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하나님의 위로 (살후 2:16-17)

첨부 1


하나님의 위로 (살후 2:16-17)


데살로니가후서는 바울이 데살로니가 교회에 보낸 두 번째 편지입니다. 특히 오늘 본문은 바울이 데살로니가 교회를 위해 중보기도하고 있는 내용입니다. 짧지만 간절한 중보기도입니다.
이 중보기도의 내용은 간단합니다. 하나님께서 데살로니가 교인들을 위로해 주십사하는 것입니다. 바울이 편지를 쓰면서 큰 어려움 가운데 있는 데살로니가 교인들을 하나님께서 친히 위로해 달라고 중보기도를 드린 것입니다.

그러면 바울은 왜 하나님께서 데살로니가 교인들을 위로해 달라고 기도한 것일까요? 도대체 데살로니가 교인들의 상황이 어떻길래 하나님의 위로가 필요한 것일까요?

위로가 필요한 사람들

본문에는 왜 데살로니가 교인들이 위로를 받아야 하는지 직접적인 언급은 없습니다. 그래서 바울이 데살로니가 교회에 보낸 두 차례 편지 전체를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데살로니가 전서와 후서를 자세히 살펴보면, 바울은 두 가지 이유에서 데살로니가 교인들에게 위로가 필요하다고 생각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첫째, 박해와 환난 때문입니다.

살후 1:4을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너희가 견디고 있는 모든 박해와 환난 중에서 너희 인내와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여러 교회에서 우리가 친히 자랑하노라”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인들이 극심한 박해와 환난을 겪고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저들이 그 모진 박해와 환난을 잘 견디며 믿음을 지켜오고 있음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바울은 정말 저들에게 하나님의 위로가 필요하다는 점을 뼈저리게 느끼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저들을 위로해 주십사 기도하게 된 것입니다.
행 17장을 보면, 바울이 복음을 전할 당시 데살로니가의 상황을 알 수 있습니다. 데살로니가에는 유대인들이 많이 살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곳에는 유대 회당이 있었습니다.

바울은 이 회당에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안식일 세 번이나 회당 예배에 참석해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런데 반응이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바울의 말씀을 듣고 기독교로 개종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다른 하나는 반대로 바울의 말씀을 듣고 격렬하게 박해를 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우선 예수를 믿기로 한 사람들을 중심으로 야손이라는 사람의 집에서 데살로니가 교회가 시작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격렬하게 박해하는 사람들 때문에 야손과 교인들이 고발을 당하여 곤욕을 치렀습니다. 그리고 바울은 더 이상 데살로니가에 머물러 있을 수가 없어서 베뢰아로 가야만 했습니다.

이 일 이후에도 유대인들의 박해는 계속되었습니다. 그래서 데살로니가 교인들은 끝없는 박해와 환난을 당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바울은 멀리 떠나있으면서 늘 데살로니가 교인들을 염려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늘 저들을 위해 중보기도를 하게 됐던 것입니다. 바로 저들에게 하나님의 위로가 있기를 기도했던 것입니다.

오늘도 박해와 환난 때문에 하나님의 위로가 필요한 사람들이 참 많습니다.

우선 박해 때문에 하나님의 위로가 필요한 사람들이 참 많습니다. 박해라는 말은 성경원어로는 ‘디오그모이스’(Diogmois)라는 말입니다. 이 말은 ‘쫓아가다’라는 말에서 유래했습니다. 그러니까 박해라는 말은 쫓아다니며 해를 가한다는 말입니다.

근자에 교회에 등록하신 분들 가운데 두 분이 생각이 납니다. 

한 분은 여자 분인데 시어머니가 몸져누우시게 되면서 교회에 나오셨습니다. 그 이유를 물었더니 대답이 이렇습니다. 처녀 때 교회를 열심히 다녔는데 결혼하고 보니 시어머니가 철저한 불교신자시더랍니다. 교회 다니는 것을 얼마나 반대를 하시던지 그야말로 주일마다 쫓아오셔서 교회 다니지 못하도록 박해를 하시더랍니다. 그러다 얼마 전에 시어머니께서 몸져누우시게 됐답니다. 이제 더 이상 박해하실 수 없는 상황이 되어서 교회에 나오게 되셨답니다.

