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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주의 지성소를 향하여 손을 들자 (시 28: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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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의 지성소를 향하여 손을 들자 (시 28:1-9)
     
크리스천 유머 중에 ‘청년의 KO패’라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모든 일을 삐딱하게 생각하는 불량 청년이 있었습니다. 그는 어느 날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 편 뺨을 치거든 왼쪽도 돌려대며..”(마5:39) 라는 성경 구절을 읽고 예수 믿는 자들은 과연 그렇게 하는지 시험해보기로 하였습니다. 

주일날 아침... 그는 예배 시간에 맞추어 집 근처의 교회로 갔습니다. 그리고 예배당에 들어서자마자 다짜고짜 장로님 한 분의 뺨을 후려갈겼습니다. 난데없이 뺨을 얻어맞은 장로님이 노발대발하면서 불량 청년의 멱살을 움켜잡았습니다. “이런 버르장머리 없는 놈 같으니라구! 어디서 배워먹은 짓거리야?” 

그러자 불량청년을 장로님의 손을 확 뿌리치면서 말했습니다. “예수님은 누구든지 네 오른 편 뺨을 치거든 왼뺨도 돌려대라고 했는데, 이래도 당신이 예수 믿는 사람이오?” 그러자 장로님이 불량 청년의 머리를 한 대 쥐어박으면서 말했습니다. “야 임마, 네가 내 왼편 뺨을 쳤지, 오른 쪽 뺨을 쳤냐?”고 했다고 합니다. 이 말에 웃어야 하는데... 이 이야기는 지어낸 유머입니다. 

저는 이 이야기를 들으면서, 저를 포함해서 우리 교우 중에 지나가는 어떤 사람에게 뺨을 한 대 얻어맞았다고 하면, 주님이 말씀하신 것을 떠올리면서 ‘그래...’ 한 대 더 얻어맞아야 한다고 행동할 사람은 아마 한 사람도 없습니다. 지나가는 사람에게 뺨을 얻어맞았다고 하면 재수 없어하고 기가 막히는 일이요, 그러다가 맞아 죽을 수도 있는 일입니다. 황당한 일입니다. 정말 예수 믿는 것 때문에 맞았다고 하면 한 대 더 맞을 수도 있습니다. 

사랑하시는 여러분, 어떻게 예수 믿는 것이 잘 믿는 것입니까? 우리가 하나님을 믿고, 예수 믿어 거듭난 사람이지만, 말씀대로 살아간다고 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입니까? 어떤 일이 있을 때에 예수님은 무엇이라고 말씀하셨고, 예수 믿는 사람으로 어떻게 행동하여야 하는가 물어보는 사람이 별로 없습니다. 

지금 내가 살아가는 방법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방법대로 살아가는 것인지, 내가 좋아서 살아가는 방법인지 물어보지도 않습니다. 그냥 기분대로 내가 좋으면 된다고 하면서 나 중심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나를 지켜보시고 있습니다. 감찰하시는 하나님, 하감하시고 살펴보시고 있습니다. 

우리의 앉고 서는 것을 감찰하시는 것이 아니라, 감찰하시는 하나님이란 말은 우리가 절망 중에 있을 때에, 함께 아파하시고 함께 있어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살펴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여름 휴가 중에 로빈 마이어스 목사님이 쓰신 “언더그라운드 교회”라는 책을 보았습니다. 번역하면 지하교회라는 말입니다. 오늘 날 교회가 잃어버린 것은 무엇인지, 그것을 찾아야 하고, 회복하라고 합니다. 

