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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회복(5) : 잃어버린 삶의 의지 (시 56: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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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복(5) : 잃어버린 삶의 의지 (시 56:1-13)

고사성어에 사면초가(四面楚歌)라는 말이 있습니다. 四(넉 사), 面(얼굴 면), 楚(초나라 초), 歌( 노래 가)입니다. 사방에서 들려오는 초나라 노래라는 뜻으로, 적에게 포위되거나 몹시 어려운 일을 당하여 극복할 방법이 전혀 없는 곤경을 말합니다. 비슷한 말로 진퇴양난(進退兩難)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나아갈 수도 물러설 수도 없는 궁지(窮地)에 빠지는 것을 말합니다. 이럴 때 많은 사람들이 삶의 의지를 꺾어 버리고 자포자기 해 버립니다. 그 극단이 자살입니다. 

우리나라에서 요즈음 하루에 평균 34명씩 스스로 목숨을 끊고 있다고 합니다. '할복의 나라' 일본은 물론, 자살률 세계 1위 헝가리마저 제치고 OECD 국가 중에서 단연 1위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국립서울병원은 한 해 자살로 인한 사회·경제적 손실액을 3조 856억 원으로 추산했습니다. 자신에게 다가온 문제, 상처받은 자존심, 굴욕감을 극복하지 못하고 죽음으로 해결하려고 합니다. 

청소년도 예외는 아닙니다. 통계청이 밝힌 우리나라 10대 청소년의 사망원인 중 1위는 자살입니다. 2011년 한 해에만 373명의 청소년이 삶의 의지를 포기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습니다. 하루에 한 명 이상 10대 청소년이 꽃도 피워보지 못하고 자살하고 있는 것입니다. OECD(경제협력개발기구) 가입 국가 중 1위입니다. 젊은이들이 가정 형편, 공부, 취업, 건강, 이성 문제, 금전 문제로 고통을 겪으면 절망과 압도적인 정신적 고통, 우울증을 앓고 결국 신변을 비관해 스스로 목숨을 끊어 버리는 것입니다. 

자살은 살라는 하나님의 명령의 거부이며(창2:16-17), 천하보다 귀한 생명의 파괴이고(막8:36-37), 가혹한 자기 처벌임과 동시에(마27:3-5), 견딜 수 없는 현실을 잘못된 방법으로 벗어나기 위한 가학적 생명 파괴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받은 고귀한 존재입니다. 인간의 생명은 신성하고 생명 자체로 존엄한 것입니다. 그 누구도 자신의 생명을 빼앗을 권리가 없습니다. 우리의 몸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고(고전6:13), 우리의 몸은 성령의 전(고전6:19)입니다. 생의 의지를 포기하는 자살은 결코 해서는 안 될 무서운 죄악입니다. 

자살할 결단력이 있다면 죽기로 살아 보아야 합니다. "자살"을 꺼꾸로 하면 "살자"입니다. 뒤집어 생각하면 얼마든지 살길은 있습니다. 우리는 어떤 환경 어떤 처지에 있든지 삶의 의지를 불태우며 일어서야 합니다. 예수님은 말씀합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11:28)" 

주님 앞에 나아가면 문제 해결의 길이 있고 안식의 길, 평강의 길이 있습니다. 포기하지 않는 자가 마침내 승자가 되는 것입니다. 오늘은 회복 다섯 번째 시리즈로 잃어버린 삶의 의지 회복이라는 제목으로 하나님이 오늘 주시는 말씀을 통해 은혜를 받으려고 합니다. 

오늘 말씀을 들을 때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우리 성도님에게 찾아오시는 인격적인 하나님을 만나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삶의 의지를 꺾으려는 절망적인 상황에서 어떻게 삶의 의지를 회복하고 일어설 수 있겠습니까?

1. 우리는 삶의 의지를 꺾는 상황을 만나면 하나님을 의지하고 삶의 의지를 회복해야 합니다.

