilemma)’에 몰아넣자는 것이었습니다. 사실상 간음은 중범죄로서 율법을 적용시키면 이 간음한 여인을 처형하는데는 사실상 예수님의 동의는 필요없는 것이었습니다.

(신22:21-24) 처녀를 그 아비 집 문에서 끌어내고 그 성읍 사람들이 그를 돌로 쳐 죽일지니 이는 그가 그 아비 집에서 창기의 행동을 하여 이스라엘 중에서 악을 행하였음이라. 너는 이와 같이 하여 너의 중에 악을 제할지니라. 남자가 유부녀와 통간함을 보거든 그 통간한 남자와 그 여자를 둘 다 죽여 이스라엘 중에 악을 제할지니라. 처녀인 여자가 남자와 약혼한 후에 어떤 남자가 그를 성읍중에서 만나 통간하면 너희는 그들을 둘 다 성읍 문으로 끌어내고 그들을 돌로 쳐 죽일 것이니 그 처녀는 성읍 중에 있어서도 소리 지르지 아니하였음이요. 그 남자는 그 이웃의 아내를 욕보였음이라. 너는 이같이 하여 너의 중에 악을 제할지니라. 

유대 율법의 집성인 미슈나(Mishnah)는 간음에 대한 형벌을 교살로 정하고 그 교살의 방법까지도 규정하고 있습니다. 간음한 남자를 분뇨통에 넣어 교살하라는 것입니다. 간음한 죄는 가장 더러운 죄라 하여 아주 더럽게 죽였던 것입니다. 또 한 가지 성경에 기록된 간음한 죄에 대한 벌은 온 동네 사람들이 동구밖에 나가서 돌을 던져 죽이는 것입니다. 그야말로 돌무더기 속에 집어넣는 참혹한 극형으로 아이들까지 동원하여 동네 사람 전체가 참가하는 처형 방법입니다. 

그렇게 함으로서 그 마을에서는 다시 그와 같은 죄가 없도록, 즉 악을 완전히 제거하자는 데 뜻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는 이러한 딜레마를 두 차례에 걸친 초월적인 지혜의 행위와 말씀으로 간단하게 해결하신 것이었습니다. 

예수의 판결은 ‘죄 없는 자가 돌로 쳐죽이라.’는 법의 집행입니다. 그래서 예수께서 땅에 손가락으로 글을 쓰시고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그렇게 기세등등하던 사람들이 이 말씀에 양심에 가책을 받아 모두 슬그머니 도망치고 말았습니다. 그러니까 거기 나왔던 사람들 중에 간음하다 현장에서 잡힌 여자보다 더 깨끗하고 죄 없는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이 사람들은 자신들의 잘못은 생각하지 않고 남의 잘못만 찾아내려고 애를 썼습니다. 

만약 오늘 이 사회에서 예수님이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고 하셨다면 서로 먼저 치려고 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돌로 치지 않는 것은 자기도 죄가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자기가 죄 없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서로 큰 돌을 들어 던지려고 할 것이라는 것입니다. 간음하다 붙잡힌 여인에게 돌을 던지기 전에 자신을 돌아볼 때, 양심의 가책을 받아 한 사람씩 한 사람씩 다 흩어졌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과 그 여자만 남았습니다.

(요8:9) 저희가 이 말씀을 듣고 양심의 가책을 받아 어른으로 시작하여 젊은이까지 하나씩 하나씩 나가고 오직 예수와 그 가운데 섰는 여자만 남았더라.

이 때, 예수께서 여자 외에 아무도 없는 것을 보시고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요8:10-11)...여자여 너를 고소하던 그들이 어디 있느냐. 너를 정죄한 자가 없느냐. 대답하되 주여 없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 하시니라.

‘오직 예수만’ 남았다는 것은 간음한 그 여인에게 돌을 던질 수 있는 사람은 오직 예수밖에는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는 돌을 던지지 않으셨습니다. 그녀를 정죄치 않으셨습니다. 어떤 면에서 이같은 예수의 행위는 자신을 죄인으로 동일시(Identification) 한 것입니다. 

