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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거룩한 소동 (행 19:23-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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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룩한 소동 (행 19:23-41)     


들어가는 말

오늘 설교의 주제는 ‘복음으로 세상에서 거룩한 소동을 일으키자.’입니다.
8월 14일, 군부와 시위대의 유혈 충돌로 수많은 사상자가 발생한 이집트가 심상치 않습니다. 
복잡하고 어려운 상황에 대해 언론들은 편향적인 보도를 합니다. 
일례로, 한국의 중앙일간지들은 군부가 반정부 시위대들을 강경 진압하여 수천 명의 사상자를 냈고, 시민들을 대상으로 대학살을 저지르고 있다고 보도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BBC Arabic은 ‘대부분의 언론들이 현 정부인 군부를 비판하지만 실제 상황은 다르다.’고 보도했습니다. 
오히려 무슬림 형제단이 상황을 더욱 과격하게 몰아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저는 이번 이집트 사태를 ‘이슬람 근본주의’라는 종교적인 신념과 정치적 야욕이라는 집단 이기주의가 결합해서 빚어진 소란이라고 봅니다.

현지에서 온 선교사 보고입니다.

“이집트는 점점 내전 양상으로 변해가는 형국입니다. 처음에는 친 무르시와 반 무르시 진영의 힘겨루기이었던 모양새가 이제는 무슬림 형제단과 그를 지지하는 이슬람 근본주의 세력들과, 임시 정부를 지지하고 있는 온건 무슬림과 자유진영 간의 대립으로 변하였습니다. 오늘도 이집트 전국에서 일어난 시위로 최소 70명이 사망하였습니다. 사망자 숫자는 앞으로 더 늘어날 것으로 예상됩니다. 서방 언론은 이집트 임시정부를 맹렬히 비난하고 있습니다. 평화적인 시위대에게 발포하여 무고한 시민을 수백 명(3일전 시위에서만 600명 이상) 살해하였다는 것이 그 이유입니다. 그런데 이집트 내부에서 보고 느끼는 것은 좀 각도가 다릅니다. 물론 공권력을 가진 현 임시정부가 상황을 잘 다스리지 못한 부분에 대해서는 책임을 져야하겠지요. 그러나 무슬림 형제단과 이슬람 근본주의자들의 무자비한 선동과 폭력 또한 이 사태를 악화시킨 근본적인 원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들의 시위를 보면 사망자들에 대한 분노의 차원을 넘어 악랄하게 보복하겠다는 기세입니다. 그러한 모습은 무력진압을 하기 전부터 그랬고, 그것이 그들의 원래 모습입니다. 그래서 지난 3일 동안 이 나라의 수많은 관공서와 경찰서, 그리고 아무 상관도 없는 기독교인들의 집과 가게, 그리고 교회들이 불타고 상해를 입었습니다. 일반 시민들과 기독교인들은 무슬림 형제단과 이슬람 근본주의자들을 경험하여 알기 때문에, 무르시를 그토록 반대하며 궐기하였고, 그 결과 정권이 바뀌게 된 것입니다. 임시정부가 힘겨운 싸움을 하고 있습니다. 밖에서는 서방의 압력이 거세지고, 안에서는 이슬람주의자들의 연합전선이 악랄합니다.”

우리는 이집트 상황을 보며 경제적이든 정치적이든 집단 이기주의와 잘못된 종교적 신념이 결합했을 때 얼마나 큰 해악을 끼치는지 보게 됩니다.

본문을 보십시오. 

에베소 시에 소란이 일어났습니다.
행 19:29절 “온 시내가 요란하여 바울과 같이 다니는 마게도냐 사람 가이오와 아리스다고를 붙들어 일제히 연극장으로 달려 들어가는지라.”
누가 일으킨 소란입니까?
우상을 만들어 파는 장사꾼들과 그들에게 속한 노동자들의 소행이었습니다. 
에베소에는 고대 역사의 7대 불가사의 가운데 하나인 아데미 신전이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아데미 신전은 너비가 130미터, 길이가 68미터의 거대한 대리석 건물이었습니다.
이 신전은 델피의 아폴로 신전 다음으로 그 당시 세계에서 최고의 명성과 숭배를 받는 신전이었습니다.
아데미(라틴어로는 다이애나)는 달의 여신으로서 인간이나 동물의 생산을 주관하는 여신으로 여겨졌습니다.
그래서 아데미 여신은 12개의 유방을 가졌습니다.
또한 아데미는 에베소 시의 수호신이기도 했습니다.
(지금도 에베소에 성지 순례를 가면 가슴이 12개인 아데미 여신상을 시내 곳곳에서 볼 수 있습니다.)

