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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아브람의 선택, 나의 선택? (창 13: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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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브람의 선택, 나의 선택? (창 13:1-18)


오늘 저는 만약에 라는 가정 하에서 한 가지 질문을 드리면서 말씀을 시작하고자 합니다.  만약에 어느 날 갑자기 여러분에게 생각지도 않았던 1억원이 생긴다면 무엇을 하시겠습니까?  화장실 한 개 더 있는 집을 사겠다, 좀더 세련된 차를 사겠다, 아이들 교육비 걱정은 없겠다, 아니면 당장 생활비 문제는 한시름 놓겠다는 등 여러 생각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사실 오늘 많은 사람들은 맘모니즘에 빠져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저 돈만 많이 있다면 모든 것이 다 해결될 것 같다는 생각 속에 살아갑니다.  솔직히 그와 같은 생각은 어쩌면 오늘 저와 여러분들에게도 없지 않아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돈으로 잠을 잘 수 있는 멋진 침대는 살 수 있어도 단잠은 못 삽니다.  돈으로 맛있는 음식은 살 수 있지만 건강은 못 삽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탄은 우리에게 돈만 있으면 모든 것이 해결될 수 있다고 속삭입니다.  그렇지만 돈 때문에 또 다른 문제를 야기시키고 돌아버린 인생들도 많이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물론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돈 그 자체가 죄는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돈에 대한 우리의 신앙적이면서도 건강한 가치관입니다.

아브람은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하나님께서 지시한 땅으로 가라고 하신 명령에 온전하게 순종하지 못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그의 불완전하고 연약한 순종에 함께 하시면서 계속해서 축복해 주십니다.  그는 기근으로 인해 애굽으로 내려갑니다.  그런데 자신의 아내가 너무 아름답다는 이유로 사람들이 자신을 죽일 것이라는 두려움 때문에 아내를 누이라고 속였습니다.  그리고 아내를 애굽의 왕에게로 보냈습니다.  아내를 애굽왕에게로 보낸 대가로 그는 극진한 대접을 받았을 뿐 아니라 양떼와 소 떼와 암나귀와 수나귀와 낙타를 비롯해서 많은 노예들을 얻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아브람을 사랑하셔서 애굽왕과 그 집에 큰 재앙을 내리십니다.  결국 아브람은 아내와 함께 과거에 비해 훨씬 더 많은 재물을 가지고 가나안으로 되돌아오게 됩니다.

오늘 봉독한 본문 2절 말씀에 보면 "아브람에게 가축과 은과 금이 풍부하였더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또 아브람은 애굽에 내려갈 때 하나님께 예배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아브람의 연약함과 불순종에도 불구하고 그를 애굽에서 올라오게 하셨습니다.  아브람은 하나님을 만났던 장소, 벧엘에서 하나님 여호와를 바라보고 다시 하나님과의 교제를 시작했습니다.  교제도 회복되고 돈도 많이 생기니 이보다 더 좋을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종종 돈을 소유하는 것이 하나님 신뢰하는 것을 대신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나도 모르게 돈의 세력에 굴복하게 되는 것을 봅니다.  돈은 하나님 대신 자기가 안전을 주고 평화를 줄 수 있다고 유혹합니다.  하나님께 드려야 할 사랑을 돈이 대신 빼앗아갑니다.  그래서 성경은 디모데전서 6장 10절에서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라고 했습니다.  마태복음 6장24절에서는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고 했습니다.

아브람은 많은 재물을 얻었습니다.  그러나 그에게는 또 다른 문제가 생겼습니다.  그것은 사랑하는 사람과의 문제였습니다.  돈 때문에 발생한 문제입니다.  그 많은 육축으로 말미암아 사랑하는 사람과 다투게 된 것입니다.  이러한 예는 우리들 주변에서도 얼마든지 찾아볼 수가 있습니다.  어렵고 힘들 때는 서로를 의지하면서 서로가 잘 되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재산이 늘어나면서 서로에 대한 견제로 신경이 곤두서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좋았던 우정이 돈으로 말미암아 깨지기 시작합니다.  친한 친구 뿐 아니라 가족들의 마음도 산산조각이 납니다.

