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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값진 향유를 깨뜨려 부은 여인 (막 14: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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값진 향유를 깨뜨려 부은 여인 (막 14:3-9)

지난 2011년에 최고의 인기를 누렸던 여러 드라마 중에 차승원씨와 공효진씨가 주인공 독고진과 구애정 역할을 맡아서 끊임없이 “띵~똥!”을 외쳤던 ‘최고의 사랑’이라는 드라마를 기억하시는지요? 저는 그 드라마 내용도 흥미진진하게 보았습니다만, 그 드라마 제목을 보면서 많은 것들을 생각해보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여러분은 무엇이 ‘최고의 사랑’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어떤 분들은 부모와 자녀와의 사랑이라고 답변하실 것이고, 또 어떤 분들은 남녀간의 사랑이라고 대답하실 겁니다. 또는 스승과 제자와의 사랑도 나름 최고의 사랑이야 라고 답하실 분도 계실 것입니다. 다 맞습니다. 우리의 인생에서 어느 사랑인들 중요하지 않은 사랑이 있겠습니까? 

그렇다면 하나님을 믿는 우리 성도들에게 있어서 ‘최고의 사랑’은 무엇일까요? 물론 우리 교회 안에서, 주님 안에서 하는 성도님들 간의 사랑의 교제도 아름답고, 사랑하는 담임목사님과 모든 교역자들이 성심으로 우리 성도님들을 사랑하고 섬기는 모습이 참으로 귀하고 소중합니다. 

부족한 종이 하나님의 은혜로 귀한 교회에 부임하기 전부터 이미 우리 교회에 대한 좋은 소문이 전국적으로 널리 퍼져있었습니다. 저의 절친한 대학친구 한 명이 예전에 대구에서 잠시 지낸 적이 있었는데, 그 때에 바로 우리 청년부에서 활동하기도 했었습니다. 그 친구가 말하기를 대구에서 으뜸가는 억수로 좋은 교회라고 칭찬을 하는 말을 들으며 큰 힘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우리 목사님의 목회비전처럼 사랑스러운 교회, 자랑스러운 교회, 그리워서 다시 찾아오고 싶은 교회가 이미 되었고, 또 그렇게 될 줄로 믿습니다. 지난 주 화요일에 저희 가정이 이사를 오자마자 담임목사님과 여러 성도님들이 따뜻하게 맞아주신 은혜, 그리고 지난 수요일과 지난 주일에 부임인사를 드림으로 환영해주신 은혜에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최고의 사랑은 바로 하나님과 우리 성도들 간의 사랑임을 믿습니다. 수요일과 주일에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성도님들을 보면서, 금요철야와 새벽예배 때 전심으로 하나님을 예배하고 기도드리는 모습을 보면서, 또한 예배 전후로 교회 곳곳에서 성도님들이 서로 교제를 나누시는 모습을 보면서 우리 교회가 참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교회요, 참으로 하늘을 이 땅에 심어 이루어가는 교회공동체임을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그런 점에서 오늘 수요예배에 나오셔서 함께 예배하는 성도님들이 너무나 귀하고 아름다우십니다. 앞뒤 좌우에 계신 분들에게 이렇게 인사하십시다. “사랑합니다. 참 멋지십니다. 아름다우십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제자들입니다. 우리 모두는 은혜를 받은 하나님의 자녀요 백성으로서 하늘을 이 땅에 심는 공동체 안에서 예수님을 따라가는 제자의 삶을 살아가시느라 수고하고 계십니다. 제가 수고하신다고 표현한 것은 우리의 제자로서의 삶이 참으로 녹록하지만은 않기 때문임을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따르는 참 하나님이신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 이 땅에 오셔서 살아가시는 동안 우리를 만나시고, 우리에게 복음을 전하시며 말씀을 가르치시며 생명을 전하여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의 삶을 인도하시며 그분의 삶 전체를 당신의 뜻 안에서 이루어가는 가운데 수많은 이들이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으로 인해 새롭게 열린 삶의 지평에 감사하고 감격하면서, 주신 은혜에 감사의 고백을 드렸습니다. 그래서 그들의 인생의 나머지 전체의 삶을 다시 예수님을 위하여 드리기로 결단한 사람들, 예수님이 기뻐하시는 삶을 위해서 자신을 기꺼이 헌신한 사람들을 우리는 성경말씀을 통해서 목격하게 됩니다.

