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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느헤미야의 개혁(4) : 무너진 가정을 회복하라 (느 13:23-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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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헤미야의 개혁(4) : 무너진 가정을 회복하라 (느 13:23-31)

오래전 독일의 트리에라는 지역에 한 유대인 소년이 살고 있었는데, 어느 날 그의 아버지에게 이렇게 물었습니다. “아버지, 우리는 유대인인데 왜 유대인 회당에 가지 않고 교회에 나갑니까?” 그러자 아버지는 “우리가 이곳에서 따돌림 당하지 않고 잘 살기 위해선 어쩔 수 없다.”고 대답했습니다. 아버지의 대답은 전혀 신앙적인 대답이 아니었습니다. 본래 이 소년의 할아버지는 유대인 랍비였고, 그의 큰 아버지도 랍비였습니다. 그러나 현실 이익에 빨랐던 이 소년의 아버지는 유대인들에 대한 사회적 불이익을 피하기 위해 개신교신자가 되었던 것입니다. 

이처럼 진정한 회심을 못했던 아버지는 이 아들에게 신앙적 영향을 끼칠 수가 없었습니다. 6살에 유아세례를 받게 했지만 커 가면서 온전한 믿음을 갖게 하지 못했습니다. 결국 이 아들은 대학에 들어가면서 교회를 완전히 떠나게 됩니다. 그리고 그의 나이 30세가 되던 1847년에 엥겔스라는 사람과 함께 런던에서 유명한 “공산당 선언”을 발표합니다. 이 소년이 바로 공산주의 창시자인 칼 마르크스였습니다.

결과적이지만 만일 이 소년이 참된 믿음의 사람으로 자랄 수 있었다면 세상의 역사는 달라질 수 있었을 것입니다. 민주주의와공산주의가 양분되는 역사를 막을 수 있었을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을 볼 때 가정에서의 자녀의 신앙교육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알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은 이제 느헤미야가 마지막으로 무너진 가정을 회복하는 내용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방인들과 결혼을 하지 않고 가정을 거룩하게 지키겠다고 서약했습니다. 그런데 이 약속을 깨뜨리고 이방여인을 아내로 맞이한 자들이 있었습니다. 특히 율법으로 금한 족속들인 아스돗과 암몬과 모압 여인을 아내로 맞이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이러한 사람들에 대한 느헤미야의 반응이 어떠합니까? 

오늘 본문 25절에 “내가 그들을 책망하고 저주하며 그들 중 몇 사람을 때리고 그들의 머리털을 뽑고”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을 보면 대단히 단호하고 과격하게 반응하고 있습니다. 그만큼 이 문제가 심각한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혹시 자녀들이 믿지 않는 불신자와 결혼을 하겠다고 한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느헤미야처럼 할 수가 있겠습니까?

여러분, 느헤미야가 이방인과의 결혼을 왜 이처럼 심각하게 생각했을까요? 

그것은 그가 이방인을 멸시했기 때문이 아니라, 이방인과의 결혼을 통해서 하나님의 자녀들이 민족의 정체성과 신앙심을 잃는 모습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본문 24절에 “그들의 자녀가 아스돗 방언을 절반쯤은 하여도 유다 방언은 못하니 그 하는 말이 각 족속의 방언이므로”라고 했습니다. 이 말은 이방인과 결혼하여 자녀를 얻었는데, 이 자녀들이 다른 이방 족속의 말은 하지만, 자기의 나라 말인 히브리어를 제대로 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스라엘 백성들의 자녀들이 히브리말을 못한다는 것은 심각한 문제입니다. 

유대인들은 어릴 때부터 신앙교육을 철저하게 시킵니다. 신 6:6-9절 말씀에 “오늘 내가 네게 명하는 이 말씀을 너는 마음에 새기고 네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며 집에 앉았을 때에든지 길을 갈 때에든지 누워 있을 때에든지 일어날 때에든지 이 말씀을 강론할 것이며 너는 또 그것을 네 손목에 매어 기호를 삼으며 네 미간에 붙여 표로 삼고 또 네 집 문설주와 바깥 문에 기록할지니라”고 했습니다.

이만큼 율법을 어릴 때부터 가르치는데 모국어를 모른다면 당연히 히브리어로 된 성경을 읽지 못한다는 뜻이고, 그 말은 결국 하나님 말씀을 잃어버리고, 신앙을 잃어버린다는 것을 뜻합니다. 

여러분, 부모가 자녀에게 물려주어야 할 가장 중요한 유산은 신앙의 유산입니다. 다른 것은 못해도 신앙만은 전수해야 합니다. 당시 유대인들에게도 이것이 중요하였지만 그런데 자녀들이 히브리말을 모른다면 어떻게 그들에게 신앙을 전수할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어떻게 그들이 성전예배나 회당예배에 참석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겠습니까? 그러니 참으로 이것은 중대한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데 이방인과의 결혼이 문제가 되는 더 심각한 이유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이방여인과 결혼할 때 몸만 오는 것이아니라 우상을 가지고 들어온다거나 불신앙적인 사상을 가져 옴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영적 성결을 유지하지 못할까 염려하여 그렇게 한 것입니다. 

