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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요 14: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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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요 14:1-6)


“예수와 함께 한 저녁식사”의 저자 데이비드 그레고리(David Gregory)는 복음의 진수를 그의 저서를 통해 설명하였습니다. 주인공 닉 코민스키는 교회와는 담 쌓고 살던 무신론자였습니다. 어느 날 발신인이 ‘예수’ 라고 되어 있는 초대장이 도착합니다. 근처 이탈리안 레스토랑에서의 저녁식사였습니다. 장난기 많은 친구들이 벌인 이벤트 정도로 생각하고 찾아간 주인공은 자신이 예수라 주장하는 사람을 만나 신앙적 진리에 대하여 대화를 나누게 됩니다. 그때 예수가 말합니다. “하나님의 선물인 구원은 오직 예수를 통해 받느니라. 하나님의 사랑만이 공의를 이룬다.” 예수는 닉의 명함 뒤에 마더 테레사의 이름을 맨 위에 적고 선을 그었습니다. 

아래에 악한 히틀러의 이름을 쓰고 선을 그었습니다. 닉의 이름은 테레사 쪽 가까운 곳에 적고는 선을 그었습니다. 그리고 예수께서 말하십니다. “조그마한 명함 안에 모든 눈금을 넣을 수 없지만, 어쨌든 히틀러는 여기 있다. 당신은 여기 쯤 있고, 테레사는 여기이다. 그런데 하나님의 기준이 얼마나 높은지 아는가?” 예수는 명함을 테이블 위에 세웠습니다. “시카고의 고층 빌딩 시어스 타워의 맨 아래 주춧돌에 이 명함을 놓는다고 가정해 보자. 

하나님의 기준은 타워의 꼭대기 즉 100층의 높이에 있는 것이다.” 그때 닉이 질문했습니다. “하나님의 기준에 의하면 테레사와 히틀러는 결국 같은 수준이란 말인가요?” “아니다. 히틀러는 악랄했고, 테레사는 자비를 베풀었으니 같지는 않다. 그렇지만 테레사의 선행 역시 하나님과의 격차를 메우기엔 히틀러만큼이나 멀리 떨어져 있다. 두 사람 모두 죄인이고 그 공력에 따라 하나님으로부터 떨어져 있는 것이다.” 닉은 잠시 생각을 한 후 “그렇다면 누구도 그 기준에 못 미치겠네요?” 예수께서 대답합니다. “자신의 쌓은 공적으로는 어림도 없다. 하나님의 기준은 한 치도 모자람이 없는 완벽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결국 하나님께서 그 죄를 짊어지셨고, 죄 값을 치루기 위해 목숨까지 버리셨다. 그것으로 하나님의 정의는 충족되었고 우리를 향해 무죄판결이 내려졌다. 그러기에 우리는 구원의 예수를 십자가에 내어주신 하나님의 사랑을 받기만 하면 된다.” 닉이 말합니다. “알 수가 없네요. 성경에 보면 십자가에서 죽은 사람은 예수이지 하나님이 아니잖아요?” 예수가 대답하였습니다. “내가 하나님이다.” 사랑의 하나님은 예수의 희생을 통해 우리의 죄를 속량해주셨습니다. 우리를 구원하여 주셨습니다. 이것이야말로 예수로 말미암은 복음이 아닙니까? 

요한복음 14-16장은 다락방 강화라고 부릅니다. 설교가 아니라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리시기 직전 제자들에게 행하신 유언적인 교훈입니다. 예수와의 관계, 장차 다가올 일들, 성령 강림을 비롯한 영적 세계에 관한 것들입니다. 14장의 서두는 ‘근심하지 말라’로 시작됩니다. 예수께서 따라오지 못할 곳으로 떠나신다 하셨기에 제자들의 마음은 요동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근심합니다. “제자공동체는 어떻게 되며, 그들이 바라던 하나님의 나라는 어떻게 세워지는가?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를 따랐던 자신들은 어떻게 될 것인가?” 그러나 예수께서는 근심하지 말라고 명령하십니다.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고 하십니다. 믿음으로 하나님의 집을 바라보라 하십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로 가는 길을 어떻게 찾습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가능합니다. 