오늘 우리에게 주신 말씀 속에서도 예수님을 만난 그래서 예수님을 너무나도 사랑하여 자신의 것을 아낌없이 드린 한 여인이 나옵니다. 그런데 이 여인의 이름은 요한복음 12장에서는 나사로와 마르다의 누이 마리아라고 언급하고 있습니다만,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의 본문에서는 그저 한 여자라고 말씀합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등장한 이 여인은 복음서의 수난 이야기가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시점에서 등장하는 인물입니다. 이 여인은 그 누구도 예수님의 죽음을 생각하지 못할 때에 주님의 죽음을 예견하고 감동적인 방법으로 주님의 죽음을 예비한 까닭에 예수님으로부터 놀라운 칭찬과 축복을 받은 사람입니다. 

9절을 함께 읽으십시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이 여자가 행한 일도 말하여 그를 기억하리라 하시니라” 그래서 마태와 마가는 이 여인의 이름이 무엇인지 밝히기보다 이 여인의 예수님을 위한 귀중한 행동에 더욱 초점을 맞추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수난을 준비하는 시기에 아름답게 쓰임 받은 여인으로서 언급되고 있습니다. 어느 해 연말에 구세군 자선냄비 모금에 어느 한 익명의 기부자가 1억원을 기부하고 돌아갔다는 뉴스를 들었는데요. 이를 통해서 한사코 이름을 밝히지 않고 이름도 없이 빛도 없이 이 세상을 밝히는 사람들이 있음을 기억하게 되었던 것처럼, 이 여인의 행동도 바로 예수님의 길을 준비하고 밝히는 자로 쓰임받은 것입니다.

■ 본문

이렇게 이름이 밝혀지지 않은 이 여인은 베다니에 사는 나병환자였던 시몬의 집에 찾아옵니다. 그녀가 시몬의 집에 찾아온 때는 유월절 이틀 전이었습니다. 1절 말씀에 보니까 ‘이틀이 지나면 유월절과 무교절이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예수를 흉계로 잡아 죽일 방도를 구하며’라고 말씀합니다. 

유월절 이틀 전 예수를 죽일 방도를 계속해서 찾던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로 인해서 긴장이 고조되던 시기에 예수님은 3절에서 보는 것처럼 전에 자신이 나병을 고쳐준 베다니에 사는 시몬의 집에 계시면서 초대받은 사람들과 제자들과 함께 식사를 하고 계셨습니다. 아마도 나병환자였던 시몬이 예수님께서 자신의 병을 고쳐주신 것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잔치를 베풀었을 것이고, 그 자리에 이 여인도 있었을 것입니다. 이 여인은 자기가 살고 있는 마을에 예수님이 오셨다는 소식을 들었고, 시몬의 집에서 열리는 잔치에 참석하신다는 소식을 듣고 찾아왔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이 무명의 여인이 베다니 시몬의 집에 와서 그 자리에 있는 모든 제자들과 남자들과 초대받은 사람들을 경악하게 할 정도로 놀라운 행동을 합니다. 3절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예수께서 베다니 나병환자 시몬의 집에서 식사하실 때에 한 여자가 매우 값진 향유 곧 순전한 나드 한 옥합을 가지고 와서 그 옥합을 깨뜨려 예수의 머리에 부으니” 바로 이 여인이 예수님의 머리에 부은 향유 때문입니다. 아마도 이 여인이 부은 향유는 예수님의 머리를 타고 흘러내렸을 것입니다. 