사람이 삶의 의지를 꺾고 인생을 포기하는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어떤 문제를 만났을 때 아무도 자신을 도울 수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중병에 걸렸을 때 그 분야의 모든 병을 고치는 명의를 만나면 삶의 의지를 꺾지 않습니다. 경제적 위기를 당했을 때 언제든지 자신을 도와주는 돈 많은 아버지가 있으면 삶의 의지를 꺾지 않습니다. 아무리 어려운 난관을 만나도 그 문제를 언제든지 해결해 줄 수 있는 분이 있다면 사람은 삶의 포기하지 않습니다. 

다윗을 보십시오. 가장 가깝고, 자신의 후견인이 되어줄 만한 장인인 사울이 자신을 죽이려고 합니다. 사위가 자신의 아들 대신 자신의 자리를 차지할 것으로 예측하고 그를 제거해야 자신의 가문이 안전할 것으로 생각합니다. 권력욕은 피도 눈물도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를 피해 결국 블레셋 나라 도시인 가드까지 도망을 하였습니다. 그래도 어떻게든 살아 보려고 삶의 의지를 가지고 원수의 나라에까지 도망간 것입니다. 황장엽씨가 남한으로 망명한 것처럼 살기 위해 남한으로 망명한 것입니다. 

자기 나라 유명한 장수 골리앗을 죽인 적장이기 때문에 안가에 살려두고 이용할 줄 알았습니다. 이스라엘의 제 2인자이기 때문에 이용할 만한 충분한 가치가 있을 것으로 생각한 것입니다. 기자회견도 하고 반공 강연도 하고 골리앗을 죽인 것을 회개하게도 하고 이용할 줄 알았습니다. 가드왕 아기스가 자신의 보호해 주고 왕이 자신을 도와 줄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예측은 전혀 빗나갔습니다. 왕의 신하, 국정원 요원들이 다 알아보았습니다. 이 사람은 분명히 저쪽 나라 왕이라고 왕에게 보고합니다. 그들 판단에 분명 왕이 될 실세이라는 것입니다. 이 사람만 제거하면 저 나라는 끝이 난다는 것입니다. 예전에 자신의 나라 장군 골리앗을 죽일 때 그 나라 여인들이 사울은 수천을 죽였고 다윗은 수만을 죽였다고 노래하고 칭송한 바로 그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감옥에 가두어 버린 것입니다. 

표제를 보십시오. “다윗이 가드에서 블레셋인에게 잡힌 때에”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언제 죽을지 모르는 상황입니다. 아무도 그를 도와주지 않습니다. 1절 하반 절을 보십시오. “사람이 나를 삼키려 하며 종일 나를 치며 압제하나이다.”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자신을 죽이려고 하루 종일 추격하며 압박해 온다는 것입니다. 

삶의 의지를 꺾는 사람은 이런 압박감에 시달립니다. 부도가 나서 빚쟁이들이 돈을 갚으라고 시도 때도 없이 전화합니다. 나중에는 폭력배를 동원하여 집으로 쳐들어옵니다. 질병에 걸려 고통을 당하면 아침저녁으로 통증이 다가오고 공포가 밀려옵니다. 정신이 제 기능을 할 수 없을 정도로 심각한 스트레스를 받는 것입니다. 

2절을 보십시오. “내 원수가 종일 나를 삼키려 하며 나를 교만하게 치는 자들이 많사오니”라고 당시 상황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자신을 비방하는 자들이 온종일 자신을 공격하고, 수많은 사람들이 저마다 잘났다고 으스대며 자신을 대적하고 있는 것입니다. 한 사람도 아군이 없습니다. 한 사람도 도와주는 이 없고 위로해 주는 이 없는 것입니다. 일가친척도, 동업자도, 심지어는 부모 자식도 소용이 없게 됩니다. 위로할 자 도울 자 아무도 없는 것입니다. 이런 상황에 처하면 고독해집니다. 이 고독이 깊어지면 결국 삶의 의지를 접어 버리는 것입니다. 

