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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우리가 믿고 있는 거짓말 (행 5: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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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믿고 있는 거짓말 (행 5:1-11)

얼마 전 읽은 책 중에 “교회에서 가르치는 거짓말”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열아홉에 목사가 되어 40년 넘게 사역했지만, 처음 30년간은 복음이 아닌 한낱 인간의 도덕 체계와 율법의 수준으로 낮추어 설교를 했던 저자 스티브 맥베이가 “반쪽짜리 복음은 거짓말일 뿐이다”라는 깨달음을 얻고 지은 책입니다.

그는 오늘날 수많은 목회자와 교회가 옛날의 자신처럼 ‘반쪽자리 복음’을 전하고 있다고 말합니다. 그 결과 교회에는 참된 믿음을 가진 사람들이 아닌 반쪽짜리 믿음, 다시 말해서 거짓된 믿음을 갖고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이 넘쳐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이야기입니다. 아나니아라 하는 사람이 그의 아내 삽비라와 더불어 소유를 팔아 그 값에서 얼마를 감추고 사도들의 발 앞에 두었는데 그 일로 인해서 죽음을 맞이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아니 이게 말이 됩니까? 어떻게 헌금을 다 드리지 않았다고 생명을 거두어 갈 수 있다는 말입니까? 본문 3절 보세요.

“베드로가 이르되 아나니아야 어찌하여 사탄이 네 마음에 가득하여 네가 성령을 속이고 땅 값 얼마를 감추었느냐”

왜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저주 받아 죽음을 맞이했습니까? 거짓말 때문이었습니다. 성경은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죽은 것이 소유 전부를 드리지 않아서가 아니라 거짓된 마음, 거짓된 믿음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사건은 대표적인 사건입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를 통해 이제 막 세워져가는 교회의 순결성을 유지하시기 위해서 일벌백계로 삼으신 것입니다. 경고하신 거에요. 그러기에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인다워지기 위해서, 아니 교회가 교회다워지기 위해서는 아나니아와 삽비라처럼 거짓된 마음을 가져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Ⅰ. 그렇다면 우리가 어떻게 거짓된 마음을 버리고 참된 신앙인으로 살아갈 수 있을까요? 거짓말은 하나님을 속이는 행위라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여러분 마음이 불편하시지 않습니까? 아니 거짓말 한 번 안 해본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거짓말을 했다고 해서 다 죽이신다면 여기에 살아남아 있을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그런데 왜 하나님은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거짓말을 단호하게 처리하신 것일까요? 거짓말은 하나님을 속이는 행위이기 때문입니다. 본문 3~4절 읽어 볼까요?
  
“베드로가 이르되 아나니아야 어찌하여 사탄이 네 마음에 가득하여 네가 성령을 속이고 땅 값 얼마를 감추었느냐 땅이 그대로 있을 때에는 네 땅이 아니며 판 후에도 네 마음대로 할 수가 없더냐 어찌하여 이 일을 네 마음에 두었느냐 사람에게 거짓말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로다”

베드로가 아나니아에게 뭐라고 말하냐면 성령을 속였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속였다는 거에요. 제가 아나니아라면 이렇게 말했을 것입니다. ‘언제요. 제가 언제 하나님을 속였다고 그러십니까?’ 사실 현대 교회에서 누군가가 아나니아처럼 헌금했다면 이건 칭찬받을 일입니다. 지금 우리의 상식으로는 도저히 이해하기 힘든 장면이 기록되어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베드로의 말이 맞습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하나님을 속인 것입니다. 헌금은 누구에게 드리는 것입니까? 하나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헌금은 내 인생의 주인이 물질이 아니라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드러내는 신앙고백입니다. 예수님만이 나의 구주이시고 나의 주인이시기에 다시는 물질을 주인으로 떠받드는 인생이 아니라 주인 되신 하나님의 뜻대로 물질을 사용하겠다는 고백을 드린 것이지요. 누구에게 말입니까? 하나님께 말입니다.