나는 의롭다고 의를 내세운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불쌍히 여기시고 죄인을 사랑하셨으므로 스스로 죄인의 위치에 앉으신 것입니다. 높은 자리에서 낮은 자를 사랑할 수 없습니다. 같이 낮아져야 사랑할 수 있습니다. 사랑은 감상적이거나 쉽게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죄인을 사랑하려면 나도 죄인과 동일시 되어야 참 사랑이 이루어질 수 있는 것입니다. 이어 예수는 간음한 여인에게 “가서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11절)는 전제하에 사죄를 선언하셨습니다. 예수께서는 정죄하신 것이 아니라 사죄를 베푸신 것입니다. 이는 예수께서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오신 분임을 잘 말해주는 것입니다. 마태복음9:12-13입니다.

(마9:12-13) 예수께서 들으시고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데 있느니라. 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 

그러나 다시 오시는 예수는 죄인을 부르시는 것이 아니라, 죄인은 심판하시고 의인을 구원하여 영생에 이르게 하기 위하여 오시는 것임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가서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 앞에 나와 죄의 용서함을 받고 의롭다함을 얻은 사람들은 하나님 앞에서 변화된 거룩한 삶을 살아야 함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남을 정죄하는 것은 결국 자신을 정죄하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예수 믿는 나를 정죄하지 않으시는데 내가 남을 정죄한다면 스스로를 정죄하게 되는 것입니다. 

한 사형수가 단두대로 끌려 나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다른 사람 대신 억울한 누명을 쓴 채 죽음을 맞이하게 된 사람이었습니다. ‘잘못도 저지르지 않았는데 이대로 죽을 수는 없지 않은가!’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도 이 사형을 피할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습니다. 드디어 단두대에 다다랐습니다. 그런데 단두대에 올라가려는 바로 그 순간 그의 머리 속에서 한 가지 기발한 생각이 스쳐 지나갔습니다. “사형당하기 전에 할 말이 있으니 잠깐만이라도 임금님을 뵙게 해 줄 수 없겠소?” 

이제 곧 죽을 사람의 마지막 소원인지라 알현이 허락되었습니다. 임금님 앞에 선 그 죄수는 다짜고짜 품에서 금덩어리 하나를 꺼내 그 앞으로 내밀며 말했습니다. “이 금덩이는 보통 금덩이가 아니라 죄없는 사람이 심으면 싹이 나서 나중에는 금덩어리 열매가 열리는 진귀한 것입니다. 그런데 저는 이미 죄인이므로 심어도 소용이 없고, 또 이제 곧 죽어야 하니까 심을 수도 없습니다. 그래서 이것을 죄 없으신 임금님께 바치고 세상을 떠나려 하는 것입니다.” 

어리둥절하게 금덩이를 받아들은 임금이 생각했습니다. ‘나도 죄가 있으니 심어도 싹이 안 나올거야, 또 만일 심었다가 싹이 나오지 않는 날에는 백성들에게 임금님도 죄인이라고 손가락질 당할 것이 아닌가?’ 임금은 얼른 금덩이를 옆자리의 대신에게 넘겨주며 심어 보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 대신은 얼굴이 새파랗게 질리는가 싶더니 옆에 있는 다른 대신에게 또 다시 얼른 넘겨주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그 금덩이는 자꾸만 이 사람 저 사람의 손으로 밀려갔습니다. 결국엔 누구 하나 심으려는 자 없이 핑계만이 무성해졌습니다. 

이 광경을 본 죄수는 “이 중에도 죄없는 사람은 하나도 없는 것 같은데 왜 나만 죽이려 하십니까?” 하면서 자신의 무죄함을 거듭 호소했습니다. 그의 호소에 임금 이하 모든 대신들의 얼굴은 발갛게 달아올랐고, 결국 이 죽을 죄인은 사형을 면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사도 야고보는 형제를 비방하거나 판단하지 말라고 합니다. 입법자와 재판자는 오직 한 분 하나님뿐이시기 때문입니다. 야고보서4:11-12을 보겠습니다.

(약4:11-12) 형제들아. 피차에 비방하지 말라. 형제를 비방하는 자나 형제를 판단하는 자는 곧 율법을 비방하고 율법을 판단하는 것이라. 네가 만일 율법을 판단하면 율법의 준행자가 아니요 재판자로다. 입법자와 재판자는 오직 하나이시니 능히 구원하기도 하시며 멸하기도 하시느니라. 너는 누구관대 이웃을 판단하느냐.
 