오래된 이야기입니다만 어느 날 어떤 사람이 서울의 어느 목사님을 찾아와서 "형님을 설득해 주십시오."라고 요청한 일이 있었습니다.  내용인 즉 "아버님이 돌아가신 후에 유산을 상속했는데, 자신이 받은 재산이 약 500억 정도 되고, 자기 형은 더 많이 가졌다.  그런데 아버지의 유서를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1억이 형님에게 갈 수도 있고, 자기에게 올 수도 있으니 형에게 1억을 양보해 달라고 말해달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형이 아무개 교회 장로인데 목사님을 무척 존경하니까 목사님이 좀 말씀해 주십시오."

그 때 그 목사님은 "가족간의 돈 문제는 제가 해결할 수 없습니다."라면서 거절하고 돌려보냈다고 합니다.  나중에 두 형제가 싸우다가 결국 동생의 부인이 너무 많은 스트레스를 받아서 그만 입이 돌아가 버렸다고 합니다.

아브람에게도 돈 때문에 인간 갈등이 생겼습니다.  그런데 오늘 봉독한 본문은 아브람이 사랑하는 사람과의 사이에 갈등 구조가 형성되었을 때에 그가 어떻게 그 문제를 해결하고 있는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아브람이 갈대아 우르에서 나올 때 동생의 아들인 조카 롯을 데리고 나왔습니다.  이것은 그가 이집트에 가서 많은 재물을 얻은 후에 벧엘에 올라올 때까지 줄곧 계속해서 롯과 함께 생활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그렇게 많은 재물을 얻어서 벧엘로 올라 오다보니 문제가 발생하기 시작을 합니다.  아브람의 소떼와 양떼가 롯의 소떼와 양떼와 다투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도 그럴 것이 이들이 사는 지역은 사막지대입니다.  사막은 물이 넉넉하지 못한 곳입니다.  그런데 그들에게는 가축이 점점 늘어만 갑니다.  물 전쟁이 일어나게 됩니다.  때문에 내 가축들에게 조금이라도 물을 더 먹여야 하겠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러다 보니 자리다툼도 일어납니다.  급기야는 종들 사이에서 주먹다툼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본문에서 눈여겨보아야 할 것은 이러한 때에, 그러니까 아브람과 롯의 종들이 서로 다투며 문제가 발생하기 시작한 때에 아브람은 벧엘에 올라와 하나님께 단을 쌓고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기 시작했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습니다.  그리고 이 문제를 하나님 중심으로 풀어가기 시작합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문제가 발생하면 그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는 방법이 두 가지의 형태로 나타납니다.  하나는 자기 중심으로 문제를 해결하려고 합니다.  이런 사람은 언제나 자기 입장이 우선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자세로는 결코 문제가 해결되지 않습니다.  다음으로는 하나님 중심으로 문제를 해결하려고 합니다.  이런 사람에 있어서 자신의 입장은 나중입니다.  타인을 먼저 생각합니다.  이러한 사람에게는 문제가 해결되지 않을 수가 없을 것입니다.  아브람은 하나님 중심에 서서 이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아브람이 어떻게 문제를 해결하고 있습니까?  그리고 오늘 우리들에게도 동일한 갈등의 문제가 일어났을 때 어떻게 그 문제를 해결해야 할까요?

첫째로, 아브람이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적극적으로 나서기 시작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인간관계에서 문제가 생길 때 가장 중요한 것은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적극적인 의지를 가지고 나서야 한다는 것입니다.  갈등이 생기고 마음이 갈라지면 먼저 말을 꺼내는 것이 힘듭니다.  그러나 아브람은 롯을 먼저 부릅니다.

여러분에게 문제가 생기면 반드시 해결하겠다고 생각하십시오.  그냥 그냥 넘어가지 마십시오.  사랑해야 할 부부가 사랑하지 않는 것은 문제입니다.  이 문제를 해결하겠다는 적극적인 의지가 필요합니다.  아브람은 그 문제가 오래 가면 좋지 않을 것을 알았습니다.  가나안과 브리스 사람들이 그 자리에서 지켜보고 있는 것을 알았습니다.  삼촌과 조카인 그들 두 사람의 다툼이 이방인들 앞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탕자의 아버지가 재산을 가지고 나간 아들을 적극적으로 끝까지 기다리는 것처럼 하나님의 사랑으로 적극적으로 해결하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교회 안에서 서로 협력하고 사랑해야 될 사람이 다투고 원수가 되는 것은 비극입니다.  부부 사이에도 마음이 틀리면 마주하기가 싫습니다.  먼저 말을 꺼내기가 싫습니다.  여기에 보다 능동적인 대처가 필요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미움은 꽈리를 틀고 뿌리를 내립니다.  그것이 뿌리를 내리고 가지를 뻗기 시작을 하면 더 이상 치유하기 어려운 상황으로 치달을 수도 있습니다.  아브람은 그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그가 스스로 문제를 풀어야 하겠다고 생각을 하고 적극적으로 나섭니다.