5절을 보십시오. 저들은 온 종이 내가 한 말을 헐뜯고 오로지 나를 쓰러뜨릴 계략만 꾸밉니다. 6절을 보십시오. 저들은 함께 모여서 사악한 음모를 꾸미고 나의 모든 걸음걸음을 감시하면서 어떻게든 내 목숨을 빼앗으려고 기회를 노립니다. 자신을 죽이려는 사람은 수없이 많고 하루 종일 자신을 감시하며 흠을 잡아 처형하려고 하는 사람은 많은데 아무도 자신을 도와주는 사람이 없습니다. 

“아무도 내 편이 없고 아무도 나를 도울 자 없다”라고 판단될 때 사람은 삶의 의지를 꺾고 포기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그 가운데서 삶의 의지를 불태웁니다. 죽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어떻게 가능합니까? 

3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두려운 날에 누구를 의지합니까? 모든 사람이 자신을 죽이려 하고 다 자신을 버린다 해도 의지하고 도움을 받을 분이 누구입니까? 큰 두려움이 나를 온통 뒤덮어도 도리어 나는 주님만 믿고 의지하겠다고 다짐합니다. 

4절을 보십시오. 하나님을 의지하겠다고 반복하여 말씀합니다. 

10절을 보십시오. “내가 하나님을 의지하여 그의 말씀을 찬송하며 여호와를 의지하여 그 말씀을 찬송하리이다.”라고 고백합니다. 하나님을 의지하니까 어떤 결과가 나타납니까?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없어집니다. 인간이 자신을 어찌하지 못한다는 믿음이 생기는 것입니다. 

11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내가 하나님을 의지하였은 즉 두려워하지 아니하리니 사람이 내게 어찌하리이까?” 하나님이 지켜 주시고 하나님이 보호해 주시는데 감히 인간 누구 자신을 해칠 수 있겠냐는 것입니다. 우리도 삶의 의지를 꺾을 만한 일을 당하면 이런 믿음으로 삶의 의지를 회복하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시편 146편을 보십시오. 인생을 의지할 대상이 아닙니다. 왜 그렇습니까? 근본적으로 도울 힘이 없기 때문에입니다(시146:3) “귀인들을 의지하지 말며 도울 힘이 없는 인생도 의지하지 말지니 그의 호흡이 끊어지면 흙으로 돌아가서 그 날에 그의 생각이 소멸하리로다 (시 146:3-4)” 도울 힘이 있더라도 언제 그 마음이 변할지 믿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윈스턴 처칠이 총리가 되기 전의 일. 하루는 BBC방송과 인터뷰하기 위해 택시를 잡고 운전기사에게 급히 방송국까지 가자고 했답니다. 그런데 기사는 "미안하지만 손님, 다른 차를 이용해 주십시오"라고 말했답니다. 처칠이 이유를 묻자 기사는 "조금 후면 처칠 경의 특별방송이 있습니다. 그 방송을 듣고 움직이려고 합니다"고 대답했답니다. 기분이 좋아진 처칠은 "거금"을 집어 주었답니다. 그러자 기사가 시동을 걸며 말했답니다. "손님, 타세요. 처칠인지 개떡인지 돈부터 벌고 봐야겠습니다." 

인간의 마음이란 이런 것입니다. 결혼할 때 사랑한다고 말하지만 항상 유효한 것이 아닙니다. 사업 시작할 때 약속 끝까지 유효한 것 아닙니다. 

믿을 수 있다하더라도 호흡이 끊어지면 끝이 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의지해야 합니다. 

그래서 “야곱의 하나님을 자기의 도움으로 삼으며 여호와 자기 하나님에게 자기의 소망을 두는 자는 복이 있도다(시146:5)”라고 말씀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천지를 창조하실 전능하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시146:6) 

믿을 수 있는 진실하실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자비로우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시146 : 7-9). 

