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누구를 두려워하리요 (시 27:1-6)

첨부 1


누구를 두려워하리요 (시 27:1-6)


플로이드 맥클랑(Floyd McClung)은 ‘제자도의 본질’이라는 저서에서 시몬 자오(Simon Zhao)라는 중국 그리스도인을 소개하였습니다. 그는 ‘백 투 예루살렘’ 비전을 품고 1940년 소그룹들과 함께 예루살렘을 향한 도보여행을 시작하였습니다. 복음을 전하는 비전에 동참한 시몬과 25명으로 구성된 팀은 중국의 변방 북서지역을 향해 출발했고 1948년 마침내 중국의 가장 서쪽 도시 카슈가르에서 여장을 풀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국경을 넘으려던 찰나에 공산주의 철권통치가 시작되었고 국경은 폐쇄 되었습니다. 자오와 그의 팀은 국경을 건너려는 반역자로 체포되어 감금되었습니다. 

하지만 절망스러운 상황에도 자오는 두려워하지 아니하며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예루살렘으로 갈 수는 없지만 그 비전을 완수할 중국 성도들을 일으켜 주옵소서.” 지옥과 같은 감방생활에서 그는 사명을 위하여 기도하면서 두려움을 극복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함께 하는 증거도 여러 번 있었습니다. 다른 죄수들이 살인적 추위 속에 밖에 그를 세워두고 하나님이 도와주실지 보라며 야유를 하였습니다. 자오는 간절히 기도했고 갑자기 온 몸에 온기가 돌았습니다. 

죄수들은 그의 몸에서 김이 나고 발주위에서 눈이 녹는 것을 보고 두려움을 금치 못했다고 합니다. 자오는 복역한지 40년이 지난 1988년에 석방되었습니다. 72세가 된 그는 작은 방을 찾아 기도하던 중에 한 성도와 접촉하게 되었고 카슈카르의 성도들 사이에 소문이 퍼졌습니다. ‘믿음 때문에 40년을 감옥에서 살다가 나온 한 형제가 있다’는 소식이 전 중국 지하교회에 전해졌습니다. 중국 지하교회 대표단이 자오를 찾아와 청년들에게 그가 겪은 이야기를 전해달라고 부탁하였습니다. 자오는 중국 가정교회를 방문하여 성령의 기름 부으시는 능력으로 ‘백 투 예루살렘’의 비전을 함께 나누었습니다. 

하나님은 중국의 젊은이들 가슴에 복음의 열정을 불붙게 하시고 복음의 서진에서 만날 무슬림과 힌두인과 불교인들에 관심을 집중할 수 있게 하셨습니다. 2001년 12월 7일 자오는 세상을 떠났지만 하나님은 눈을 감기까지 13년이라는 사역의 기회를 주셨습니다. 비록 예루살렘으로 가지 못하였지만 그로 인하여 수많은 중국 그리스도인들이 복음을 가지고 타 종교인들에게 다가가는 비전에 순종하게 되었습니다. 모든 두려움을 물리치고 감당했던 시몬 자오의 사역은 변방의 촌락 몇 개를 찾아가는 수준이 아니라 놀라운 결실을 맺는 사역이 되었습니다. 

시편 27편은 ‘여호와는’의 구절로 시작하여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에 집중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나’라는 1인칭 단수가 반복적으로 등장합니다. 1절부터 6절까지 무려 21번씩이나 반복됩니다. 마지막 14절까지는 40번 반복됩니다. 대적에 쫓겨 신음하고 있는 나에게 하나님이 어떤 분인가 말씀하고 있습니다. 믿음의 사람이라도 하나님을 바라보는 신앙의 초점을 다른 곳으로 돌리면 이내 두려움에 사로잡히고 말 것입니다. 두려움은 마음을 약하게 하고, 평안을 빼앗아가며, 불안을 가중시키며 믿음까지도 무너뜨립니다. 

본문은 다윗의 신앙고백입니다. 자신을 에워싼 걱정과 근심, 두려움의 요소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조금도 두렵지 않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무엇이 그로 두렵지 않게 하였습니까? 모든 상황 속에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믿기에 결코 두려워하지 않으리라고 고백하였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다윗이 두려워하지 않는 이유는 과연 무엇입니까? 