오늘의 교회는 깊은 잠에서 깨어나라고 합니다. 정말 예수 믿는 것 보여주고, 예수를 믿어도 제대로 믿어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가족들로부터 “미쳤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얼마나 말씀대로 살았는지 당시 유대의 지도자들은 예수를 폄훼하면서 “귀신에 들렸다”고 했습니다. 그런 말을 들을 수 있어야 제대로 믿는 성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로빈 마이어스 목사가 신학교 다닐 때 설교학의 대가인 ‘프레드 크래독’박사의 강의를 들을 것을 기록하고 있었습니다. 하루는 강의를 벗어나 학생들을 혼란에 빠뜨렸습니다. 박사님이 허튼 소리를 하거나, 나사가 풀렸거나 아니면 학생들이 주의해서 듣고 있는지 시험하시는 것으로 보였습니다. 교수님이 이런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며칠 전에 내가 집 앞에서 무게가 4Kg 되는 참새 한 마리가 길거리를 걸어가는 것을 보고 내가 참새에게 ‘너 좀 너무 무거운 것이 아니냐?’ 하고 물어보았지요. 참새는 ‘네, 그래서 제가 살을 좀 빼려고 걷는 중이랍니다.’ 하고 말하더군요. 그래서 나는 ‘왜 날지를 않니’ 하고 물었습니다. 그 참새는 내가 마치 멍청이인 것처럼 바라보고는 ‘날아요? 나는 한 번도 날았던 적이 없어요. 다칠테니까요’ 하고 말하더군요. 그래서 네가 ‘네 이름이 무엇이니?’하고 물었지요. 그 참새가 하는 말이 ‘교회랍니다’ 하고 말했습니다.”

저는 그 이야기를 들으면서 커다란 망치로 뒤통수를 얻어맞은 기분이 들었습니다. 날아야 하는 참새가 비둔해져서 한 번도 날아본 적이 없대요. 그런데 그 참새는 오늘의 교회라는 사실에 가슴이 무너지면서 제 자신이 송두리째 갈아 앉는 것을 느꼈습니다.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힘껏 날아야 하는 교회가 비둔해지고 공룡화 되면서 이제는 자기 몸을 유지하기가 어려워 자멸하고 있습니다. 

우리 주님이 나를 대신하여 십자가를 지시면서 천국을 선물로 주셨고, 나의 더러운 죄와 허물을 다 용서해지시고 해결해주셨는데, 우리는 이 세상에 안주하고 좋은 음식, 좋은 옷, 좋은 집, 좋은 자가용, 좋은 환경을 좋아하다보니 미친 사람이라는 말을 들으신 예수님, 귀신 들렸다고 하시던 그 예수님은 우리에게서 찾아볼 수가 없었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던 처음 제자들은 또 하나의 예수라는 말을 들으면서 살았고, 마지막에는 예수님처럼 예수님을 따라 죽었습니다. 

오늘의 기독교인들은 그렇게 위험한 인물들이 아닙니다. 오늘 우리 성도들은 지극히 정상적이고, 예절 바르고, 예측이 가능한 사람들이요, 괜찮은 사람들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우리 사회의 모순을 보면서 예언자적으로 외치는 이들도 없고, 가난한 사람들로 인하여 마음 아파하고 그들과 함께 나누고 자기의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주는 그런 사람도 보이지 않습니다. 

로빈 마이어스 목사님이 교회사를 통찰하면서 오늘날 우리가 잃어버린 것이 무엇인지를 제시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다름 아니라, 실천이라는 것입니다.

원문을 그대로 옮겨봅니다. 43쪽에 “심지어 신앙의 성격도 완전히 바뀐다. 1세기 급진적 윤리인 산상설교에는 무엇을 믿을 것인가에 관해서는 단 한 마디도 없고 무엇을 할 것인가에 관한 말들뿐인데, 4세기의 니케아신조에서는 무엇을 할 것인가에 관한 말은 단 한 마디도 없고, 오직 무엇을 믿을 것인가에 관한 말들뿐이다.”라고 쓰고 있습니다. 

저자는 강조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본받아 행하는 사람들인가? 아니면 믿는 사람들인가? 우리는 선호하는 성경구절만 선택하고 우리가 선호하는 신조들을 암송하고 있지 않습니까? 

저자인 로빈 마이어스 목사님은 예수님을 예배의 대상이 아니라, 삶의 모델로 삼자고 제안하고 있습니다. “우선 만일에 예수님이 우리의 예배의 대상이라기보다 우리의 삶의 모델이라면, 우리가 교회 안에서 다투는 대부분의 문제들을 사라질 것이다”라고 합니다. 예수님을 모델로 하면 우리 사회의 모든 난제들을 해결할 수 있습니다. 

어느 시골교회에서... 목사님이 하나님께 기도하면서 진지하게 물어보았답니다. “하나님, 하나님은 진짜로 존재하시는 겁니까?” 그러자 하나님이 대답하셨습니다. “너는 지금 누구한테 질문하는 거냐?” “하나님한테요!” “그럼 내가 누구냐?” “하나님이요!” 그러자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너, 내일 설교 준비는 다 했냐?” 존재와 현상이라는 글에 나오는 말입니다. 현상만을 믿는 자는 의심에 갇히게 됩니다. 그러나 본질을 믿는 사람은 마음이 열리고 하나님의 임재 안에 거하게 됩니다. 