본문 6절입니다.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예수의 유일성을 의미합니다. 현대 기독교는 종교 다원주의에 도전을 받고 있습니다. ‘왜 예수만 믿어야 되는가? 예수 그리스도 이외에도 구원받을 수 있지 않는가?’ 그러나 성경은 예수로 말미암지 않고는 구원받을 수 없다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사도행전 4장 12절입니다.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 예수가 삶 속에서 어디 계십니까? 중심에 계십니까? 무엇으로 말미암아 사십니까? 오직 예수로 말미암아야 합니다. 그렇다면 그 이유는 과연 무엇입니까?  

첫째로 길이시니 

어떤 사람이 숲을 지나야 하는데 길을 몰라 인디언을 안내인으로 고용했습니다. 그 인디언을 따라가는데 수풀이 우거지고 온통 돌밭일 뿐 길은 나타나지 않습니다. 그래서 “내가 보기엔 길이 없는 것 같은데 잘못 가고 있는 것은 아니요?” 라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인디언이 돌아보며 웃으면서 “내가 바로 길입니다. 나만 따라오면 틀림없지요” 라고 대답했습니다. 결국 길은 전혀 없었지만 인디언만 따라가니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었습니다. 천국이 어디에 있는지 알지 못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천국 가는 길을 안다고 했지만 자신도 그 길을 몰라 죽고 말았습니다. 오직 예수만이 죽었다가 부활하시고 승천하셔서 길이 되셨으니 우리는 예수만 따라 가면 됩니다. 결코 다른 것은 필요 없습니다. 오로지 길이신 예수만 따라가야 합니다. 

본문 6절입니다. “내가 곧 길이요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고 변함없는 길은 예수 밖에 없습니다. 하늘의 길을 증명하신 이가 바로 예수입니다. 하늘에서 내려오신 분은 예수밖에 없고 죽었다가 부활해서 하늘로 올라가신 분도 예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온 길’과 ‘가는 길’을 아시는 분은 예수밖에 없습니다. 

문제에 봉착했다는 말은 길이 막혔다는 의미입니다. 길이 있으면 문제가 없다는 뜻입니다. 인생길에는 크고 작은 문제들로 점철되어 있습니다. 문제없는 사람은 없습니다. 어떤 이는 질병 때문에, 어떤 이는 자녀 때문에, 어떤 이는 물질 때문에, 어떤 이는 가정문제로, 어떤 이는 인간관계의 갈등으로 무거운 짐을 지고 가다 길이 막혀 버린 것입니다. 누구도 이 길을 아는 사람이 없습니다. 이 길을 찾기 위해 힘쓰지만 곧 한계에 이르고 맙니다. 그런데 예수가 스스로 길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만이 길을 알고 있는 유일하신 분입니다. 그러므로 무슨 문제로 길이 막혔든지 길이신 예수께로 가져오시기 바랍니다. 예수가 길이며 예수를 따르면 문제가 해결됩니다. 

둘째로 진리이시니

힌두교에 심취해 있다가 그리스도인이 된 인도의 한 교수가 있었습니다. 어느 날 택시를 탔습니다. 택시에 교수까지 네 사람이 타게 되었습니다. 각자 소개를 하고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공교롭게도 종교가 각자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때 한 사람이 말했습니다. “우리는 종교가 달라도 같은 배를 탄 사람들이지요. 결국 같은 목적지를 가진 같은 신을 섬기는 사람들이니까요.” 그러자 가만히 있던 교수가 버럭 고함을 쳤습니다. “아니오. 당신들은 같은 배를 탔는지 모르지만 나는 다르오. 나는 다른 배를 탔소!” 진리는 타협할 수 없습니다. 진리는 오직 하나뿐입니다. 진리 안에 바로 서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한다는 것은 종교적인 의식이나 인격수양의 차원을 넘어서 절대적 구원을 얻는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본문 6절입니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세상에 여러 종교가 있습니다. 공자나 소크라테스와 같은 성현들은 진리를 설명은 하지만 진리는 아닙니다. 그러나 예수는 자신이 곧 진리입니다. 진리는 하나님 말씀입니다. 

예수는 절대적 진리입니다. 결코 변치 않습니다.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십니다. 예수가 진리이기 때문에 믿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진리는 우리를 자유하게 합니다. 예수 안에 있으면 자유를 누리게 됩니다. 진리 안에 거하시기 바랍니다. 진리이신 예수를 통해서만 하나님을 만날 수 있으며, 예수를 통해서만 자유와 큰 은혜를 얻을 수 있습니다.  

