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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맹인된 것이 누구의 죄인가? (요 9: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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맹인된 것이 누구의 죄인가? (요 9:1-7)

(요 9:1) 예수께서 길 가실 때에 날 때부터 소경된 사람을 보신지라
(요 9:2) 제자들이 물어 가로되 랍비여 이 사람이 소경으로 난 것이 뉘 죄로 인함이오니이까 자기오니이까 그 부모오니이까
(요 9:3)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이 사람이나 그 부모가 죄를 범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니라
(요 9:4) 때가 아직 낮이매 나를 보내신 이의 일을 우리가 하여야 하리라 밤이 오리니 그 때는 아무도 일할 수 없느니라
(요 9:5) 내가 세상에 있는 동안에는 세상의 빛이로라
(요 9:6) 이 말씀을 하시고 땅에 침을 뱉아 진흙을 이겨 그의 눈에 바르시고
(요 9:7) 이르시되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 하시니 (실로암은 번역하면 보냄을 받았다는 뜻이라) 이에 가서 씻고 밝은 눈으로 왔더라

미국의 모 대학 총장이 자기가 겪었던 간단한 에피소드입니다. 총장이 사는 모 지방 도시 번화가 옆에 조그마한 공터가 있는데 그곳에는 언제나 맹인 한 명이 까만 선글라스를 끼고 손에는 작은 컵 하나를 든 채 서서 구걸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하루는 이 총장이  그곳을 지나가다가 그 맹인이 구걸하는 것을 보고 호주머니에 있던 25센트 짜리 동전 하나를 끄집어내어 그 컵 속에다 넣어 주었습니다. 25센트 짜리 동전을 던져  넣고 몇 발자국을 지나왔는데 뭔가 낌새가 이상해서 자기도 모르게 뒤를 돌아봤더니 그 구걸하던 맹인이 검은 안경을 위로 치켜들고 컵에서 그 동전을 꺼내들고는 얼마 짜린가 하고 들여다보고 있더랍니다. 

그 모습이 하도 이상해서  그는 가던 걸음을 멈추고 되돌아 와 가지고 
"여보, 당신은 앞을 못 보는  사람이라고 알고 있는데 어떻게 그렇게 돈을 들여다보며 살피고  있소?"하고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 죄송합니다. 사실 저는 맹인이 아닙니다."
"아니, 맹인이 아니면서 왜 맹인인체 하고 구걸을 하고 있는 거요?" 
"예, 원래 여기에 서서 구걸하던 맹인이 제 친구인데요, 잠깐 없는 동안 제가 대신 서 주고 있는 겁니다." 
"그래, 당신의 맹인 친구는 어디에 간 거요?" 
"저 앞에 있는 영화관에 영화 구경하러 갔습니다." 

오늘 말씀은 날 때부터 맹인 된 사람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이 사람은 태어나면서부터 빛을 전혀 볼 수 없었던 사람이니 얼마나 갑갑하였을까요? 참 불쌍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아무도 그를 불쌍하게 여기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제자들도 그가 듣고 있는데서 아주 심한 말을 합니다. "선생님, 이 사람이 맹인으로 태어난 것이 누구의 죄때문입니까? 자기의 죄입니까? 그의 부모의 죄입니까?"  빛을 보지 못하는 것도 고통스럽고 서러운데 본인이 듣는데서 듣고 있는 맹인에게 얼마나 큰 상처가 될 것인가?는 개의치않고 마구 떠들어댑니다. 오직 자기의 호기심을 푸는 데에만 관심이 있습니다. 어쩌면 맹인은 아무것도 보지 못하나 자신들은 좋은 시력으로 만물을 볼 수 잇다는 사실로 인해 우쭐해졌는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40절에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보지 못하는 자들은 보게 하고 보는 자들은 맹인이 되게 하려 함이라' 그러자 바리새인중에 '우리도 맹인인가?' 하고 빈정거린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이 "너희가 본다고 하니 너희 죄가 그대로 있느니라" 하셨습니다. 

