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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Coram Deo(코람데오 : 하나님 앞에서) 신앙 (행 4:13-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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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ram Deo(코람데오 : 하나님 앞에서) 신앙 (행 4:13-22)

『Coram Deo 신앙』!그것이 무엇인가요? 『Coram Deo』란 말은 라틴어로 Coram은 '∼의 면전에, ∼의 앞에, 공개적으로'란 뜻입니다. Deo는 '하나님'을 말합니다. 즉 『Coram Deo』란 '하나님의 면전에서'라는 뜻입니다. 우리는 보통 '하나님 앞에서'라고 말합니다. (19절)

본문 말씀을 이해하려면 3장부터 보아야 합니다. 3:1절 이하에 보면 성전 미문에서 구걸하는 하반신 마비 장애인을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걷게 하는 기적이 있었습니다.

3장 11절부터 보면 베드로가 솔로몬 행각에서 설교를 합니다. 4장 4절에 보면 말씀을 들은 사람 중에 남자만 약 5천 명이 회개하고 주님께 돌아왔습니다. 그러다보니 제자들에 대한 박해가 일어났습니다.

13절 : 우리나라는 종교의 자유가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에 대하여 보고 들은 것을 말하는 것이 아무 것도 아니지만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그 당시에는 예수님에 대하여 보고 들은 것을 말하는 것은 죽고 사는 문제요, 목숨을 거는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 20절에 보면 베드로와 요한은 “우리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않을 수 없다”고 담대히 말합니다. 이 말은 이들이 죽으면 죽으리라하고 목숨을 걸고 하는 말입니다. 원래 이들이 이렇게 담대히 말할 수 있는 용기있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세 번씩이나 부인하고 아예 예수님을 버리고 갈릴리 바닷가로 고기잡이를 떠나 버린 사람입니다. 예수님께서 잡히시던 날 베드로가 예수님을 부인할 때 베드로는 대제사장이나 공회원들, 로마군인들 앞에서 예수님을 부인한 것이 아닙니다. 옆에 같이 구경하던 힘없는 하인들, 어린 여자 아이 앞에서 예수님을 부인한 것입니다. 

요한도 담대하고 용기있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을 끝까지 따르기는 했지만 예수님께서 잡히시던 날 밤에는 병사들이 요한을 잡으려고 하니까 웃옷까지 벗고 도망간 사람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고 골고다 언덕길을 오르실 때는 요한은 무서워서 멀찍이서 예수님을 따라갔던 나약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이들은 “우리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않을 수 없다”고 담대히 말하고 있습니다. 이들이 이 말을 할 때의 상황은 그 때와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더 위험하고 살벌한 상황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못박혀 죽으신 후 예루살렘의 상황은 살벌했습니다. 어느 누구도 예수믿는 사람이라고 함부로 말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믿는 사람들은 다 잡아 가두고 죽이는 때였습니다. 

또한 본문의 상황은 그 당시의 최고의 권세를 가진 공회원들이 “너희들 다시는 예수 이름을 들먹거리고 예수에 대하여서 가르치고 전하면 가만 두지 않겠다"고 위협하고 있는 살벌한 상황입니다(17-18절). 

그런데 베드로와 요한은 담대하게 용기있게 19절 '하나님 앞에서', 20절 "우리가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않을 수 없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이들이 이렇게 용기있고 담대한 사람으로 변할 수 있었습니까? 베드로와 요한이 이렇게 담대하고 용기있는 사람들로, 예수님을 위하여 목숨을 걸고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로 바뀌게 된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습니다. 

1. 어떻게 베드로와 요한이 이렇게 변화될 수 있었습니까? 

