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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신자의 정체성 (행 26:13-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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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자의 정체성
사도행전 26:13-23

사도행전에는 사도 바울의 회심이야기가 모두 3번 나오는데, 한번은 실제적인 사건의 기록을, 두 번은 바울 사도 자신이 전도하는 이야기 가운데 나옵니다. 사도행전 9:1-19절에서 한번, 그리고 22:1-16절에서 한번, 그리고 마지막으로 오늘 말씀의 본문으로 삼은 사도행전 26장에 한번 나옵니다. 아무리 유명한 사도의 이야기라고 할지라도, 어떤 한 사람의 회심 기사를 한 책에서  세 번씩이나 동일한 내용을 기록하고 있다는 것은, 사도행전의 기록자인 누가가 이 사도 바울의 회심 기사를 통해서, 무엇인가! 아주 중요한 메시지를 전달하고자 했을 것이란 생각을 자연스럽게 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바울의 회심기사는 단순한 기록이 아니라, 바울 사도 자신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감당한 믿음생활에 관한 구체적인 내용이고, 바울의 가치관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친 사건입니다. 

그래서 오늘은 본문 사도행전 26:13-23절에 기록된 바울 사도의 회심기사를 통해서 그리스도교 역사상 가장 위대한 이방인을 위한 사도로 알려진, 바울 사도가 스스로는 어떤 존재로 자신을 인식했는지에 대하여 살펴보면서 몇 가지 말씀을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1. 바울은 ‘자신은 부활하신 그리스도 예수께로부터 부름을 받았다.’라고 인식합니다.
일반적으로 세상에서는 ‘사람은 누구에게서 부름을 받았는지가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부름을 받은 사람은, 자신을 부른 자의 권위를 덕입게 되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서 어머니가 부르면 어머니의 권위를 입고, 장군의 부름을 받으면, 비록 일개 사병일찌라도 장군의 권위를 덧입게 됩니다. 왕으로부터 부름을 받으면, 비록 미관말직에 있는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왕의 권위를 덧입음으로, 장관도 총리도 무시하지 못하는 존재가 되고 맙니다. 그러니까 이 말은 사람이 자신을 인식할 때, 자신의 권위를 생각할 때, 자기를 부른 자를 통해서, 자신을 인식한다는 의미입니다.
 
신약성경에 나오는 바울의 편지를 보면, 바울 사도께서 각 교회에다 당신을 소개할 때, 가장 많이 사용하고 있는 표현을 볼 수가 있는데,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종 사도 바울은…”이라는 표현입니다. 여기서 ‘예수 그리스도의 종, 나 바울은’이라는 표현은 사도 바울이 자신을 어떻게 인식했는지를 분명하게 보여주는 한 가지 예입니다. 

사도행전  9장에서 다마스커스로 피신한 예수당을 붙잡아서 박해하고자 하는 목적으로 대제사장의 공한을 가지고 다마스커스로 가는 길 위에서 갑자기 밝은 빛 가운데서 찾아 온 부활하신 그리스도 예수를 만난 이후에,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자 증인으로 부름을 받은 이후, 사도 바울의 믿음생활을 보면, 바울이 진정으로 주인이신 그리스도 예수의 충성스러운 사환과 증인으로서 합당한 삶을 살았다는 것을 여러분은 신약성경을 통하여 분명하게 알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예수 그리스도의 사환으로 증인으로서의 역할을 감당하기 위하여 얼마나 열심히 전도자의 삶을 살았으며, 많은 사람에게 복음을 전하는 전도자가 되기 위하여 얼마나 많고 어려운 핍박과 위험을 당했는지 여러분은 알 것입니다. 바울은 오직 사나 죽으나 그리스도 예수에게만 매달려 살았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평생을 오직 복음만을 전하기 위하여 독신으로 살았습니다. 가정을 가지는 즐거움보다 진정한 신랑인 예수의 정결한 베필이 되고자 노력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고상한 일을 위해서는 저신의 모든 자랑스러운 조건까지도 마치 인간의 배설물처럼여기며 살았습니다. 그렇다고 바울의 삶에 전혀 부족함이 없다는 말이 아닙니다. 그렇게 오직 예수만 사랑하고, 예수 한분으로만 만족을 하는 삶을 살았다는 말입니다.  
 
