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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기독교가 인류 역사에 기여한 것들 (신 34: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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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가 인류 역사에 기여한 것들 (신 34:1-6)

모세가 느보산에 올라가서 숨을 거둘 때 장차 이스라엘 백성이 들어갈 가나안 땅을 바라보며 숨을 거두었다고 했습니다. 과거 40년 동안 걸어 온 광야를 되돌아보지 않고 장차 이스라엘 백성이 들어가 차지할 땅을 바라보면서 숨을 거두었습니다. 그 먼 광야 길을 걸어서 요단강 어귀까지 올 수 있었던 것만 해도 대단한 일입니다. 그 길을 거치지 않았으면 여기까지 오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모세의 목적지는 광야길이 아니고 가나안 땅이었기 때문에 지금까지 걸어온 땅을 되돌아보지 않고 장차 들어갈 땅을 바라보면서 세상을 떠난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지난 수천 년 동안 기독교와 기독교인들이 세상에 여러 가지 기여한 바가 있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과거를 되돌아보는 백성이 아니고 천성을 향해 가는 백성들이기 때문에 천성을 바라봅니다. 그 동안 우리가 남긴 업적이 있다면 그것은 사실 부차적인 것이고 우리는 천성을 향해 앞을 바라보고 나아가는 사람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은 이스라엘 백성의 40년 광야 경험을 자세하게 서술했습니다. 그들이 어떤 경험을 했고 어떤 실수를 했고 하나님이 어떤 역사를 행하셨는지 가감 없이 기록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40년 동안 잘 한 것만 있는 게 아니고 잘못한 것도 많고 실수한 것도 많이 있습니다. 

성경은 그것을 숨기지 않고 다 기록했습니다. 그럼에도 이스라엘 백성이 도중에 주저앉지 않거나 기권하지 않고 요단강까지 올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이제껏 내가 산 것도 주님의 은혜라. 또 나를 장차 본향에 인도해 주시리.’

기독교가 인류 역사에 무엇을 기여했는가를 논할 때 당연히 누가 반발하느냐? 비그리스도인들이 반발할 것입니다. 그건 우리가 감수해야 됩니다. 그들은 우리의 신앙을 공유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당연히 기독교의 공헌을 폄하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럴수록 기독교가 인류 역사에 기여한 바가 무엇인지를 우리가 제대로 알아야 비신자들과 대화할 때 기독교 신앙을 제대로 변론할 수 있습니다.

달라이 라마는 당연히 기독교인이 아니에요. 그러나 수년전 뉴스위크 기자가 그를 인터뷰하는 자리에서 ‘기독교의 기여한 바가 무엇이라고 생각하느냐?’라는 질문에 달라이 라마는 다음과 같은 대답했습니다. 

‘첫째로 교육의 발전에 공헌했다. 둘째로 자선사업과 인도주의 발전에 기여했다. 셋째로 인간을 치유하는 데에 기여했다. 매우 후한 발언을 한 것인데, 달라이 라마가 기독교에 대하여 편견을 갖고 있었다면 이런 말을 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기독교인들 중에도 본인이 교회를 다니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에도 불구하고 기독교가 세상에 기여한 바가 별로 없다고 비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것은 두 마음을 품은 것이고, 누워서 침 뱉기를 하는 것이고, 마음에 편견을 갖고 있는 때문입니다. 

아마 본인 개인은 신앙인으로 세상에 기여한 바가 없을지 모르지만 이 세상에 그동안 신실하게 살려고 애를 쓰고, 그런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을 직접 만나보지도 못했으면서 피상적으로 기독교인들에 대하여 부정적으로 생각하는 것은 무식한 것이고 불공평한 것이고, 완악한 것입니다.