당시에 귀한 손님이 오면 향기가 좋은 향유 기름을 발라주는 풍습이 있었기 때문에 그 행동 자체는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다만 그녀가 옥합을 깨서 부은 향유의 가치가 무려 삼백 데나리온이나 되기 때문에 문제가 되었습니다. 오병이어 사건에서 빌립의 계산에 의하면 오천 명을 한 끼 먹이는 데 드는 비용이 이백 데나리온인데, 

그 향유가 삼백 데나리온이면 도대체 얼마나 큰 액수이겠습니까? 간단한 방정식으로 계산하면 삼백 데나리온이면 자그마치 칠천 오백 명을 먹일 수 있는 액수입니다. 삼백 데나리온은 일반 노동자가 1년을 꼬박 일해야 벌 수 있는 돈입니다. 그리고 그 매우 값진 향유, 곧 “순전한 나드 한 옥합”은 아주 값비싼 수입산 향유입니다. 나드는 향기가 좋고 다른 향보다도 값이 비쌌습니다. 

그런데 이 나드 향유는 주로 인도나 히말라야 산맥에서 자라는 ‘타키스 자타만시’라는 향나무 뿌리에서 나는 것으로 만든 것인데, 아주 품질이 뛰어나서, 오늘날로 치면 대백(대구백화점) 명품관에 가야 살 수 있는 것이었습니다. 워낙 비싼 향유라 산화되지 않게 하려고 옥으로 만든 병에 밀봉해 보관한 것입니다. 앰플(ampulla)이라고 불리는 작은 유리병에 담긴 주사액을 쓰려면 앰플을 깨야 하는 것처럼, 이 나드 향유도 쓰려면 그 옥합을 깨야만 했던 것입니다. 

당연히 한번 옥합을 깨고 나면 다시 쓸 수 없기에 제자들이나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이 볼 때에는 저 여인이 도대체 무슨 일을 하는지 어안이 벙벙해서 보았을 것이고, 그 여인이 제정신이 아닌 사람으로 보였을 것입니다. “아니, 어떻게 저 1년치 월급을 한 번에 주님의 머리에 붓나? 아무리 주님이 귀하시다고 하나 너무 심하지 않나?” 적어도 그 자리에 있던 제자들이 볼 때에는 그 여인의 행동이 엄청난 낭비요 쓸데없는 짓이었습니다. 

그래서 4절에 보면 어떤 사람들, 곧 제자들이 화를 내었다고 합니다. 게다가 제자들 중의 어떤 이, 곧 요한복음 12장에 나오는 가룟인 유다는 ‘그 향유를 팔아 수많은 가난한 사람들을 돕지 그랬냐?“며 이 여인을 책망하면서 야단쳤다고 기록합니다. 특별히 가룟인 유다는 이 여인을 정죄하고 나섰습니다. 

그러나 그 가룟인 유다는 예수님과 따르는 제자들의 돈궤, 곧 재정을 책임지고 있으면서 도둑질도 서슴지 않는 사람이었는데 요때다 싶어서 여인을 공격하고 있습니다. 너무나 인간적인 생각이 아닐 수 없습니다. 겉으로는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것처럼 보이나 실상은 위선이었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사랑하기보다 돈을 사랑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 여인과 달리 그는 말만 앞선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그 여인의 예수님을 사랑하는 마음을 전혀 알지도 못했고 이해하지도 못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 여인의 행동과 제자들의 책망에 대한 예수님의 반응이었습니다. 제자들은 화를 내고 책망하는데 예수님은 오히려 제자들 앞에서 이 여인의 사랑과 헌신을 변호하고 크게 칭찬하십니다. 정말 잘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행동이 영원히 기억될 것이라고 하십니다.

