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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내 안에 거하라 (요 15: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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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안에 거하라 (요 15:4-6)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음 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 사람이 내 안에 거하지 아니하면 가지처럼 밖에 버려져 마르나니 사람들이 그것을 모아다가 불에 던져 사르느니라

오늘은 하디 110주년 청년대회 때 했던 설교를 하려고 합니다.
메시지를 준비하면서 제가 은혜를 많이 받았기에 교우들에게도 전하고 싶은 마음이 있어서 다시 설교하려고 합니다. 오늘은 오늘의 은혜로 역사해 주실 줄 믿습니다.

여러분은 하디 선교사는 도대체 무엇을 회개했는지 아십니까?
"예수님을 믿는 진정한 믿음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이 무슨 말입니까? 하디 선교사는 당시 가장 성실하고 존경받던 선교사였습니다.
그런데 그가 예수님을 믿지 않았다니요!
아는 것을 믿음이라 하면 분명 주 예수님을 믿었지만, 주 예수님을 의지하지는 않았다는 것입니다, 성령께서 하디에게 임하였을 때, 하디가 예수님을 위하여 열심히 일했는지는 모르지만, 주 예수님으로 일하지 않았음을 책망하셨고 그것을 고백하라고 하셨다는 것입니다.

‘믿음 좋다’, ‘헌신적이다’, 라는 사람들도 이럴 수 있습니다.
존 웨슬리 목사님도 선교사까지 갔다 온 훌륭한 목사였지만, 1738년 5월 24일 회심하기 까지 예수님을 의지하는 믿음은 없었습니다. 
허드슨 테일러 선교사님도 중국에 가서도 온전히 주 예수님만 의지하는 믿음이 없었기에 좌절하여 쓰러진 적이 있었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지금 한국 사회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설교하거나 전도만 하지 말고 “예수를 보여 달라”고 합니다. 수많은 예배당과 신학교와 기독교 단체들이 있고, 주위에 그리스도인들도 많지만, 예수가 누군지 잘 모르겠다는 말입니다.
여기에 한국 교회의 위기가 있습니다. 선뜻 대답을 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 예수님의 일이라고 보여주는 것들은 다른 종교나 단체나 사람들도 하는 일들 뿐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사람들에게 주 예수님을 보여줄 수 있을까요?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놀라운 약속을 하셨습니다.
요 14:12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를 믿는 자는 내가 하는 일을 그도 할 것이요 또한 그보다 큰 일도 하리니 이는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라
성경은 그리스도인은 세상 사람들에게 주신 그리스도의 편지라고 하였습니다.

고후 3:3 너희는 우리로 말미암아 나타난 그리스도의 편지니 ...
갈라디아서 4장 19절에서 사도 바울은 “나의 자녀들아 너희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루기까지- 다시 너희를 위하여 해산하는 수고를 – 하노니” 했습니다.  
사도 바울이 해산의 수고를 하면서 이루고 싶었던 것은 세상 사람들이 그리스도인을 보면 예수님을 보는 것 같이 되기 위하여 기도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가족들은 여러분을 볼 때마다 예수님을 보는 것 같겠습니까?
여러분의 이웃이나 동료들이 여러분을 볼 때마다 예수님을 보는 것 같겠습니까?
우리는 이 말을 들을 때 마음이 답답합니다. 
주 예수님은 살아계시며 우리와 함께 계신데 어찌 사람들이 모를 수가 있습니까?