에베소 사람들은 이 아데미를 위하여 5월 한 달을 축제의 달로 보냅니다.
오월의 여왕(May Queen)이란 말이 여기서 나왔습니다.
이때에는 세계 곳곳에서 많은 관광객들이 몰려와서 이 축제를 즐깁니다.
그래서 아데미 여신상을 넣어두는 작은 함을 은으로 만들어 관광객들에게 파는 장사가 짭짤하게 되었습니다.
이 사업을 하는 사람이 바로 데메드리오라는 말씀이지요.

그는 바울의 복음 전도가 결국 우상으로 먹고 사는 자기 사업을 망하게 할 것임을 예견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직공들과 아무것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을 선동해서 소란을 일으켰습니다. 
“........모인 무리가 분란하여 태반이나 어찌하여 모였는지 알지 못하더라.”(32절) 
34절에 보면 그 무리가 연극장에 모여 두 시간 동안이나 “크다. 에베소 사람의 아데미여!”라고 소리쳤습니다.
고고학자들의 발굴에 의하면 그 당시 에베소에는 25,000명을 수용할 수 있는 야외극장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러니 저들 폭도의 규모와 소동이 어느 정도였는지 알만하지 않습니까? 

우리는 본문에서도 경제적이든 정치적이든 집단 이기주의와 잘못된 종교적 신념이 결합했을 때 얼마나 큰 해악을 끼치는지 보게 됩니다.
본문에서는 데메드리오를 중심으로 한 경제적인 집단 이기주의와 잘못된 아데미 신앙이라는 종교적인 신념이 결합하여 소동을 일으켰습니다.
다행히 서기장이 무리를 잘 설득하여 큰 불상사는 없었지만, 바울 일행이 순교를 당할 뻔한 상황이었습니다.

일본이 정치적인 집단 이기주의와 천황 숭배라는 잘못된 종교적인 신념이 결합하여 태평양 전쟁을 일으켜 얼마나 많은 사람들에게 고통을 주었습니까? 
독일이 정치적 집단이기주의와 게르만 민족주의라는 잘못된 정치적 신념이 고착되어 세계대전을 일으켜 얼마나 많은 고통을 인류에게 주었습니까?
집단이기주의와 잘못된 종교적인 신념의 결합은 국가 또는 민족 단위에서만 나타나는 현상이 아닙니다.
작은 공동체어서도, 작은 조직에서도 그런 현상이 나타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더딘 것 같지만 답답한 것 같지만 합리성과 과정을 중요시하는 태도가 더 바람직합니다. 
‘완장’차고 설치는 사회보다는 ‘투표’하는 사회가 훨씬 더 좋은 사회입니다.
우리는 에베소 우상숭배자들의 소용돌이를 통해서 참 신과 우상을 구별할 수 있습니다.

첫째, 우상은 사람이 만들고, 하나님은 사람을 만듭니다.
26절, “이 바울이 에베소뿐 아니라 거의 전 아시아를 통하여 수많은 사람을 권유하여 말하되 사람의 손으로 만든 것들은 신이 아니라 하니 이는 그대들도 보고 들은 것이라.”

“사람의 손으로 만든 것들은”이라는 구절이 있습니다.
세상에는 사람이 자기들의 손으로 만든 신이 있고, 반면 그 사람을 만드신 신이 있습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인간에 의하여 만들어진 신이 아니라 친히 사람의 호흡과 생명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입니다.

생각해보십시오.
사람의 손으로 나무를 다듬고, 돌을 쪼아서, 주물을 부어 만든 우상들이 무엇을 할 수 있겠습니까?
사람의 손에 의하여 다듬어지고 색칠이 입혀진 우상들 앞에 엎드려 절하는 것은 무슨 믿음입니까? 
아이가 도화지에 도깨비 그림을 그려놓고 그것을 보고 무섭다고 벌벌 떤다면 어른은 그 아이에게 뭐라고 말하겠습니까?
“이 바보야!”하지 않겠어요? 
신이 인간의 손에 의하여 만들어진다면 그것을 섬겨야 할 이유가 어디 있습니까? 
이사야 선지자의 공격을 들어보십시오. 