이 사람들이야말로  육신의 눈은 문제가 없었지만 영적인 소경이 되어 자신이 무엇을 보지 못하고 사는지 모르고 잇었던 것입니다. 자신의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육안으로 볼 수 있는 세계보다 더 크고 아름다운 영적 세계를 부정하고 믿지 못하는 바리새인과 닮은 사람들이 오늘날에도 참 많습니다.  바로 영적 소경들입니다. 

평생 맹인으로 살며 큰 족적을 남긴 헬렌 켈러 여사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내 육체의 눈을 잃어 버림보다 더 큰 비극은 마음의 눈을 잃어버리는 것이다. 앞을 보지 못하는 것보다 더 큰 비극은 미래를 보지 못하는 것이다"고 했습니다.

반면에 날때부터 맹인이었던 사람은 예수님을 만나 고침받은후  "주여, 내가 믿나이다"하고 고백하며 절을 합니다. 그는 육체의 눈을 뜨게 되었을 뿐 아니라 예수님을 알아보는 영적인 눈이 열린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이제 새로운 세상을 보는 새사람이 되어 확신에 차서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 예수님에 대하여 증거합니다. 그는 은혜를 입고 행복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맹인으로 살다 눈을 뜬 이 사람처럼 여러분들도 영적인 눈이 활짝 열리게 되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다가오시는 예수님을 알아보게 되고  믿음으로 충만하여져서 예수님을 자랑하게 되고 예수님을 따르게 되기를 바랍니다. 
  
1. 예수님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일을 나타내십니다.(3) 
  
우리는 이해할 수 없는 고통을 만날 때 "왜?'라는 질문을 종종 던집니다. '왜 나에게 이런 불행이 찾아왔을까? 나보다 나쁜 사람들이 많은데 나에게만 이런 고통이 따라다닐까?'  악과 고난의 문제는 누구도 쉽게 설명하지 못합니다. 그러다보니  고통에 대한 편견이 많습니다. 가장 보편적인 편견은 고통의 원인을 자신의 죄나 부모 혹은 조상의 죄로 보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 역시 그런 편협하고 그릇된 관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2절에 보면 제자들은 예수님께 묻습니다. "선생님, 이 사람이 맹인으로 난 것이 누구의 죄로 인함입니까? 자기의 죄입니까? 아니면 그의 부모의 죄때문입니까?" 그러나  예수님의 대답은 둘 다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 사람이나 그 부모가 죄를 범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라"(3절)  물론 죄가  질병이나 고통을 가져다 주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겪게 되는 많은 고통들이 오늘 본문의 맹인처럼 오히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어 축복의 기회가 되기도 하고 성숙의 기회가 되기도 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다른 사람의 고통을 까십거리로 삼아 함부로 판단하고 정죄해서는 안됩니다.  그리고 우리 자신이 고통을 만날 때 사람을 원망하거나 하나님을 원망해서는 안됩니다. 그렇다고 숙명처럼 받아 들이고 살아서도 안됩니다.  지나치게 죄책감에 사로잡혀 사단에게 속아서도 안됩니다. 