성도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을 위해 “피차에 비방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욕하거나 험담하지 말라는 뜻입니다.(Do not slander one another., Do not speak evil against one another..)

(벧전2:12) 너희가 이방인 중에서 행실을 선하게 가져 너희를 악행한다고 비방하는 자들로 하여금 너희 선한 일을 보고 권고하시는 날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함이라 

(벧전3:16) 선한 양심을 .이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너희의 선행을 욕하는 자들로 그 비방하는 일에 부끄러움을 당하게 하려 함이라. 

물론 그렇다고 우리가 정당한 비판의 기능을 무시하거나 포기해야 한다는 것은 아닙니다. 형제를 바로 세우고 우리 가운데 죄악을 제거하기 위해서 뼈를 깎는 듯한 자기반성도 필요하고, 마치 자신의 수족을 찍어내는 듯한 고통스러운 비판을 형제에게 해야 할 때도 있습니다. 이러한 비판은 매우 소중하고 필요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비판도 신중하게 합니다. 왜냐하면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고 진주를 돼지 앞에 던지는 꼴이 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개에게 거룩한 것을 준다는 것은 거룩한 고기, 즉 제사장만 먹을 수 있는 아주 특별한 고기를 주었다는 의미입니다. 그렇다고 개가 그것을 압니까? 개한테는 그 고기가 거룩한 고기인지 그냥 고기인지 아무런 구별도 없고 상관도 없습니다. 마치 돼지 목에 진주 목걸이를 걸어주는 것과 같습니다. 돼지에게는 진주 목걸이가 필요 없습니다. 

오히려 돼지는 먹지도 못할 것을 주었다고 화를 내고 주인에게 달려들어 상하게 한다는 것입니다. 거룩한 것을 거룩한 것인 줄 모르고 값진 것을 값진 것인 줄 모르는 사람에게는 그런 것을 줄 필요도 없고 주어서도 안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혜서 잠언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잠언9:7-9입니다.

(잠9:7-9) 거만한 자를 징계하는 자는 도리어 능욕을 받고 악인을 책망하는 자는 도리어 흠을 잡히느니라. 거만한 자를 책망하지 말라. 그가 너를 미워할까 두려우니라. 지혜있는 자를 책망하라. 그가 너를 사랑하리라. 지혜 있는 자에게 교훈을 더하라. 그가 더욱 지혜로와질 것이요. 의로운 사람을 가르치라. 그의 학식이 더하리라. 

무슨 얘기인가 하면, 잘못을 지적하고 비판하는 것은 영혼을 살릴 수 있는 약이 됩니다. 여기서는 비판을 하는 것에 대한 말씀이 아니라 비판을 받는 입장에 대한 말씀입니다. 정말 소중한 친구라면 쓰디쓴 충고도 할 수 있는 사이일 것입니다. 진정으로 위하고 사랑하면서 잘못된 것을 그대로 내버려둘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다 자기 잘 되라고, 잘못된 것 고치고 올바로 되라고 충고와 비판을 하는데 그것을 못 받아들이고 기분 나빠하고 화를 낸다면 이런 사람에게 비판을 하는 것은 마치 돼지에게 진주 목걸이 걸어주려고 하는 것과 마찬가지라는 것입니다. 겸손하게 비판을 수용하고 잘못을 인정하는 사람이 정말 위대한 사람입니다. 


3. 예수께서는 정죄하지 아니하셨을 뿐, 비판까지 아니 하신 것은 아닙니다. 바리새인들은 습관적으로 비판합니다. 당시 바리새인들은 율법 조항으로 다른 사람들의 잘못을 비판하면서 다른 사람들을 정죄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자신들이 다른 사람과 다르다는 면에서 다른 사람들을 비판하고 정죄했습니다. 정말 그 비판으로 사람들이 깨닫고 고치고 변화되기를 바라서 하는 비판이 아닙니다. 이해심도 동정심도 없이 그야말로 비판을 위한 비판을 했습니다. 예수께서 그 예를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누가복음18:10-14입니다.

(눅18:10-14) 두 사람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가니 하나는 바리새인이요. 하나는 세리라.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가로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하고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가로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옵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였느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사람이 저보다 의롭다 하심을 받고 집에 내려 갔느니라.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하시니라.

