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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은혜로운 교회, 헌신적인 바나바 (행 4:32-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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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혜로운 교회, 헌신적인 바나바 (행 4:32-37)

사도행전의 예루살렘교회는 성령이 충만한 교회, 교회다운 교회였습니다. "은혜로운 교회 아름다운 성도"의 모습을 보여주는 오늘 본문에 나오는 교회는 성령의 말하게 하심을 따라 복음을 담대히 증거하며, 쉼 없이 기도하는 사도들과, 교회에 일어난 일들은 그야말로 기적의 연속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기적적인 역사 속에 박해도 있었습니다. 힘과 권력을 가진 사람들을 총동원해서 사탄은 복음의 역사를 막으려고 모든 노력을 동원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성령님의 역사는 세상의 그 무엇으로도 막을 수가 없었습니다. 박해 중에 온 교회는 열심히 모여 더욱 힘있게 기도하고, 박해받는 사도들을 위로하며 영적 힘을 뒷받침해 드리는 교회는 참으로 은혜로운 교회, 아름다운 성도들의 모습을 갖추어 가고 있었습니다. 


1. 믿는 무리가 한 마음과 한 뜻이 되었습니다.(32절) 

이것은 평안한 상황에서 이루어진 것이 아닙니다. 예루살렘 전체의 권력자들과 힘있는 사람들이 총동원되어 교회를 박해하고 있는 상황에서 이루어진 일입니다. 이것이 성령님이 하신 일입니다. 교회가 참으로 성령충만하냐를 알 수 있는 첫 번째 증거는 하나됨에 있습니다. 특별히 어려움과 환란을 당할 때에 이것은 더욱 확연하게 드러나게 됩니다. 성령님은 어려움을 당한 교우들을 서로 격려하게 하고 서로 기도하게 하고, 서로 사랑하게 하여 하나되게 하십니다. 사탄은 비난하고 책임을 서로에게 미루게 하고, 당을 짓고 싸우며 분열하게 만들어 주님의 몸된 교회를 욕되게 합니다. 하나님은 바울을 통하여 우리에게 권면합니다. 

"그러므로 주안에 갇힌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가 부르심을 입은 부름에 합당하게 행하여, 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고 오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고,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의 하나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 몸이 하나이요 성령이 하나이니 이와 같이 너희가 부르심의 한 소망 안에서 부르심을 입었느니라. 주도 하나이요 믿음도 하나이요 세례도 하나이요 하나님도 하나이시니 곧 만유의 아버지시라. 만유 위에 계시고 만유를 통일하시고 만유 가운데 계시도다."(에베소서4;1-6) 

성령님은 하나되게 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나 성령님의 하나되게 하심은 성령 받은 성도들이 힘써 지켜야할 본분입니다. 은혜로운 교회는 하나되어 서로를 사랑하는 교회입니다. 아름다운 성도들은 서로 격려하며 서로 도와주며 섬기는 사람들입니다. 


2.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함께 나누었습니다.(32, 34-35절)

그래서 교인들 중에는 핍절(乏絶)한 자가 없었습니다. 이를 두고 초대교회를 원시적인 공산 사회였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사실 공산주의 원리인 "능력만큼 일하고, 필요에 따라 분배한다"는 철학이 여기서 비롯된 것입니다. 얼마나 아름다운 일입니까? 모두가 함께 공평하게 잘 사는 세상! 꿈같은 이상적인 사회가 아닙니까? 그러나 이 원리를 따른다고 했던 공산사회는 70년 만에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그러면 사도행전의 은혜로운 교회와 공산주의 사상의 차이는 무엇이었습니까? 그것은 형식은 유사하지만, 기독교는 사랑으로 말미암는 자발적인 헌납으로 이루어진 거룩한 공동체입니다. 그러나 공산주의는 강압적으로 있는 자들의 재산을 착취하여 나누어 가짐으로 말미암아 분노와 증오의 사회를 만들었습니다. 교회는 사랑의 영이신 성령의 능력으로 신앙적인 혁명으로 스스로 가난하게 살고자 하는 결단과 사랑으로 함께 나누고자 하는 정신으로 충만했습니다. 

어떤 교인은 이 땅에서 의사로서 누릴 수 있는 모든 부와 영광을 과감하게 포기하고 중국 선교를 위하여 자기 병원을 처분하고 온 가족이 함께 평신도 선교사로 떠나기도 하고, 병원의 문을 닫고 농어촌 낙도의 의료혜택을 받지 못하는 사람들을 위하여 전도하며 헌신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청지기 정신입니다. 