악인에게 이용당하거나 속는 분은 아니시기 때문입니다(시 146:9). 

호흡이 끊어지는 법이 없고, 영원히 살아 계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시146:10).

(멀고 험한 이 세상길. 정처없는 나그네의길 방황하고 헤메이다 정처 없이 살아 왔네 의지할 곳 없는 이 몸 위로받고 살고파서 세상유혹 따라가다 모든 것을 다 잃었네. 무거운 짐 등에 지고 쉴 곳 없어 애처로운 몸...) 


2. 우리는 삶의 의지를 꺾는 상황에서 기도로 문제를 해결하며 삶의 의지를 회복해야 합니다. 

사람들이 삶의 의지를 꺾는 두 번째 이유는 문제를 자신 스스로 해결할 수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1억 원을 해결할 수 없어 남성연대 대표가 한강에 투신한 기사를 보았을 것입니다. 결혼한 한 경찰관이 임신했다는 내연녀의 말을 듣고 300만원을 주며 그만 만나자고 했으나 내연녀가 금액이 적다며 거절하고, 부인에게 불륜 사실을 알리겠다며 휴대전화를 빼앗으려 하면서 얼굴을 할퀴자 목을 졸라 살해한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문제를 일으켰는데 문제를 해결할 길이 없자 극단적인 행동을 한 것입니다. 삶의 의지를 포기하는 행동을 한 것입니다. 

인기를 누리던 연애인들이 어느 날 인터넷 상에서 자신을 비난하는 글이 도배되면 그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삶의 의지를 포기하고 자살하는 경우를 봅니다. 예전에 행복전도사로 통했던 어느 유명 강사가 스스로 목숨 끓은 일이 있었습니다. 평소 ‘자살’을 거꾸로 읽으면 ‘살자’라며 삶의 의지를 불태웠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전신 홍방성 낭창(루푸스)와 세균성 폐렴으로 인한 공통을 당하니까 견딜 수 없어 삶의 의지를 꺾어 버렸습니다. 매일 웃으며 살자며 그렇게도 강조했던 행복전도사가 자신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자 삶의 의지를 꺾어 버렸습니다. 작은 문제는 어떻게든 극복하려고 하는데 자신의 힘으로 어찌할 수 없는 문제가 다가오면 사람들은 삶의 의지를 꺾어 버리는 것입니다. 

다윗은 어떻게 하였습니까? 진퇴양난, 사면초가의 상태입니다. 적진에 가도 자신을 죽이려고 하고 고국으로 돌아오면 장인 사울이 죽이려고 하는 진퇴양난의 어찌할 수 없는 상황입니다. 자신의 힘으로 어찌할 수 없는 상황입니다. 하늘 아래 피할 곳이 없습니다. 죽을 수밖에 없는 절망적 상황입니다. 무능력과 무기력을 느끼게 됩니다. 이것이 심화되면 삶의 의지를 포기해 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때 다윗은 삶의 의지를 꺾으며 자결하지 않았습니다. 다윗은 불가능한 것 같은 문제를 어떻게 해결합니까?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1절을 보십시오. “하나님이여 내게 은혜를 베풀소서.” 내가 할 수 없는 일이지만 하나님이 은혜를 베풀어 주시면 되는 것입니다. 

7절을 보십시오. “그들이 악을 행하고야 안전하오리이까 하나님이여 분노하사 뭇 백성을 낮추소서.”라고 기도합니다. 하나님 저들을 그냥 내버려 두지 말라는 기도입니다. 진노를 발하여 저 이방민족을 내리쳐달라는 기도입니다. 

8절을 보십시오. 자신의 방황과 탄식을 굽어 살펴 달라는 것입니다. 자신의 흘린 눈물의 기도를 항아리에 담아주고 두루마리 책에 기록해 달라는 것입니다. 눈물의 기도를 하나님이 잊지 않고 반드시 응답해달라는 것입니다. 