오늘 하나님의 사람, 다윗은 주의 지성소를 향하여 손을 들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1-2말씀입니다. “여호와여 내가 주께 부르짖으오니 나의 반석이여 내게 귀를 막지 마소서 주께서 내게 잠잠하시면 내가 무덤에 내려가는 자와 같을까 하나이다 내가 주의 성소를 향하여 나의 손을 들고 주께 부르짖을 때에 나의 간구하는 소리를 들으소서” 다윗은 기도의 사람이었습니다. 어려운 일이 일어났습니까? 내 힘으로 해결하기 어려운 일이 있으면 먼저 기도하였습니다.

다윗은 살아계시는 하나님, 지금 지성소 안에서 우리의 모든 문제를 해결해주시는 하나님이 계심을 믿고, 기도하고, 기도에 응답하시기를 기도하고 있습니다. 

1절 말씀은 “나의 반석이여”라는 말은 “나의 바위이시여”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종종 당신의 백성들의 바위, 반석으로 불리고 있습니다. 반석이란 견고함을 상징하는 것으로 하나님의 신뢰성과 불변성을 잘 드러내고 있습니다. 우리 같으면 하나님을 향하여 ‘나의 반석이여’라고 말하기가 송구스럽지만, 히브리적 사고는 결코 추상적이거나 철학적이지 않고, 구체적이고 사실적인 표현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헬레니즘, 그리스 사고로 교육을 받아왔기 때문에 하나님을 추상적이고 고상하게 표현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하나님을 자기의 산성, 요새, 바위, 방패, 구원의 뿔, 나의 깃발이라고 합니다. 

다윗은 견고한 반석과 같이 완전한 피난처가 되시는 하나님께 부르짖고 있습니다. “내게 귀를 막지 마소서”라는 말은 침묵하지 말아달라는 간절한 기도입니다. 귀를 막는다는 말은 침묵을 의미하고, 침묵은 포기나 외면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이 침묵하시면, 내게 잠잠하시면 나는 무덤에 내려가는 자와 같다고 합니다. 무덤은 음부요, 지하세계요, 참담한 죽음을 말합니다. 지금 얼마나 어려운 상황에서 기도하는지 하나님이 그의 기도를 들어주시지 않으면 죽을 것 같다고 합니다. 

2절에서 “내가 주의 성소를 향하여 나의 손을 들고 주께 부르짖을 때에 나의 간구하는 소리를 들으소서”라고 기도합니다. 주의 성소라고 하였지만, 새번역과 공동번역에서는 지성소라고 번역하고 있습니다. 본래 지성소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하나님이 임재하시고 있는 성전의 지성소를 향하여 손을 들고 있습니다. 갈급한 심정을 그대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나의 간구하는 소리를 들으소서” 이 말은 나의 애원의 기도, 탄원의 기도를 들어달라는 말입니다. 

인간의 손은 어떤 다른 동물보다 발달되어 있습니다. 사람은 손으로 문화를 발전시켰습니다. 손을 많이 쓰면 두뇌가 발달된다고 합니다. 손재주가 많은 사람, 그림을 잘 그리는 사람, 손으로 하는 일에 익숙한 사람, 피아노를 잘 치거나, 글씨를 잘 쓰는 사람은 머리가 발달됩니다. 손에 얽힌 일화들이 아주 많습니다. 다윗은 이 손이 기도하는 기능이 있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기도하는 손입니다. 

딤전2:8 “그러므로 각처에서 남자들이 분노와 다툼이 없이 거룩한 손을 들어 기도하기를 원하노라”고 하셨습니다. 분노와 다툼도 손으로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거룩한 손을 들어 기도하라고 하셨습니다. 

지금 다윗이 주의 지성소를 향하여 손을 드는 것은 하나님을 높이고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기고 항복한다는 의미로 손을 들었습니다. 손을 든다는 말은 기도한다는 다른 표현입니다. 