그런데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감추었습니다. 하나님께 드리면서 하나님을 속일 수 있다고 생각한 거에요. 그분 앞에 숨길 수 있는 것은 없습니다. 이 땅에서 우리가 은밀하게 행한 모든 것이 언젠가 그분 앞에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충분히 하나님을 속일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들이 믿는 하나님은 성경에 기록된 전지전능하신 하나님, 창조주 하나님, 지금도 살아계셔서 우리 가운데 거하시는 하나님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에게 하나님은 얼마든지 속일 수 있는 어리석은 하나님이었습니다. 우상이지요.
 
우리는 그런 하나님을 믿는 사람을 종교인이라고 부릅니다. 기억하십시오. 교회 안에 들어와서 참된 신앙을 갖지 못한 채 종교인으로 살았던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하나님을 속일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야말로 속은 것입니다. 하나님을 속일 수 있다는 거짓말에 속은 것입니다.

한발 더 나아가서 우리가 어떻게 거짓된 마음을 버리고 참된 신앙인으로 살아갈 수 있을까요? 거짓말은 자신을 속이는 행위라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저는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이야기를 읽으면서 이해되지 않는 것이 하나 있었습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왜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깨닫지 못했을까? 그것은 자기 자신에게 속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나는 하나님이 필요하지 않은 사람이야. 나는 죄가 없어’라는 거짓말에 속고 있었던 것입니다.

성경은 그런 사람은 하나님을 만날 수 없다고, 예수님이 누구이신지 깨달을 수 없다고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누가복음 5장 31~32절 보세요.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나니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노라”

예수께서 지금 이 말씀을 누구에게 하고 계신 것입니까?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에게 하신 거에요. 왜요? 그들은 자신들을 의인라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로 인해 그들은 자신들을 구원하실 예수님을 눈앞에 두고도 구원받지 못하고 말았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중요한 진리 하나를 얻습니다. 아무리 성경을 읽고 묵상한다고 해도 자신의 치명적인 문제를 바라보지 못한다면 종교인으로 전락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바로 그런 사람들이었습니다. 본문 1~2절 보세요.
 
“아나니아라 하는 사람이 그의 아내 삽비라와 더불어 소유를 팔아 그 값에서 얼마를 감추매 그 아내도 알더라 얼마만 가져다가 사도들의 발 앞에 두니”

이 본문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본문 앞에 생략된 접속사를 이해해야 합니다. 원문에 보면 ‘그러나’라는 의미의 접속사 ‘데(de)’라는 단어가 있습니다. 그것은 본문이 앞에 본문과 연계되어서 이해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앞에 어떤 본문이 있었습니까? 바나바가 자신의 밭을 처분해서 그 처분한 모든 것을 사도들의 발 앞에 두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그러나 아나니아라는 하는 사람은 그 아내와 더불어 소유를 팔아 그 값에서 얼마를 감추었다는 것입니다. 무슨 말입니까?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소유를 팔아 헌금을 한 것은 바나바처럼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아 드린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가 헌금한 이유는 하나님의 은혜 때문이 아니라 자신의 체면 때문이었습니다.

왜요? 자신이 바나바보다 못할 게 없는 사람이거든요. 그런데 바나바가 사람들의 존경을 받자 자신도 사람들에게 존경받는 사람이 되기 위해 드린 것입니다. 하지만 막상 드리려니 아까웠어요. 하지만 바나바처럼 그 물질로 자신도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고 싶었어요. 그래서 얼마를 감추고 드린 것입니다.

그렇다면 분명해졌습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은 것이 아니라 사람들에게 자신의 종교심이 얼마나 대단한 지를 보여주기 위함이었습니다. 무슨 말이에요? 아직도 이 사람은 자기 자신에게 속고 있는 것입니다. 자신이 죄와 허물로 망가져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구원받을 수 없다는 것을 모르고 있는 것입니다. 여전히 자신이 꽤 괜찮은 사람이라고 여기고 있는 거에요.