우리 모두는 사실 하나님 앞에서 청지기로 살 따름입니다. 욥이 말한 것처럼 알몸으로 나왔다가 알몸을 가는 인생입니다. 전도서의 말씀대로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가는 것입니다.(욥 1;21, 전 5;15) 

땅에 잠간 머무는 동안 보잘 것 없는 나에게 재물과, 뛰어난 재능을 주셔서 영광스런 지위를 얻게 하셨으면, 하나님의 은혜임을 알아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섬기며, 봉사하며 겸손함으로 살아야할 것입니다. 

또한 일생동안 뼈빠지게 일만하고, 먹지 않고 입지 않고 쓰지 않고 모아서, 자식에게 한 푼이라도 더 물려주려고 하지 맙시다. 자식 공부시키고 살 수 있는 기본을 만들어 주었으면 그 다음은 자신이 하나님의 축복을 받아 살도록 해야 합니다. 자식에게 무엇보다 하나님을 섬기며 사는 믿음을 갖도록 어릴 때부터 신앙생활을 바로 지도해야 합니다. 

때가 되면 스스로 알아서 할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큰 착각입니다. 유태인들은 어릴 때부터 철저히 말씀을 읽히고 암송시키며 믿음을 유산으로 물려줍니다. 재산이나, 자식이나 어느 것도 내 것은 없습니다. 하나님의 것입니다. 다만 하나님께서 나에게 잠깐 동안 관리를 맡겼을 뿐입니다. 그러므로 어떻게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살 것인가를 기도해야 합니다. 

한 때 미국이 세계에 선교사를 파송하여 세계 복음화에 크게 이바지하였습니다. 세계도처에 수많은 교회들을 세웠고, 또한 수많은 학교들을 세워 후세를 신앙으로 육성하고, 많은 장학 사업으로 천국 일꾼을 양성하며, 병원을 세워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어렵고 고통받는 사람들을 돌보는 등 큰 일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일반 교인들의 주일 헌금으로 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믿음의 사람들이 일생을 살만큼의 재산을 남기고 나머지를 교회에 미리 헌납하거나, 돌아가시는 교인들이 재산을 모두 교회에 헌납하는 것을 통해서 그렇게 큰 일들을 할 수 있었습니다. 

한 때 한국 기독교인들 가운데 "유산 안 남기기 운동"을 전개한 적이 있었습니다. 바람직한 일입니다. 우리들 모두 하나님 앞에서 정직하게 하나님의 것을 하나님께 돌려 드릴 줄 아는 믿음이 있기를 바랍니다. 은혜로운 교회는 사랑으로 서로 돕고 나누는 교회입니다. 아름다운 성도는 청지기정신으로 하나님의 뜻을 따라 나누어주며 살 줄 아는 성도입니다. 


3. 큰 권능으로 주 예수의 부활을 증거하니 무리가 큰 은혜를 받음(33절) 

이 말씀은 하나되는 힘과, 청지기 정신으로 사는 힘이 어디에서 나오는지를 알려주는 말씀입니다. "큰 권능" "큰 은혜"는 예수의 부활에 있었습니다. 죽음의 권세를 이기신 예수의 부활의 능력! 이 복음이 믿는 자들의 삶을 힘있게 만드는 근원이었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죽음"이라는 것! 그것은 우리의 모든 삶을 송두리째 허무의 굴레 속으로 떨어지게 하고도 남습니다. 

고린도전서 15장의 말씀대로 "만일 죽은 자의 부활이 없으면 그리스도도 다시 살지 못하였으리라.....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바라는 것이 다만 이생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리라"(고전 15;13, 19) 

그리스도의 부활은 우리 모든 믿는 자의 부활의 첫 열매가 되었습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오늘 우리들이 왜 청지기로 바르게 살아야 하는지 그 이유를 알게 하셨습니다.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요한복음5;29)고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부활은 반드시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 이 사실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인생을 설계하십시다. 청지기로 성실하게 살아가십시다. 주님의 몸된 교회의 하나됨을 힘써 지키며 사랑으로 섬기며 사십시다. 부활의 날에 하나님 앞에서 영광스럽게 서실 수 있도록 사십시다. 