바울은 언제나 자기를 당신의 사환으로 증언자로 불러준 그리스도 예수만을 바라보고, 자기의 주인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눈으로 자기를 인식하고 보았습니다. 그렇습니다, 바울은, 자신을 당신의 사환과 증인으로 불러주신 분, 진정한 바울의 주인인 분인, 오직 한 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자신을 인식했습니다.

사람은 창조될 때부터 ‘하나님의 형상 곧 image of God'을 따라서 창조되고, 거기에 하나님께로부터 온 생기가 함께 한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은 이 세상에 속한 것을 보면서, 자신을 인식해서는 안 되는 존재입니다. 생명의 주인이시고, 여러분을 부르신 하나님을 통해서, 자신을 바라보아야만 온전히 사람의 가치를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많은 사람이 진정한 주인인 그리스도 예수를 통하지 않고, 오히려 재물이나 능력이나 자랑거리를 통해서 자신을 봅니다. 그러면 누구든지 자신의 정체성을 잃어버리고 맙니다.

바울처럼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자신을 보지 않고, 자신을 통해서 자신을 인식하게 되면, 자기애착과 자기연민 밖에는 나오지 않습니다. 그런 사람은 매일 자기만 주인공이 되어야하고, 모든 것이 자기중심으로 움직여야만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아무 것도 아닌 일에 상처를 받고 쓰러지고, 공연한 일로 낙심을 하고, 시비하면서  원망을 합니다.

아마도 바울이 바나바와 베드로와 자신을 비교하였다면, 아무 일도 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바울은 베드로는 유대인에게, 자신은 이방인에게 보냄을 받았다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맡겨준 구분을 겸손하게 인정을 합니다. 이렇게 바울처럼 오로지 부활하신 그리스도 예수를 통해서, 자신을 바로 인식할 때에만, 진정한 자신을 볼 수 있고, 거룩하고 선하신 하나님의 일꾼이 될 수가 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께서 바울을 부르면서 첫 번째 하신 명령은 바로 16절에 나오는 ‘일어나 너의 발로 서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바울 보고 어디에 서라는 것입니까? 그리고 어떻게 서라는 것입니까? 주님의 말씀은 바로 바울에게 다마스커스로 가는 길 위에서 나를 만났듯이 그렇게 ‘부활하신 그리스도 예수 앞에 일대 일로, 단독자로 서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다른 사람의 앞도 아니고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으려고 서는 것도 아니고, 오로지 부활하신 그리스도 예수하고만 독대하여 서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주님의 말씀은 ‘네 모습 그대로 네 존재 그대로 서라.’는 의미입니다. 더할 것도 뺄 것도 없이, ‘그냥 네 모습 그대로를 주님께서 부르셨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요즈음 그리스도인은 이런 부분에 있어서 자기 고백과 믿음이 너무나 유약한 것을 발견합니다. 바울 사도가 가진 것과 같은, ‘오로지 부활하신 그리스도 예수께서 나를 부르셨다.’는 확신과 ‘내가 부활하신 주님의 부름을 받은 사람이라.’는 자존감이 너무나 약합니다. 그래서 세상에 대해서 자신감이 없고, 담대하지를 못합니다.
너무나 썩어질 세상에 대하여 유약하기 때문에, 일이 있을 때마다 믿음을 따라서 살면서 성령의 능력을 덧입어 세상을 이기기보다는, 세상에 속한 어리석고 썩은 가치관에 밀려서, 세상에 눌려 삽니다. 그리고는 과거의 죄를 기억하며, 날마다 자신을 괴롭힙니다. 

