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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믿음은 반응입니다 (행 5:1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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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은 반응입니다 (행 5:11-16)

일본의 유명한 과학자이자 그리스도인으로서 세계적인 영향력을 끼친 기독교 지도자가 한 분 있습니다. 바로 우찌무라 간조라는 분입니다. 어느 날 한 대학생이 그에게 찾아와서 이렇게 말합니다.
 
“선생님, 저는 성경을 믿고 싶고 또한 성경을 믿습니다. 그런데 성경 안에서 초자연적인 것, 기적적인 것, 사람의 상식으로 쉽게 납득할 수 없는 것도 믿어야 합니까? 예컨대 ‘예수가 물 위를 걸어갔다든지, 죽었다가 살아났다는 것이라든지’하는 것을 믿으라고 강요하실 필요가 있습니까? 그러한 것들을 믿지 않으면 성경을 믿을 수 없는 겁니까?”
 
그러자 이 질문을 받은 우찌무라 간조가 이런 대답을 해 주었다고 합니다.
 
“젊은이, 성경에 나오는 첫 번째 말씀이 무엇인 줄 아는가? 창세기 1장 1절 말이야,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다’고 말씀하고 있지 않은가? 그것은 기적 중의 기적이 아닌가? 무에서 유를 만들어 내신 놀라운 기적이지, 그러면 성경에 마지막 말씀은 무엇인 줄 아는가?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라고 기록되어 있네.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예수님께서 다시 역사 속으로 돌아오셔서 만물을 심판하신다는 것 또한 기적 아닌가? 이렇게 성경은 기적으로 시작하여 기적으로 끝난다네. 여보게 젊은이, 성경에서 기적을 다 빼버리면 성경에는 꼭 두 가지가 남게 되지. 한 쪽 책 표지와 반대쪽 책표지 말일세.”

오늘 본문은 사도들의 손을 통하여 표적과 기사가 많이 일어났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의 기적이 무엇을 가리키는 것일까요? 그것은 예수님이 그리스도이며 온 우주 만물의 주인이시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베드로를 비롯해 사도들의 손을 통하여 표적과 기사가 일어나는 것은 사도들의 능력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손을 사용하시는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가 그리스도이자 주님이시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본문을 보면 표적과 기사가 일어났음에도 불구하고 모두가 예수님을 믿지는 않았다고 기록해 주고 있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기적이 일어난다고 해서 다 믿음을 갖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믿음은 기적의 유무와 상관이 없습니다. 기적이 일어나면 더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을 것 같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기적이 일어나도 믿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믿지 않는 사람도 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믿음은 기적이 일어났느냐 아니냐에 의해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어떻게 반응했느냐에 따라 결정되는 것입니다.

Ⅰ. 그렇다면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우리는 어떻게 반응해야 하는 것일까요? 두려움을 가져야 합니다.

비폭력과 무소유 공동체인 브루더호프의 지도자인 요한 크리스토프 아놀드가 쓴 역작 중에 “두려움 너머로”라는 책이 있습니다. 거기에 마더레인 르 앵글이라는 분이 쓴 머리글은 이렇게 시작됩니다.

어느 날 저녁, 아이들이 숙제를 하고 있는 동안 책상에 앉아 글을 쓰고 있는데, 고등학교를 다니는 이웃사촌 밥이라는 아이가 집에 찾아와서 다짜고짜 질문을 던집니다.

“아줌마, 아줌마는 죽음이 두려우세요?”
 
그녀는 책상에 앉아 돌아보지도 않은 채 대답합니다.

“그럼, 물론이지, 밥”

그러자 그 애는 의자에 털썩 주저앉으며 한숨을 내쉬며 이렇게 말합니다.
 