예수님의 말슴에 귀를 기울이며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유심히 살피며 하나님께 자신을 내어 맡기는 것이 중요합니다. 내가 겪는 고통에 대해 주변의 사람들이 판단하고 정죄하며 수근거리며 상처를 입힐때에도 그런 말을 믿고 자책하거나 낙심하지 말고 나의 인생을 통해 하나님께서 행하실 크고 놀라운 일을 기대하며 소망을 품고 기다리는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조차도 이 불쌍한 사람에게 전혀 도움이 되지 않고 오히려 상처를 입히며 고통을 더해 주었다는 사실에 주목하십시오. 하물며 우리도 고통당할 때 위로받기를 기대했던 교인들에게 오히려 상처를 받을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별 생각없이 본능적으로 판단하고 정죄하기를 좋아합니다. 이런 상황을 만나면 우리는 사람에게 촛점을 맞추지 말고 오로지 예수님께만 집중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친히 행하십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말슴하셨습니다. "때가 아직 낮이매 나를 보내신 이의 일을 우리가 하여야 하리라 밤이 오리니 그 때는 아무도 일할 수 없느니라(4)" 예수님은 불쌍한 맹인을 보시며 하나님의 일을 하시고자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그 맹인을 위해 하신 일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사랑을 나타내신 것입니다. 평생을 살아오는 동안 아무도 맹인에게 그리고 그의 고통에 대해 진정한 관심을 가지고 다가온 사람은 없었습니다. 그의 아픈 마음을 이해하고 수치를 씻어주는 말을 한 사람은 없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 불쌍한 사람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나타내셨습니다. 

우리는 좋지 않은 일을 만나거나 시련을 만나면 '내가 뭘 잘못해서 벌 받는것 아닐까?'하고 생각합니다. 또는 '조상의 묘자리가 나빠 일이 안풀리는 것 아냐?' 성경은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라고 말씀합니다. 늘 실패하고 절망적인 사람이 예수 믿고 변화되어 성공하고 소망으로 가득찬 사람이 되면 하나님이 그 사람안에서 위대한 일을 이루셨음을 모두가 보게 될 것입니다. 질병에 눌려 살고 나쁜 것에 중독되어 사람 구실을 못하던 사람이 예수님을 만나 몸도 마음도 삶도 건강해지면 하나님께서 큰 일을 행하심을 모두가 깨닫지 않겠습니까?  

실제 하나님을 부정하며 교만하게 살던 사람이 불치의 병에 걸린 후 하나님께 매달리게 되고 하나님을 생생하게 체험한 사람이 많습니다. 따라서 실패도, 질병도, 불행도, 고난도 원망할 일이 아니라 하나님을 경험하는 좋은 재료가 됩니다. 지금 여러분이 안고 있는 고난의 문제에 예수님을 초대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이 겪고 있는 고난을 통해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를 경험할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2. 예수님은 우리를 치유하여 보게 하십니다.(7)
  
예수님은 오늘 본문의 맹인에게 다가가 당신의 침으로 진흙을 이겨 그의 눈에 바르시며 그의 눈을 친히 어루만지십니다. 사랑의 손으로 터치하십니다. 그의 눈과 함께 마음의 모든 상처까지 함께 어루만지신 것입니다. 마치 '나는 너를 더럽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나는 너를 저주받은 자라고 간주하여 외면하지 않는다.'하는 사인이 담겨 있는 손길입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이런 사랑의 터치가 필요하지 않습니까? 저는 이 찬양을 부를때마다 얼마나 큰 위로를 받는지 모릅니다. [주님과 같이 내 마음 만지는 분은 없네 오랜 세월 찾아 난 알았네 내겐 주 밖에 없네 주 자비 강같이 흐르고 주 손길 치료하네 고통받는 자녀 품으시니 주 밖에 없네 주님과 같이 내 마음 만지는 분은 없네 오랜 세월 찾아 난 알았네 내겐 주 밖에 없네 ]
  
여러분 고통스러울 때 예수님께 나아가 만져달라고 간구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의 아픈 몸을, 그리고 마음의 아픈 상처를, 고통스런 영혼까지 함께 만져달라고 내어 맡길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은 언제나 고통스러워하는 우리의 몸과 마음과 영혼까지 어루만져 치유해 주십니다. 그 사랑의 손길을 경험하고 새로와지기를 축원합니다. 

예수님은 이제 소경에게 말씀하십니다.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고. 그리고 그는 실로암 못에 가서 씻고 밝은 눈으로 왔다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왜 하필이면 실로암 못이었을까요? 과연 실로암 못이 이 소경을 치료한 것이겠습니까? 아닙니다. 진흙에 어떤 성분이 있어 눈이 치료된 것입니까? 아닙니다. 