6-8절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만 두라 너희가 어찌 하여 그를 괴롭게 하느냐 그가 내게 좋은 일을 하였느니라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으니 아무 때라도 원하는 대로 도울 수 있거니와 나는 너희와 항상 함께 있지 아니하리라 그는 힘을 다하여 내 몸에 향유를 부어 내 장례를 미리 준비하였느니라” 

예수님이 제자들의 반응과 달리 그 여인을 칭찬하신 그 까닭은 무엇입니까? 첫째, 그 여인이 예수님을 정말 소중하게 여기고 좋은 일을 했기 때문입니다. 그 여인은 무슨 연유로 예수님을 사랑하게 되었는지 알 수 없지만 이전에 예수님을 만나고 그녀의 삶이 놀랍게 변화되었기 때문에 예수님을 사랑하게 되었고, 예수님을 정말로 소중하게 여기게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의 아내나 남편, 부모님을 소중하게 여기십니까? 정말로 소중하게 여기신다면 오늘 밤에 댁에 돌아가셔서 “자기야, 여보야, 당신, 당신은 나한테 제일 소중한 사람이야!”라고 말해보세요. 만일 돌아가셔서 “자기야, 당신, 나한테 참 소중한 사람 중의 한 명이야!”라고 한다면 내일 아침밥을 굶을 각오를 하셔야 할 겁니다.

여러분, 여러분의 부모님, 가족, 아내나 남편을 소중하게 여기시기를 축복합니다. 그러나 무엇보다 우리의 주님을 정말로 소중하게 여기시고 주님을 위해 좋은 일을 하시기를 힘쓰는 우리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소원합니다. 정말 소중하다면, 그것에 다 투자해야 합니다. 계산하지 말고, 쏟아부어야 합니다. 많은 소중한 것 중에 하나라는 말은 전혀 소중하지 않다는 말과 같은 말입니다. 그런 사람에게 내 소중한 것을 전부 쏟아 부을 수는 없습니다. 

제자들은 입버릇처럼 주님을 위해서 뭐든지 다 하겠다고, 심지어 같이 죽겠다고까지 하면서 정작 위급한 순간에는, 예수님이 고난 받으시는 순간에는 저 혼자만 살려고 걸음아 날 살려라 하면서 도망갑니다. 그러나 이 여인은 말로 하지 않고, 행동으로 보였습니다. 정말 주님을 만났기에 그 은혜에 너무나 감사하면서 주님을 소중하게 여기어 실제로 자신이 가진 전 재산에 해당되는 향유를 깨뜨려 주님의 머리에 다 쏟아부었습니다.

이것이 진정으로 그분을 섬긴 좋은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주님도 그 여인을 귀하게 여기신 것입니다. 또한 다른 성도님들의 주님을 향한 섬김을 판단하지 말고 함께 귀하게 여기실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둘째, 그 여인은 주님께 최고의 사랑을 드릴 헌신의 기회를 놓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7절 말씀입니다.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으니 아무 때라도 원하는 대로 도울 수 있거니와 나는 너희와 항상 함께 있지 아니하리라” 

그 여인은 주님을 만난 후 주님을 따라다니면서 주님이 하셨던 말씀을 잘 기억했습니다. 그래서 그녀는 예수님께서 여러 차례 고난당하실 것을 말씀하셨음을 기억했습니다. 자기가 살고 있는 마을인 베다니에 예수님이 오셨다는 소식에 이것이 예수님을 만날 수 있는 마지막이 될 것 같은 예감이 들었습니다. 실제로 유월절이 지나고 예수님은 체포되셔서 고난을 받으시고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습니다. 