이재철 목사님은 “사도행전 속으로”라는 책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발상의 대전환이 수반되지 않은 믿음은 종교심과 구별될 수 없고, 종교심이 깊어지면 깊어질수록 인간은 실은 하나님과 더욱 무관한 존재가 되고 맙니다.”

그렇습니다. 발상의 대전환, ‘내가 그래도 괜찮은 사람이야’라는 착각에서 벗어나 ‘내가 죄인 중의 죄인이구나’하는 발상의 대전환이 없이는 교회 안에서 열심히 헌신하면 헌신할수록 하나님과 더욱 무관한 존재가 되고 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자신이 꽤 괜찮은 사람이라는 말로 자기 자신을 완전히 속였기에 자기 자신도 자신이 종교인이라는 것을 전혀 눈치 채지 못하는 것입니다.

Ⅲ. 마지막으로 우리가 어떻게 거짓된 마음을 버리고 참된 신앙인으로 살아갈 수 있을까요? 거짓말은 사단의 지배를 받는 행위라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워렌 위어스비 목사는 “정직의 위기”라는 책에서 남에게 거짓말을 하는 것은 영적인 어두움에 들어가는 첫 단계에 불과하다고 말합니다. 거짓이 계속되면 이제는 꾸며대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삶의 방식이 되어 남을 속이는 위선과 자기 자신을 속이는 표리부동이 계속되고, 결국 정직은 침식되고 그 결과 배교, 하나님을 거짓말쟁이로 만드는 일이 일어난다고 경고합니다. 그런데 왜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아니 왜 우리는 계속 거짓말을 하는 것일까요? 그것은 우리를 속이는 존재가 있기 때문입니다. 본문 3절 보세요.

“베드로가 이르되 아나니아야 어찌하여 사탄이 네 마음에 가득하여 네가 성령을 속이고 땅 값 얼마를 감추었느냐”

베드로가 뭐라고 말하고 있습니까? 아니니아가 성령을 속이게 된 이유가 무엇 때문이라고요? 사단이 아나니아의 마음에 가득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성경은 사단의 존재를 분명히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우리를 속여 우리의 인생을 무너뜨리려는 사단이 있다는 사실을 그렇게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요한복음 8장 44절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대로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 그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하나니 이는 그가 거짓말쟁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음이라”

그렇습니다. 사람들을 유혹해 무너뜨리는 사단이 있습니다. 그리고 성경은 이 사단이 바로 거짓의 아비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기억하시나요? 왜 인류가 타락하게 되었습니까? 사단이 거짓말로 아담과 하와를 유혹했기 때문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 먹으면 정녕 죽으리라고 하나님께서 분명하게 말씀하셨지만 사단이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는 거짓으로 그들을 속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아담과 하와는 유혹을 받아 사단의 거짓말에 놀아난 것일까요? 사단의 책임인가요? 아니요.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같이 되려는 욕심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아담과 하와가 욕심을 갖고 선악과를 바라보는 모습을 이렇게 소개하고 있습니다. 창세기 3장 6절 보세요.
 
“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 여자가 그 열매를 따먹고 자기와 함께 있는 남편에게도 주매 그도 먹은지라”

왜 선악과를 따먹었습니까? 욕심 때문이었습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이 왜 사단의 지배를 받게 되었을까요? 그것은 그들 안에 욕심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야고보서 1장 15절은 말씀합니다.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

그렇습니다. 욕심을 가질 때 우리의 마음은 사단이 노략질하기 가장 쉬운 놀이터로 전락하고 맙니다. 그러기에 디모데전서 6장 10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탐내는 자들은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

사랑하는 여러분,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왜 믿음을 갖지 못했습니까? 왜 신실한 신앙을 갖지 못한 채 사단이 그 마음에 가득하게 되었습니까? 욕심 때문이었습니다. 그 욕심이 자신을 속였고, 그 욕심이 하나님도 속일 수 있다는 미련한 생각을 하게 만든 것입니다.