사 44:15-18절을 읽습니다.
“이 나무는 사람이 땔감을 삼는 것이거늘 그가 그것을 가지고 자기 몸을 덥게도 하고 불을 피워 떡을 굽기도 하고 신상을 만들어 경배하며 우상을 만들고 그 앞에 엎드리기도 하는 구나. 그중의 절반은 불에 사르고 그 절반으로는 고기를 구워 먹고 배불리며 또 몸을 덥게 하여 이르기를 아하 따뜻하다 내가 불을 보았구나 하면서 그 나머지로 신상 곧 자기의 우상을 만들고 그 앞에 엎드려 경배하며 그것에게 기도하여 이르기를 너는 나의 신이니 나를 구원하라 하는도다. 그들이 알지도 못하고 깨닫지도 못함은 그들의 눈이 가려서 보지 못하며 그들의 마음이 어두워져서 깨닫지 못함이니라.”

성경은 우상숭배자의 죄를 갚는다고 했습니다.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 또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에 있는 것이나 땅 아래 물속에 있는 것의 어떤 형상도 만들지 말며 그것들에게 절하지 말며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 나 네 하나님 여호와는 질투하는 하나님인즉 나를 미워하는 자의 죄를 갚되 아버지로부터 아들에게로 삼사 대까지 이르게 하거니와.”(출20:4-5)

자식들에게까지 불행을 유산으로 남기지 않으려면 우상숭배를 해서는 안 됩니다.
기독교인의 30%가 점을 친다는 보고가 있습니다.
잘못된 보고이겠지요?
성도들은 장난으로라도 점을 쳐서는 안 됩니다.
성도들은 심심해서라도 ‘오늘의 운세’를 보아서는 안 됩니다.
성도들은 재미로라도 토정비결을 봐서는 안 됩니다.
성도들은 1%라도 하나님 외에 마음을 빼앗겨서는 안 됩니다.
그것은 가문에 불행을 안겨주는 일입니다.

두 번째는, 우상은 인간의 도움을 받고, 하나님은 인간을 돕습니다.

행 19:27절을 보십시오.
“우리의 이 영업만 천하여질 위험이 있을 뿐 아니라 큰 여신 아데미의 신전도 무시당하게 되고 온 아시아와 천하가 위하는 그의 위엄도 떨어질까 하노라 하더라.”
그들 에베소의 우상숭배자들은 아데미의 신전이 무시당하게 되고, 아데미의 위엄이 떨어질까 봐 걱정을 합니다.

참 우습지요?
아데미가 참으로 살아있는 신이라면 그는 스스로 자기 영광과 위엄을 지킬 것입니다.
스스로 자기를 경홀히 여기는 자를 심판할 것입니다.
삿 6장에 보면 사사 기드온이 하나님의 부름을 받고, 먼저 바알의 제단을 부숩니다.
그랬더니 사람들이 들고 일어나서 바알의 제단을 부순 기드온을 죽여야 한다고 떠들었습니다.

그 때 기드온의 아버지 요아스가 한 말이 무엇입니까?
“........너희가 바알을 위하여 다투느냐 너희가 바알을 구원하겠느냐 그를 위하여 다투는 자는 아침까지 죽임을 당하리라 바알이 과연 신일진재 그의 제단을 파괴하였은즉 그가 자신을 위해 다툴 것이니라 하니라.””(삿6:31)

생각해보십시오.
그 신이 참 신이라면 스스로 심판할 것이고, 저주할 것이고, 형벌을 내릴 것입니다.
사람이 나설 이유가 없어요. 

여러분, 점치거나 굿할 때 가만히 보세요.
조상귀신이 “제사를 제대로 안 지내 줘서 배가 고파 죽겠다.”고 합니다.
객귀가 되어 산사람이 던져 주는 찬밥이나 얻어먹어야만 허기진 배를 채울 수 있는 귀신들을 우리가 섬겨야 합니까?
그러다가 밥 한 그릇 제대로 안 준다고 삐쳐서 후손들에게 벌이나 내리는 (물론 내릴 수도 없지만, ‘우상은 앙화를 내리지 못한다.’고 성경이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 신들을 우리가 섬겨야 하겠습니까?

역대상 29:11-12절에서 다윗은 이렇게 하나님을 고백했습니다.