이 여인은 주님께 최고의 사랑을 드릴 헌신의 기회를 놓치지 않았습니다. 그는 자신이 갖고 있던 것 중에 가장 귀한 것, 향유가 가득 담긴 옥합을 갖고 예수님께 나아온 것입니다. 그 여인은 예수님의 은혜와 사랑에 너무나 감사해서 ‘나 무엇을 주님께 바치리이까’하는 자세로 마음과 뜻과 정성을 다해서 귀중한 나드 한 옥합을 바쳤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주님을 섬기고 싶어도 기회가 지나가면 섬기지 못합니다. 마태복음 19장에 보면 기회를 놓친 한 부자 청년의 이야기가 소개되고 있습니다. 영생의 길을 찾기 위해 예수님을 찾아온 부자 청년에게 “네 소유를 다 팔아서 가난한 이웃에게 주고 와서 나를 따르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시자 그 청년은 재산이 너무 많음으로 근심하며 돌아갔습니다. 진정으로 예수님을 따르고자 자신의 재산을 아까워하지 않고 다른 가난한 이들과 나누었더라면 어땠을까요? 자신의 부로 인해서 누리는 만족과는 비교할 수 없는 참 기쁨과 나눔의 은혜를 체험했을 것이고, 예수님의 가르침도 훨씬 더 잘 받아들였을 것입니다.

전에 섬기던 교회에서 전임사역을 시작한 지 얼마되지 않은 때의 일이었습니다. 어느 연말쯤에 한 남자 성도님과 상담하였는데 그 분은 교회 남신도 구역모임에 열심히 참여하고자 했으나 세상 일이 너무 바쁘다보니 점점 소홀해지게 되고 그러다가 세상 모임이 교회 구역모임보다 더 유익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 자신은 혼자 예수님을 믿으면서 주일만 나오겠다고 말하면서, 점차 예배는 물론, 맡고 있는 남신도 구역모임의 부구역장 직분도 내려놓는 모습을 보면서 너무 안타까웠습니다. 

또 한 남자 성도님은 딸을 통하여, 그리고 새로 시작하는 사업을 계기로 심방을 받고 다시금 주일예배에 출석하고 순모임에 참석하기로 결단했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사업이 어려워지자 결국 사업을 정리하였고, 주일성수 약속도 지키지 않는 안타까운 일도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에베소서 5장 16절에 “세월을 아끼라 때가 악하니라”고 말씀했고, 로마서 12장 11절에서도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고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라”고 했습니다. 오늘 우리에게 주어진 기회는 다시 오지 않습니다. 인생에서도 기회가 항상 있는 것이 아닙니다. 기회는 붙잡지 않으면 지나갑니다. 주님을 섬길 수 있을 때, 헌신할 수 있을 때, 봉사할 수 있을 때, 사랑할 수 있을 때 기회를 붙잡읍시다. 다음 세대를 위해서, 그리고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투자하는 우리의 헌신만이 우리 삶의 진액을 한 방울도 헛되이 낭비하지 않는 비결입니다. 

“주님의 시간에”(In his time)라는 찬양이 있습니다. 제가 중등부 때 배웠던 찬양인데, 벌써 20년도 넘은 찬양입니다만, 이 말씀을 준비하는 가운데 주님이 생각나게 하신 찬양입니다.
주님의 시간에 주의 뜻 이뤄지리 기다려 하루하루 살 동안 주의 뜻 이뤄지리 주 뜻 이룰 때까지 기다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구원과 헌신과 축복의 기회가 올 때 놓치거나 미루지 말고 기회를 꼭 붙잡으시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그래서 흔들리지 않는 믿음을 가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셋째, 이 여인은 ‘자신의 옥합을 깨뜨리고’ 예수님의 머리에 향유를 부었기 때문입니다. 향유를 예수님 머리에 붓기 위해서는 목이 가늘고 긴 옥합을 깨뜨려야 합니다. 이것은 이 여인에게는 자신의 전부와도 같은 향유였습니다. 이것은 곧 자기 자신을 드린 것이었습니다. 옥합이 아주 아름다운 병이었지만 그 안에 담긴 향유와 비교할 바가 못 됩니다. 이 옥합이 깨져야 그 안의 향유가 쏟아져서 나옵니다. 