첫째로 나의 소망이시니

스코틀랜드의 종교개혁자 존 낙스(John Knox)가 세상을 떠날 때 동지들이 물었습니다. “소망이 있습니까?” 질문의 뜻은 여러 가지로 생각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영생에 소망이 있습니까? 교회개혁에 소망이 있습니까? 스코틀랜드의 미래에 소망이 있습니까?” 한때 통치자들의 박해 속에서도 지치지 않고 교회개혁을 단행했던 낙스였습니다. 그의 목소리가 어찌나 우렁찼던지 설교할 때는 나무둥지가 흔들리는 것 같다고 했던 존 낙스였습니다. 그러나 세상을 떠날 때는 힘이 없었습니다. 

한마디의 말도 하기 어려울 정도였습니다. “소망이 있습니까?”라는 질문에 낙스는 숨을 거두면서 힘이 없어 말은 못하고 손가락으로 하늘을 가리켰습니다. 그 뜻은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있다. 하나님이 계신다. 하나님께서 하신다. 하나님을 의지하라.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소망은 하나님께 있다!” 

본문 1절입니다. “여호와는 나의 빛이요 내가 누구를 두려워하리요.” 여기의 빛은 하나님이 소망이 된다는 뜻입니다. 다윗의 삶은 공포와 두려움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오랫동안 공포와 두려움으로 떨게 되면 절망을 하게 됩니다. 다윗도 인간인지라 좌절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절망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이런 다윗에게 하나님이 빛이 되었다는 것은 하나님이 다윗의 궁극적 소망이 되었다는 뜻입니다. 

실망할 수밖에 없고 자포자기할 수밖에 없던 다윗의 삶에 하나님이 빛으로 다가 오셨습니다. 그리고 다윗의 삶을 덮고 있는 어두움을 몰아내셨습니다. 다윗의 어두운 내면과 캄캄한 삶의 현장을 비춰주셨습니다. 결국 두려움이 사라진 다윗에게 소망이 생겼습니다. 절망 속에서도 살아야 할 이유를 가졌습니다. 그러한 다윗에게 무엇이 두렵습니까? 오히려 승리의 노래를 부르고 있습니다. 절망 중에도 하나님만 바라보면 소망이 생깁니다. 생기가 솟아오르고 밝은 빛을 향해 걸어갈 수 있게 될 것입니다.  

둘째로 나의 구원이시니

19세기 미국의 부흥사 무디(D. L. Moody)가 어느 주일, 교회 입구에서 실랑이가 벌어진 것을 보았습니다. 거지 소년이 교회에 들어가겠다고 떼를 쓰고 있었고 안내를 맡은 직분자들 들어가지 못하도록 가로막고 있었습니다. 무디가 소년에게 다가서자 그들이 만류하며 말했습니다. “목사님, 얘는 안됩니다. 예배분위기가 훼손돼요. 들여보낼 수 없어요.” 그러나 무디는 거지 소년의 어깨를 감싸 안고 교회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의아해하는 성도들을 바라보며 무디는 강대상 위에까지 소년을 데리고 올라갔습니다. 

그리고 설교시간에 무디는 소년을 가리키며 말했습니다. “이 소년은 입장불가였습니다. 그러나 저와 함께 오니까 성전안만 아니라 이 강대상 위에까지 올 수 있었습니다. 죄인된 인간은 천국에 들어갈 수 없는 남루한 존재들입니다. 그러나 예수께서 이러한 우리들을 안고 하나님의 보좌 앞까지 가셨습니다. 소년이 입은 은혜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자녀 된 우리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날 성도들은 평생 동안 잊을 수 없는 구원에 대한 감동을 받았습니다.

본문 1절입니다. “여호와는 나의 빛이요 나의 구원이시니 내가 누구를 두려워하리요”. 다윗은 하나님의 구원을 수없이 경험했습니다. 사울의 군사가 자기를 추격하고 포위해도 하나님은 항상 구원해 주셨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하나님이 구원이심을 확실하게 체험하였습니다. 수많은 사울의 군대가 포위하고 에워싼다 해도 결코 두렵지 않다고 고백하였습니다. 

하나님이 구원이심을 믿으면 평안합니다. 안연합니다. 다윗의 하나님은 우리에게도 언제나 구원이 되셨습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선으로 역사해 주셨습니다. 절박한 상황에도 구원의 역사를 베풀어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걱정이 없어집니다. 두려움이 사라집니다. 오히려 담대함과 용기가 충만하여 승리의 노래를 부르게 하실 것입니다. 
 