오늘 본문 26절 말씀에서 느헤미야는 실례를 들고 있습니다. “또 이르기를 옛적에 이스라엘 왕 솔로몬이 이 일로 범죄하지 아니하였느냐 그는 많은 나라 중에 비길 왕이 없이 하나님의 사랑을 입은 자라 하나님이 그를 왕으로 삼아 온 이스라엘을 다스리게 하셨으나 이방 여인이 그를 범죄하게 하였나니”라고 했습니다. 

솔로몬은 지혜로운 왕이었습니다. 그 시대에 가장 뛰어난 왕이었습니다. 그런데 자신의 권력과 나라를 유지하기 위해 혼인정책을 사용하여 이방 여자를 아내로 데리고 왔습니다. 문제는 이방여인들이 결혼해서 올 때, 그들이 섬기는 이방신들과 우상들을 함께 가지고 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솔로몬이 살고 있는 왕궁뿐만 아니라 온 나라에 우상이 가득 차게 되었습니다. 한마디로 그토록 위대한 솔로몬도 이방여인과의 결혼 때문에 타락하였습니다. 결국 그 타락은 나라가 남북으로 분열되는 비극이 되고 말았습니다. 

삼상 2:30절에 보시면 “여호와 하나님을 존중히 여기는 자는 존중이 여기고 여호와 하나님을 경멸히 여기는 자는 하나님도 그를 경멸히 여긴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는 것이 있어서는 절대로 안 됩니다. 진정 우리 가정이 지속적으로 행복해지는 비결이 무엇이겠습니까? 모든 가족 구성원들이 하나님을 섬기며 사랑하는 것입니다. 

사실 나라와 민족과 교회의 회복은 근본적으로 모두 가정 회복에서 시작됩니다. 우리는 우리 자녀를 신앙을 가진 자녀로 잘 양육해야 합니다. 또 식구들이 모두 믿음 안에서 하나가 되도록 힘쓰고, 자녀들의 신앙을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그리고 여러분 개인의 영적 순결을 목숨처럼 귀하게 지켜야 합니다. 느헤미야는 이러한 사실을 잘 알고 신앙의 순결을 유지하기위해 강력하게 권면하고 불순종할 경우 단호하게 대처한 것입니다. 

그러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이 금지하신 이방인들과의 결혼을 명령을 어기면서까지 하게 된 이유가 무엇입니까? 

먼저는 신앙보다는 외모에 현혹되었기 때문입니다. 

결혼이나 소개를 할때 남자들에게 가장 큰 관심은 역시 외모입니다. 어떤 조건이나 신앙의 조건이 맞아도 마지막에 묻는 말은 “이쁘냐”입니다. 현대인들은 외모를 중시합니다. 그래서 성형 수술이 유행처럼 번지고 있습니다. 취직을 하려 해도 성형 수술해야 하고, 남자도 수술하고 심지어 대통령도 쌍까풀 수술하는 시대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의 외모에는 전혀 관심이 없습니다, 오직 우리의 영성과 거룩함에 관심을 갖습니다. 그러기에 예배도 중요하고 기도도 중요하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우리 중심이 하나님께 향해 있는 것입니다. 

예배할 때 정말 하나님을 사모하며 예배하고,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 살아 계시고, 나의 기도를 들으신다는 마음을 가지고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무엇보다 그 마음의 중심을 보십니다. 이처럼 외모와 세상적인 것들 때문에 신앙을 팔아버리는 모습을 하나님께서는 가장 싫어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세상적인 것들로 우리 자신의 영혼을 파는 일이 없어야 할 것입니다. 

또 다른 이유는 경제적 이유를 들 수 있을 것입니다. 

그 당시 유대 사회의 우선적인 관심은 오늘날처럼 경제적으로 윤택하게 사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주위를 돌아보니까 이방인들이 잘 살더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자기들이 지금까지 고수했던 율법 중심의 삶이 별 매력적이지 못하고 오히려 이방인들의 자유분방하면서도 물질적으로 풍부한 삶이 부러웠습니다. 그래서 유대 청년들이 이방 여자와의 결혼을 통해 경제적 자립을 꾀했던 것 같습니다. 

이같은 현상은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신앙보다도 경제적인 조건, 직업을 더 중요하게 여기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리고 권력의 유지를 위한 정략적인 이유입니다.

28절에 보시면 대제사장 엘리아십의 손자 요야다의 아들 하나가 호론 사람 산발랏의 사위가 되었습니다. 산발랏은 느헤미야의 대적이요, 이스라엘 백성들의 원수입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도성을 재건하는 일에 최대의 방해자였습니다. 