둘째로, 원리 원칙에 충실해야 합니다.

아브람이 롯을 불러놓고 말합니다.  "우리는 한 친족이라."  하나라는 말입니다.  나눌래야 나눌 수 없는 관계요, 미워할래야 미워할 수 없는 사람이라는 말입니다.  이 일 때문에 사이가 나빠져서는 안될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너와 나는 친족이며 하나다.  네게 손해가 되면 내게도 손해이고, 너가 실패하면 그것은 곧 나의 실패이고, 너의 영광이 곧 내 영광인 우리는 친족이다."  아브람은 그 원리를 충성스럽게 붙잡습니다.

일반적으로 화가 나면 감정이 먼저 우리를 지배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들어오지 않습니다.  끓어오르는 감정이 먼저 앞섭니다.  그러나 그것은 또 다른 문제를 일으키는 요인이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혹여 인간관계로 갈등을 가지고 고통을 겪으시는 분들이 계십니까?  이 원리 앞으로 나오십시오.  하나님께서 이 문제를 어떻게 생각하실까를 먼저 생각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나를 비추기 전에는 나를 객관화시킬 방법이 없습니다.  아브람은 하나님의 말씀 앞에 조용히 서서 우리가 싸우면 안될 친족이라는 원리를 이야기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가나안 사람과 브리스 사람들, 세상 사람들이 우리와 함께 있으면서 우리를 비웃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삼촌과 조카가 서로 다툰다고 손가락질을 할 것이라는 것입니다.  우리 경상도 말에 "남사스럽다"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남 보기에 부끄럽다는 말입니다.

그런가하면 세 번째로는 상황인식, 현실인식을 정확히 합니다.

본문 6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다같이 읽도록 하겠습니다.
"그 땅이 그들이 동거하기에 넉넉하지 못하였으니 이는 그들의 소유가 많아서 동거할 수 없었음이니라."

아브람과 롯은 그들이 고향을 떠나오면서 오늘까지 줄곧 함께 생활해 왔습니다.  아브람이 있는 곳에 롯이 있었고, 롯이 있는 곳에 아브람이 있었습니다.  그렇게 살아오는 가운데 그들에게는 가축과 재물이 많이 늘어났습니다.  이제 아브람은 그들 두 사람이 함께 하기에는 이곳이 너무 좁은 땅이라는 현실을 인식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올바른 믿음은 "믿사오니!"하고 맹목적으로 나아가는 것이 아닙니다.  보통 예수 믿는 사람들이 앞뒤를 생각하지도 않고 믿음이라는 명목 하에 일을 밀고 나갑니다.  그러나 그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가를 알아야 합니다.

우리 나라의 기업들 가운데 이랜드가 있습니다.  기독교적으로 운영하는 기업인데, 언젠가 어느 글에 보니까 이랜드의 박회장께서 이런 하소연을 털어놓았습니다.  "이제는 예배당을 안 짓기로 작정했습니다.  교인들이 믿음은 좋은데 대책이 없습니다."

이랜드에서 건설업도 하는데 교회 예배당을 지어주고 공사비를 제대로 못 받는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교회들은 예산에 맞지 않게 건축을 하고서 믿음으로 지었다고 한다는 것입니다.  사실 남에게 손해를 끼쳐가면서 지었지, 그것이 어떻게 믿음으로 지은 것입니까?  예수님께서 이 땅에 사시면서도 우리에게 비유로 말씀했습니다.  망대를 세우려고 할 때도 비용을 먼저 계산해 보고, 싸움에 나갈 때도 적군이 얼마나 되는지 셈을 해 보고 나가라고 말입니다.  그것이 누가복음 14장에 나옵니다.(28, 31)  책임과 손해를 남에게 맡기고 하나님의 축복만 자기들이 받았다고 해서는 안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진리를 붙잡는 것과 동시에 내 인생 앞에 펼쳐진 현실을 바로 인식해야 합니다.  문제가 생기면 문제를 깊이 생각해야 됩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이 사업이 안되면 금식 기도하러 들어갑니다.  우리가 금식 기도하는 것, 이것은 영적으로 유익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의 삶은 성실하지 않고, 사업을 지혜롭게 하려고 노력하지도 않습니다.  이 일이 잘못될 때 하나님의 영광을 얼마나 가릴는지도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러면서 기도하면 모든 문제가 해결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잘못된 자세입니다.  이러한 사람은 아무런 노력도 하지 않고서 가만히 누워서 감나무에 감이 떨어지기를 기다리는 사람입니다.