“후우, 다행이다. 그런데 왜 다른 사람들은 그걸 인정하지 않으려고 하는지 모르겠어요.”
사람들은 죽음을 두려워합니다. 그것을 인정하면 보다 가치 있고 의미 있는 인생을 살려고 할거에요. 잠시 있다 사라지는 허무한 인생이 아니라 영원을 있는 풍성한 인생을 살려고 할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에게 심각한 문제가 있어요. 죽음이 두렵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 것입니다.

장례식장에 가보면 어떤 사람들은 고인의 엄숙한 죽음 앞에서 고스톱을 치느라 정신이 없어요. 막 싸워요. 불행한 사람들이죠. 한 사람의 죽음 앞에서 죽음의 두려움을 화투치는 것으로 애써 잊고 있는 것입니다. 본문 11절 읽어 보실까요?

“온 교회와 이 일을 듣는 사람들이 다 크게 두려워하니라”

무슨 일을 들었길래 이 사람들이 큰 두려움에 빠졌습니까?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죽음에 대해 들은 것입니다. 오늘날로 말하면 교회의 평신도 리더가 죽은 거에요. 다른 사람들은 몰라도 그들은 천국 갈 줄 알았거든요. 그런데 죽은 거에요. 왜요? 그들의 겉은 그 누구보다도 헌신된 사람들처럼 보였지만 그들의 마음은 거짓된 마음, 욕심으로 인해 사단의 지배를 받으며 살고 있었거든요.

그 순간, 사람들은 생각했을 거에요. 사실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마음이 자신들에게도 있었거든요. 그래서 사람들은 큰 두려움에 사로잡혀서 이런 질문을 갖게 된 것입니다.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두려움은 축복입니다. 하나님의 말씀 앞에 자신의 모습을 봄으로 두려워 떠는 자에게 복이 있는 것입니다.

Ⅱ. 한발 더 나아가서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우리는 어떻게 반응해야 하는 것일까요? 주님께 나아가야 합니다.

C. S. 루이스는 “기적”이라는 책에서 유령을 본 적이 있다는 사람을 단 한 명 만나 보았다고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사실은 그 사람은 유령을 보기 전에도 영혼의 불멸성을 믿지 않았지만, 본 후에도 여전히 믿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 사람은 유령을 직접 본 사람이었지만 자신이 환영을 본 것이거나, 아니면 신경이상으로 인한 착시 현상이었을 것이라고 말하더랍니다.

그 사람의 생각이 옳은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 사람의 이야기에서 우리가 분명히 알게 되는 한 가지 사실은 C. S. 루이스가 말한 것처럼 보는 것이 곧 믿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본문을 살펴봐도 그렇습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죽었습니다. 그것은 자연적인 죽음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난 것입니다. 또한 이어 사도들에 손을 통하여 민간에 표적과 기사가 많이 일어났습니다. 그런데 앞서 말씀 드린 것처럼 놀랍게도 믿지 않는 사람들이 여전히 있었습니다. 믿는 사람도 있었지만 믿지 않는 사람들, 그 나머지가 있었습니다. 왜 이들은 믿지 않은 것일까요?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죽음을 통해 두려움을 느꼈지만 주께로 나아가지는 않았기 때문입니다. 아니 이후 계속되는 표적을 보고도, 주께로 나아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본문 14절 보세요.
 
“믿고 주께로 나아오는 자가 더 많으니 남녀의 큰 무리더라”

믿지 않았던 사람들과 달리 믿는 사람들을 어떻게 설명하고 있습니까? ‘주께로 나아오는 자’ 그렇습니다. 믿는다는 것은 주께로 나아오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구원자이시오, 주님이신 것을 믿고 주께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그냥 믿고 있다’ 그 사람들은 구원 받은 사람들이 아닙니다. 야고보서 2장 19절은 말씀합니다.