출17:10-11에서 “여호수아가 모세의 말대로 행하여 아말렉과 싸우고 모세와 아론과 훌은 산 꼭대기에 올라가서 모세가 손을 들면 이스라엘이 이기고 손을 내리면 아말렉이 이기더니” 

모세는 이스라엘의 승리를 위하여 하나님 앞에 기도의 손을 들었습니다. 기도의 손이 내려오면 이스라엘이 지니, 어떡합니까? 모세의 기도하는 손이 내려오지 않도록 아론과 훌이 양 옆에서 붙잡아 주었습니다. 우리도 기도의 손이 내려오지 않게 해야 합니다. 

예레미야 애가3:41입니다. “우리의 마음과 손을 아울러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 들자”고 하셨습니다. 우리의 마음과 손을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 들어야 합니다. 


다윗의 기도하는 내용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3절에서 “악인과 행악하는 자와 함께 나를 끌지 마옵소서 저희는 그 이웃에게 화평을 말하나 그 마음에는 악독이 있나이다”라고 했습니다. 이 본문은 새번역으로 보아야 그 의미가 살아납니다. “악인들과 사악한 자들과 함께 나를 싸잡아 내동댕이치지 마십시오. 그들은 이웃에게 평화를 말하지만 마음에는 악을 품고 있습니다.” 악인들과 사악한 사람들은 하나님이 반드시 내치시고 영원한 멸망에 버리십니다. 다윗은 자기를 환난에서 보호해달라고 기도합니다. 

4-5절입니다. “저희의 행사와 그 행위의 악한대로 갚으시며 저희 손의 지은대로 갚아 그 마땅히 받을 것으로 보응하소서 저희는 여호와의 행하신 일과 손으로 지으신 것을 생각지 아니하므로 여호와께서 저희를 파괴하고 건설치 아니하시리로다”

다윗은 하나님에게 원수를 갚아달라고 합니다. 저들의 악한 행위를 그대로 갚아주시고, 저의 손이 지은 대로 그 마땅히 받을 것으로 보응해달라고 합니다. 

우리는 참으로 그런 기도를 드릴 수는 없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원수 갚는 것은 하나님께 있고, 우리는 다만 그를 위하여 기도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마5:44절에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고 하셨습니다. 원수도 사랑할 사람이지, 결코 미워할 사람이 아닙니다. 우리가 기도할 때에 누구를 위하여 기도해야 합니까? 나를 박해하는 사람을 위하여 기도해야 합니다. 


다윗은 기도의 확신을 가지고 있습니다. 

6-7절입니다. “여호와를 찬송함이여 내 간구하는 소리를 들으심이로다 여호와는 나의 힘과 나의 방패시니 내 마음이 저를 의지하여 도움을 얻었도다 그러므로 내 마음이 크게 기뻐하며 내 노래로 저를 찬송하리로다”

다윗은 기도의 응답을 확신하였고, 그동안 기도에 응답을 수없이 체험하고 있었습니다. 답답하여 손을 들고 기도하던 다윗을 손을 들고 찬송하고 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을 찬송하는 것은 그의 간구하는 기도를 들어주셨기 때문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우리의 힘과 방패가 되시고, 우리는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승리하고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하나님이 계십니다. 온 우주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 하늘에 계신 하나님, 그러나 그 하나님은 당신의 아들을 우리의 구세주로 내어주신 하나님, 우리의 아버지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도 하나님 앞에 기도할 수 있는 특권이 있습니다. 

저는 아브라함이 조카 롯을 위하여 기도하는데, 기도하는 내용을 계속 변경하면서 기도하는데, 하나님을 들어주신다고 약속하십니다. 한번 기도해도 되지만, 구체적인 기도를 드리고 있습니다. 소돔성에 살고 있는 롯을 구원하기 위하여 소돔성에 의인 50명이 있다면 그 의인 50명으로 인하여 그 성을 멸하지 말아달라는 하였습니다. 어떻게 공의로우신 하나님이 의인과 악인을 함께 보실 수 있느냐고 하면서 의인 50명을 보시고 그 성을 멸하지 말아야 달라고 하였습니다. 