(1) 전능하신 예수님께 붙들렸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전능하신 예수님께 붙들려서 쓰임받기만 하면 우리는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능력자가 됩니다. 전능하신 하나님께 붙들리기만 하면 마른 막대기도 능력의 지팡이로 변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예수믿는 우리들에게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마가복음 9:23)”고 하셨고,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빌립보서 4:13절)”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들은 아주 나약한 자들이었습니다. 주님께서 잡히시고 십자가에 달리실 때 다 도망쳤던 자들입니다. 부활하신 주님의 큰 능력을 체험하고도 주님을 떠나갔던 자들입니다. 옛날 물고기 잡던 본래 직업으로 돌아갔던 자들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약하고 부족한 이들을 버리지 않으시고 다시 찾아오셔서 부르셨습니다. 그리고 책망대신 "와서 조반을 먹으라"(요한 21:12)고 하셨습니다. 

이때부터 이들은 예수님께 완전히 붙잡힌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여러분도 여러분을 사랑하시고 다시 찾아주시고 다시 불러 주시는 주님 앞에 온전히 붙잡힐 때 자기 능력의 한계를 뛰어 넘는 능력있는 인생으로 변화됩니다. 우리가 현재 아무리 약하고 부족하여 자신이 없는 인생을 살고 있다고 하여도 그것에 매여 인생을 포기하지 말고, 주님께 온전히 붙들려 능력의 한계를 뛰어넘는 능력있는 사람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2) 부활의 주님을 만났기 때문입니다. 

부활의 주님을 만난 후 부활의 증인된 베드로와 요한은 예수님과 함께 했던 때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체험하고 배우고 깨닫게 되었습니다. 이들은 부활의 주님을 만난 후 담대하고 용기있는 사도들로 변했고 초대교회의 초석을 놓은 일등 공신으로 변했습니다. 부활의 증거를 가진 사람들의 특징은 보고 들은 것을 있는 그대로 담대하게 말합니다. 

그래서 이들은 오늘 본문 20절에서 보듯이 자신들을 잡아 죽이려는 살벌한 공회원들 앞에서도 담대히 “우리가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않을 수 없다”고 말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이런 부활의 주님을 만나야 합니다. 오늘도 내일도 모레도 날마다 그리고 영원히 살아계셔서 역사하시는 부활의 주님을 만나야 그 신앙이 죽은 신앙이 아닌 살아있는 신앙이 됩니다. 그래야 강하고 담대하게 능력있게 일할 수 있게 됩니다. 

(3) 성령의 충만함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 8절 말씀 보면, “이에 베드로가 성령이 충만하여 가로되”하였습니다. 이들 베드로와 요한은 오순절날 마가의 다락방에서 성령의 불같은 역사로 성령세례를 받고 성령의 충만함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이들은 겁쟁이에서 용기있는 사람으로, 소심한 사람에서 담대한 사람으로 변화되었습니다. 이제 이들은 육적인 사람이 아니라 성령이 충만한 성령의 사람들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도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의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나라의 일들은 성령충만하지 않고는 할 수 없습니다. 성령님은 약한 자를 강하게 하고, 비겁한 자를 용기있게 하고, 도망자가 담대히 나가 증거하는 자가 되게 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구할 것은 바로 성령의 충만함입니다. 

예전의 베드로와 요한이 아닙니다. 용기가 있습니다. 성령이 충만합니다. 이들이 위협합니다. “더 이상 예수를 전하지 말라. 예수에 대하여 가르치지 말라. 만약 이 명령을 거역하면 사형에 처하겠다.”고 위협합니다. 그러나 베드로와 요한은 성령이 충만하여 담대히 말합니다. 

본문 19절을 봅니다. “하나님 앞에서” 이 말을 ‘코람 데오’라고 합니다. 성령이 충만한 사람은 자신이 항상 하나님 앞에 서있다는 것을 압니다.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하신다는 믿음이 있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 앞에서 두려울 것이 없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사람의 말 듣는 것이 옳습니까? 하나님 말씀을 듣는 것이 옳습니까? 당연히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이 옳습니다. 