9절을 보십시오. 같이 읽겠습니다. 기도하는 날 원수들이 물러갈 것이라는 확신을 가집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자신의 편에 있다는 사실을 알겠다는 것입니다. 확신을 가지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내 힘으로 해결할 수 없는 문제를 만나면 삶의 의지를 꺾지 말고 하나님께 문제를 맡기고 하나님께서 그 문제를 해결해 주신다는 사실을 믿고 삶의 의지를 회복하고 기도하여야 합니다. 히스기야를 보십시오. 적들이 쳐들어 왔습니다. 

그런데 병이 들었습니다. 이사야 선지자에게 부탁했지만 살지 못하니 집을 정리하고 죽을 준비를 하라는 절망적인 말을 듣습니다. 그 때 어떻게 합니까? 얼굴을 벽에 대고 통곡하며 눈물의 기도를 합니다. 우리 하나님께서는 기적으로 통하여 히스기야의 생명을 15년 연장해 주었습니다. 하나가 아이를 낳지 못했습니다. 브닌나가 괴롭힙니다. 그 때 좌절하며 삶의 의지를 꺾은 것이 아니라 눈물의 기도를 술 취한 여인처럼 하였습니다. 결국 하나님께서 민족의 지도자 사무엘을 그의 몸을 통해 낳게 하였습니다. 살다보면 누구나 삶의 의지가 시들 때가 있습니다. 

신앙의 영웅들도 그랬습니다. 모세도 그랬고 엘리야, 요나도 그랬습니다. 모세는 200만 이스라엘 민족을 광야에서 이끈 민족지도자입니다. 엘리야는 갈멜산에서 850명의 이방 선지자를 물리친 사람입니다. 요나는 니느웨 사람 12만 명을 회개시킨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들도 하나님께 "죽여 달라"고 할 정도로 삶의 의지를 잃어버릴 때가 있었습니다. 하던 일이 계획대로 되지 않을 때, 능력부족을 절감할 때 사람은 어쩔 수 없습니다. 그러나 내가 능력 없다고 우리 하나님께도 능력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그럴 때 하나님께 나와 기도해야 합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너는 내게 부르짖어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비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 (렘 33:3)".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어 하나님의 아들이 된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은 말씀합니다. “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마7:11)”

“내가 또 너희에게 이르노니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아낼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구하는 이마다 받을 것이요 찾는 이는 찾아낼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니라 (눅 11:9-10)”


3. 우리는 삶의 의지를 꺾는 상황에서 미래를 소망적으로 기대하며 삶의 의지를 회복해야 합니다.

사람들의 삶의 의지를 꺾는 세 번째 이유는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미래에 대하여 희망을 접기 때문입니다. 아무래도 미래는 불행해질 것 같고 아무리 해도 미래는 절벽으로 끝날 것 같으니까 삶의 의지를 꺾어 버리는 것입니다. 

미래는 비관적이고 미래는 부정적이고, 미래는 절망적이라고 생각할 때 삶의 의지는 꺾이는 것입니다. 지금은 조금 불행하고, 지금은 병들었고, 지금은 가난하고, 지금은 감옥에 있고, 지금은 질병에 걸렸지만 그래도 미래는 건강하고 행복해질 것이라고 기대를 가지면 삶의 의지를 꺾지 않습니다. 

성경에도 삶의 의지를 꺾고 자살한 사람들이 소개되어 있습니다. 대표적인 사람이 예수님을 인신매매한 유다입니다. 은 30에 예수님을 인신매매한 유다가 그것을 성전에 던져 놓고 물러가 스스로 목매달아 죽었습니다(마27:5). 이스라엘 초대 왕 사울도 블레셋 전쟁에서 중상을 입자 스스로 자결하였습니다(삼하31:4). 