하디 선교사는 조선에서 사역의 열매가 없는 것이 당시 조선 교회와 조선 사람들 탓인 줄 알았습니다. 조선 사람들이 자신에게서 예수님에 대하여 듣기만 했지 예수님을 보지는 못하였기 때문임을 몰랐습니다.
이것을 깨닫고 그가 고꾸라진 것입니다. “교회에 부흥이 없고 진정한 회심자가 없는 것이 바로 나 때문입니다!” 애통하며 회개하였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요한복음 15장 5절에서 “나는 포도나무 요 너희는 가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을 믿는 것입니다! 예수님과 우리는 포도나무와 가지 처럼 한 몸으로 연합된 존재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은 우리를 통하여 역사하시고 우리를 보면 예수님을 보는 것 같습니다. 이것이 열매를 많이 맺는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의 삶은 예수님을 드러내는 삶입니까?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공로로 용서받고 은혜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고  믿습니다. 그러나 이 믿음은 반드시 검증이 필요합니다.
원수도 용서하고 사랑하게 되었는지를 보고서야 정말 믿는지를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십자가에서 드러난 하나님의 용서와 사랑을 믿으면서도, 원수가 용서 안된다면 믿는 것이 아닙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자신이 말할 수 없는 죄인이었다고 고백합니다. 정말 그렇습니까?
그러면 누가 자신에게 비난을 하고 잘못을 지적하면 화가 나지 않아야 정상입니다.
‘말할 수 없는 죄인’이 어찌 그리 화를 잘 내는 것입니까?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께서 독생자를 주시기까지 사랑하심을 믿는다고 말합니다.
정말 믿는다면 이 자리에서 하나님께서 가장 사랑하시는 사람이 누구일까요? 질문하면  즉각 “나지!” 하는 대답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왜 그렇게 불평, 원망이 많습니까?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주 예수님께서 마음에 임하심을 믿는다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다툼이 사라졌습니까?’ 예수님이 마음에 계신데 어떻게 부부 싸움도 하고 교인들 사이에 다툴 수 있겠습니까? 염려, 걱정, 다 사라졌습니까? 풍랑을 잔잔케 하고 오병이어의 기적을 행하신 주님이 함께 하심을 믿는다면 무슨 걱정이 있겠습니까?
은밀한 죄가 다 사라졌습니까? 음란물과 술, 담배, 도박, 게임은 더 이상 유혹이 되지 않습니까? 예수님이 마음에 오셨다고 하면서 은밀한 죄를 짓고 산다면 그 믿음은 거짓입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이 세상이 전부가 아니고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가 있음을 믿는다고 말합니다.
그러면 고난도 축복이요 죽음도 두렵지 않습니까? 성공하고 출세하고 부자되는 것 보다 예수님이 더 좋습니까? 어떤 상황에서도 기뻐하고 감사하십니까?

여러분은 정말 예수님을 믿는 사람 맞습니까?
우리가 이렇게 예수님을 믿으니 사람들이 우리를 보고 예수님을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하디 선교사의 회개로 인하여 부흥이 일어났던 것은 하디 선교사가 단순히 회개했기 때문만 아닙니다. 하디 선교사가 변하여 그에게서 예수님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은혜를 받기 전 하디는 기록에 의하면 하디는 아주 냉정하고 차가운 사람이었다고 합니다. 자들이 기피하는 쌀쌀맞은 의사였습니다. 
그런데 그가 성령님을 의지하고 그와 동행하기를 시작했을 때, 그는 따뜻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조선의 백성들에게 좀처럼 곁을 주지 않던 사람이 오히려 직접 찾아가 손을 잡아주는 사람이 된 것입니다. 
차라리 아픈 것이 더 낫다며 병이 들어도 하디에게 치료를 받기를 주저했던 환자들은 하디가 은혜를 받은 후 손만 만져도 병이 나았다고 증언하였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하면 예수님과 연합한 자가 되어 우리의 삶을 통하여 주 예수님을 증거할 수 있겠습니까?

예수님께서는 “내 안에 거하라” 하셨습니다. 그리하면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말씀하셨습니다.
요 15:4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우리가 먼저 예수님 안에 거해야 합니다. 
그러면 예수님 안에 거하는 것은 어떻게 하라는 것입니까? 요한계시록 3장 20절 말씀을 보면 예수님께 마음을 여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계 3:20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예수님은 그저 우리 안에 들어오시는 줄 압니다.
‘마음을 열었다’는 기억이 없습니다. 그러고도 예수님이 마음에 계시다고 믿는 것입니다.
아닙니다. 라오디게아 교회처럼 예수님은 마음 분 밖에서 문을 두드리기만 하실 뿐입니다. 마음을 연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어떤 그리스도인들이 자신은 마음을 열었다고 생각합니다.
“예수님 영접합니다! 제 안에 오세요.” 하면 마음을 연 것인 줄 압니다.
아닙니다. 마음을 여는 것은 가장 힘들고 두려운 일입니다. 여러분은 누구에게 마음을 열어 보았습니까?
마음을 연다는 것은 그렇게 간단하고 쉬운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 마음을 연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정말 마음에 임하시는 것을 믿으며 예수님을 왕으로 섬기며 예수님의 통치를 받아들이겠다는 결단입니다.
마음을 예수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왕으로 모시고 살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마음에 임하셨다고 믿기만 한다고 바른 믿음은 아닙니다.
자신이 주인이면 예수님은 포로 신세가 되는 것입니다.
먼저 예수님 안에 거한다는 것은 주인은 예수님이시라는 뜻입니다.
주님이 왕이시니 주님이 우리 안에 임하셔도 문제가 없는 것입니다.