함께 읽어 봅시다.
“여호와여 위대하심과 권능과 영광과 승리와 위엄이 다 주께 속하였사오니 천지에 있는 것이 다 주의 것이로소이다. 여호와여 주권도 주께 속하였사오니 주는 높으사 만물의 머리이심이니이다. 부와 귀가 주께로 말미암고 또 주는 만물의 주재가 되사 손에 권세와 능력이 있사오니 모든 사람을 크게 하심과 강하게 하심이 주의 손에 있나이다.”

저는 이 사실을 믿습니다.
여러분도 위대하심과 영광과 승리와 위엄이 주께 속하였음을 믿으시길 바랍니다.
부와 귀가 주께로 말미암고, 모든 자를 크게 하심과 강하게 하심이 주의 손에 있음을 믿으시길 바랍니다.
하나님만이 우리의 도움이십니다.

(찬송가 618장-나주님을 사랑합니다.) 

셋째로, 우상숭배자들은 자기 욕심을 위하여 우상을 이용하고, 그리스도인의 궁극적인 목적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오늘 에베소 사람들이 이렇게 흥분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자기의 이익에 문제가 생기기 때문입니까 아니면 아데미 여신의 영광이 가려지기 때문입니까?

행 19:25절을 보십시오.
“그가 그 직공들과 그러한 영업하는 자들을 모아 이르되 여러분도 알거니와 우리의 풍족한 생활이 이 생업에 있는데”

그렇습니다.
자기들의 풍족한 생활이 흔들릴까 봐 이 난리를 치는 것입니다.
그것이 우상을 섬기는 자들의 본심입니다.
우상 숭배자들은 찬송가 323장과 같은 찬송은 죽었다가 깨어나도 못 부릅니다.
“존귀영광 모든 권세 주님 홀로 받으소서. 멸시 천대 십자가는 제가 지고 가오리다.
이름 없이 빛도 없이 감사하며 섬기리다. 이름 없이 빛도 없이 감사하며 섬기리다.”
어떻게 이런 찬송을 부를 수 있겠어요?

우리가 하나님을 믿지만 찬송가 323장을 저주받은 찬송가로 여긴다면 우상숭배자들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자, 오늘 우리가 중요한 것 하나를 배워야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 기독교는 복과는 상관이 없습니까?
때때로 좀 배웠다는 사람들이 ‘기독교가 기복적이 되어간다’고 비판하는데 기독교는 기복적이 아닙니까?
‘기복’이란 말은 ‘복을 빌다’는 말인데, 기독교는 복을 빌지 않나요?
만일 저에게 누군가가 질문한다면, 저는 ‘기독교는 기복적인 종교’라고 대답할 것입니다.

여러분, 기독교가 기복적이 아니라면 신명기 28장을 어떻게 해석해야 합니까?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청종하면 이 모든 복이 네게 임하며 네게 이르리니 성읍에서도 복을 받고 들에서도 복을 받을 것이며 네 몸의 자녀와 네 토지의 소산과 네 짐승의 새끼와 소와 양의 새끼가 복을 받을 것이며 네 광주리와 떡 반죽 그릇이 복을 받을 것이며 네가 들어와도 복을 받고 나가도 복을 받을 것이니라.”(신29:2-6) 

자, 신명기 28장은 구약성경이어서 그렇다고 칩시다.

마 6:31-33절의 말씀은 주님이 직접 하신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이 말씀은 먹을 것, 마실 것, 입을 것을 준다는 얘기입니까 아니면 주지 않는다는 얘기입니까?
준다는 얘기이지요!
기독교는 기복적입니다.
우리는 물론이거니와 많은 신앙의 선배들이 하나님으로부터 얼마나 많은 복을 받았는지 모릅니다.
목적을 분명히 하십시오.
신앙생활의 우선순위를 분명히 하십시오.

이제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에베소에 소란이 일어났습니다.
엄밀하게 보면 거기에는 두 가지 소란이 일어난 것입니다.
하나는 우상숭배자 데메드리오가 자기 이익이 줄어드는 것을 염려하여 일으킨 소란입니다.
다른 하나는 바울 사도가 복음으로 일으킨 거룩한 소란입니다.
복음의 누룩이 들어가면 온 성이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소란이 일어나게 되어 있습니다.
복음의 누룩이 들어가면 온 가족이 부글부글 끓어오른 소란이 일어나게 되어있습니다.
복음이 누룩이 들어가면 온 직장이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소란이 일어나게 되어있습니다.
사실 그리스도인들은 복음으로 세상을 제대로, 거룩하게 어지럽히는 사람입니다. 
이런 역사가 일어나길 축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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