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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교회, 주께서 사랑하시는 형제들 (살후 2:1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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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 주께서 사랑하시는 형제들 (살후 2:13-17)


데살로니가는 마게도냐의 가장 중요한 항구도시였고 로마 제국의 속령이 된 마게도냐 주의 수도이며 또한 총독이 주재하는 도시였습니다. 로마 제국의 동서를 잇는 가장 중요한 도로가 데살로니가를 지나가고 있었는데 거기에 바울과 실라의 전도로 교회가 세워진 것입니다. 그런데 이들을 시기한 유대인들이 난동을 일으키는 바람에 바울 일행은 밤을 타서 그곳을 떠나야 했습니다(행17:1-17). 

다시 데살로니가를 방문하기가 어려워진 바울 일행은 그곳에 새로 생겨난 교회가 박해에도 불구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에 충실히 머물러 있는지를 알아보기 위해 아덴에서 디모데를 데살로니가로 보냈습니다. 디모데가 돌아와 데살로니가 교회가 믿음 안에서 잘 자라고 있다는 좋은 소식을 전하자 사도 바울은 이에 감사하며 또 디모데가 전해주어 알게 된 그 교회 안의 몇 가지 현안에 대하여 가르침을 주기 위하여 편지를 쓴 것이 데살로니가 전·후서입니다. 특히 데살로니가후서는 그리스도의 재림의 때에 관한 오해와 그로 말미암아 야기된 혼란을 해소하기 위해서 쓴 편지입니다. 

오늘 본문은 하나님께서 어떻게 우리를 구원하시는지에 관한 중요한 가르침들을 담고 있습니다. 성경적 구원관의 주요 요소들이 거의 다 들어있는 말씀인 것입니다. 먼저 본문 13절에서 사도 바울은 쓰기를 “주께서 사랑하시는 형제들아, 우리가 항상 너희에 관하여 마땅히 하나님께 감사할 것은 하나님이 처음부터 너희를 택하사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과 진리를 믿음으로 구원을 받게 하심이니” 합니다. 

사도 바울은 데살로니가 전·후서 모두를 그 첫 절에서 쓰기를 “데살로니가인의 교회에 편지하노니” 합니다. 그런데 “데살로니가인의 교회”에 편지한다 하면서 바울은 “주께서 사랑하시는 형제들아” 하고 부른 것입니다. 교회는 “주께서 사랑하시는 형제들”을 가리키는 말인 것입니다. 교회를 이루고 있는 사람들이 각각 살아온 배경이 다르고 하는 일이 다른 남녀노소라 할지라도 다 “형제”라고 한 것은 모두가 주께서 사랑하시는 사람들이라는 공통점 때문입니다. 사회적 지위나 신분이 아무리 달라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는, 그를 믿는 믿음 안에서는 다 같은 형제이고 자매인 것입니다. 교회는 모두가 한 형제이고 자매인 공동체입니다. 그것이 교회가 세상 그 어느 집단과도 다른 이유입니다. 

교회를 가리키며 “주께서 사랑하시는 형제들”이라 하는 것은 교회의 기초와 출발은 주님의 사랑임을 말합니다. 우리가 한 교회의 이름 아래 이렇게 모인 것은 다른 그 무엇 때문이 아니라 우리들 각자를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 때문인 것입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사랑의 공동체입니다. 교회는 당연히 그 구성원끼리 서로 사랑해야 하는 공동체이지만 우리가 서로 사랑한다고 교회가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먼저 우리 각자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교회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랑하시지 않고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들끼리 모여 아무리 사랑한들 그것을 교회라고 하지는 않습니다. 따라서 교회는 은혜의 공동체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것은 전적으로 은혜이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어서 쓰기를 “하나님이 처음부터 너희를 택하심”을 감사한다고 합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택하심을 받은 이들의 무리를 가리킵니다. 우리가 무엇 때문에 하나님의 택하심을 받았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택하심을 받을 만한 아무런 이유도 자격도 없기 때문입니다. 유일한 이유가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그렇게 우리가 무엇 때문에 하나님의 택하심을 받았는지는 알 수 없지만 무엇에로 택하심을 받았는지는 분명합니다. 그것은 구원입니다. 본문 13절 끝에서 “구원을 받게 하심이라”고 사도 바울은 말합니다. 교회는 하나님께서 구원에로 택하신 사람들의 무리를 일컫는 말입니다. 즉 교회는 구원의 공동체인 것입니다. 