한 마음 한 뜻으로 서로 나누는 교회, 전도하는 교회 공주세광교회가 처음 예루살렘의 그 은혜로운 교회, 아름다운 성도들의 삶이 우리들 속에 실현되어지기를 바랍니다.


4. 위로의 아들 바나바(36-37절)

바나바는 삶에 위로를 제공하는 사람입니다.

첫째 바나바는 아름다운 헌신의 사람이었습니다. 

본문에 보면 성도들이 하나님의 교회를 위해 집 팔고 밭 팔아서 헌납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바나바도 자기 밭을 팔아서 바쳤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바나바의 원래 이름은 요셉이었는데 사람들이 바나바라는 별명을 붙여주게 됐고 그는 요셉이라는 이름보다는 바나바라는 이름으로 더 많이 알려졌습니다. 그 이름의 뜻은 ‘격려의 아들, 권고하고 위로하는 자’라는 뜻입니다. 이름대로 바나바로 인하여 권고받고 위로받고 도움이 받은 사람들이 많이 있었고 그들이 붙여준 이름인 것입니다. 

바나바의 헌신이 아름다웠고 많은 사람들에게 칭찬과 귀감이 되었습니다. 바나바는 그저 사도들 발 앞에 두었다고만 했지 ‘이것을 어디다 쓸 것이냐, 어디다 써 달라, 얼마가 들었느냐, 왜 그렇게 썼느냐’ 등의 주장은 전혀 하지를 않았습니다. 헌금을 하는 바람직한 자세입니다. 

구약시대의 제물들을 보십시오. 제물로 드려진 것들은 전부 피를 뺀 것으로 완전히 죽은 것입니다. 살아서 펄떡펄떡 뛰는 것이 아닙니다. 죽어야 제물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자아가 죽어야 제물이 됩니다. 내가 살아 있으면 제물이 아닙니다. 주님도 십자가의 죽음으로 완전한 제물이 되셨습니다. 완전히 죽었을 때 온전히 다시 사는 은혜가 있는 것입니다. 철저한 헌신, 아름다운 헌신을 통해서 하나님의 역사는 일어나는 것입니다. 


둘째 바나바는 인간성이 아주 훌륭했습니다. 

지금 이 세상은 완전히 경쟁사회입니다. 그래서 모든 것이 경쟁이고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친구고 친척이고 간에 다 적이 되는 세상이 되고 있습니다. 심지어는 교회도 경쟁이라 경쟁력을 키우지 않으면 생존이 불가능한 시대입니다. 입시경쟁, 취업경쟁, 생존경쟁, 수출경쟁, 출근경쟁 그냥 자고 나면 경쟁 세상에 뛰어들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렇게 경쟁을 하다보니 인간성이 다 짓밟히고 단지 사람들이 악만 남아가지고 자꾸 살벌해지는 것이 안타깝습니다. 

바나바의 아름다운 이야기가 행 9장에도 기록 됐습니다. 사울이 주의 제자들을 잡으려고 살기등등하여 떠나는 장면으로 9장은 시작이 됐습니다. 그런데 다메섹 도상에서 주님을 만난 이후 사람이 변했습니다. 나쁘게 변한 것이 아니라 좋게 변했습니다. 복음을 영접하고 주의 사람이 됐습니다. 사울이 바울이 됐습니다. 

그 후 바울은 주의 제자들을 사귀고 싶어했습니다. 전에는 주의 제자들을 핍박하려고 찾았는데 이제는 사귀고 싶어서 찾아 나섰습니다. 그런데 변화된 사울 아니 변화된 바울을 아무도 믿어주지 않았습니다. 여전히 못된 사람으로만 보고 있습니다. 그 때 바울을 보증해 준 사람이 바로 바나바입니다. 9;27에 보면 “바나바가 데리고 사도들에게 가서 그가 길에서 어떻게 주를 본 것과 주께서 그에게 말씀하신 일과 다메섹에서 그가 어떻게 예수의 이름으로 담대히 말하던 것을 말하니라”고 했습니다. 

이 이야기는 바울이 핍박자가 아니라 주의 사도로 복음사역을 하려고 하는데 아무도 믿어주지 않았고 인정하지 않았는데 바나바가 바울을 보증해 줌으로서 비로소 사도로서의 첫 발걸음을 내딛을 수 있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 때 바나바가 바울을 보증해 주지 않았다면 오늘의 바울이 있었겠느냐 하는 생각도 가질 수 있는 것입니다. 바나바는 이렇게 훌륭한 인간성을 지닌 인물입니다. 