셋째로 나의 능력이시니

백기현(白琦鉉) 교수는 국립공주대학 음악교육과 교수입니다. 창작오페라 이순신을 작곡하여 화관문화훈장을 받았습니다. 백 교수가 어릴 적 돌을 막 지났을 때 8살 고모의 등에 업혀 놀다가 함께 넘어지면서 척추를 다쳐 그만 곱사등이 되었습니다. 앞가슴이 나오고 키도 자라지 못하였습니다. 그 후 55년이 지났습니다. 어느 날 부흥회에 참석하여 은혜를 받던 가운데 하나님이 그의 귀에 대고 말씀하셨습니다. “너의 등을 내가 편다.” 그리고 하나님이 그의 몸을 어루만져주셨습니다. 5일 동안 방에 잡아두시고는 온 몸을 구석구석 만져주시고 고쳐주셨습니다. 

그래서 정상인이 되어 반듯한 모습으로 살게 되었던 것입니다. 놀라운 기적을 경험한 백교수는 하나님을 전심으로 찾게 되었고 치료의 옵션으로 주신 “내가 너를 치유하였다. 지금부터 나를 찬양하여라 그리고 널리 알리라”는 말씀대로 6년 동안 700회가 넘게 하나님을 증거하였습니다. 감격 속에 간증하는 그의 모습은 보는 이마다 가슴이 미어지는 전율을 느끼게 하였습니다. 하나님이 그의 능력이 되어 주신 것입니다. 55년 동안 힘든 고통 속에 있었으나 능력이신 하나님께서 그를 치유하시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도록 하셨습니다. 

본문 1절입니다. “내 생명의 능력이시니 내가 누구를 무서워하리요” 하나님의 능력은 어떠한 견고한 진도 무너뜨리는 능력입니다. 아무리 사탄의 진영이 견고하다고 하여도 하나님이 명령하시면 무너지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은 어떠한 궤변, 어떠한 합리적이고 과학적인 이론도 무너뜨리기 때문입니다. 

에스겔 골짜기에 흩어진 마른 뼈다귀를 보신 하나님은 에스겔에게 “이 뼈들이 살겠느냐?” 물으셨습니다. 머뭇거리는 에스겔을 통해 마른 뼈들에게 생기가 들어가도록 명령 하셨습니다. 그 즉시 힘줄이 생겨나고 살이 오르며 뼈들이 여기저기 모이더니 큰 군대가 되어 일어났습니다. 하나님께서 놀라운 능력을 통하여 우리도 일으켜 살게 하십니다. 하나님은 능력 그 자체이십니다. 

4세기경 크리소스톰(John Chrysostom)이라는 설교가가 있었습니다. 정부에 의해 지위를 박탈당하고 설교도 하지 못하는 핍박을 당했을 때 그는 스스로에게 자문자답한 적이 있었습니다. “내가 무엇을 두려워하는가? 죽음일까? 그러나 그리스도가 나의 생명이고 죽음까지도 유익할 것을 나는 알고 있다. 귀양 가는 것일까? 두렵기는 하다. 

그러나 이 지구와 지구상의 어디에 가도 하나님은 거기 계시지 않는가? 재물을 잃는 것인가? 그러나 나는 세상에 빈손으로 왔고 갈 때도 빈손으로 가지 않겠는가? 그러므로 세상에서 무섭다고 하는 것이 나에게는 아무 것도 아니다. 또 세상의 좋은 것도 나는 그저 웃어넘길 것뿐이다. 나는 가난을 두려워하지 않고 재물을 사모하지 않으며 죽음에 위축되지도 않겠다.” 하나님은 우리의 생명을 주장하시고 세상의 모든 것을 주관하십니다. 영원까지도 주장하시는 분입니다. 그러므로 그 무엇도 그 누구도 두려워 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의 모습은 어떠합니까? 형식적으로 하나님을 믿고 무기력하게 살아가는 신앙은 아닙니까? 무엇이든 누구든 두려워하며 살아가고 있지는 않습니까? 두려움가운데 의기소침한 것은 아닙니까? 마귀는 끊임없이 두려움을 가지고 우리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틈만 있으면 마음속에 두려움을 퍼붓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의 힘으로 안 되는 것을 되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부디 다윗처럼 하나님을 후원자로 삼고 두려움을 극복하시기 바랍니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하나님을 향한 확실한 신앙고백입니다. 다윗처럼 나의 소망이신 하나님, 나의 구원이신 하나님, 나의 능력이신 하나님을 분명히 고백하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이 베푸시는 담대함으로 두려움을 극복하는 복된 성도들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김광일 목사)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