주 예수님을 믿어도 왜 삶은 변화되지 않습니까?
십자가 구원을 믿으면서도 원수 사랑은 안되고, 하나님 사랑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여전히 부족한 것이 많고, 다른 사람에게 나누어주지 못하고, 주님이 마음에 계시다고 믿으면서도 은밀한 죄는 해결되지 않고, 하나님의 나라를 믿으면서도 고난이 축복임이 믿어지지 않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아직 마음을 하나님께 드리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드릴 수 있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돈? 시간? 직업? 결혼? 생명? 아닙니다. 다 하나님께서 주신 것들입니다. 하나님 마음대로 주시기도 하고 가져가시기도 하십니다. 우리는 아무런 할 말이 없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드릴 수 있는 유일한 것은 우리 마음 뿐입니다.

우리는 어른이 된 후 왕이 없어졌습니다. 왕을 두는 것을 싫어합니다. 마음대로 살고 싶기 때문입니다. 한번 누가 왕이라 여기며 살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에 대하여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을 믿지만 왕이라 여기지 않습니다. 말만 그렇게 할 뿐입니다.

우리가 정말 예수님을 마음에 왕으로 영접하고 그의 통치하심을 받아들인다면 반드시 삶이 변하게 되어 있습니다.
학교 은사님을 모시고 살거나 회사 사장님을 모시고 살거나 목사와 함께 산다고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의 모든 생활에 변화가 일어날 것입니다.
부모님만 모시고 살아도 사위 며느리와 함께 살아도 집에 자녀나 손자가 생겨도 생활에 변화가 일어날 것입니다.   

그렇다면 주 예수님을 마음에 왕으로 모시고 사는데 어찌 삶이 바뀌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그동안 예수님을 마음에 모시고 살면서도 삶의 변화가 없었다면 예수님을 무시하고 산 것입니다. 전혀 의식하지 않고 산 것입니다. 결코 왕으로 모신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우리의 삶에 변화가 없고, 사역에 열매가 없는 것입니다.

주일도 예배를 드리고 교회 문을 나서는 순간 혹 이런 마음을 품을지도 모른다.“예수님, 왜 이러세요. 왜 따라 오시는 거예요. 여기 잠잠히 계세요. 세상으로 따라오는거 아니예요.”
이런 자세로 예수님을 믿으니 삶의 변화가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마음을 통치하지 못하시는 사람의 마음의 주인이 누구인지 아십니까? 마귀입니다. 마귀는 우리 마음이 얼마나 중요한지 잘 압니다. 그래서 우리 마음을 지배하면서 주님을 진정으로 마음에 영접하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인과 불륜에 빠진 목사가 나오는 것입니다. 부정한 방법으로 사업을 시작하여 구속된 장로가 나오고, 뇌물을 받아 퇴직하게 된 권사가 나오고, 먹고 살기 어렵다고 술집에 나가는 여집사들이 나오고, 일이 많다고 교회 사명을 내려놓는 교인이 생기고, 헌금이 줄었다고 선교사 후원을 줄이기로 결의한 교회가 나오는 것입니다.
유혹은 너무 강하고 굶어죽을 것 같이 어려워서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마음의 왕이 아니시기 때문입니다. 마음을 마귀에게 빼앗기고 살기 때문입니다.

이용도 목사님이 쓰신 [마음을 붙잡아 주십시오] 라는 시가 있습니다.
“주여, 글쎄 이를 어찌 하나요.
마음을 결심의 띠로 꽁꽁 묶어/ 주님의 제단에 바치고 정성스레 들어올리노라면/ 어느덧 묶였던 띠가 끊어지고/ 모았던 마음이 산산이 풀어져/ 이 바람 저 바람에 날리고 마니/ 글쎄 이를 어떻게 하면 좋습니까?
얼마 후에는 /또 흩어진 마음을 집어 모으느라고/ 눈물을 짜면서 애를 박박 쓰곤 하니,
주님의 제단에 한 번도 알뜰한 제물을 바쳐보지는 못하고/ 밤낮 이 짓만 하다가 /서산에 해가 떨어져 버리고 말면/ 
어찌합니까, 주님이시여!