아비멜렉은 기드온의 첩이 낳은 아들로서 이복형제 70명을 살해하고 정권을 잡았습니다. 집권 3년 만에 여인이 던진 맷돌에 머리뼈가 파쇄 되자 병기 잡은 자에게 자신을 치게 하여 자살했습니다(삿9:52-54). 

압살롬을 도와 부왕 다윗을 배반하고 정권을 잡게 한 아히도벨도 모략이 수포로 돌아가자 스스로 목매어 죽었습니다(삼하17:23).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시므리가 집권 7일 만에 왕도가 포위되자 불을 지르고 그 속에서 죽었습니다(왕상16:18). 왜 이들이 자살을 합니까? 미래가 없기 때문입니다. 이후 더 좋은 미래는 오지 않을 것이라고 단정하고 죽는 것이 사는 것보다 났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다윗을 보십시오. 미래에 대한 희망이 있겠습니까? 적진에 붙들렸습니다. 적들이 죽일 명분만 찾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도망 나와 이스라엘로 돌아간다고 해도 적국에 망명갔다 온 사람을 백성들이 환영하겠습니까? 사울이 환영하겠습니까? 미래에 대한 기대가 없는 상황에 처한 것입니다. 이럴 때 가장 쉬운 방법이 삶의 의지를 꺾고 자결해 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다윗은 자결하지 않았습니다. 다윗은 미래에 대하여 어떤 기대를 가지고 있습니까? 

12절을 읽어 보겠습니다. 하나님께 서원한 대로 감사제를 올리겠다는 것입니다. 지금 예루살렘 성전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어느 날인가 예루살렘 성전에 올라가게 될 것이다는 것입니다. 9절에 이미 다윗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구원할 것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 확신과 아울러 그는 하나님께 감사제를 드리겠다고 서원하는 것입니다. 언젠가는 모든 문제를 해결하고 왕이 될 때가 올 텐데 환난 가운데 약속했던 대로 하나님께 올라가 감사제사를 드리겠다는 것입니다. 미래에 대한 기대가 있는 것입니다. 승리에 대한 확신과 감사를 갖는 것입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주님이 찬양을 받으시기에 합당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13절을 보십시오. 세 가지를 말씀합니다. 첫째는 주님께서 이 몸을 죽음의 세력에서 건져 주었기 때문입니다. 둘째는 내 발을 헛디디지 않도록 지켜 주셨기 때문입니다. 셋째는 하나님 앞에서 생명의 빛 가운데 거닐 수 있게 해 주었기 때문입니다. 다 과거 시제입니다. 이 시편을 기록할 때 여전히 원수의 손아귀에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이렇게 완료형으로 표현하는 것은 하나님의 구원을 절대적으로 확신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앞은 성도가 하나님과 교제하는 곳으로 예루살렘을 말합니다. 아직 예루살렘에 가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언젠가 예루살렘에 올라갈 것을 확신하는 것입니다. 지금 죽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미 그 사랑하는 자를 악인들로 인해 실족하지 않게 하시고, 악행자들을 친히 보응하시며 자기 자녀에게 생명의 빛을 비춰 주실 것으로 약속했는데 하나님의 하나님이 하신 약속을 신실하게 지키시기 때문에 아직 보이지 않는 미래이지만 말씀 붙들고 확신하는 것입니다. 내 능력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해 주실 것으로 믿고 바라고 나아가는 것입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한 것들의 증거”입니다. 