바리새인은 기도하면서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면서 은근히 다른 사람과 세리 등을 비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비판은 남을 경멸하는 태도입니다. 그러므로 비판을 잘하는 사람은 사람을 경멸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사람에 대한 경멸은 비판보다 더 큰 죄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자녀이며, 하나님의 형상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을 자기 기준에 합당하지 않다고 하여 경멸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을 향하여 주님은 분명히 말씀합니다. 

(약 2:13) 긍휼을 행하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긍휼없는 심판이 있으리라. 긍휼은 심판을 이기고 자랑하느니라. 

예수께서 긍휼없는 자에게 대한 긍휼없는 심판을 비유로 말씀하셨습니다. 마태복음18:23-35입니다. 

(마18:23-35) 하늘 나라는 종들과 계산을 하려는 왕과 같다. 계산을 시작하자 10,000달란트 빚진 한 종이 왕 앞에 끌려왔다. 그 종은 빚을 갚을 돈이 없으므로 왕이 종에게 그와 아내와 자식들과 그가 가진 것 전부를 팔아서 빚을 갚으라고 명령하였다. 그러자 종은 왕에게 엎드려 ‘조금만 참아 주십시오. 그러면 다 갚아 드리겠습니다.’ 하고 간청하였다. 그래서 왕은 그를 불쌍히 여겨 빚을 모두 면제해 주고 놓아 주었다. 그러나 그 종은 나가 자기에게 100 데나리온 빚진 동료를 만나 멱살을 잡고 `당장 내 돈을 내놔!' 하면서 재촉하였다. 그 동료는 엎드려 ‘조금만 참아 주게. 반드시 갚겠네.’ 하고 간청하였다. 그러나 그 종은 그 사람의 간청을 들어주지 않고 빚을 다 갚을 때까지 그를 감옥에 가둬 버렸다. 다른 종들이 그가 하는 짓을 보고 몹시 마음이 아파 왕에게 가서 모두 일러바쳤다. 그래서 왕이 그 종을 불러 말하였다. ‘네 이놈, 네가 간청하기에 모든 빚을 면제해 주지 않았느냐? 그렇다면 내가 너를 불쌍히 여긴 것처럼 너도 네 동료를 불쌍히 여기는 것이 마땅하지 않느냐?’ 그리고서 왕은 화를 내며 빚을 다 갚을 때까지 그 종을 가두어 두었다. 너희가 전심으로 형제를 용서하지 않으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그와 같이 하실 것이다. 


4. 비판은 꼭 필요한 것입니다. 비판을 두려워하는 개인이나 공동체는 성숙할 수 없습니다. 건전한 비판은 개인에게는 깨달음을 주고, 공동체의 질서를 세워주는 수단이 됩니다. 하지만 비판을 하거나 받아들일 때에 주의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첫째, 확실한 근거에 기초하지 않은 추측성 비판은 삼가야 합니다. 의혹만으로 비판하지 말아야 합니다. 
둘째, 상대방을 일깨워주려는 목적이 아니라 헐뜯고 비방하려는 목적으로 비판하지 말아야 합니다. 
셋째, 비판은 비판으로 끝내야 합니다. 비판을 받는 일이 유쾌할 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감정적으로만 받아들이는 것은 성숙하지 못한 태도입니다. 

이러한 원칙이 무시된 채로 함부로 비판할 때, 그것은 곧 심판이 되어버립니다. 그리고 그러한 심판은 개인의 인격과 공동체의 평화를 파괴하는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요즘 인터넷 댓글 문화가 매우 심각한 지경입니다. 근거 없는 비방성 글을 무책임하게 유포함으로써 진실을 왜곡하고, 개인의 인격을 짓밟고, 어떤 경우에는 한 사람을 죽음으로 몰아가기도 합니다. 모건 블레이즈는 심판의 역기능을 다음과 같이 표현했습니다. 

