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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무화과나무 옷과 가죽 옷 (창 3:7-1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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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화과나무 옷과 가죽 옷 (창 3:7-10,21) 
  
예수님은 (요5:39)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연구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언하는 것이니라.”고 말씀했다. 바울은 (골2:2下) “…하나님의 비밀인 그리스도를 깨닫게 하려 함이니.”라고 했다. 이처럼 성경의 주제도, 주인공도, 예수 그리스도다. 

성경을 한 마디로, 예수 그리스도를 나타내는 책이다. 구약성경은 오실 예수님에 대해, 신약성경은 오신 예수님과, 다시 오실 예수님에 대해 증언한다. 창세기-요한계시록까지,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벌겋게 물들어 있는 책이다. 구약을 짜면, 짐승의 피가 나온다. 신약을 짜면, 예수님의 피가 흐른다. 

마르틴 루터는 “만일 하나님이 나에게, 설교를 한 번하고 죽으라면, 나는 피 설교를 하고 죽겠다. 두 번 설교하고 죽으라면, 피 설교와 재림설교를 하고 죽겠다. 세 번 설교하고 죽으라면, 피 설교와 재림설교, 그리고 선교설교를 하고 죽겠다. 성경을 짜 보아라. 피가 나올 것이다.”라고 했다. 

성경은 피의 책이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목적은, 인간구원이다. 그런데 인간을 구원하는 방법은 십자가의 죽음이다. 따라서 예수님의 피가, 우리를 구원하는, 비밀을 살펴보자. 하나님은 아름다운 에덴동산을 만들고, 아담과 하와를 창조했다. 그리고 에덴동산을 지키며, 다스리며 살도록 축복했다. 

그러나 마귀는 아담과 하와에게, 하나님이 금한,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따먹도록 유혹했다. 인류 최초의 범죄는, 아담의 죄다. 하나님의 명령을 어긴 죄다. 아담이 범죄 했을 때,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ה󰗏󰗃אַ)”고 부르셨다. 이때 죄를 범한 아담은 숨었다. 그런데 숨은 이유가 이상하다. 

명령을 어겼다면, 말씀을 듣지 않았기에, 하나님을 뵐 면목이 없어, 두려워 숨는 것이 보통인데, (10下)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했다. 명령을 어겨서, 벌 받을 것이 두려워서가 아니라, 벌거벗은 몸이 부끄러워, 두려워서 숨었다고 했다. 알몸인 줄 알고, 수치심을 느꼈다. 

여기서 벗었다는 말은 에롬(ם󰙡י󰘠)인데, 아람(ם󰙜󰘝, 벌거벗다, 교활하다, 간교하다)라는 말에서 왔다. ‘교활하고, 간교한 모습을 깨달았다’는 말이다. 그래서 즉각적인 행동을 취했다. 바로 그 나뭇잎으로, 그들의 옷의 일부분인 치마를 만들어 허리 부분을 둘렀다. 

1. 아담은 자신의 범죄가, 하나님께 드러났음을 깨달았다(7). 

“이에 그들의 눈이 밝아져, 자기들이 벗은 줄을 알고,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치마로 삼았더라.” 뱀의 말을 듣고 선악과를 따먹었더니, 정말 눈이 밝아졌다. 그들이 발가벗은, 부끄러운 모습을 깨달았다. 

벌거벗었기에, 악하다는 사실을 알았다. 마귀의 말대로, 정말 선과 악을 알게 되었다. 여기까지는 마귀의 말이 맞다. 마귀가 뭐라 했는가? (5)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게 된다.” 했다. 아담과 하와는, 선악을 알게 되었다. 무엇이 죄인지 알게 되었다. 

그러나 ‘하나님과 같이 된다.’는 말은 거짓이었다. (8) “그들이 그 날 바람이 불 때, 동산에 거니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아담과 그의 아내가 여호와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동산 나무 사이에 숨은지라.” 오히려 하나님 앞에서, 부끄러워 숨었다.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고, 죄를 범한 그들에게, 하나님의 영광이 떠났다. 그들에게 찾아온 최초의 감정은, 자신들의 간교한 모습인 부끄러움이었다. 그래서 무화과나무로 엮은, 치마를 만들어 입었다. 이것이 인류 최초의 옷이다. 