우리가 흔히 말할 때 ‘사람을 보지 말고 하나님을 보고 교회를 다녀라.’고 하는데, 그건 일반적인 상식을 말하는 것이지 실제로 본보기가 될 만한 기독교인이 없다는 말은 아닙니다. 우리의 안목이 좁고, 우리의 지식이 적고, 우리가 충분히 세상을 경험해 보지 않았기 때문에 그런 말을 하는 것입니다. 

레미제라블에서 장발장이 변화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사람이 어느 시골 성당의 사제였지요. ‘이 사람이 신부님의 은촛대를 훔쳤습니까?’라는 경찰의 질문에 ‘형제여, 내가 다른 은촛대도 드렸는데 왜 그것은 가지고 가지 않았습니까?’라고 장발장을 두둔해주는 것을 경험하고 강퍅했던 장발장이 변화하는 계기가 되지 않습니까. 

물론 이것은 픽션이지만 실제로 이런 인물이 세상에 있느냐 하는 질문은 핵심을 비켜가는 것입니다. 빅터 휴고가 기독교 사상에 감화를 받고 영감을 받았기 때문에 이런 작품을 쓸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레미제라블은 기독교 정신을 반영한 것이고 기독교가 인간에게 줄 수 있는 영향에 대해서 말하고자 한 것입니다. 

Ben Hur도 인기 영화였던 것뿐만이 아니고 위대한 문학작품이었는데, 그 작품이 말하고자 한 것도 기독교 정신입니다. 용서와 구원이라는 주제를 말하고자 한 것입니다. 이것은 픽션일 뿐인데 실제로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다는 말이냐 라고 묻는다면 그것 역시 핵심을 비켜가는 것입니다. 그와 같은 정신을 제시했다는 사실이 중요합니다. 기독교가 아니라면 인류는 이처럼 원수를 용서한다든가, 절망에서 구원의 소망을 가질 수 있다는 메시지를 얻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기독교가 인류 역사에 기여한 바가 무엇이냐? 몇 가지 기독교만이 할 수 있었던 그것을 말씀드리면 

첫째로 인간의 가치를 긍정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인간의 가치를 긍정했습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찾아오셨다는 사실에서 인간은 죄인일지라도 구원할만한 가치가 있고, 찾을만한 가치가 있고, 살릴만한 가치가 있다는 것을 하나님이 확증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인본주의와 어떻게 다르냐? 인본주의는 사람이 스스로 가치를 창조하는 것이지만 기독교는 하나님이 가치를 부여하셨다는 것이 다른 것입니다. 

그래서 기독교의 영향으로 천한 자 · 병든 자 · 가난한 자 · 여성 · 어린이 · 이방인 · 죄인, 모든 사람의 본질적인 가치를 긍정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군국주의라든가 전체주의는 기독교 사상과 맞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국군주의나 전체주의 사회에서는 전체를 위하여 개인의 생명을 중요시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일본의 군국주의에서는 천황을 위하여, 국가를 위하여 꽃다운 젊은이들의 희생을 강요할 수 있었습니다. 사람은 아무 것도 아니고 전체를 위해서 얼마든지 희생할 수 있다는 것으로 그들은 믿었습니다. 공산주의도 그랬지요. 혁명을 위해서는 사람은 아무것도 아니다, 혁명을 이루기 위해서 사람을 얼마든지 희생할 수 있다, 

이것이 공산주의에요. 그러나 기독교는 그렇게 믿지 않고 그렇게 가르치지 않습니다. ‘사람이 온 세상을 얻고도 자기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자기 목숨과 바꾸겠느냐’, ‘목자가 길을 잃은 양 한 마리를 찾기 위하여 양 아흔아홉 마리를 들에 두고 찾으러 간다’고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우리가 우리 십자가를 지고 우리 자신을 부인할 것을 말씀하셨지만 한 분만이 세상을 위하여 십자가에 달려 희생 당하셨습니다. ‘너희가 나를 찾았으니 이들을 가게 하라’ 이것이 예수님의 말씀이에요. 예수님 한분이 고난을 당하심으로 우리가 평강을 얻고 구원을 얻게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섬김을 받으러 오신 것이 아니고 섬기려 오셨습니다. 