본문 7절은 실로암의 뜻을 이렇게 밝히고 있습니다. "보냄을 받았다는 뜻이라"  

4절에서도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아 오셨다고 하셨습니다. 실로암이 치유한 것이 아닙니다. 보냄 받아 오신 예수께서 치유하신 것입니다. 이 소경이 한일은 이 예수의 보내심에 순종한 것 밖에 없었습니다. 그의 말씀을 믿고 순종했더니 눈이 열린 것입니다. 새 하늘 새 땅이 보이기 시작한 것입니다. 새 세상이 열린 것입니다. 새 인생이 보인 것입니다.

그가 다시 어둠으로 돌아갔을까요? 그가 다시 구걸했을까요?  결코 그럴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는 이제 간증하는자가 되었습니다. 빛을 증거하는 자가 되었습니다. 그가 당장 부자가 된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는 행복한 사람이 되어 찬양하는자가 되었고 증거하는 자가 된 것입니다. 예수님을 자랑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사람들이 이 사람의 이런 모습이 못마땅해 예수님을 비난합니다. 

"우리는 이 사람이 죄인인줄 아노라" 그러자 맹인이었던 이 사람은 "내가 다른 것은 몰라도 확실하게 아는 것은 내가 맹인이었는데 지금 새 세상을 보게 된 그것입니다."하며 예수님을 끝까지 옹호합니다. 그리고 어떤 압력에도 굴복하지 않고 예수님이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분임을 증거하였습니다. 이 맹인은 육체의 눈과 함께 영의 눈까지 치료된 것입니다. 

헬렌 켈러는 비록 육안이 열려 빛을 보지는 못했으나 예수님을 만나 마음의 눈이 열리는 경험을 했습니다. 그녀의 마음의 눈이 열린 순간 모든것은 감사로 변했고 찬양으로 변했습니다. 그녀의 자서전에 보면  어느날 설리반 선생이 헬렌의 손을 펌프꼭지에 갖다 대고 차거운 물을 퍼올려 손에 물을 느끼게 해주면서 그녀의 손바닥에 천천히 물이라고 써 주었다고 합니다. 

그 물의 촉감과 함께 갑자기 그녀에게는 하나님의 창조의 세계를 일깨우는 영혼의 전율이 임하면서 그녀의 마음속에는 빛과 희망 그리고 기쁨이 쏟아져 들어왔다고 합니다. 그 순간 그녀의 마음속에는 오직 한 단어만이 솟아 오르고 있었다고 합니다. "오 나의 하나님, 감사합니다." 

그 순간이래로 그녀는 다시는 인생을 비관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이 맹인의 눈이 실로암의 물에 적셔지는 순간도 그러했을 것입니다. 그 눈이 생명의 물을 느끼고 어둠에 익숙했던 그의 눈에 처음으로 빛이 쏟아져 들어오는 순간 놀라운 감동이 밀려왔고 그의 인생은 감사로 변한 것입니다. 

보지 못하고 듣지 못하고 말하지 못하고 평생을 산 여인이  이토록 행복에 젖어 눈물겨운 감사를 품고 살았는데 오늘 여러분과 저의 감사의 제목은 무엇입니까? 

오늘 여러분이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기쁨으로 감사와 감격과 감동으로 가득찬 행복에  새 삶을 누리고 있다면 여러분도 본문의 맹인처럼 영적 눈이 열린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풍족한 은혜를 깨닫지 못하고 불평과 불만이 가득하다면 우리는 영적 눈을 열어달라고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여러분 모두 예수님께서 나타내신 하나님의 일을 힘입어, 그리고 예수님의 사랑의 손길을 힘입어 치유되고 영적인 눈이 열려서 언제나 행복한 감동이 넘치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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