사랑하시는 이들을 택하시고 그들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에 대해서 의문과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왜 하나님께서 누구는 사랑하셔서 구원에로 택하시고 누구에게는 그렇게 하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편파적이고 불공평하다는 것입니다. 그런 하나님은 믿고 싶지 않다고 말하기까지 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항변하는 것은 마치 어떤 마음에 꼭 드는 남자가 사랑한다고 고백하며 청혼하는데 그 사랑과 청혼을 얼른 받아들이고 행복한 삶을 살 생각은 하지 않고 “왜 하필 나를 사랑하느냐? 왜 나만 사랑하느냐? 왜 나하고만 결혼하려고 하느냐? 

왜 다른 모든 여자를 사랑하고 모든 여자와 결혼해야지 나만 사랑하고 나하고만 살려고 그러느냐?” 하며 의심과 질문만 계속하면서 평생을 혼자 살다가 늙어 꼬부라지는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많은 사람들 가운데 왜 우리를 사랑하시는지는 우리가 알 수 없다고 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신비 속에 남겨두고 우리는 그 놀라운 사랑을 그저 받아들이기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신실하게 그를 사랑하며 살면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지 못하는 사람은 참으로 어리석고 불쌍한 사람인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또 이어서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을 감사한다고 쓰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일방적으로 사랑하신 이들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택하시고는 그들을 성령으로 거룩하게 하십니다. 성령께서 우리 각자를 일생을 통하여 날마다 조금 씩 조금 씩 거룩하게 변화시켜 가시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구원을 이루시는 방법입니다. 그것을 성화라고 합니다. 교회는 거룩한 공동체입니다. 우리가 이미 다 거룩한 존재들로 완성되어서가 아닙니다. 우리는 그 누구도 죽기까지 완전한 사람 없습니다. 우리의 믿음이 평생 불완전하며 하나님 앞에서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다만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를 계속해서 거룩한 삶에로 변화시켜 가시는 성령의 역사가 있기 때문에 교회는 거룩한 공동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또 이어서 하나님께 “진리를 믿음으로 구원을 받게 하심”을 감사한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랑하시는 이들을 택하시고 그들의 구원을 이루어 가시는 방법이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과 함께 “진리를 믿음으로”입니다. 진리는 물론 하나님의 진리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진리는 우리가 다 알 수 없습니다. 우리가 알 수 있는 하나님의 진리는 하나님 자신이 우리에게 알게 하시는 한의 진리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가 알기를 원하신 하나님의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가장 완벽하게 나타내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 우리가 하나님을 알 수 있는 최선의 길입니다. 그를 알고 그를 믿으면 구원을 얻는 것입니다. 주님 자신이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그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요3:16-17)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공동체입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아들이시고 만인에게 유일하신 구원자이시며 주님이시라고 알고 믿고 고백하는 이들의 공동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 안에 주어진 구원의 진리를 믿게 하심으로써 구원하시는 이들의 공동체가 바로 교회인 것입니다. 