그리스도 예수께서 내게 새로운 삶을 주셨다는 것을 입으로는 알면서도, 삶의 자리에서는 전혀 체험을 g지 못하고 삽니다. 그러니 내일에 대한 소망이 없고, 삶의 자리에서 승리의 생활을 맛볼 수가 없습니다. 여러분과 함께 하는 임마누엘의 주님을 경험하지 못합니다. 따라서 날마다의 삶이 답답하고, 힘이 들고, 불평이 생기고, 감사한 것이 없는 것입니다. 신실한 신자는 자기의 힘 때문이 아니라 그리스도 예수의 능력과 지혜로 그런 삶의 자리에서 벗어납니다. 지금 여러분의 신령상 형편은 어떠한지 살펴보기 바랍니다. 그리고 어디에 문제가 있는지 살펴서 깨달아지는 것이 있으면, 지금 여기서 회개하고, 여러분의 삶의 자세를 고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사도 바울이 만약 과거를 가지고 괴로워했다면, 바울은 더욱 더 그럴 수밖에 없는 사람입니다. 바울은 예수당을 핍박하고, 예루살렘 교회의 지도자이자 집사인 스데반의 죽음에 증인을 섰던 책임이 있고, 수없이 많은 성도를 잡아다가 박해하고 괴롭히고 죽이는 일에까지 앞장을 섰던 사람입니다. 나사렛 예수를 핍박하는데 괴수 역할을 한 사람입니다. 하지만 바울은 지나간 과거의 부끄러운 삶의 흔적까지도 가지고 그리스도 예수 앞에 섰고, 그런 약점을 가지고 있는 채로 부활하신 예수의 부름을 받은 사람입니다. 바울 사도의 이런 모습이 바로 여러분에게도 있어야 합니다. 다시 말해서  ‘내 모습 그대로 가지고 나를 부르신 그리스도 예수 앞으로 나아가 서는 자세’입니다. 나의 양손에는 죄만 가득하고, 내 가슴에도 죄만 가득하고, 온 몸과 맘에 죄만 가득할지라도, 그런 모습 그대로 주님 앞에 나아가, 자신이 죄인임을 고백하고, 이런 죄인을 불러주신 그리스도 예수 앞에 감사하고 감격스런 마음으로 서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예수를 통한 은총의 역사가 바로 거기서부터 시작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제부터는 내가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부활하신 그리스도 예수께서 나를 당신의 사환으로 증인으로 불러주셨다는 점을 분명하게 깨닫고, 나의 지은 죄로 말미암아 죽을 수밖에 없는 불러주신 그리스도 예수께 감사하는 것 뿐만 아니라 나의 진정한 주인이 되시는 예수의 눈으로 모든 것을 바라보고, 충성스럽게 바울처럼 자기의 일을 감당하는 신자가 되고자 마음과 정성을 다하는 여러분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다음으로 바울은 예수께서 자기를 부르신 부름에는, 거룩한 목적이 있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그러면 부활하신 예수께서는, 무엇을 위하여 사도 바울을 당신의 사환으로 증인으로 부른 것입니까? 다시 말해서 이런 질문은 예수 그리스도의 ‘사환과 증인의 역할은 무엇인가?’라는 질문과 동일한 말입니다.

여기서 사환과 증인이 해야만 할 일이란, (1) 사환은 자기의 주인이 하라는 일을 감당하기 위하여, 자기의 하나뿐인 목숨까지도 아끼지 않고 충성하는 것을 의미하고, (2) 증인의 역할이란, 어떤 사건의 증인이라면, 반대파가 있어서 증언을 하지 못하도록, 생명을 위협한다고 할지라도, 그런 모든 증언을 하지 못하도록 하는 위협과 방해를 무릅쓰고서 “자신이 본 것과 들은 것”을 담대하고 정확하게 증거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누가는 부활하신 주님께서 바울을 만났을 때에 하신 말씀을 본문 16절에 기록하기를, ‘일어나 너의 발로 서라 내가 네게 나타난 것은 곧 네가 나를 본 일과 장차 내가 네게 나타날 일에 너로 종과 증인을 삼으려 함이라.’라고 합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분명하게 바울을 만나서 명하기를, ‘내가 네게 나타난 것은 곧 네가 나를 본 일과 장차 내가 네게 나타날 일에 증인을 삼으려 함이라.’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바울은 부활하신 주님께서 한 일과 앞으로 하실 일에 대하여 증인노릇을 시키기 위하여 부름을 받은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본문 21-22절에서 아그립바 왕 앞에서 담대하게 자기의 그동안의 역할에 대하여 고백하기를, ‘유대인들이 성전에서 나를 잡아 죽이고자 하였으나,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아 내가 오늘까지 서서, 높고 낮은 사람 앞에서 증언하는 것은, 선지자들과 모세가 반드시 되리라고 말한 것밖에 없다.’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바울은 아그립바 왕에게, ‘자기를 유대인들의 수많은 시도가 있지만 그럼에도 아직까지 살아 있는 것은, 자신이 그리스도 예수를 위한 증인으로 성실하게 살았기 때문입니다.’라고 자신의 삶을 가지고 아그립바왕에게 간증을 한 것입니다. 