학문적으로 접근하면 교육 심리학자 마거릿 클리포드가 말한 ‘건설적 실패 이론’입니다. 사람들은 대부분 실패 후에 좌절과 실망감을 느끼지만 사람에 따라서는 이런 감정을 빨리 정리하고 난 뒤 실수를 줄이기 위해 노력하고, 인내심을 배우며, 과제의 중요성을 인식하는 긍정적인 결과를 이끌어 내는 경우가 있는데 이런 사람은 실패 내성이 높은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우리 신앙인은 실패 내성이 높은 사람입니다. 우리는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을 믿기 때문입니다. 이 실패 내성은 실패의 원인을 어디에 돌리는지에 따라 행동이 달라진다는 것입니다. 귀인모형에 따르면 세 가지 중요한 차원이 동기와 정서, 이후 행동에 영향을 미친다고 합니다. 

첫 번째 차원은 실패나 성공의 원인을 내부에 돌리느냐 외부로 돌리느냐의 차이라고 합니다. 열심히 노력해서 시험을 잘 봤다고 생각하면 내부로 원인을 돌리는 것이고, 시험문제가 쉬웠기 때문에 시험을 잘 봤다고 생각하면 외부에 원인을 돌리는 것이라고 합니다. 내부에 원인을 돌리면 자부심을 느낌 것이고, 외부에 돌리는 사람은 안도감은 느끼겠지만 자신감이 높아지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잘못을 빨리 깨닫고 회개하고 개선합니다. 

두 번째 차원은 안정성입니다. 머리가 좋아서 시험을 잘 봤다고 여긴다면 능력이라는 안정성 높은 요인에서 원인을 찾는 것이고, 노력과 운에서 원인을 찾았다면 변화 가능성이 높은 불안정한 요인을 성공 요인으로 본 것이라고 합니다. 능력이라는 안정성 높은 요인은 자신감을 증가시키는 긍정적인 영향을 준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왕같은 제사장으로 존귀한 자로 믿고 살고 있습니다.

세 번째 요인은 통제 가능성입니다. 내가 생각한 그 원인을 내 힘으로 통제할 수 있는가 하는 점입니다. 어떤 일의 원인을 통제 불가능한 것으로 돌릴수록 동기 수준은 낮아진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 하나님께서 통제하신다는 사실을 믿고 있습니다. 

귀인모형을 제안한 학자들은 어떤 일의 결과에 대해 내부에 원인을 돌리고, 안정적이며, 통제 가능하다고 믿을 때 사람들은 가장 자신감 있는 모습을 보이며 실패를 쉽게 극복하고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미래는 하나님의 손에 있습니다. 현실은 암흑 같을 지라도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저들의 우리의 밥이라고 담대하게 나아가는 것입니다. 예수님 말씀합니다. “이것을 너희에게 이르는 것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요 16:33)” 성경은 말씀합니다.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박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롬 8:35)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롬 8:37)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롬 8:38)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롬8:39)”

우리 믿는 사람에게 있어서 실패는 하나의 과정입니다. 어떤 실패라도 그것을 끝으로 받아들이며 삶의 의지를 꺾어서는 안 됩니다. 

서른다섯의 나이에 ‘강남스타일’이라는 노래와 우스꽝스러운 말춤으로 전 세계의 이목을 끈 가수 싸이를 보십시오. 두 아이를 가진, 뚱뚱한 사람, 십 년 전에 대마초 흡연으로 벌금형을 받은 사람입니다. 2년 후에는 군대 부실복무 의혹으로 전국민으로부터 질타를 받고 군에 재복무했던 사람입니다. 가족 중에서 제일 공부를 못했고, 부모님이 원하는 아들 상에 절대 맞지 않는 사람이었다고 합니다. 스스로 별 볼 일 없고, 가진 것 없다고 생각하며 무수한 실패와 일탈을 겪었던 사람입니다. 그가 대마초 사건 때 삶의 의지를 꺾었다면 오늘의 싸이가 존재할 수 있겠습니까?

세계적인 농구 스타 마이클 조던은 이런 말을 하였습니다. “선수생활 통틀어 나는 9000개 이상의 슛을 놓쳤다. 거의 300회의 경기에서 패배했다. 경기를 뒤집을 수 있는 슛을 할 기회에서 26번 실패했다. 나는 살아오면서 실패를 거듭했다. 그것이 내가 성공한 이유다.” 한 번의 실패가 결코 실패한 인생을 만드는 것은 아닙니다.