아브라함이 생각하기를 아무리 보아도 의인 50명이 되지 않을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45명으로 내려잡아 말씀을 드렸습니다. 40명으로, 30명으로, 다시 20명으로, 마지막에는 의인 10명으로 “주님 노하지 마시고 제가 한 번만 더 말씀드리게 허락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거기서 열 명만 찾으시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주님이 말씀하셨습니다. “열 명을 보아서라도 내가 그 성을 멸하지 않겠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기도하러 나온 사람을 책망하시지 않습니다. 기도가 기도 답지 않으면, 하나님이 감동 주셔서 기도 같은 기도를 하도록 인도하여 주십니다. 

아브라함이 기도하는데, 6번 정도 같은 제목으로 기도하였습니다. 나도 아브라함처럼 6번은 기도하겠다고 하지 않아도 됩니다. 기도는 단 한번 기도해도 됩니다.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기도라면 한 번으로 끝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기도를 수정해주십니다. 나는 잘 살기를 바랐는데, 하나님은 나중에 기도하기를 잘 믿기를 기도하게 하십니다. 


다윗은 그의 생애는 하나님의 은혜였음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8-9절입니다. “여호와는 저희의 힘이시요 그 기름 부음 받은 자의 구원의 산성이시로다 주의 백성을 구원하시며 주의 산업에 복을 주시고 또 저희의 목자가 되사 영원토록 드십소서” 

하나님은 다윗에게 있어 힘이었습니다. 구원의 산성이 되셨습니다. 하나님은 다윗의 목자가 되어주시고, 산업에 복을 주셨습니다. 

우리의 살아온 모든 날에 하나님은 은혜 아닌 것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힘이 되어주셨습니다. 구원의 산성이 되어 주셨습니다. 주의 백성을 구원하시며, 주의 산업에 복을 주셨습니다. 우리의 목자가 되어 주셨습니다. 

A. W. 토저 목사님이 쓰신 “나는 진짜인가 가짜인가”라는 책이 있습니다. 토저 목사님은 이 시대의 선지자라는 말을 듣는 목사입니다. 인기에 영합하지 않고, 타협이 없는 하나님의 말씀만 외치고 있습니다. 토저는 학교에서 배운 사람이 아니라, 성령님께 배운 사람이라고 하는 말을 듣고 있습니다. 

진짜는 험한 십자가를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진짜는 솜사탕 복음을 거부하고 가시 면류관 복음을 믿는다. 진짜는 주님의 ‘일’보다는 ‘주님’에 우선순위를 둔다. 진짜는 행복보다는 거룩을 열망한다. 진짜는 신앙의 기본에 충실한다. 진짜는 무엇을 믿는가에서 진짜는 유한한 세상을 믿지 않고, 영원한 하나님을 믿는다. 하나님의 황홀한 임재를 믿는다. 하나님과의 친밀한 우정을 믿는다. 진짜는 무엇을 행하는가에서 진짜는 자유의지를 하나님의 의지 앞에 복종시킨다. 영적 침체에서 벗어나기 위해 전력을 기울인다. 과거의 후회를 버리고 주님과의 교제에 힘쓴다. 성령으로 변화된 인격으로서 봉사한다. 영적 전투에서 불퇴전의 믿음으로 승리한다. 

신앙생활은 이 세 가지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롬14:17에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 있는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의는 거룩, Holy를 의미합니다. 평강은 조화와 평안 harmony입니다. 희락은 행복입니다. Happy입니다. 거룩이 가장 깊은 곳에 자리 잡고, 다음으로 조화와 평강, 그리고 행복과 기쁨이 있어야 합니다. 동심원 세 개를 그리면 가장 깊은 원에는 거룩이 있어야 하고, 다음으로 조화가 마지막 누리는 것은 행복이어야 합니다. 

먼저 거룩해야 합니다. 구별되어야 합니다. 달라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안 믿는 사람들과 달라야 합니다. 시간이 남아돌아 갑니까? 쓸데없는 것 보지 말고, 하나님의 말씀을 보시고 주님을 바라보셔야 합니다. 진짜 예수 믿는 성도들이 되어야겠습니다. 

오늘 우리는 살아계신 하나님, 우리의 아버지 하나님이 계신 것을 감사하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는 진짜 예수 믿는 사람들, 하나님이 원하시고 기뻐하시는 자녀들이 됩시다. 우리가 기도할 수 있다는 것은 특권 중의 특권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온갖 구하는 것이나 생각하는 것보다 더 좋은 것으로 응답해주십니다. 하나님을 나의 하나님으로, 나의 아버지로 고백하고 그 아버지의 능력 안에서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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