“네가 하나님은 한 분이신 줄을 믿느냐 잘하는도다 귀신들도 믿고 떠느니라”

무슨 말이에요? 귀신들도 하나님이 한 분이시고 그분이 살아계심을 믿고 두려움에 떤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아는 것처럼 귀신들은 예수님께 나아가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주님으로 인정하지 않습니다. 그러기에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믿고 두려워하는 것이 아닙니다. 거기에 그친다면 구원은 없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이 메시지를 듣고 있는 우리는 어떻습니까? ‘하나님은 믿어’ 하시면서도 예수가 그리스도이시오, 주님이시라는 사실은 인정하지 않는 것 아닙니까?

그렇다면 이제 제대로 반응하셔야 합니다. 주 예수께로 나아가야 합니다. 오늘 본문은 심지어 병상에 누워있는 채로, 수많은 병자들이 주께로 나아갔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오늘 주께로 나아갈 수 있는 자는, 두려움에 머무는 자들이 아니라 자신의 죽음을 극복할 수 없는 연약한 인생, 아니 자신이 주인 되어 살아 죄와 허물로 망가진 인생이라는 것을 깨달은 자만이 주께로 나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그 축복이 저와 여러분에게 있기를 소원합니다.

Ⅲ. 마지막으로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우리는 어떻게 반응해야 하는 것일까요? 성도들의 모임을 사모해야 합니다.

주께로 나아가는 사람들, 다시 말해서 참된 믿음을 가진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성도들의 모임을 사모합니다. 어떤 대가를 치를지라도 그 모임은 나아가야겠다하는 열망이 있어요. 본문 12-13절 보세요.

“사도들의 손을 통하여 민간에 표적과 기사가 많이 일어나매 믿는 사람이 다 마음을 같이하여 솔로몬 행각에 모이고 그 나머지는 감히 그들과 상종하는 사람이 없으나 백성이 칭송하더라”

믿는 사람과 믿지 않는 사람을 어떻게 구별해 주고 있습니까? 믿는 사람들은 다 마음을 같이 하여 모이는데 나머지 믿지 않는 사람들은 믿는 사람들과 상종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믿는 사람들이 얼마나 모임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는지 원어를 연구해보면 쉽게 알 수가 있습니다. 여기서 ‘상종하는’으로 번역된 ‘콜라스다이’라는 단어는 ‘아교로 붙이다’, ‘함께 접합시키다’라는 뜻입니다. 다시 말해서 아교에 붙여진 것처럼 ‘친밀한 관계를 형성하다’라는 뜻입니다. 그렇습니다. 주께로 나아가 주님을 영접한 사람들은 모임에 적극적으로 참여합니다.

하지만 나머지는 달랐습니다. 그들은 믿는 사람들과 상종하지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나머지는 누구입니까? 그들은 예루살렘 교회 안에 이미 들어와 있었던 거짓 신자들입니다. 사도들이 선포한 복음, “예수가 그리스도이시오, 주님이시다”라는 말씀을 듣고 믿는 사람들이 교회로 모이자 시류에 편승해 교회 안으로 들어온 것입니다. “들어와 보니 괜찮았어요”하는 사람들입니다.

바나바와 같은 사람들이 소유를 팔아 그 판 것으로 필요를 공유하는 거에요. 그들은 생각했습니다. ‘교회는 바로 우리같은 사람들을 위해 필요한 곳이야’ 하지만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저주받아 죽는 것을 목격하면서 겁에 질렸습니다. 하나님께서 자신들의 심령을 꿰뚫어 보고 계심을 알고는 두려움에 사로잡혔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주께로 나아가고 싶지는 않았습니다. 자신이 주인 되어 살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믿는 사람들을 칭찬하면서도 정작 자신은 믿는 성도들의 모임에 속하기를 꺼려한 것입니다. 적당한 거리를 두면서 말입니다. 그러나 요한1서 3장 15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마다 살인하는 자니 살인하는 자마다 영생이 그 속에 거하지 아니하는 것을 너희가 아는 바라”

그렇습니다.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자, 그 안에 영생은 없습니다. 성도들의 모임이 사모되지 않는 사람은 진실된 믿음을 가진 것이 아닙니다. 참된 믿음을 가진 사람, 그 사람은 하나님을 두려워하기에 주께로 나아가는 사람입니다. 성도들과 함께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위해서 모이기를 힘쓰는 사람입니다. 여기, 바로 여기 그런 사람 안 계십니까?