여기에 기독교가 전파된 곳마다 인간을 귀중하게 여기는 사상이 발달할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은 한 가지가 아닌 여러 가지 방법을 통해서 나타났습니다. 노예제도가 폐지되고, 여성과 어린이와 병자와 가난한 자와 죄인과 이방인에 대한 차별을 극복하는 원동력을 제공했습니다. 빈민과 병자의 인권을 보호하게 되고 복지 · 박애 · 갱생 · 의료 이 모든 것이 발달할 수 있는 동기가 된 것입니다.

영화 <트래픽>을 보면 마약의 문제를 의논하기 위하여 미국의 대표와 멕시코의 대표가 서로 만나서 의논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왜냐하면 미국으로 들어가는 마약의 대부분이 멕시코를 통해서 들어오기 때문이에요. 미국 대표가 멕시코 대표에게 물어보기를 ‘멕시코에서는 마약 중독자들을 위한 어떤 대책이 있습니까?’라고 물어봅니다. 멕시코 대표가 대답하기를 ‘그런 대책은 없습니다. 마약 중독자가 죽으면 그만큼 문제가 적어지니까.’ 이 말을 듣고 미국 대표가 뭐라고 대답할 바를 알지 못합니다. 비록 마약 중독자가 자신의 상태에 대해서 책임이 있지만 그들을 버릴 수 없기에 건지기를 도모해야 되지 않느냐, 이것은 지극히 기독교적인 사상이에요.

하나님 말씀하시기를 ‘내가 너를 떠나지 아니하고 너를 버리지 아니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은 물건을 버립니다. 쓰지 않는 물건을 버립니다. 그걸 쓰레기라고 합니다. 하도 많은 물건을 버리기 때문에 종량제를 실시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우리는 쓰지 않는 물건뿐만 아니라 쓸모없다고 생각되는 사람마저도 버리려고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죄인이라도 버리지 않으시고, 병자라고 버리지 않으시고, 몸을 버린 여자라고 버리지 않으십니다. 사람은 사람을 버리지만, 하나님은 사람을 버리지 않습니다. ‘내가 너희를 떠나지 아니하고 너를 버리지 아니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기독교 사상이 발달한 국가일수록 한 사람, 한 사람을 귀중히 여기고 건지기 위하여 애를 쓰는 것입니다. 이것은 아주 중요한 사상이에요. 

수년 전 TV에서 샤이암 쌍둥이 분리수술에 대한 다큐멘터리를 본 적이 있습니다. 샤이암 쌍둥이란 몸이 붙어서 엄마 뱃속에서 나온 것이 아닙니까. 이 아이가 어느 나라 출신이었는지는 분명히 기억이 나지 않는데 동남아시아 어느 국가였던 것 같습니다. 이 샤이암 쌍둥이의 몸통이 붙어 있어요. 

그런데 서구의 의료진이 이 쌍둥이를 데리고 가서 분리수술을 해 주는데 허리와 장이 붙어 있기 때문에 분리를 할 경우 항문이 하나밖에 없기 때문에 다른 아이에게는 인조 항문을 만들어주어야 되는 아주 어렵고 시간이 많이 드는 수술을 수십 명의 의료진이 달라붙어서 이 수술을 실시해서 성공을 하는 과정을 담은 다큐멘터리입니다. 