그러기에 거짓된 마음을 버리고 참된 신앙의 길을 걷고자 한다면 욕심을 버려야 합니다. 온통 죄와 허물로 철저히 부패한 우리의 마음을 보아야 합니다. 그럴 때만이 우리는 사단의 지배에서 벗어나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께 향할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때에야 비로소 우리는 한량없는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고,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걸었던 종교인의 길, 죽음의 길이 아닌 바나바와 초대교인들이 걸었던 신앙인의 길, 생명의 길을 걸을 수가 있을 것입니다.

1956년 미국 전역을 큰 충격으로 몰아넣었던 이야기 하나가 있습니다. 밝은 미래가 약속된 다섯 명의 젊은이들이 에콰도르의 아우카족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 떠났다가 불과 닷새가 지나기도 전에 그들에게 죽임을 당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그들의 주머니에 권총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충분히 자신들의 신변을 보호할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대로 죽은 것입니다.

당시 타임지는 이 사실을 보도하면서 얼마나 분노했는지 그 기사의 타이틀은 “What a Waste!”(이것이 무슨 낭비인가)였습니다. 한 기자는 순교 당했던 짐 엘리엇의 부인 엘리자베스 엘리엇에게 찾아가 동일한 말을 내뱉었습니다. “What a Waste!” 명문 휘튼 대학을 수석으로 졸업한 그가 부질없이 생명을 버린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20대 초반밖에 안되었던 엘리엇 부인은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나의 남편은 어렸을 때부터 이 순간을 위해 준비했던 사람입니다. 내 남편은 이제야 그 꿈을 이룬 것뿐입니다. 이후로 다시는 내 남편의 죽음을 낭비하라고 말하지 마십시오.”

후에 엘리자베스 엘리엇은 자신의 남편이 기숙사에 있을 시절부터 적었던 글과 일기를 공개해 책으로 출간했습니다. 그 책이 바로 “전능자의 그늘”이라는 책입니다. 그 책에서 저는 뜻밖의 글을 읽게 되었습니다. 순교자 짐 엘리엇은 사랑하는 자신의 연인, 베티라고 불렸던 엘리자베스를 떠나면서 이렇게 적고 있었습니다.
 
“오, ‘마음으로 하나님의 뜻을 행하여’라는 말씀처럼 전심으로 그분의 뜻에 따르고 싶다. 올 여름에 약혼할 수 없음을 잘 알면서도 솔직히 고백건대 그것을 아버지의 뜻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전혀 기쁘지 않다…. 어쨌든 나는 항상 베티 생각을 떨칠 수 없고 밤낮 함께 있고 싶다. 몸의 집요한 갈망과 마음의 외로움 때문에 베티가 없으면 때로 공부도 바보짓 같고 삶 자체가 부질없어 보일 정도다.”

무슨 말입니까? 순교자 짐 엘리엇, 그는 우리와 동일한 성정을 가진 사람이었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그는 복음을 위해 사랑하는 아내 베티와 생후 9개월 된 아기를 떠나 아우카족에게로 간 것입니다. 세상이 보기에 가장 미련한 낭비를 한 것 같은 그가 우리에게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영원한 것을 얻고자 영원할 수 없는 것을 버리는 자는 바보가 아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영원한 것을 얻기 위해 영원할 수 없는 그것을 버리는 자. 세상 보기에 그처럼 바보스러운 사람이 없겠지만 오늘 성경은 영원하지 않는 물질의 노예가 되어 영원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지 못한 채, 죽음을 맞이한 한 부부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아나니와 삽비라, 그들의 죽음 앞에서 성경은 오늘 우리에게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영원하지 않은 것을 얻고자 영원한 것을 버리는 자에게는 생명이 없다. 그가 비록 사람들이 부러워할만한 헌신을 한 종교인일지라도….” (김인환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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