“나는 치명적인 타격을 가할 수 있는 힘과 기술이 있다. 나는 상대방을 죽이지 않고도 승리할 수 있다. 나는 가정과 국가, 그리고 어떤 조직도 파괴할 수 있고, 수많은 사람을 파멸시킬 수 있다. 나는 바람의 날개를 타고 여행한다. 아무리 순결한 사람이라도 내게는 무력하고, 아무리 깨끗한 사람이라도 내게는 더럽다. 나는 결코 망각하지 않으며, 결코 용서하지 않는다. 내 이름은 비난이다.” 그러므로 오늘 본문을 더 깊이 해석하면, “비판하되, 심판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비판하되, 심판하지 말라!”는 대원칙 하에서 예수님은 우리가 마음에 새겨야 할 세 가지 심판에 관한 진실을 일러주십니다. 첫째는, 우리가 남에게 들이대는 심판의 잣대가 바로 우리 자신이 심판 받는 잣대가 될 것이라는 점입니다. 이를 본문에서 예수께서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남을 심판하는 그 심판으로 하나님께서 너희를 심판하실 것이요, 너희가 되질하여 주는 그 되로 너희에게 되어서 주실 것이다.”(2절) 

한 미국 마을에서 빵 공장 사장이 버터를 만드는 농장 주인을 고소했습니다. 이유인 즉 버터의 양을 슬며시 줄여 부당한 이익을 챙겼다는 것입니다. 판사가 농장 주인에게 물었습니다. “농장에서 버터를 만들 때 어떤 저울을 사용하고 있소?” 

그가 대답했습니다. 
“우리는 저울을 사용하지 않습니다.” 판사가 되물었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버터의 무게를 잰다는 거요?” 
“네, 그것은 간단하지요. 저희가 사먹는 빵이 1 파운드 짜리입니다. 
그래서 버터를 담을 때에 그 빵의 무게와 똑같은 무게의 버터를 담습니다.” 

“그럼 그 1 파운드 짜리 빵은 어디에서 사오는 거요?” 농장 주인은 자기를 고소한 빵 공장 사장을 가리키며 말했습니다. 
“판사님, 우리는 늘 저 사람 공장에서 만든 빵을 사다 먹습니다.” 

결국 죄에 대한 벌을 받게 된 것은 먼저 함량을 속인 빵 공장 사장이었습니다. 이와 같이 남에게 들이대는 심판의 잣대는 반드시 부매랑처럼 자신에게 돌아와 자신이 그 잣대로 심판을 받게 됩니다. 둘째는, 남을 비판하기 전에 먼저 자기 자신을 살펴보아야 한다는 점입니다. 

본문에서 예수님은 “어찌하여 너는 남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면서,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3절)고 꾸짖으십니다. 그런 사람을 위선자라고 말씀하십니다. “외식하는 자여. 먼저 네 눈 속에서 들보를 빼어라. 그 후에야 밝히 보고 형제의 눈 속에서 티를 빼리라.”(5절) 

이 말씀은 자기 자신에 대해서 잘 모르면서 마치 자기가 세상의 기준처럼 착각하여 자기는 정당화하고 다른 사람을 비판하고 정죄한다는 것입니다. 자기 자신에 대해서 한 없이 너그러우면서 다른 사람에게는 냉혹하리만치 엄격하게 비판하고 정죄한다는 것입니다. 자기에게는 관대하고 남에게는 가혹합니다. 자기가 하면 투자인데 남이 하면 투기입니다. 자기가 하면 로맨스인데 남이 하면 불륜입니다. 그래서 내 눈의 들보가 티로만 보이고, 남의 눈의 티는 들보로 보입니다. 

비판의 기준이 자기중심적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다른 사람의 관점에서 볼 수 있어야 합니다. 다른 사람의 관점에서 나를 보아야 합니다. 그래야 내 눈의 들보를 들보로 볼 수 있습니다. 다른 사람의 입장에서 그 사람을 보아야 합니다. 그래야 그 사람의 티가 티로만 보입니다. 예수 믿는 성도들은 자기 자신에게는 바늘 끝처럼 철저하고 남에게 대해서는 바다처럼 관대할 필요가 있습니다. 자기 자신의 실수와 허물은 뼛속 깊이 아파하고 괴로워해야 합니다. 그리고 남의 실수와 허물은 한없이 관용을 베풀어야 합니다. 우리 눈의 들보가 들보로 보여야 하고, 남의 눈의 들보는 티로 보여야 합니다. 우리 눈의 들보가 티로 보이면 그 눈에 병이 든 것입니다. 이 영적 눈병을 고쳐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갈라디아서6:1입니다.