그런 인생을 살았던 분을 만난 적이 있습니다. 바로 중국열방학교의 최하진 교수입니다. 그는 카이스트에서 화학공학으로 박사 학위를 받고 미국 스탠포드 대학교의 연구교수로 살던 사람이었습니다. 어려서부터 교회를 다녔지만 그에게 참된 믿음은 없었고 흔히 말하는 선데이 크리스천으로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대덕 연구소에 다닐 때 그는 퇴근 후면 연구원들과 화투를 치며 돈을 잃지 않기 위해 광만 팔아서 광팔이라는 별명을 갖고 있었습니다. 또한 그는 종종 유성의 한 호텔 스카이라운지에서 ‘섬씽 스페셜’을 마시며 대한민국의 섬씽 스페셜, 특별한 사람이 될 거라는 야망을 갖고 살았습니다.

그런데 그러던 어느 날 여느 때처럼 광을 팔고 집으로 돌아오다가 문든 이런 생각이 들었다고 합니다.

“정말 이렇게 살아도 되는 걸까?”
 
갑자기 찾아온 불안감에 그는 집으로 돌아와 성경을 읽어보기로 했습니다. 창세기를 읽던 중 아브라함을 부르시는 장면이 나왔습니다. 그러나 별 흥미가 없었습니다. 모태신앙이었던 그는 누구보다도 귀가 따갑도록 아브라함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그에게 다른 사람의 이름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습니다. 바로 아브라함의 아버지 데라였습니다. 그는 그의 식솔을 데리고 갈대아 우르를 떠나 가나안으로 가던 중 하란에 와서 정착했습니다. 그도 아브라함과 함께 자신의 고향을 떠난 것입니다. 그런데 그는 목적지인 가나안이 아닌 하란에서 머물다 죽은 것입니다.

“데라는 이백오 세를 향수하고 하란에서 죽었더라”

사실 그는 그때 고스톱 말고도 직장 선배 연구원들을 따라다니면서 아주 비싸고 비싼 명품 오디오 세트를 장만하는 취미에 빠져 있었습니다. 또한 주중에는 골프에 미쳐 있었고 주말에는 가족과 함께 산과 바다를 찾아다니면서 인생을 즐기려고 버둥거리고 있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구절을 읽는 데 자꾸 두 단어가 반복되는 것이었습니다.

“데라…죽었더라, 데라…죽었더라, 데라…뒈졌더라”

어느새 ‘죽었더라’라는 단어가 ‘데라’와 합쳐지면서 ‘뒈졌더라’로 변해가고 있었습니다. 그러면서 자신의 모습이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낮에는 대덕 연구단지의 점잖고 지적인 전문 과학자로 있지만 밤에는 유성이라는 관광도시에서 유흥의 물결에 휩쓸려 여기저기를 기웃거리며 밤거리를 탐닉하고 싶어하는 모습이 보이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후 그는 주님께로 나아갔고 주님을 위해서 자신의 인생 전부를 걸었습니다. 지금 그는 중국의 젊은이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그들을 섬기기 위해 미국 스탠포드 대학교의 연구교수라는 안정된 삶을 포기하고 중국에서 열방학교를 세워 가장 낮은 자리에서 섬기고 있습니다. 그런 그가 “반응”이라는 책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능력 있는 그리스도인은 하나님께 반응하는 자이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 반응하는 사람이 바로 참된 믿음을 가진 사람입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기에 주께로 나아가 주님께 자신의 전 인생을 거는 사람, 성도들과 함께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위해서 담대히 나아가는 사람, 그 사람이 바로 지금 하나님 찾고 있는 사람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어떻게 반응하시겠습니까?  (김인환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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