이제 본문 14절을 봅니다: “이를 위하여 우리의 복음으로 너희를 부르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우리의 복음”이란 사도 바울과 그의 일행이 전한 복음이라는 말입니다. 
“우리의 복음으로 부르셨다”는 것은 사도들과 복음전도자들이 하나님의 구원사역에 있어서 중요한 도구의 역할을 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얼마든지 혼자서 직접 역사하실 수 있으시지만 택하여 세우시는 사람들을 통하여 일하시기를 기뻐하십니다. 그 일을 위하여 부르심에 기쁘게 응답하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주의 일꾼들의 복음 전함을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택하신 백성을 구원에로 부르시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이 귀한 복음전파의 사역을 소홀히 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교회는 복음전파의 공동체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랑하시는 이들을 택하셔서 구원에로 부르십니다. 그런데 그 구원에로 부르시는 목적이 바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을 얻는다”는 것은 구원을 얻는다는 말의 또 다른 표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아버지 하나님과 함께 만유의 주이시며 영원히 아버지의 영광을 공유하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그의 영광을 얻는다는 것은 곧 그와 더불어 영원한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하나님나라의 백성이 되는 것을 말합니다. 그것을 우리는 “영화”하고 부르는데 “영화”는 칭의, 성화와 함께 우리의 구원의 주된 내용이며 완성의 상태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성령을 통해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하시고 그 믿음 때문에 우리를 의롭다고 인정하시고, 일생을 통해 우리를 거룩한 백성으로 변화시키셔서, 마지막에는 영원히 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을 누리게 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구원사역이라는 것입니다. 교회는 이렇게 영광의 공동체입니다. 지금 영광스러운 모습을 완전히 갖추어서가 아닙니다. 비록 지금은 이 세상에서는 영광스럽지 못한 모습도 보이고 부끄러운 면이 많이 있을지라도 교회는 하나님으로부터 영원한 영광을 약속받은 공동체이며 그 영원한 영광을 향하여 나아가는 공동체입니다. 

이렇게 교회가 무엇인지를 밝힌 사도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회의 신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권면합니다. 본문 15절입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굳건하게 서서 말로나 우리의 편지로 가르침을 받은 전통을 지키라.” 
“우리의 편지”라고 한 것은 지금 이 본문이 들어있는 편지에 조금 앞서서 먼저 보낸 데살로니가전서를 가리킵니다. 

그리고 여기서 말하는 “전통”은 “진리”란 뜻입니다. 사도들이 전한 복음의 진리를 여기서 “전통”이라고 부른 것은 그 복음의 진리가 잘 보존되고 신실하게 계승되어야 할 것이라는 뜻에서입니다. 
“굳게 서서 ... 지키라.” 한 것은 데살로니가 교회 신자들이 박해와 거짓 교사들과 세속의 유혹과 적대감 때문에 진리를 버리고 믿음을 떠나려고 하는 시험에 부딪칠 것을 사도 바울이 알았기 때문에 한 말입니다. 그 시험을 이기기 위해서는 사도 바울과 그 일행이 데살로니가에서 직접 말로 전하고 또 앞서 써 보낸 편지인 데살로니가 전서를 통해서 가르친 진리 위에 굳건하게 서야 한다는 격려와 권면인 것입니다. 교회는 진리의 공동체입니다. 

본문의 마지막 16-17절은 데살로니가 교회 신자들을 위한 사도 바울의 기원입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와 우리를 사랑하시고 영원한 위로와 좋은 소망을 은혜로 주신 하나님 우리 아버지께서 너희 마음을 위로하시고 모든 선한 일과 말에 굳건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진리의 말씀 위에 굳게 서서 박해와 거짓 교사들과 세속의 유혹과 적대감 때문에 진리를 버리고 믿음을 떠나려고 하는 시험을 이길 것을 권면한 바울은 그 믿음의 형제들에게 더욱 용기와 힘을 주기 위하여 하나님의 사랑을 상기시키고 그가 주실 영원한 위로와 좋은 소망을 상기시키며 모든 선한 일과 말에 있어서 그들을 굳건하게 하실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상기시킨 것입니다. 교회는 위로와 소망의 공동체입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신실한 약속의 공동체인 것입니다. 

데살로니가 교회 신자들이 부딪쳤던 시험 즉 박해와 거짓 교사들과 세속의 유혹과 적대감 때문에 진리를 버리고 믿음을 떠나려고 하는 시험은 오늘날 우리도 고스란히 직면하고 있는 현실입니다. 이때 우리가 굳건히 서서 지켜야 할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사도들이 전해준 대로의 말씀의 진리입니다. 이 진리 위에 굳게 서서 믿음을 지키는 우리에게 하나님께서는 모든 위로와 좋은 소망과 강건함과 승리와 영광을 주실 것입니다. (이수영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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