바나바의 이런 훌륭한 점은 행15:에도 나옵니다. 바울의 제 1차 전도여행 때 바나바는 마가를 데리고 가자고 했고 바울은 그런 사람은 데리고 갈 수 없다고 다툼이 일어났습니다. 그 때도 역시 바나바는 마가를 열심히 변호하여 결국 바울은 실라를 데리고 갔고 바나바는 마가를 데리고 전도여행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먼 훗날 마가는 바나바의 말대로 훌륭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바나바는 바울도 주의 일을 할 수 있도록 해 주었고 마가도 훌륭한 사람이 될 수 있도록 그를 믿어 주었던 것입니다. 바울도 그의 인생 말년에 가서는 마가를 필요로 했고 마가의 신분을 인정했습니다. 그것은 바울이 “이 복음사역을 위해 내가 동역자가 필요하니 마가와 요한을 보내달라”고 요청했던 것을 보아도 마가는 바나바의 믿음대로 훌륭한 인물이 된 것입니다. 그 때 만약 바나바가 마가를 보호하지 않았다면 마가는 그토록 훌륭한 인물이 되었을 것이라고는 예측하기가 어려운 것입니다. 


셋째 바나바는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일을 했습니다. 

행 11장에도 바나바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바나바가 안디옥교회에 목회자로 청빙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안디옥교회에 바나바가 부임한 이래 교회는 놀라운 부흥의 불길이 타올랐습니다. 참으로 다행스러운 일입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몰려옵니다. 바나바의 인기가 막 올라갔습니다. 

이 때 바나바는 바울을 초청하여 동역자로 세워 함께 일을 했습니다. 만약 바나바가 옹졸한 사람이었다면 절대로 바울을 부흥의 현장에 초청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교인들이 초청하자고 해도 못하게 했었을 것입니다. 자기의 인기가 바울에게로 갈 수도 있고, 부흥의 기초는 자기가 다 닦아 놓았는데 영광은 엉뚱한 사람이 누릴 것이 싫을 수도 있었습니다. 오직 자기의 실력이 인정받고 인기를 얻고 대우를 받고 싶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바나바는 추호도 그런 생각을 하지 않았습니다. 바울이 인기를 얻든 그 때문에 부흥했다고 하든 하나님의 교회가 진정으로 부흥한다면 자기 자신 하나 감추어지는 것은 일도 아니라고 생각을 한 것입니다. 그는 철저하게 하나님의 영광만을 위하여 산 사람입니다. 자기의 체면, 자기의 인기, 자기의 목표보다도 주님의 사역이 활발해지기를 간절히 소원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확장될 수 있다면, 주님의 교회가 부흥할 수 있다면 이름없이 빛도없이 얼마든지 감사하며 주를 섬기겠다는 아름다운 마음자세를 가진 것입니다. 이런 겸손과 이런 자기를 감추고 남을 드러내려고 하는 훌륭한 인품에 교회는 날로날로 부흥을 했던 것입니다. 

오늘 이 시대에 바나바와 같은 인물이 그립습니다. 세상과 나는 간 곳 없고 구속한 주님만 나타나야 한다는 그의 심정이 매우 훌륭한 것입니다. 자기를 나타내려고 하는 사람들, 인기에 영합하는 사람들, 그들이 과연 하나님의 일을 한 것인지 자기 일을 한 것인지 하나님 앞에 가보면 알 수 있을 것입니다. 

특별히 오늘 오후에 국제기드온협회 공주캠프 순방예배가 있습니다. 1866년 미국 상선 제네날 셔먼호를 타고 평양으로 왔다가, 우리 군사들과의 충돌로 상선이 불타고 모두가 죽어갈 때, 그 배를 타고 함께 왔던 27세의 토마스 목사가 대동강변에서 병졸 박춘권에게 목베임을 당하면서 전해준 한 권의 성경책이 이 땅의 복음의 첫 시작이 되었습니다. 박춘권은 후에 안주교회의 영수가 되었고, 그 성경책을 뜯어 벽지로 썻던 박영식의 집은 평양 최초의 교회인 널다리골 예배당이 되었습니다. 우리가 오늘 보내는 성경 한 권 한 권이 그와 같은 역사를 일으키는 기적의 봉헌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그리고 우리교회에 바나바와 같이 은혜롭고 인간성이 훌륭하고 하나님 앞에서 일하는 신실한 성도가 많이 나올 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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