다른 한 분도 여자 분이신데 이 분은 수요 사경회 때 등록을 하셨습니다. 알고 보니 남편이 하도 반대를 해서 주일에는 교회 나올 수가 없답니다. 그래서 할 수 없이 남편이 출근한 수요 오전 예배 때 교회에 나오게 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오늘도 예수 믿는 일이 쉽지 않은 분들이 많습니 다. 오늘도 박해를 무릎 쓰고 신앙생활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이런 분들에게 하나님의 위로가 필요합니다. 물론 하나님께서 이런 분들을 위로하십니다.

다음으로 환난 때문에 하나님의 위로가 필요한 사람들도 참 많습니다. 환난이라는 말은 성경원어로는 ‘들립세신’(Thlipsesin)이라는 말입니다. 이 말은 좁은 곳에 몰아넣어 옥죄임을 당하듯 고통을 당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니까 환난이란 여러 가지 이유로 고통을 당하는 것을 말합니다.

성경을 보면 환난을 당한 가장 대표적인 사람으로 욥을 꼽을 수 있습니다. 욥은 동방의 의인이라 불릴 정도로 하나님을 잘 믿어온 사람입니다. 그런데 갑자기 재난을 당해서 가진 재산을 다 잃었습니다. 마음의 고통이 어땠을까요? 그리고 자식 열을 한꺼번에 잃었습니다. 그 마음의 고통은 또 어땠을까요? 게다가 온 몸에 종기가 나서 몸이 만신창이가 됐습니다. 그 몸과 마음의 고통은 또 어땠을까요?

그렇습니다. 오늘도 예수 믿으면서 원치 않은 큰 고통을 겪는 분들이 많습니다. 때로는 질병 때문에 고통을 겪습니다. 때로는 먹고 살기조차 힘든 고통을 겪습니다. 때로는 깨지고 부서진 인간관계 때문에 고통을 겪습니다. 이런 분들에게 하나님의 위로가 필요합니다. 물론 하나님께서 이런 분들을 위로하십니다.

둘째, 슬픔 때문입니다.

데살로니가 교인들에게 하나님의 위로가 필요한 또 하나의 이유는 슬픔 때문입니다. 살전 4:13을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형제들아 자는 자들에 관하여는 너희가 알지 못함을 우리가 원하지 아니하노니 이는 소망 없는 다른 이와 같이 슬퍼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바울이 데살로니가 교회를 떠난 후 교인들 가운데 몇 사람이 세상을 떠났습니다. 당시 교인들의 믿음이 초보 수준이었기 때문에 큰 슬픔을 겪게 됐습니다. 저들은 주님께서 속히 재림하신다는 것은 믿었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재림하시기 전에 죽은 사람들은 믿지 않는 사람들처럼 끝이라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정말 큰 슬픔에 잠기게 됐습니다.

바울은 저들에게 무엇인가를 해 주려고 하기 전에 하나님께서 저들을 위로해 주십사고 기도했습니다. 그 슬픔 앞에서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인생에는 견디기 힘든 슬픔이 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었을 때 그 슬픔은 우리가 상상하기 힘든 고통이 됩니다. 

베스트셀러로 유명한 무라카미 하루키의 [상실의 시대]라는 책을 보면 이런 구절이 나옵니다. “이 세계에는 눈물조차도 흘릴 수 없는 슬픔이라는 것이 존재한다.” 때로는 눈물로도 닦아낼 수 없는 슬픔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슬픔을 겪는 분들에게 하나님의 위로가 필요합니다. 물론 하나님께서 이분들을 위로하십니다.