죄지은 인간들이 하나님 앞에 설 때는, 자신의 모든 것이, 다 드러나기에 부끄럽게 된다. 사람은 죄를 지으면, 부끄러움을 느끼게 되는데, 죄를 해결하는 방법이 각각 다르다. 마귀는 죄지은 인간이, 감추고 숨도록 만들지만, 하나님은 죄지은 인간들을 용서받고, 다시 하나님 앞에 서기를 원한다. 

아담과 하와는 부끄러움을 감추려고, 무화과나무 잎으로, 치마 옷을 만들어 입었다. 치마는 하고르(רוֹג󰖖)인데, ‘허리 띠, 허리 덮개’를 말한다. 자신을 온전히 감출 수 없는 옷이다. 사람들이 만들어낸 옷은, 한 부분만 가린다. 따라서 일리가 있지, 전체를 보는 진리는 아니다. 

하나님이 아담을 부르시자, 무화과나무 치마, 곧 허리띠와 같은 연약한 옷을 입었기에, 부끄러워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어버렸다. 이들이 만들어 입은 무화과나무 치마는, 너무 불완전한 옷이다. 성경학자 베이컨은, 에덴동산으로 추정되는 곳에서, 무화과나무 치마를 만들어 입어보았다. 

더운 열기가, 한 시간도 되지 않았는데, 말라비틀어졌다. 어느 곳에 조금만 닿아도, 찢어져 버렸다. 정말 불안하기 짝이 없는 옷이었다. 그래서 하루를 살려고 하면, 낮에만 10벌 이상 필요했다. 따라서 아담과 하와는, 옷을 만드는 수고만 더할 뿐이었다. 

무화과나무는 테에나(ה󰗺󰔞󰚢)라 하는데, 이 말은 아벤(ן󰕳אָ)이라는 말에서 나왔다. 아벤은 ‘헛됨, 거짓, 우상’이라고 한다. 자기 손으로 옷을 지어 입었지만, 하나님 앞에서는 소용이 없다. 헛된 노력이고, 실패로 끝난다, 우상이라는 뜻이다. 

무화과나무로 만든 옷이, 어디 하나님 앞에서 온전하겠는가? 미흡할 뿐이다. 하나님 앞에서 죄를 숨기려는 헛된 행동들이, 바로 종교, 도덕, 선행, 철학, 등등, 인간적인 모든 행동을 말한다. 그러나 이것으로는 죄를 감출 수 없다. 

왜냐하면 (히4:13) “지으신 것이 하나도, 그 앞에 나타나지 않음이 없고, 우리의 결산을 받으실 이의 눈앞에, 만물이 벌거벗은 것 같이 드러나느니라.”했다. 하나님의 불꽃같은 눈앞에서는, 미흡한 무화과나무 옷의 부끄러움이, 드러나 버리고 만다. 

(계3:17-18)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 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는도다. 내가 너를 권하노니, 내게서 불로 연단한 금을 사서 부요하게 하고 흰옷을 사서 입어,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하고,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보게 하라.” 

(시32:1) “허물의 사함을 받고, 자신의 죄가 가려진 자는 복이 있도다.”라고 하였다. 죄지은 인간은 하나님 앞에서 숨을 곳을 찾지만, 하나님을 떠나서, 세상 어디에나 숨을 곳이 없다. 속죄(ר󰘪󰗏)라는 말은, 죄를 덮어준다는 말이다. 벌거벗은 부끄러움을 감출 수 있어야 하는데, 어떻게 감출 수 있나? 

하나님의 은혜가 있어야만 한다. 은혜란 무엇인가? 하나님이 죄지은 사람의 죄를, 덮어주는 것이 은혜다. 선악과는 율법의 거울과 같다. 우리의 부끄러운 모습을 볼 수 있고, 죄를 깨닫게 해 준다. 그러나 죄를 용서할 수는 없다. 율법을 통해 죄를 깨달을 수 있지만, 죄를 가려줄 수는 없다. 