이 옥합은 바로 나 자신이자 우리 성도님 한 분 한 분이십니다. 주님께 드리는 참된 헌신은 내가 깨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 앞에서 내가 깨어지는 결단이 있어야 합니다. 이제까지는 나 중심으로 살아왔던 우리였지만, 어느날 이 옥합 안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찾아오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가장 귀한 분으로서 내 삶에 들어오셔서 우리의 모든 것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아직 많은 이들이 예수님을 믿으면서도 예수님을 내 삶의 중심에 모시지 않고, 자기 중심으로 살고 있습니다. 이 옥합이 깨져야 합니다. 

저 자신도 대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원에 다닐 때만 해도 예수님을 만났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저 자신의 계획을 가지고 살았습니다. 저는 유엔과 같은 국제기구에서 일함으로 유명해지고 세계에 공헌하는 일을 하고 싶었습니다. 예수님을 알고 예수님을 내 삶의 중심으로 모셔들였다고 했지만 여전히 내 중심의 인생 계획을 세우고 착착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2002년 초 어느날 주님께서 말씀으로 저에게 찾아오셔서 히브리서 10장 38-39절의 말씀을 주셨습니다. “나의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또한 뒤로 물러가면 내 마음을 그를 기뻐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우리는 뒤로 물러가 멸망할 자가 아니요 오직 영혼을 구원함에 이르는 믿음을 가진 자니라” 이 말씀을 주시면서 저에게 겉으로 화려한 무늬를 가진 옥합을 깨뜨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제 자신을 주님께 온전히 드리기 원하시는 주님의 음성에 저는 여지없이 순종하고 “오직 영혼을 구원하기에 힘쓰는 믿음을 가진 자”로 살아가기로 결단했습니다. 비로소 그 때 처음으로 제 자신을 주님께 드리게 되었고, 감사하게 지금 목사로 여러분을 섬기게 되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주님께서는 ‘내 인생의 시간표’대로 인도하시는 것이 아니라 ‘당신의 시간표’에, 당신의 시간에, 저 자신을 받으시고 저를 인도하시기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옥합을 깨뜨려 주님을 위하여 향유를 붓는 인생으로 살아가기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명예, 인기, 이기주의, 교만, 세상의 화려함 등 겉으로만 화려하고 아름다운 것을 그대로 가지고 있으면 예수의 향기는커녕 나 자신만 드러납니다. 그러나 겉으로 화려하고 아름다운 것이 깨져야 비로소 주님이 드러나시게 됩니다. 

그래서 갈라디아서 2장 20절 말씀,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는 말씀처럼, 나의 옛 사람이 깨어지고 오직 주님만 내 안에 사시게 해야 합니다. 그래야 내 속에 계신 그리스도께서 비로소 그 향기를 드러내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8절에서 “그는 힘을 다하여 내 몸에 향유를 부어 장례를 미리 준비하였느니라”고 하시면서 그 여인을 칭찬하신 것이었습니다. 그 여인이 힘을 다해 향유를 부음으로 베다니 시몬의 집 전체에 향유의 향기가 가득하게 되었던 것처럼 그 여인이 자신의 옥합을 깨뜨림으로 예수님의 고난과 죽으심을 미리 준비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결국 예수님 자신도 이 세상을, 우리를 너무나도 사랑하셔서 십자가에서 자신의 옥합을 아낌없이 깨뜨리셨습니다. 자신의 존재를 깨뜨리시면서까지 우리의 죄를 짊어지셨고 십자가에서 보배로운 피를 쏟으셨습니다. 우리는 그의 피로 죄사함과 깨끗함을 얻어서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로, 예수님을 나의 구세주로 모시고 살게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 여인은 하나님의 때에, 주님의 시간에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여 그녀의 가장 귀한 것을 드려 예수님의 장례를 준비하였습니다. 그래서 그 여인은 장례식을 치를 때 시신에 바르던 최고급 향유를 주님께 깨뜨려 부어 미리 장례를 치러드린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러한 여인의 행동을 보시고 주님께서 최상급의 칭찬으로 갚아주시는 것이 당연한 일이라 하겠습니다. 
결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제는 우리가 옥합을 깨뜨려야 할 차례입니다. 오늘 우리가 깨뜨려야 할 옥합은 무엇입니까? 시간의 옥합을 깨뜨려 주님 앞에 드리십시다. 물질의 옥합을 깨뜨려 주님의 발 앞에 향유를 부으십시다. ‘나’라는 존재를 깨뜨려 주님 앞에 드리는 고귀한 헌신자가 되십시다.  