하나님의 위로

오늘 본문을 다시 주목해 보겠습니다. “하나님 우리 아버지께서 너희 마음을 위로하시고” 바울은 하나님께서 친히 데살로니가 교인들을 위로해 주시기를 기도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백성들을 어떻게 위로하실까요? 오늘 본문에서 바울은 어떻게 위로해 달라고 기도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방법으로 위로해 달라고 기도한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의 하나님의 위로의 방법을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첫째, 함께 하십니다.

단 3장을 보면, 다니엘의 세 친구가 풀무불에 던져진 이야기가 기록되어있습니다. 

느브갓네살 왕이 금으로 신상을 만들고 모든 백성들로 하여금 절하게 했습니다. 만일 절하지 않는 자들은 풀무불에 던져 넣겠다고 공언을 했습니다. 다니엘의 세 친구는 우상 앞에 절할 수 없었습니다. 당장 왕에게 보고되어 저들이 체포됐습니다. 왕이 다시 물었습니다. 이제라도 절하면 살려줄 터이나 그렇지 않으면 맹렬히 타는 풀무불 속에 던져 넣겠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저들은 단호하게 거절했습니다.

화가 난 왕이 평소보다 7배 뜨겁게 하여 다니엘의 세 친구를 그 풀무불 속에 던져 넣으라 명했습니다. 이제 저들이 풀무불에 던져졌습니다. 밖에서 지켜보고 있던 느브갓네살 왕이 깜짝 놀랐습니다. 풀무불 안에 네 사람이 있는 것입니다. 분명히 세 사람을 던져 넣었는데 그 안에는 네 사람이 있는 것입니다. 
25절에 왕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보니 결박되지 아니한 네 사람이 불 가운데로 다니는데 상하지도 아니하였고 그 넷째 모양은 신들의 아들과 같도다.” 

그렇습니다. 다니엘의 세 친구는 풀무불에 던져졌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풀무불 속에 저들을 홀로 버려두지 않으셨습니다. 그 풀무불 속에 저들과 함께 하셨습니다. 저들에게 얼마나 큰 위로가 되었을까요?

론 밀이라는 분이 쓴 ‘상한 마음의 치료’라는 책을 보면 자기 경험담을 기록해 놓았습니다.

한 번은 아들이 큰 고민에 빠져있었답니다. 그런데 자기는 그 무엇도 도와줄 수가 없더랍니다. 아들 스스로 해결해야 할 문제였기 때문입니다. 아들에게 “왜 그러냐? 어떻게 하기로 했냐?”라고 물으면 그 자체가 아들을 더 힘들게 하는 것이어서 물을 수도 없었답니다. 그래서 할 수 없이 아들이 잠들어 누워있는 침대에 누워있다 나왔답니다. 그러기를 여러 날 반복했답니다.

아들이 아버지가 곁에 누워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아버지가 자기가 힘들어하는 것 때문에 함께 힘들어 한다는 것도 알았습니다. 그리고 아들은 ‘나 혼자가 아니다. 내 마음을 이해해 주는 분이 계시다’라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자리를 털고 일어나 새로운 시도를 하더랍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위로는 우선 하나님께서 우리의 고난의 자리, 우리의 슬픔의 자리에 함께 하시면서 시작됩니다. 그저 말없이 우리의 고난의 현장, 슬픔의 현장을 찾아오십니다. 함께 하시며 그 자리를 지키십니다.
그래서 우리로 하여금 나 혼자가 아니다 라는 사실을 깨닫게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내 고난을 아시고 내 슬픔을 아신다는 것을 깨닫게 하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의 고난의 현장을 둘러보십시오. 여러분의 슬픔의 현장을 둘러보십시오. 거기에 주님이 계십니다. 다니엘의 세 친구가 풀무불 속에서 함께 하시는 주님을 발견한 것처럼 여러분도 함께 하시는 주님을 발견하십시오. 그 순간 여러분은 이 세상에서 경험할 수 없는 놀라운 하나님의 위로를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둘째, 못 자국 난 손을 내미십니다.