우리는 "이 문제로 왜 갈등했는가?  이 문제가 앞으로 어떻게 발전할 것인가?  이 문제가 해결되기 위해 다른 방법은 없는가?"를 생각해야 합니다.  현실에 대한 분명하고도 정확한 인식이 있어야 합니다.

네 번째, 양보입니다.

아브람은 그 땅이 두 가족이 함께 살 수 없는 좁은 지역인 것을 알고 양보합니다.  본문 9절을 다같이 읽도록 하겠습니다.
"네 앞에 온 땅이 있지 아니하냐 나를 떠나가라 네가 좌하면 나는 우하고 네가 우하면 나는 좌하리라."

조카인 롯에게 우선권을 먼저 줍니다.  이것은 남을 배려하는 마음입니다.  사실 그리스도인들이 이 세상을 살면서 남을 배려하지 않는다는 비난을 종종 듣습니다.

하나님이 보시는 나에 대한 객관적인 시각이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항상 자기 안에 갇혀 삽니다.  그리고 자기는 자기 속에 안 갇혔다고 착각하며 삽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보는 시각으로 내가 정당한가를 보아야합니다.  주관 속에 빠지면 나는 언제나 옳고, 남은 언제나 틀립니다.  남에게 상처를 주면서도 자기가 상처 주는지조차도 모릅니다.  기억하십시오.  자기 주관 속에 빠지면 문제 해결은 없습니다.

아브람은 조카 롯에 대해서 "네가 먼저 가지라"고 합니다.  이것은 우리 주님께서 2천년 후에 이 땅에 오셔서 산상수훈에서 말씀했던 삶과 일치합니다.  누군가가 너에게 5리를 가자고 하면 함께 10리를 가고, 겉옷을 달라고 하면 속옷을 주고, 상처를 주기 보다 상처를 입고, 남을 이겨서 굴복시켜 군림하기보다는 내가 져주는 것,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의 모습이라고 하셨습니다.

어떻게 좋은 조건을 상대방에게 먼저 선택하라고 할 수 있습니까?  그것은 그의 마음 속에는 진정한 보화가 무엇인지를 알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하늘의 부요가 무엇인지를 알았기 때문입니다.  천국의 부요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 땅의 부요가 아니라 하늘의 부요함을 품고 살아가는 자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내 것인 것을 내가 갖지 않으니까 얼마나 자유롭게 누릴 수 있는지 모릅니다.  아브람에게는 그런 믿음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부요가 있었기 때문에 내어줄 수가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축복, 하나님의 임마누엘의 능력이 어떤 것인지 알 때, 이러한 일이 가능합니다.  하나님의 부요를 알게 되면 남을 배려하는 마음이 생깁니다.

그런데 롯은 아브람의 제안을 듣자마자 눈을 들어 천지를 바라봅니다.  우리 같으면 "삼촌이 먼저 선택해야지요. 내가 어떻게 먼저 선택하겠습니까?"라고 말할텐데 롯은 그렇지를 못합니다.  그는 언제나 자기 중심적입니다.  인간이 이기심에서 벗어났는가는 자기에게서 벗어났는가와 비례합니다.  롯은 넒은 요단 들녘, 하나님의 저주가 쏟아지기 직전의 그 기름진 들녘을 선택했습니다.  그 땅에 소돔과 고모라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롯은 눈에 보이는 부와 맑은 물과 푸른 초장을 바라보고 선택했습니다.  하나님의 축복스러움을, 하나님의 영광을 알았지만 눈에 보이는 대로 선택합니다.