많은 성도들이 이처럼 마음이 갈기갈기 찢어진 채 살아가고 있습니다.
우리가 우리 마음을 어떻게 하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정신차려야 합니다. 
엡 5:14 그러므로 이르시기를 잠자는 자여 깨어서 죽은 자들 가운데서 일어나라 그리스도께서 너에게 비추이시리라 하셨느니라

마음을 지키는 길은 예수님을 마음에 왕으로 영접하는 길 밖에 없습니다. 
우리의 죄는 예수님을 믿고도 왕으로 섬기지 않는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허랑방탕한 죄 보다 더 큽니다. 죄가 죄인 줄 모르고 오히려 하나님 원망만 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주님으로 일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디 선교사가 그렇게 회개한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고 받은 가장 큰 복은 만 왕의 왕이신 주님이 우리 안에 오신 것입니다.
오순절 마가의 다락방에서 성령에 의하여 제자들 안에 오신 후 만왕의 왕 예수님께서 믿는 이들 안에 영원히 거하시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왕으로 인정하든 안 하든 왕이십니다. 만 왕의 왕이십니다.
그러나 우리가 예수님을 왕으로 인정하지 않으면 우리 안에서 결코 왕이 되실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영접하기 전 우리가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예수님을 왕으로 모시고 생각과 감정 조차 주님께 복종할 결단을 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적당히 넘어가니 주님이 마음에 거하시는 역사를 체험할 수 없습니다.

나비가 되려고 누에고치를 빠져 나올 때, 힘들어 하는 것 보고 고치를 잘라 주면 금방 나옵니다. 그러나 그런 나비는 날지 못합니다. 고치를 빠져나올 때, 날개가 온전히 강해지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예수님을 믿을 때, 예수님 안에 거하는 것을 적당하게 생각하고 예수님이 내 안에 계신 것만 좋아하니, 예수님을 영접하고도 영적으로 날지 못하는 나비처럼 사는 것입니다. 그러니 예수님의 열매를 풍성히 맺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속히, 그리고 철저히 회개하여야 할 일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지금 이 시간 우리를 주목하십니다. 더 정확히 말하면 우리 마음입니다.
아브라함이 이삭에게 칼을 내리치려고 했을 때, “이제야 알겠다!” 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은 이삭을 바친 것이 아니라 마음을 바친 것입니다.
우리도 그러한지 알고 싶어 하십니다.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서 2장 20절에서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했습니다. 
우리도 그러한지 알고 싶어 하십니다.

다윗은 오직 하나만 원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시 27:4 내가 여호와께 바라는 한 가지 일 그것을 구하리니 곧 내가 내 평생에 여호와의 집에 살면서 여호와의 아름다움을 바라보며 그의 성전에서 사모하는 그것이라
하나님께서는 우리도 그러한지 알고 싶어 하십니다.
예수님 한 분이면 충분한 사람을 찾으십니다.

아직도 주저하시는 분은 우리 마음대로 사는 것 보다 예수님을 왕으로 모시고 그 통치 아래 사는 것은 더욱 지혜로은 길임을 알아야 합니다.
예배드리다가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할 때가 있었다면, 하나님의 나라에서 실제 하나님을 바라보며 예배드릴 때는 얼마나 황홀할까요?
여러분, 성경을 읽다가 가슴이 뜨거워지는 경험을 한 적이 있었다면, 모든 진리가 다 밝혀지는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얼마나 가슴이 벅찰까요?
일출이나 일몰의 아름다움을 보며 흥분했던 적이 있었다면, 새 하늘과 새 땅의 아름다움을 볼 때는 어떨까요?

지금 교인들끼리 교제할 때도 감동하고 감사한 일이 있다면, 모든 족속과 언어로부터 온 큰 무리와 함께 있을 때 얼마나 큰 기쁨이 될까요?
벧전 1:8 예수를 너희가 보지 못하였으나 사랑하는도다 이제도 보지 못하나 믿고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하니
우리가 지금 마음에 임하신 예수님을 통하여도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 할 수 있다면 주 예수님을 눈을 볼 때는 얼마큼 기쁠까요?
그러나 이 모든 영광은 하나님 앞에 가서야 열리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왕으로 섬긴다면 여기서도 그 영광을 충만하게 누릴 수 있게 됩니다.

두려운 일과 염려스런 일이 많고 현재 상황은 답답하고 미래는 불투명하여도 우리가 할 일은 예수님을 마음에 왕으로 섬기기로 결단하고 순종하며 사는 것 뿐입니다. 
그 다음은 주님이 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나의 생명이십니다! 예나생!
예수님은 나의 주님이십니다! 예나주!
예수님은 나의 왕이십니다! 예나왕! 아멘!  (유기성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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