사람이 자기 죄를 종교와 교육을 통해, 선과 악을 깨달을 수 있다. 기독교도 세상 종교와 세상의 교육으로, 선악은 다 똑같이 구별할 수 있다. 율법이 있는 사람은, 율법으로 죄를 깨닫고, 율법이 없는 사람은, 양심으로 깨달을 수 있다. 그러나 자기의 부끄러운 죄가 발견되었을 때, 해결하지는 못한다. 

불교는 죄가 드러나면, 공양미 3백 석을 드리거나, 천 번 절하거나, 한 달간 좌선을 하고, 물고기를 방생하며, 선행과 고행을 강조함으로 죄를 덮으려 한다. 그러나 이것은 모두, 인간의 손으로 무화과나무 옷을 만들어 입는 행위이다. 

인류의 조상 아담도 자기 손으로, 무화과나무 옷을 해 입었지만, 하나님 앞에서 떳떳하게 설 수 없었다. 무화과나무 옷을 해 입고도, 하나님 앞에 두려워서 숨어 버렸다. 무화과나무 옷으로는 죄를 덮을 수 없기 때문이다. 율법과 선행으로도, 죄를 덮을 수 없다. 

선악과를 따먹고, 내가 벌거벗은 것을 본 이상, 내 손으로 나뭇잎 치마를 해서 가리워도, 하나님 앞에서는 온전히 가려지지 않는다. 하나님은 율법으로, 자신을 가리고 있는 아담을 먼저 부르셨다.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 아예카(ה󰗏󰗃אָ). 

이 음성은 책망의 음성이 아니다. 죄지은 인간을 사랑하시는, 자비하신 하나님의 음성이다. 연민의 정에서 우러나오는, 사랑이 넘치는 음성이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다. 솔직히 죄를 시인하면 된다. 그런데 회개하지 않으면, 하나님은 네가 어떻게 그럴 수 있느냐는, 안타까운 모습이 된다. 

이때는 히브리 모음만 변화시키면, 에이크(󰗗󰖹󰔞)가 된다. 그때는 ‘어떻게, 어찌하여’라는 의미이다. ‘내가 이렇게 너에게 기회를 주는데, 어떻게 그럴 수 있느냐?’는 음성이다. 인간의 배신을 한탄하는, 하나님의 말씀이 된다. 

죄는 이미 세상에 들어왔다. 참 보기 좋은 세상이 어찌하여 이 지경이 되었느냐고, 하나님은 한탄하신다. “사랑하는 사람아! 어찌하여 이렇게 불안하여 떨고 있느냐?”고 말씀하신다. 죄지은 인간은, 하나님 앞에서 숨을 곳을 찾는다. 그러나 하나님을 떠나서, 이 세상 어디에나 숨을 곳이 없다. 

하나님이 부르심은, 벌주기 위해서가 아니다. 다시 한 번 기회를 주기 위한 부르심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내게 찾아오실 때, 변명의 기회로 삼지 말고, 어떻게 내가 여기까지 떨어졌는지, 회개할 수 있는 기회로 만들어야 한다. 이 기회를 놓치지 말라. 육체가 있을 동안에는, 돌아올 수가 있다. 

그런데 아예카(ה󰗏󰗃אָ)를, 에이카(ה󰗇י󰔞)로 모음만 변화시키면, 또 다른 의미로 변화가 된다. 이 말은 ‘슬프다.’는 말이다. 구약성경에 예레미야 애가가 있다. ‘애가’(哀歌)는 히브리어로 ‘에이카’다. 예언자 예레미야는, 예루살렘의 멸망을 눈물로 지켜보며, 슬픔과 눈물로 쓴 시다. 