그리고 본문 23절에서 누가는 바울이 아그립바 왕에게 증언 한 말을 기록하기를, ‘곧 그리스도가 고난을 받으실 것과 죽은 자 가운데서 먼저 다시 살아나사 이스라엘과 이방인들에게 빛을 전하시리라 함이니이다.’라고 했는데, 바울의 이 말도 사실은 부활하신 그리스도 예수에 대하여 증언한 말입니다. 이치럼 바울은 부활하신 그리스도 예수에 대한 참으로 성실한 증거자입니다.    

바울은 때를 얻든지 못얻든지 상관없이 복음을 전하고 나사렛 사람 예수가 인류의 구세주라고 증언했습니다. 수없이 매를 맞으면서도 복음을 전했고, 심각한 질병인 안질과 간질에 시달리면서도 핑계하지 않고 복음을 전했습니다. 복음을 전하다가 굶기도 하고, 옥에 갇히기도 하고, 전도여행을 하다가 해적을 만나기도 하고, 바다에서 표류하기도 하고, 병에 걸려 죽을 뻔 한적도 여러 번입니다. 하지만 바울 그런 가운데서도 낙심하지 않고, 남의 병은 고쳐주면서도, 자기의 병은 그대로 가진 채로 나사렛 예수를 인류의 구세주 그리스도라고 증언하는데 최선을 다했습니다. 그래서 오죽하면 유럽의 그리스도교를 바울의 종교라고까지 표현하는 사람이 있을 정도입니다. 

이렇게 바울은 자기의 할 일은 오직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인 나사렛 예수를 인ㄹ의 구세주인, 그리스도라고 증거 하는 일이라고 여겼습니다. 바울은 다른 일에는 전혀 관심을 갖지 않았습니다. 바울은 언제나 어디서나 목숨을 걸고, 내놓고, 과거에 자신이 다마스커스로 가던 길 위에서 만난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 지금도 자기와 항상 같이 해주는 분인, 그리스도 예수를 증거 하는 일에만 마음과 정신을 쏟았습니다. 부활하신 예수께서 당신을 핍박하는 바울을 부르신 목적도 바로 예수를 그리스도라고 증거 하게 하기 위해서였는데, 바울은 정말이지 예수의 뜻대로 살았습니다. 여러분도 바울처럼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고, 여러분의 주인인 예수의 뜻대로만 살아야 합니다.    
그러면 바울이 증거 해야 할 내용은 구체적으로 무엇입니까? 
간단하게 정리하면 세 가지입니다.
첫째는 나사렛 예수께서 담당하신 십자가의 고난, 곧 대속의 고난입니다. 대속의 고나이란 하나님의 공의를 만족시키기 위하여, 전혀 죄가 없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 인류의 죄를 대속하기 위하여 죄인으로 정죄를 당하시고, 십자가에 달려 주는 고난을 당한 것을 말합니다. 그러니까 저와 여러분의 죄를 대속하고자 사람이 되신 하나님께서 대신 십자가에서 대속의 제물이 되신 고난을 말합니다. 예수께서 감당하신 대속의 고난을 믿는 사람은 다 죄사함을 받고 하나님 앞으로 나갈 수 있는 은총을 받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둘째는 나사렛 예수께서 영생의 첫 열매가 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십자가에서 죽은 예수께서 생전에 말씀하신대로 죽은지 사흘만에 부활하셨기 때문입니다. 부활의 몸은 다시 죽지 않고 늙지 읺는 신령한 몸입니다. 이것은 곧 영생이 있음을 증거해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수의 부활을 믿고 증거하는 사람은 이미 영생을 얻는 것입니다.     