우리의 섬김이 다 예수님을 위한 섬김이 되기 원합니다. 우리의 섬김이 주님을 머리로 모신 그의 몸된 우리 하늘담은교회를 위한 섬김이 되기 원합니다. 우리의 섬김이 이 세상을 향한 섬김이 되기 원합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모든 사람은 예수님을 섬기는 사람입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내 안에 있기 원합니다.’라는 고백을 주님께 드리십시다.

베다니의 나병환자였던 시몬의 집에 있었던 그 어떤 제자들보다, 그 어떤 사람들보다, 심지어 병고침을 받은 시몬보다 오늘 말씀의 주인공은 단연 베다니의 그 이름없는 여인입니다. 그녀는 예수 그리스도의 가시는 길을 준비한 여인이었습니다. 주님이 가시는 길은 십자가의 길, 섬김의 길, 사랑의 길이셨습니다. 그 길에 이 이름모를 여인의 섬김이 있었습니다. 축복을 흘려보내는 섬김이 있었습니다. 십자가의 길, 부활의 길을 준비하는 섬김이 있었습니다. 그러하였기에 그의 선물은 그 어떤 것보다 가장 값진 것이었고, 이에 예수님이 감동하시고 9절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우리 다함께 9절의 말씀을 읽으십시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이 여자가 행한 일도 말하여 그를 기억하리라 하시니라” 

놀랍게도 그 여인이 예수님께 매우 값진 향유 한 옥합을 부은 그 사건이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시고 장사되시기 전 마지막으로 장례를 준비한 사건이 되었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이 고난을 받으시고 십자가에 달리시는 순간에 비겁하게 도망하였지만, 심지어 가룟인 유다는 예수님을 배반하였지만 그 여인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시고 죽으시는 그 순간에도 예수님을 떠나지 않고 곁을 지켰을 것입니다.

예수님 당시에 인정받고 대접 받던 남자들과 달리 늘 천대와 무시를 당하던 여자들, 그 가운데서도 예수님을 따랐지만 정말 이름없이 빛 없이 묵묵히 섬겨야 했던 이 여인이야말로 우리에게 참된 섬김과 헌신과 겸손의 제자도를 보여주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이 여인의 섬김은 예수님이 다시 오실 때까지 복음이 전파되는 곳마다 기억하고 전해질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예수님을 참으로 기쁘시게 하는 성도는 예수님을 소중하게 여기고 사랑함으로 자신의 모든 것을 아낌없이 드리는 성도입니다. 그리고 참 제자는 예수님께 최고의 사랑을 드릴 헌신의 기회를 놓치지 않고 시간과 물질을 드리는 성도입니다. 또한 예수님을 참으로 따르는 성도는 자신을 온전히 드림으로 주님께 헌신하는 성도입니다. 오늘 주신 이 말씀을 기억하시면서 값진 향유를 깨뜨려 부은 이 여인처럼 온전한 것을 드리기에 힘쓰시는 귀한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이 시간 아까 찬양했었던 ‘내게 있는 향유 옥합’이라는 찬양을 한 번 더 다함께 부르시고 기도하는 시간을 갖겠습니다.

내게 있는 향유 옥합 주께 가져와 그 발 아래 입맞추고 깨뜨립니다.
나를 위해 험한 산길 오르신 예수 걸음마다 크신 사랑 새겨놓았네.
나를 위해 십자가에 오르신 그 발 흘린 피로 나의 죄를 대속하셨네.
주님 다시 이 땅 위에 임하실 그 때 주의 크신 사랑으로 날 받아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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