일전에 미국의 노 목사님의 설교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그 목사님의 성함과 직책에 대해서는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다만 지금도 그 내용 일부가 기억이 납니다.
이분이 갓난아이의 장례를 치른 일이 있었답니다. 장례 후에 아이의 부모는 장례 과정에서 예수를 만나게 됐고 믿음을 가지게 돼서 교회에 출석하게 됐답니다.

그런데 얼마 안 돼서 또 다른 어린 아이가 세상을 떠나게 돼서 장례를 정성껏 치렀답니다. 그리고 장례 후에 위로 차 들렀는데 별로 위로가 되지 않더랍니다.

그런데 장례 후에 예수를 믿게 됐던 부부가 이 가정을 방문했답니다. 그리고는 이렇게 말하더랍니다. “우리도 당신과 똑 같은 일을 겪었습니다. 저희는 깊은 암흑 속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저희를 찾아오셔서 말없이 손을 내미셨습니다. 저희는 그 손을 붙잡았습니다. 그 때 말로 다할 수 없는 큰 위로가 임했습니다. 이제 두 분도 주님의 손을 잡으십시오.”

이 목사님 말씀이 이 부부는 아마도 자기가 여러 날 여러 달 결려도 하기 힘든 일을 했다고 말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주님께서는 못 자국 난 손을 내미십니다. 그 손은 우리가 겪고 있는 고난을 이미 다 겪으신 손입니다. 그 손은 우리가 겪는 그 어떤 슬픔의 눈물도 다 닦을 수 있는 손입니다.
주님께서 오늘도 우리에게 그 손을 내미십니다. 이제 우리가 그 손을 잡아야 합니다. 우리가 그 손을 잡을 때 놀라운 하나님의 위로를 받을 수 있습니다. 주님 주시는 새 힘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다시 일어설 수 있습니다.

셋째, 이겨낼 힘을 주십니다.

행 9:31을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온 유대와 갈릴리와 사마리아 교회가 평안하여 든든히 서고 주를 경외함과 성령의 위로로 진행하여 수가 더 많아지니라” 초대교회 시절 교회가 아직 미약할 때 감당하기 힘든 박해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저들이 그 박해를 이겨내고 오히려 교회가 부흥할 수 있었습니다. 그 이유를 성령의 위로가 있었기 때문이었다는 것입니다. 성령께서 함께 하시면서 그 박해를 이겨낼 힘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 환난을 이겨낼 힘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 슬픔을 이겨낼 힘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저도 지금까지 목회하면서 몇 차례 제 힘으로 이겨낼 수 없는 큰 위기를 겪었습니다. 그저 온 몸에 힘이 빠지고 제 어깨를 짓누르는 무거운 짐을 벗을 길이 업었던 때가 있었습니다. 
그래도 정말 다행인 것은 기도할 힘은 남아있었습니다. 이를 악물고 기도의 자리로 나아갔습니다. 엎드려 하나님께 부르짖었습니다. 그런데 거짓말처럼 기도 자리에서 능력을 덧입을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 눈에는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다시 일어설 수 있었습니다.

바로 이것이 성령의 위로입니다. 성령께서 그 모든 어려움을 이겨낼 수 있는 힘을 주십니다. 우리가 기도 가운데 이런 성령의 능력을 덧입어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는 그 어떤 박해도 이겨낼 수 있습니다. 그 어떤 환난도 이겨낼 수 있습니다. 그 어떤 슬픔도 이겨낼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의 위로가 필요한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에는 여전히 박해가 있습니다. 신앙생활을 방해하는 박해가 있습니다. 신앙생활 도중 감당하기 힘든 환난들도 있습니다. 또한 우리가 견뎌내기 힘든 슬픔도 있습니다. 

그러나 감사한 것은 하나님의 위로가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위로를 바라보십시오. 그리고 하나님의 위로를 받으십시오. 그래서 박해와 환난과 슬픔을 이기시고 다시 일어서시기 바랍니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