셋째로 생명이시니

19세기 미국의 부흥사 무디(D. L. Moody)의 말입니다. “얼마 있지 않아 여러분은 나에 대한 소문을 들을 것입니다. 무디가 죽었다는 소문 말입니다. 혹 신문에도 나서 여러분이 보실 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제가 여러분에게 부탁하는 것은 그런 소문 곧이듣지 마시라는 것입니다. 나는 영원히 살 것입니다. 내가 이 육신을 벗어 놓을 때는 지금보다 더 분명히, 더 똑똑히, 더 깨끗이, 더 풍성하게, 더 행복하게 영원히 살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은 영원히 사는 것입니다. 

본문 6절입니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예수는 생명의 근원이십니다. 모든 생명이 그로 말미암아 창조되었고 그로 인하여 보존됩니다. 예수는 영혼을 소생시키시는 생명입니다. 모든 사람은 죄로 말미암아 그 영혼이 죽었습니다. 그러나 예수 믿으면 죽었던 영혼이 거듭나게 됩니다. 거듭난 성도는 예수의 생명과 연합되었으므로 영원히 살게 되는 것입니다. 생명은 약동하는 힘입니다. 예수의 생명을 가지고 있다면 절망할 수 없습니다. 어떤 경우에도 불안할 수 없습니다. 예수의 생명이 강하기에 죽음까지도 결박할 수 없습니다. 생명이신 예수를 통해 변화되시기 바랍니다.

죠쉬 맥도웰 (Josh McDowell) 교수는 베스트셀러 작가였습니다. 처음에는 기독교를 반박하는 책을 저술하고자 했지만 예수를 영접하고 그리스도인이 되었습니다. 그 후 좋지 않은 성격에 변화가 따랐습니다. 그는 항상 자기가 옳다고 생각해 자기 말이나 행동을 의심하는 사람을 그냥 두지 않았고 항상 성질이 발끈하였습니다. 그런데 예수 믿은 후 변하기 시작하였습니다. 특히 증오심에 대한 부분이었습니다. 그는 알콜 중독자였던 아버지를 심히 미워하였습니다. 

하지만 믿기로 결심한 후 5개월쯤 지났을 때였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마음에 파고 들어오면서 자신을 돌아보게 되었고 못된 성질과 기질이 변화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는 아버지를 정면으로 보게 되었고 “아버지를 사랑합니다” 라고 말할 수도 있게 되었습니다. 말뿐만 아니라 사랑을 행동으로 보이려고 애썼습니다. 교통사고를 당하여 그가 입원하게 되었는데 병실에 찾아온 아버지가 물었습니다. “나 같은 아버지를 어떻게 사랑할 수 있게 되었는가?” “저는 6개월 전만해도 아버지를 경멸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를 영접한 후 말로 다 설명할 수 없지만 아버지를 사랑할 수 있는 힘이 생긴 것 같습니다.” 잠시 후 아버지가 말하였습니다. “얘야, 만일 그분이 너의 삶 속에서 하신 일을 역시 나의 삶 속에서도 하실 수만 있다면 나도 그분에게 기회를 드리고 싶구나.” 예수를 영접하여 구원받고 축복받는 삶만 원하지 정작 자신의 일그러진 인격이나 잘못된 성질을 고치려는 노력은 전혀 하지 않고서 신앙의 년 수만 날로 더해가는 상당수의 그리스도인들을 향하여 ‘왜 예수를 믿는가’ 라는 질문을 심각하여 던지고 있는 대목입니다. 

우리의 힘으로는 결코 아무것도 변할 수 없습니다. 예수로 말미암지 않고는 도저히 불가능한 일입니다. 우리는 길을 찾지 못하고 방황합니다. 진리를 찾지 못하고 자유를 누리지 못합니다. 생명을 찾지 못하고 사망의 권세에 눌려 있습니다. 그러기에 부디 길이신 예수, 진리이신 예수, 생명이신 예수로 말미암아 삶과 인격에 변화가 따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예수로 말미암아 새로운 인생이 펼쳐지는 복된 성도들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김광일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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