셋째로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이방인이든 유대인이든 상관 없이 당신의 백성에게 빛을 비추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구원의 범위가 온 우주로 확장되었음을 말합니다. 
이제는 아브라함의 자손만이 아니라 그 이외의 모든 사람도, 즉 인종이나 신분, 성별이나 연령에 관계없이, 누구든지 그리스도 예수를 통하여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빈부의 격차에 상관없이, 지위에 상관없이, 과거와 상관없이, 누구든지 나사렛 예수를 그리스도라고 믿기만 하면, 생명의 주인이신 하나님께서 그런 사람에게 구원의 빛을 비추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모두가 구원 받은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있습니다.
영생을 얻게하는 구원의 문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누구에게든지 열려있습니다.
이런 구원의 복음을 증거 하기 위하여 부활하신 주님께서 당신을 핍박하던 바리새인 사울을 불러서 이방인을 위한 사도 바울로 세운 것입니다.

사랑하는 마포중앙교회 성도 여러분! 여러분도 예수께 부름을 받은 사람입니다. 그러면 나는 무슨 일을 감당하게 하기 위하여 예수께서 부르셨을까? 한번 스스로 물어보고, 주님께서 나를 부른 이유가 무엇인지 깨닫게 해달라고 겸손히 기도하기 바랍니다.  여러분을 부른 주님의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은 지금 예수 그리스도의 사환과 증인으로 부름을 받아서 마포중앙교회에 나온 것입니다. 바울은 자신이 본 예수 그리스도 즉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보았기 때문에 자기 본 예수 그리스도를 평생 동안 쉬지 않고 증거하고 섬겼습니다. 

여러분은 예수님을 어떤 분으로 만났습니까? 꼭 바울이 만난 예수님만이 전부는 아닙니다. 성경이 말하는 예수님도 좋지만, 여러분이 만나고 경험한 예수님을 증거하는 여러분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부탁을 드립니다. 그것이 지금 여러분이 해야 할 일입니다. 내가 만난 예수가 분명히 있어야만 합니다.

어느 날 이현필 선생의 제자가 이현필 선생에게 묻기를 "어떻게 믿어야 잘 믿을 수 있습니까?"라고 했더니, 이현필 선생이 대답하기를, "물에 빠지듯 풍덩 빠져 믿으시오."라고 했다합니다. 사도 바울은 ‘자기는 예수를 위해 미친다.’라고 고백을 했습니다. 사도행전에 나오는 그리스도인은 대부분이 예수에게 미친 사람들입니다. "미치자. 크게 미치자. 예수를 위해 미치는 것만이 우리의 목적이다."라고 이용도 목사는 외쳤다. 무슨 일이든지 미치지 않고는 위대한 일이 일어날 수가 없습니다. 코카콜라의 사장은 ‘내 혈관에 흐르고 있는 것은 피가 아니고 코카콜라’라고 했습니다. 볼셰비키 혁명을 일으킨 공산당은 마르크스주의에 미친 사람들입니다. 오늘의 그리스도인에게는 예수그리스도에게 미친 뜨거운 정열이 없습니다. 쇼 윈도우 속에 진열해 놓은 마네킹과 같은 메마른 신심을 가지고 무엇을 할 수 있겠습니까? 여러분은 예수의 마음을 진정으로 느껴본 적이 있는지 자신의 신령상 형편을 정직하게 살펴보기 바랍니다.

주님께서 바울을 불러서 당신의 일을 하신 것은, 전능하신 주님도 당신의 일은 구체적으로 사람을 통해서 하신다는 뜻입니다. 예전에 바울을 부른 예수님은 동일하게 여러분을 증인과 사환으로 부르십니다. 그러면 부활하신 주님 앞에서, 멸망할 세상 앞에서 여러분의 정체성은 무엇입니까? 주님의 부름을 받은 사람, 마땅히 해야 할 일이 있는 사람이 되어서, 오직 주님의 영광을 위해서 여러분의 삶의 초점을 예수 그리스도께만 맞추고 살고자 마음과 정성을 다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환이자 증인역할을 감당하는 여러분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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