송진구씨가 쓴 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치열한 삶의 의지를 상실한 사람이 읽어 볼만한 책입니다. 그분은 우리 뇌는 희망을 심으면 희망이, 절망을 심으면 절망이 자란다고 단언합니다. 죽었다 깨어나도 절망을 심은 데서 희망이 자라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희망+절망=100’이라는 것입니다. 희망이 50이면 절망이 50이고, 희망이 0이면 절망이 100이라는 것입니다. 

희망이 0이 될 때 사람은 죽는다는 것입니다. 재벌총수도 자살하고, 권력자도 자살하고, 인기연예인도 자살하는데 자살을 결심할 무렵, 돈도, 권력도, 인기도 희망이 돼주지 못했기 때문에 삶의 의지를 꺾는다는 것입니다. 

그 책에서는 죽을 각오로 절망의 절벽을 넘어선 14명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한의대에 8번 떨어지고 9번 만에 합격한 평강한의원 이환용 원장이 18만 평의 식물원을 가꾼 이야기, 세계에서 유일한 네 손가락 피아니스트 이희아 이야기, 고졸자에 군대에서 장애까지 입은 몸으로 벤처기업을 이룬 김용균 대표 이야기, 평범한 아줌마로 연매출 1,000억 원, 직원 2,000명의 중견기업 미애부 화장품 백인자 대표 등의 이야기가 실려 있습니다. 

천호식품 김영식 회장은 고등학교도 마치지 못했다고 합니다. 24세에 처음으로 학습지 사업을 시작하여 승승장구하였지만 한순간에 사업이 무너지고 무일푼이 되어버렸답니다. 다시 천호물산을 설립하였지만 교통사고를 당해 큰 고통을 겪다 달팽이를 복용하고 효과를 보아 상호를 천호식품으로 바꾸고 식용달팽이의 분양사업을 시작했답니다. 회사가 잘 나가다 다시IMF외환위기로 은행부채만 20억만 남고 파산하였답니다. 

절망에 빠진 그는 모든 것이 끝났다고 생각하고 삶의 의지를 잃고 자살을 결심했답니다. 빌딩 9층에 있는 사무실에서 뛰어내리려고 했답니다. 바로 그 순간 책상 위의 전화벨이 울렸답니다. 전화를 받으니 세무서 직원이었답니다. 그는 다짜고짜 체납된 세금을 내라고 독촉했답니다. “이봐요, 나, 지금 빚에 쫓겨 9층에서 뛰어내려 죽으려고 합니다. 이 판국에 세금은 무슨 세금이요?” “죽더라도 세금은 내고 죽어야죠!” 세무서 직원이 냉혹하게 말했답니다. 

그 순간, 김 회장은 오기가 생겼답니다. “뭐라고? 그래! 세금 낸다! 반드시 재기해서 세금 낸다!” 김 회장은 버럭 소리를 지르고 전화를 끊었답니다. 삶의 의지를 가지고 이를 악물고 일어났답니다. 그에게 남은 재산이라고는 결혼반지 하나뿐이었답니다. 그것을 전당포에 맡기고 130만 원을 마련했답니다. 그리고 ‘쑥진액’으로 다시 시작하여 1년 11개월 만에 은행빚 22억을 모두 갚고 연매출 1,000억 원이 넘는 건실한 중소기업으로 성장시켰다고 합니다. 

그는 자수성가한 성실한 기업인으로서 대통령 표창, 보건복지부 장관상, 모범납세자로 국세청장상 등 수많은 상을 받았고 온갖 어려움 속에서도 못다 한 공부를 계속하여, 부산 동아대학교에서 경영학 박사 학위도 받았으며 모교의 겸임교수로 후진들을 가르치고 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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