대제사장 자식은 레위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대제세사장의 가문이 이들과 결혼을 통하여 결탁하였습니다. 신앙보다는 자신의 권력과 힘을 유지하기 위해서입니다. 산발랏은 당시 실세였습니다. 권력의 힘이 있었습니다. 그러니 신앙을 버리고 사명을 버리고서라도 권력을 갖기만 하면 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결국 신앙을 팔아버리는 결과를 낳게 되고 하나님의 배신하는 모습이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세상에서 권력, 돈, 쾌락에서 한 발짝 물러서지 않으면 주님의 나라에 들어가기가 쉽지 않습니다. 양 다리를 걸치고는 주님의 나라는 갈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눅 9:62절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하지 아니하니라” 야고보 사도도 약 4:4절에서 “간음한 여인들아 세상과 벗된 것이 하나님과 원수 됨을 알지 못하느냐 그런즉 누구든지 세상과 벗이 되고자 하는 자는 스스로 하나님과 원수 되는 것이니라”고 했습니다. 

물론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불신자들과 전혀 교제해서는 안 된다는 말씀은 아닙니다. 그러나 결혼에 있어서는 결코 양보할 수 없는 선이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신앙입니다. 신앙이 같지 않고는 진정으로 한 몸이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물론 불신 배우자가 나중에 신앙을 가질 수는 있지만 그것도 장담할 수는 없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되기까지 그 세월이 너무 고통스럽게 때문에 그 길을 권장할 수 없습니다. 

여러분, 오늘 이 시대에 결혼의 기준은 무엇입니까? 

다양한 조건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모두가 공통적인 것이 아마 사랑일 것입니다. 사랑하기 때문에 결혼한다고 말할 것입니다. 그런데 그 사랑의 기준이 무엇입니까? 욕심과 쾌락에 의한 세속적인 사랑이 아닙니까? 그러나 이러한 목적으로 결혼한 가정은 결코 지속적으로 행복하게 할 수 없습니다.  

자녀 혼사를 진행하는 것을 보면 그 사람의 신앙지수를 알 수 있습니다. 솔직히 결혼 당사자들도 그렇지만 부모들도 문제입니다. "예수 없어도 좋다. 조건 좋은 사람만 만나 결혼만 해다오! 결혼해서 믿게 해!" 그러나 성경은 선(先) 결혼, 후(後) 신앙을 절대로 가르치지 않습니다. 

아마 여러분 가운데 ‘아직 자녀가 어리니까 그런 소리 할 수 있지, 나도 젊어서는 그랬는데 막상 혼기를 넘기고 있는 자녀를 보면 마음이 달라진다. 그래서 젊은 목사들은 현실감이 없다’는 생각을 하시는 분들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분명히 말씀드리지만 신앙보다, 하나님보다 세상의 조건을 더 중요하게 생각한다면 그것은 분명히 하나님을 정면으로 대항하는 죄악이라는 점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고후 6:14-16절에 “너희는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함께 메지 말라 의와 불법이 어찌 함께 하며 빛과 어두움이 어찌 사귀며 그리스도와 벨리알이 어찌 조화되며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가 어찌 상관하며 하나님의 성전과 우상이 어찌 일치가 되리요 우리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성전이라”고 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제라도 믿지 않는 가정에 결혼한 자녀가 있다면 반드시 자녀의 가정의 믿음의 가정이 되도록 기도하시고 전도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자녀가 결혼을 앞두고 사귀는 상대가 있는데 믿지 않은 불신자라면 결혼 전에 반드시 전도하여 세례를 받도록 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자녀가 아직 결혼적령기가 아니라고 하더라도 자녀들에게 꼭 믿음의 상대를 만나야 한다고 신앙교육을 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믿음의 가정에 결혼하도록 지금부터 자녀를 위해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지금까지 느헤미야서를 통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이 영적인 회복과 부흥을 살펴보았습니다. 이 말씀을 통해 우리의 신앙과 믿음이 회복되고 우리 교회가 영적으로 부흥하는 한 해가 되기를 바랍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신분이 변화된 사람들입니다. 우리의 본향은 하늘나라입니다. 이 세상에 살고 있지만 이 세상에 속한 사람은 아닙니다. 우리가 지속적인 복을 누리기 위해서는 이제 하나님의 말씀을 삶의 기준으로 삼고, 마음속에 있는 세속적 가치관을 몰아내야 합니다. 

그리고 물질을 삶의 목표로 삼지 말고 여호와를 주인으로 삼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모든 날 중에 주일을 가장 중요하게 여기며, 모든 시간 중에 예배시간을 가장 귀히 여기며, 주일을 성수하고 예배를 우선시하는 삶이 되어야 합니다. 무엇보다 믿음의 가정을 이루고, 가정의 구성원들 모두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삶을 통해 자손 천대까지 축복의 삶을 이어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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