(갈6:1) 형제들아 사람이 만일 무슨 범죄한 일이 드러나거든 신령한 너희는 온유한 심령으로 그러한 자를 바로잡고 너 자신을 살펴보아 너도 시험을 받을까 두려워하라 

마지막으로, “비판하되, 심판하지 말라!”는 말씀에 이어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며 너희 진주를 돼지 앞에 던지지 말라. 저희가 그것을 발로 밟고 돌이켜 너희를 찢어 상할까 염려하라.” 고 하셨습니다. 여기 ‘거룩한 것’과 ‘진주’는 상대방을 바로 잡아주려는 목적에서 주는 애정 어린 비판을 말합니다. 

그것을 ‘개나 돼지에게 주지 말라’는 말씀은 바리새인들이나 서기관들처럼 마음이 완고해져서 아무리 진심 어린 비판을 해주어도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으로 인해 시간과 열정을 낭비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아무리 설명해도 알아듣지 못하고, 아무리 권면해도 받아들이지 못하고, 아무리 비판을 해주어도 고치지 않는 경우에는 이후의 결과를 주님께 맡기고 겸손히 문제를 내려놓으라는 말씀입니다. 

옛날에 고집 쎈 사람 하나와 똑똑한 사람 하나가 있었습니다. 둘 사이에 다툼이 일어났는데, 다툼의 이유인 즉 슨, 고집 쎈 사람이 4×7=27 이라 주장하고, 똑똑한 사람이 4×7=28이라 주장했다는 것입니다. 

답답한 나머지 똑똑한 사람이 고을 원님께 가자고 말했고 그 둘은 원님께 찾아가 시비를 가려줄 것을 요청 했습니다. 고을 원님이 한심스런 표정으로 둘을 쳐다본 뒤 고집 쎈 사람에게 말을 하였답니다. 

“4x7=27이라 말하였느냐?” 
“네, 당연한 사실을 당연하게 말했는데, 글쎄 이놈이 28이라고 우기지 뭡니까?” 
그러자 고을 원님은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27이라 답한 놈은 풀어주고, 28이라 답한 놈은 곤장을 열대 쳐라!” 

고집 쎈 사람은 똑똑한 사람을 놀리며 그 자리를 떠났고, 똑똑한 사람은 억울하게 곤장을 맞아야 했습니다. 곤장을 맞으면서 똑똑한 사람이 원님께 억울하다고 하소연을 했습니다. 그러자 원님의 대답은......“4×7=27이라고 말하는 아둔한 놈이랑 싸운 네놈이! 더 어리석은 놈이니라!” 

우리에게는 상황을 분별할 수 있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언제까지 인내하며 머물러야 할지, 언제 포기하고 떠나야 할 지 분별해야 할 때가 있습니다. 언제까지 참고 받아주어야 할 지, 언제 포기하고 놓아주어야 할 지 분별해야 할 때가 있습니다. 

참으로 쉽지 않은 일입니다. 이런 일이 있을 때에는 반드시 우리 자신의 지혜에 의존하지 말고 주님의 지혜를 구해야 합니다. 그래야 훗날 후회하지 않을 바른 선택을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어떤 경우에도 결코 진리에 대한 소신과 인간에 대한 애정을 동시에 갖고 있어야 합니다. 

“죄는 미워하되 죄인은 미워하지 말라!”(Hate the sin, but not the sinner)는 말이 있습니다. 참으로 바르고 귀한 말입니다. 우리가 비판하는 것은 죄이지 죄인이 아닙니다. 죄인은 하나님께서 심판하십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가르쳐주신 것을 따라 옳고 그름을 판단하며, 옳은 길을 따르고 그릇된 길을 비판할 수 있을 뿐입니다. 옳고 그름은 분명히 하되, 비판이 심판이 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다른 사람을 파헤치는 일보다 자신을 돌아보는 일에 더욱 치열해야 합니다. 그리고 더욱 겸손하시기 바랍니다. 사람을 변화시키고 세상을 바꾸는 일은 우리의 비판 몇 마디로 가능한 일이 아님을 인정하고, 최선을 다하되 또한 하나님께 맡겨야 합니다. 이러한 실천을 통해서 더욱 평안하고 성숙한 가정, 교회, 사회를 이루어나가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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