예레미야는 처참한 예루살렘의 모습을 보고, 에이카(슬프다!)라고 비탄의 노래를 불렀다. 그래서 예레미야 애가라고 한다. 즉, 하나님께서 아담을 찾으시는 소리는, 죄로 인하여 탄식하는 소리이다. 네가 떨면서 숨어있다니, 어째서 이렇게 되었느냐? 범죄한 인간은, 죽음의 병에 걸렸다는 말이다.‘ 

아담과 하와가 죄를 범한 후에, 하나님은 그들에게 형벌을 내린다. 하와에게는 잉태하는 고통을, 크게 더하리라고 하셨다(16). 아담에게는 평생에 수고를 하여야, 먹고살도록 만드셨다(17). 땅이 네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라(18)고 하셨다. 


2. 이 죽음에 이른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 하나님의 어떻게 하셨는가?(21)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과 그의 아내를 위하여, 가죽옷을 지어 입히시니라.” 가시와 엉겅퀴가 나는 땅에서, 무화과나무 치마 옷은, 아주 부적합한 옷이다. 자주 찢어지고, 상처가 나는 옷이다. 

하나님 말씀을 불순종하여, 불완전해진 사람은, 불완전한 옷을 만들 수밖에 없었다. 아담과 하와는 범죄 한 후, 부끄러워 견딜 수 없었다. 사람은 누구나, 범죄하고 나면 부끄럽다. 자꾸 가리고 싶고 숨기고 싶다. 그래서 범죄 한 인간들이, 얼굴을 가리지 않는가? 

이렇게 그들이 만든 무화과나무 치마를 입고, 큰 나무 뒤에 숨어 버렸다. 무화과나무 잎으로 만든 치마가 오죽하겠는가? 아이들 소꿉장난하는 풀로 만든 치마였다. 감추려던 것이 금방 오그라들면서, 모두 다 드러났다. 또 다시 만들어 입어 보아도, 잠시잠깐 뿐이었다. 

아담이 느낀 수치심, 죄책감이었다. 그들 자신의 노력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근본적인 문제였다. 불쌍한 이들을 내려다보신 하나님은, 불완전한, 아담의 무화과나무 옷을 벗기셨다. 동산에 있는 짐승 아마 양으로 생각된다. 어린양을 잡아서, 하나님이 친히 가죽옷을 만들어, 그들에게 입혀주셨다. 

어린양은 피를 흘리며 죽었다. 아담의 부끄러움을 가려주기 위해, 어린양이 희생되었다. 하나님이 지어주신 가죽옷을 입은 후에야, 죄는 가리어지고 해결된다. 가죽옷은 일생을 입어도, 헤어지지 않는다고 한다. 하나님이 가죽옷을 입혔더니, 수치도 가리고, 오래 입을 수 있었다. 마음도 편안해졌다. 

인간이 손으로 만든 치마 가지고는, 죄의 문제가 해결될 수가 없음을 뜻한다. 죄의 문제는 사람의 힘으로는 해결할 수 없다. 죄를 범한 인생을, 구원하는 방법은, 누군가 대신 속죄의 피를 흘려야만 한다. 이 말씀은 예수님의 모형이요 그림자다. 

하나님이 동물을 희생시키고, 피가 묻은 가죽을 손수 벗겨서, 아담과 하와에게 입혀주셨다. 무화과나무 옷으로는 안 되기에, 피를 흘린 가죽옷을 지어 입혔다. 옷은 케토네트(ת󰗾󰚘󰗖, 긴 옷)이다. 전체를 가릴 수 있다. 부분적인 일리가 아니다. 몸의 전체를 가릴 수 있는 옷이다. 전체를 가려줘야 진리다. 

하나님 앞에서 인간의 부끄러운 죄는, 오직 예수님의 피로만 가려질 수 있다. 바로 이 가죽옷은, 예수님의 피 흘림을 상징한다. (마26:28) “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고 말씀하셨다. 

우리 죄를 사하기 위해, 흘리신 피의 옷을 입어야 한다는 말이다. 그래서 (롬13:14)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으라.”고 하였다. (고후5:3) “이렇게 입음은, 우리가 벗은 자들로 발견되지 않으려 함이라.”고 하였다. 