마르틴 루터가 종교개혁을 할 때 보름스라고 하는 의회 앞에서 재판을 받았습니다. 이곳 역시 생사여탈권을 가지고 있는 곳입니다. 이곳에서 마르틴 루터는 하늘을 쳐다보며 담대히 말했습니다. 
“Oh, God. Here I stand.” “하나님! 제가 지금 하나님앞에 서 있습니다.” 

사람 앞에 서있는 게 아니라는 말입니다. 스데반 집사도 순교당할 때 하늘을 우러러 바라보았습니다. 거기 보좌에 예수님께서 서 계신 것을 보았습니다. 그때 스데반 집사는 자신이 예수님 앞에 서있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담대할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 앞에서는 죽음도 두렵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십자가상에서 자신을 죽이는 원수까지 용서하신 것처럼 스데반 집사도 자신을 돌로 쳐죽이는 그들을 용서할 수 있었습니다. 

로마에 가면 원형경기장이 있는데 이곳에서 그 옛날 우리 기독교인들이 거기서 수십만 죽어갔습니다. 거기서 순교한 순교자들의 기록 중에 이러한 기록이 남아 있다고 합니다. 

“나를 저주하십시오. 당신들이 나를 저주하면 할수록 나는 당신들을 더 사랑하게 될 것입니다. 
내게 침을 뱉으십시오. 나는 당신들에게 사랑의 숨결을 불어낼 것입니다. 
나를 찌르십시오. 나는 당신들에게 당신들을 사랑한다고 말할 것입니다. 
나를 짐승의 먹이로 던져버리십시오. 나는 당신들을 위한 사랑의 제물이 될 것입니다. 
나를 불태워 주십시오. 나는 사랑의 열기로 증오로 가득한 당신들의 마음을 녹일 것입니다.” 

이렇게 그들은 자기들을 죽이는 원수들 앞에서 말하면서 죽어갈 수가 있었습니다. 

이렇게 우리도 성령이 충만하면 가능합니다. 베드로와 요한처럼, 마르틴 루터처럼, 스데반 집사처럼, 원형경기장에서 죽어간 수많은 초대교회 그리스도인들처럼 담대해질 수 있습니다. 우리는 무슨 일을 하든지 하나님 앞에서 합니다. 우리는 무슨 말을 하든지 하나님 앞에서 합니다. 이 ‘코람 데오’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심을 느낄 때 우리는 담대해질 수 있습니다. 원수까지도 사랑할 수 있습니다. 이런 사람이 바로 성령이 충만한 사람입니다. 이렇게 성령이 충만하면 근심, 걱정, 두려움, 다 사라집니다. 담대함과 용기가 생겨납니다. 

우리 성도들은 『Coram Deo 신앙』으로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입은 '사명자'는 철저한 신전 인격으로, 『Coram Deo 신앙』으로 그 인격이 갖추어져 있어야 합니다. 

이 『Coram Deo 신앙』이 없을 때 사람을 바라보게 되고, 사람을 두려워하게 되고, 『사람 앞에서』사는 자가 되고 맙니다. 할말을 못하는 자가 되고 맙니다. '아니오' 해야 할 때에 '아니오' 하고 '예'할 것은 '예' 해야 합니다.

본문의 베드로와 요한을 보세요. '우리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아니할 수 없다'고 외치고 있습니다.(20절) 대제사장들과 장로들과 서기관들이 모인 산헤드린 공회에서 기탄없이 외칩니다. '그들의 위협' 앞에 있는 것 아니라 '하나님 앞에'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Coram Deo 신앙』입니다. 

재판장의 자리 앉은 대제사장 안나스와 가야바, 그들이 누구입니까? 그들은 바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아 죽게 한 자들입니다(요 18:12-24). 그러나 그들 앞에서, 그들의 위협에도 불구하고 기탄없이 자기의 할 말을 다 하는 베드로와 요한입니다. 


2. 하나님 주권 사상(主權思想) 

시편 16:2절에 "내가 여호와께 아뢰되 주는 나의 주시오니 주 밖에는 나의 복이 없다 하였나이다"고 했습니다. 

