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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예수를 따른다는 것 (눅 5: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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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를 따른다는 것 (눅 5:1-11)

옛 속담 중에 “거름지고 장에 간다.” 는 속담이 있습니다. 자기의 생각이나 계획이 없이 남이 하니까 얼떨결에 따라하는 것을 보고 만들어 진 속담입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참 열심히 삽니다. 아침에 일찍 일어나고 밤늦게까지 일합니다. 

그런데 정작 무엇을 위해 그렇게 숨차게 뛰는지를 모르고 무작정 뜁니다. 십중팔구는 “남들이 하니까 나도 한다.” 는 대답입니다. 특별한 목표가 있어서 열심히 뛰는 사람들도 물론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집단에서 이탈되는 것이 두려워서 공부를 하고, 자기만의 목표가 아니라 남이 하는 만큼 해야 한다는 이상한 목표를 가지고 삽니다. 남들이 자가용 사고, 좋은 집에 사니까 나도 당연히 그러지 못하면 뒤쳐지는 것이 아닌가 하여 어느새 그것이 목표가 되어버립니다. 

그런데 여러분, 왜 사는지, 무엇을 위해서 사는지 모르고 열심히만 살면 그만큼 빨리 지칩니다. 성실하게 열심히 뛰는 것은 분명 아름다운 일입니다. 그러나 그 아름다움은 목표가 뚜렷할 때에 그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만약에 인생이 아무런 목표 없이 마냥 뛰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면 죽음을 향해 뛰는 것 외에 어떤 의미도 없는 것입니다. 문제는 삶의 목적입니다. 사단이 우리를 시험할 때 사용하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삶의 목표를 잃게 만드는 것입니다. 왜 사는지를 스스로 생각하지 않고 <부화뇌동(附和雷同)> 하게 만드는 것이 사단의 전략입니다. 

현대인들의 특징이 열심히는 하는데 그만큼 기쁨이 없다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수고한 만큼의 성과가 없다는 생각 때문입니다. 남들처럼 되기는 돼야 하는데 마음대로 되지는 않고 그나마 목표 없이 무작정 달려가는 일이 자꾸만 실패합니다. 이것이 인생을 허탈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노력만큼 얻어지는 성과가 없을 때 사람들은 지치고 절망하고 허탈에 빠집니다. 이게 현대인의 모습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이런 허탈감에 젖어있는 사람들을 만날 수 있습니다. 지금 까지 자기들을 먹여 살려 준 바다에 그물을 던지고 지금까지 먹고살게 해주었던 물고기를 잡아 올리려고 했지만 던질 때마다 이상 하리 만치 단 한 마리도 건져 올리지 못하고 말았습니다. 이러기를 수십 번 아니 수 백 번했음에도 불구하고 날이 밝을 때까지 한 마리의 물고기도 잡지 못했습니다. 헛수고로 인하여 하염없이 실망하며 또 언제 물고기가 잡힐지 기약이 없는 빈 그물을 정리하는 일밖에 더 할 일 없습니다. 

그런데 어쩌면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이 경험하는 어두운 모습이 이와 똑 같은지도 모릅니다. 살아가면서 누구나 크고 작은 일들에 실패한 경험을 가지고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매일 매일 빈 그물을 정리해야할 때가 있습니다. 

공들여 쌓아올린 사업이며 평생을 헌신하고 일했던 직장이 와르르 무너지기도 합니다. 믿었던 자녀들이 탈선하고 대학을 나와도 원하는 대로 취직이 되지도 않아 자포자기하고 맙니다. 이처럼 기대했던 것들이 일시에 무너지고 오랜 노력이 그만 헛수고가 되었을 때 사람들은 삶의 의욕을 상실하고 허무함을 느낍니다. 성공의 기약이 없는 빈 그물을 매만지는 것만큼 허무한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이대로 가다가는 일어설 용기도, 살아갈 의욕도 없습니다. 그냥 끝인 것 같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그 옛날에도, 지금도 인간의 삶의 허무한 현장에, 우리의 수고가 헛수고로 그치는 현장에 어김없이 찾아오시는 분이 계십니다. 빈 그물 같은 인생, 실패한 인생에게 늘 우리 주님이 찾아오고 계시다는 사실을 기억해야합니다. 주님이 시몬의 배에 올랐습니다. 왜입니까? 뱃놀이를 하자는 겁니까? 아니면 그물질을 가르치시겠다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이유는 단 하나, 그들의 헛수고를 채워주시기 위함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오늘 주님께서 우리의 배를 타시고자 합니다. 왜입니까? 우리의 실패한 부분들을 회복시키기 위해서입니다.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리라.” 고 하시는 말씀은 우리의 헛수고, 실패한 신앙의 모습들을 채워주시기 위해서입니다. 채워도 보통으로 채우시는 분이 아닙니다. 

오늘 본문을 보세요. “그물이 찢어지고 두 배에 나누어 실어도 배가 가라앉을 지경이었다.” (눅5:6,7)고 말하고 있습니다.
 
자, 이제 제자들은 그 순간에 돌이켜 함께 배를 타고 “깊은 데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 고 말씀하신 분이 누구인지를 생각하게 됩니다. ‘우리의 헛수고를 단숨에 돌려놓으신 분, 게다가 우리가 누구인지 그 실체를 정확히 깨닫도록 만드신 분, 이분이야말로 우리가 진정 만나고자했던 메시야가 아닐까?’ 하는 생각에 미치자 시몬 베드로가 무릎을 꿇고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라고 고백하기에 이릅니다. 