예수님의 가죽옷을 입어야만, 하나님 앞에서 죄 많은, 벌거벗은 자로 드러나지 않는다는 말이다. (마22장)은 천국 잔치에서, 예복 입지 않은 사람은, 그 손발을 묶어 바깥 어두운데 던졌다.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게 되리라(12-13)고 하였다. 

무화과나무 옷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시는 믿음의 예복, 예수님께서 나를 위해 피를 흘려주심을 믿는, 피 흘림의 이 가죽옷을 입지 않은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 쫓겨났다. 이제 죄지은 모든 인생은, 우리를 위해 피 흘려주신 예수님으로, 옷을 입어야 한다. 

그래야 하나님 앞에 설 수가 있고, 하나님과의 관계가 다시 회복된다. 내가 만든 무화과나무 옷은 절대로 안 된다. (히10:19)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라고 하였다. 

예수님의 피를 힘입지 않고서는, 하나님 앞에 섰을 때, 감히 부끄러워서, 설 수조차 없다. 이처럼 아담 하와에게 은혜로 주신 가죽옷이, 예수님의 피로 만든 옷이었다. 이 피로 만든 옷이, 하나님의 은혜다.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의 죄를 가려주는 은혜이다. 

자기의 독생자를 이 땅에 보내시고, 십자가에서 인간의 죄를 가리기 위해 죽였다. 그러나 아담이 만들어 입은 무화과나무 옷은, 피 한 방울 묻지 않은 옷이다. (히9:22) “…피 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고 했다. 이처럼 피 옷을 입지 않은 사람에게는, 구원의 역사가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러므로 우리가 죄인 된 순간부터, 하나님은 사람에게 피 묻은 옷을 입히기 시작하셨다. 이 가죽옷은 우리 주님의 십자가 피의 모형이다. 선악과를 따먹은 죄로, 수많은 짐승이 피를 흘려야 했고, 드디어,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피를 흘려야만 하셨다. 

가죽옷은 하나님의 은혜를 상징한다. 인간이 죄에서 구원받음은, 나의 공로나 노력으로 되지 않고, 하나님이 주시는 가죽옷 선물로, 된다. (엡2:8)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말씀한다. 

가죽옷은 하나님께서 주셨기에 은혜다. 가죽옷을 입으려면, 피를 흘려야 한다. 가죽옷을 입으려면 죽어야 한다. 이렇게 예수님은 우리에게 값없이 주신 분이요, 우리를 위해 피 흘려주신 분이고, 대신 죽으신 주님이다. 


결론이다. 

지금도 무화과나무 치마를 만들어 입고 있다. 어떤 사람은 돈이라는 무화과나무 치마를 만들어 입었다. 어떤 사람은 명예라는, 무화과나무 치마를 만들어 입었다. 어떤 사람은 과학 기술로, 그런 무화과나무 옷을 만들어서, 부끄러움을 가려보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다. 

그러나 그것으로는, 부끄러움을 온전히 가릴 수 없다. 일부분만을 가릴 뿐이다. 하나님이 만들어 주신 가죽옷이 필요하다. 하나님이 우리 죄를 용서하기 위해, 예수님을 이 세상에 보내셨다. 죄인의 피는 효과가 없다. 죄 없는 인간의 피만 효력이 있다. 

우리 인간은 모두 죄인이기에, 피를 흘려도, 다른 사람의 죄를 용서할 수 없다. 그러나 하나님은, 죄가 없다. 그러나 육체가 없기에, 죽을 수 없기에, 육체의 모양을 하고, 이 땅에 오셔서, 우리 죄를 짊어지고 죽었다. 이것이 하나님의 비밀이요, 약속이다. 

하나님이 우리를 부를 때, 자신의 죄가 들어 났을 때, 변명하려고 하지 말고, 주님 앞에 솔직하게 고백하고 나가자. 죄지은 인간을 찾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서, 주님께 더욱 나아가는 자가. 그리고 주님의 보혈을 의지하고, 더욱 주님께 나아가는 성도들이 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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