주권이란 '주된 권리'란 말로 쉽게 말하면 '주인 된 권리'입니다. 『하나님 주권 사상』이란 바로 하나님이 나의 주인이 되신다는 신앙 고백입니다. 

하나님이 나의 주인이 되신다는 것은 하나님은 나의 창조주요, 나는 그의 피조물로 그의 소유라는 얘깁니다. 곧 하나님은 내 주인이요, 나는 그 주인의 소유인 종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주 밖에는 나의 복이 없다』는 것입니다. 종은 자신의 것이 없습니다. 자신의 소유도, 자신의 권리도, 자신의 소망도, 자신의 계획도, 자신의 생각도, 자신의 삶도 없습니다. 

그뿐인가.... 자신의 영광도, 자신의 기쁨도, 자신의 즐거움도 없습니다. 다만 주인의 영광에, 주인의 즐거움에 참예할 뿐입니다(마 25:21). 

이처럼 하나님을 나의 창조주로, 나의 소유주로, 나의 주인으로 알고, 그 앞에서『Coram Deo 신앙』으로 종으로서 섬기며 살아가는 신앙 자세가 바로 『하나님 주권 사상』입니다. 

이러한 『하나님 주권 사상』은 하나님에 대한 절대적 신앙입니다. 결코 둘이 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도 말씀하시기를 『주 곧 우리 하나님은 유일한 주시라』고 했습니다(막 12:29). 

『Coram Deo 신앙』으로 『하나님 주권 사상』을 가지고 살기에 "주의 뜻이면 우리가 살기도 하고 이것저것을 하리라"고 고백합니다(약 4:15).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라"고 고백합니다(롬 14:8).


3.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고전 10:31절에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 했습니다. 

우리 인간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살아야 한다는 것은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신 창조 목적입니다.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또 영원토록 그를 즐거워하도록 창조되어졌습니다. 

우리 성도가 창조 목적을 수행하며 살아갈 때 하나님이 영광 받으시고 즐거워하십니다. 우리 성도 또한 그 하나님의 즐거움에 함께 참예하게 되는 것입니다.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사나 죽으나 우리의 존재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있고, 그것이 곧 '창조 목적'입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 '존재의 이유'입니다. 

본문의 베드로와 요한도 자신의 평안과 안일을 원했다면 그들의 위협에 굴복하던가 아니면 타협을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창조 목적'을 버릴 수 없고, 더욱이 일꾼으로 부르심을 받은 그 사명을 저버릴 수 없었습니다. "우리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아니할 수 없노라"고 소리 높여 기탄없이 외칩니다. 이것이 'Coram Deo 신앙'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살아가는 앞서 간 증인들, 선배들의 모습입니다. 

이렇게 『Coram Deo 신앙』으로 『하나님의 능력을 힘입어』 살아갈 때 세상이 저들을 감당하지 못합니다. 채찍으로 쳐도, 돌로 쳐도, 톱으로 켜도, 칼로 죽여도, 짐승의 가죽을 입혀도, 굶기고 매질을 해도 굴복시킬 수 없었습니다. 승리는 항상 이렇게 『Coram Deo 정신』으로 『하나님의 능력을 힘입어』 살아가는 자들에게 주어졌습니다. 모두가 하나님 앞에 선 신앙인으로 승리하심 바랍니다.

코람 데오 신앙으로, 오직 하나님 앞에서 교회를 섬기시고
코람 데오 신앙으로, 오직 하나님 앞에서 사회에 봉사하시고
코람 데오 신앙으로, 오직 하나님 앞에서 이웃을 사랑하고
코람 데오 신앙으로, 오직 하나님 앞에서 사람을 대하고
코람 데오 신앙으로, 오직 하나님 앞에서 신앙을 지켜
아름다운 흔적을 남기시는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

상급 또한 우리 하나님께서 허락해 주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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