그리고 드디어 예수님의 능력과 존재를 깨달은 후 그들은 변화되었습니다. 11절입니다. “그들이 배들을 육지에 대고 모든 것을 버려두고 예수를 따르니라.” 오늘 이 말씀이 얼마나 귀한지 모릅니다. 

인생의 허무함을 단숨에 복의 열매로 바꾸어 놓으신 주님의 능력을 보았습니다. 그 능력 속에서 신앙을 깨달았습니다. 이제 무엇을 위해 나의 인생을 살아야 하는지가 보이기 시작했다는 말입니다. 즉 삶의 목적이 보이기 시작했고 그들은 그 목적을 붙잡았다는 이야기입니다.
 
오늘도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는다고 지적으로는 동의합니다. 하지만 대부분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자리까지 나가지 못할 때가 참으로 많습니다. 삶의 최종목적이 하나님께 있지 못하고 순간순간 이루어지는 삶의 성취에 만족하고 맙니다. 필요한 물고기를 잡기위해 하나님의 능력을 구하고, 현세에 얻을 명예를 위해 주님께 함께 배를 타달라고 졸라대는 것이 전부입니다. 그래서 세상사는 동안 그 배로 물고기만 많이 잡으면 끝이라고 생각하며 삽니다. 주님의 능력도 거기까지만 필요합니다. 이것이 우리 신앙의 한계입니다. 

이 얼마나 어리석은 일입니까? 우리가 우리 자신의 욕심을 위하고, 세상에서 내 삶의 목적을 성취하려고 하나님의 권능을 끌어들인다면 불교 신자가 돌부처에게 복을 달라고 비는 것이나 하등의 다를 바가 없습니다. 무속 인들이 정화수(井華水)를 떠놓고 자신의 소원이 이루어지기를 구하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오늘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삶을 산다고 자부한다면 나 자신을 위해서, 혹은 내 목적을 성취하기 위해서만 살아서는 안 됩니다. 삶의 목적만큼은 오직 하나님께 두는 삶이어야합니다. 정말 우리가 예수님을 따른다면 오늘 자신들의 모든 것을 버려두고 예수님을 따랐던 어부들처럼 그런 정신으로 주님의 능력너머 보이는 삶의 목적을 볼 줄 알아야한다는 사실을 오늘 본문은 우리에게 던져주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제자들에게서 배워야 할 중요한 것은 <버려두고 따르는 신앙> 입니다. 주님을 따르는 데에는 적어도 이들의 인생에 중요한 몇 가지씩을 희생해야만 하는 큰일이었습니다. 알다시피 생업과 사랑하는 부모와 처자식을 버려야만 했습니다. 오늘 날 우리가 이 사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합니까? 지나친 오해는 금물입니다. 

우리도 처자식을 버리고 가정도 팽개치고 교회에만 와서 살라는 말로 이해하면 될까요? 오늘 이 말씀을 듣는 모든 사람이 다 목사가 되어야 한다는 이야기입니까? 그런 이야기는 아닙니다. 본문의 의미를 제대로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본문의 초점은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서 생업을 포기해야 하느냐 마느냐를 택하라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본문은 가치의 문제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즉 예수를 따른다는 것의 가치입니다. 베드로와 안드레에게 있어서 예수를 따른다는 것은 자기의 생업을 포기해도 조금도 후회하지 않을 정도의 가치가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야고보와 요한에게 있어서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은 자기의 사랑하는 아버지를 버려두어도 조금도 후회하지 않을 정도의 가치가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여러분이 택한 예수 그리스도, 여러분이 가진 이 신앙의 가치가 얼마정도입니까? 정말 자신할 정도로 가치 있다고 여기시면서 살아가십니까? 모든 것을 버려두고도 따를 만한 가치로 여기시느냐 말입니다. 

더 중요한 것을 잡기 위해서 덜 중요한 것을 포기 할 줄 아는 것이 신앙의 지혜입니다. 가치 있는 것을 소유하기 위해 가치 없는 것을 버릴 줄 아는 신앙이 지혜로운 신앙입니다. 베드로와 안드레와 야고보와 요한이 모든 것을 포기할 수 있었던 것이 남이 하니까 나도 따라서 한 것도 아니요, 순간적인 충동에 의해서 반짝하는 기분으로 한 것도 결코 아닙니다. 

한때는 너무 좋아서 어쩔 줄 몰라 하며 봉사하고 헌신하다가 일순간에 무너져 내리는 그런 신앙이 아니요, 세월이 흘러도 여전히 성숙되지 못하는 신앙이 불쑥 불쑥 튀어나와서 순간에 무너져 버리는 그런 얄팍한 믿음이 아니라는 사실을 주목하시기 바랍니다. 오늘 우리는 어떻습니까? 그 동안 자신의 목적 없는 실패와 가치 없는 인생의 허무함을 주님의 능력 안에서 깨달았다면 그 실패를, 그 무가치함을, 그 목표 없는 인생을 어떻게 해야 할 것입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삶의 열정을 불태울 진정한 목표를 상실한 시대라고 합니다마는 주님을 따르는 우리들의 삶의 목표만큼은 분명해야 할 것입니다. 주님을 따르기로 작정한 신앙이란 모든 것을 버려두고 따라도 후회하지 않을 진정한 가치를 바라보는 것입니다. 오늘도 주님을 따르는 우리들의 삶의 결단이 내 남은 삶의 가치를 결정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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