저는 그것을 보면서 궁금하게 생각했습니다. 이 샤이암 쌍둥이가 태어난 본국에서는 왜 이런 수술을 시도하지 않고 서구 의 의료진이 그를 데려다가 이 어려운 수술을 해 주었을까? 본국은 후진국이고 서구의 의료진은 선진국이기 때문이라고만 설명하는 것은 흡족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인간을 보는 관점의 차이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 쌍둥이가 태어난 본국 사람들은 이것이 그 아이들의 숙명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숙명이기 때문에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겠지만 서구 의료진은 이게 숙명이 아니고 고칠 수 있다, 고쳐야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지극히 기독교적인 사상인 것입니다. 예수님이 수많은 병자들을 보실 때 한 번도 이것은 너의 운명이다, 이것은 너의 숙명이라고 지나치지 않고 일일이 다 고쳐주신 거예요. 예수님이 병자뿐만이 아니고 인간에게 얼마만큼의 가치를 부여하셨는가를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기독교가 인류 역사에 가장 크게 기여한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 아니면 다른 어떤 방법을 통해서도 얻을 수 없는 귀중한 진리가 되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 기독교는 존재의 가치를 긍정했습니다. 인간의 존재뿐만이 아니라 모든 것의 존재가치를 긍정했습니다. ‘하나님이 만드신 모든 것이 선하니 감사함으로 받으면 버릴 것이 없느니라’ 여기에도 ‘버릴 것이 없느니라’는 말이에요. 

신앙의 목적은 무엇을 버리기 위한 것이 아니고 무엇을 없애기 위한 것이 아니에요. 인간의 욕망이든, 번민이든, 이것을 부인하고 지우기 위한 것이 신앙의 목적이 아닙니다. 예수님 말씀이 ‘나의 온 것은 너희로 생명을 얻되 더 풍성히 얻게 하기 위함이니라’ 가나의 혼인잔치에서 포도주가 떨어졌을 때 예수님은 ‘포도주가 없으면 물을 마셔라’ 이렇게 말씀하시지 않고 물을 포도주로 바꾸어 주시고 더 나은 포도주를 만들어 주셨다고 했습니다. 

믿음은 없는 것을 있는 것처럼 부르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모든 것이 어두운 상태에서 ‘빛이 있으라’고 하셨더니 빛이 있었던 것처럼 하나님이 당신 자신에 대하여 말씀하시기를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 – I am that I am’ 스스로 있는 자이신 하나님이 우리를 당신의 형상대로 지어주셨기 때문에 인간의 존재이든 하나님이 만드신 피조물이든 모든 존재가 귀중하고 그것을 우리가 긍정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기독교 신앙은 창조적이고, 진취적이고, 진보적인 사상을 가능하게 했습니다. 기독교 신앙이 뿌리를 내린 나라에서는 필연적으로 발전이 이루어지는데 이것은 모든 면에 일컬어 발전이 가능한 것입니다. 과학 · 기술 · 경제 · 의학 · 탐구 이 모든 것에 필연적으로 발전을 가능하게 했습니다. 

아마 세상사람 중에는 이러한 사실을 인정하고 싶어 하지 않는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마는 동네 어느 집에 잔치가 열리면 동네 사람들이 다 잔치 떡을 얻어먹는 것처럼, 기독교가 세상에 끼친 혜택을 비그리스도인들도 얻어먹습니다. 다만 그 혜택이 어디서 왔는지 본인이 알지 못하는 것뿐입니다. 

예수님 말씀에 천국은 반죽에 누룩을 넣는 것과 같아서 누룩을 넣으면 반죽 전체를 부풀린다고 하셨고 천국은 겨자와 같아서 겨자씨는 지극히 작은 것이로되 땅에 심으면 큰 나무가 된다고 말씀하신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는 인간 사상에 혁명적인 변화를 가지고 왔습니다. 

우리가 이 사실을 알아야 됩니다. 기독교인들은 자신의 역할과 또한 자신의 믿음에 대한 자존감을 되찾아야 됩니다. 예수님이 인류에 주신 사랑은 한이 없습니다. 한이 없는 사랑과 은총을 베푸셨습니다. 그것을 우리도 경험했고 그리고 그것을 남에게 전해야 될 사명이 있는데 예수 믿는 사람들이 세상에 기여할 수 있는 것도 이와 같은 것입니다. (김영준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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