성경을 보십시오.  그가 아름다운 땅을 차지하고서 하나님을 찬양했다는 이야기가 없습니다.  그곳에서 하나님 앞에 제단을 쌓았다는 이야기도 없습니다.  결국 얼마 후에 유황불로 소돔과 고모라는 역사상 자취를 감춰버렸습니다.  그는 눈에 보이는 가축 중심의 인생을 살았습니다.  그 땅에 얼마나 죄악이 관영했는지 생각지를 못했습니다.  자녀들이 얼마나 나쁜 영향을 받을 것인지, 영적으로 얼마나 손해볼 것인지를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저 눈에 보이는 풍요로움과 아름다움만을 보았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롯도 하나님을 알고 믿었던 사람입니다.  그는 아브람과 동행하면서 하나님이 아브람에게 주신 축복을 눈으로 보았던 사람입니다.  그러나 결정적인 순간에 그는 눈에 보이는 대로 선택했습니다.  이와 같은 올바르지 못한 행동은 비단 롯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을 합니다.  솔직히 오늘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는 믿음의 권속들 가운데서도 쉽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살아 계심을 믿습니다.  천국과 지옥이 있음도 믿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고백하고 믿는 우리들의 행동은 언제나 자기 중심적이요, 눈에 보이는 대로입니다.  그러고서 어떻게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다고 말할 수가 있다는 것입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인생을 살아가면서 때때로 선택해야 할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 선택의 때에 하나님이 어디에 계신가를 생각하십시오.  미국의 경건한 그리스도인들은 시장 바구니를 가지고 장 보러 갈 때에도 기도하면서 쇼핑 목록을 만들어 간다고 합니다.  그리고 필요한 것만을 산다고 합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그저 눈에 보이는 대로 보고, 손에 들리는 대로 들고 사십니까?

아브람은 롯이 떠난 다음 동서남북을 바라보면서 "내가 너와 함께 있겠다.  내가 너를 축복한다.  네게 보이는 땅을 다 주겠다.  네 자녀를 바다의 모래처럼 무한히 주겠다"고 약속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습니다.  그 땅의 이름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성경은 아브람이 헤브론에 거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헤브론이라는 말은 '교제'라는 뜻입니다.  어쩌면 거룩한 하나님의 사람 아브람이 하나님 한 분만을 교제하며 살았던 곳이었기에 후대 사람들이 그렇게 이름을 붙였는지도 모릅니다.  그는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보고 믿음으로 전진해 나갔습니다.

반면 롯의 잘못된 선택 하나가 얼마나 비참하게 그의 인생을 마치게 만들었는지 모릅니다.  자신의 인생만 비참하게 끝났던 것이 아니라 그의 잘못된 선택 하나로 온 가족이 비참하게 끝나고 말았습니다.  보십시오.  그의 아내는 소금 기둥이 되었습니다.  그의 두 딸은 아버지에게 진탕 술을 먹여서는 관계를 갖고 아이를 낳게 됩니다.  그리고 그들은 모압과 암몬 족속의 조상이 되는데 그들은 영원히 저주받은 족속이 되고 말았습니다.

어느 회사 광고인지는 기억이 나지를 않습니다만 오래 전에 텔레비전 광고에 이런 광고가 있었습니다.  아마 여러분께서도 기억하실 것입니다.
"순간의 선택이 평생을 좌우한다."

저는 이 말을 누가 만들었는지는 모르지만 정말로 잘 만들었다고 생각을 합니다.  사실 물건 하나 잘못 선택을 해서 두고두고 골치 덩어리가 되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저는 이 말을 이렇게 바꾸어 봅니다.  "순간의 선택이 영원을 좌우한다."  그렇습니다.  선택은 내 생애를 주장하고 지배합니다.  그것이 이 땅에서의 삶뿐만 아니라 죽어서 영원히 좌우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실 때 양편에 같이 달렸던 두 강도를 생각해 보십시오.  한 강도는 십자가에 달려서 자신을 저주하고 예수님을 저주했습니다.  그렇지만 다른 한 강도는 죽어 가는 그 마지막 순간에도 예수님을 영접하고 자신을 예수님께 의탁했습니다.  그들의 순간의 선택은 결국 영생과 영벌로 갈라졌습니다.

그렇다면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은 어느 길을 선택하시겠습니까?  어떤 삶을 선택하시겠습니까?  아브람의 삶을 선택하시겠습니까?  아니면 롯의 삶을 선택하시겠습니까?

우리가 알아야 하는 것은 아브람이 롯에게 양보한 그 때부터 그의 신앙이 더 온전해졌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두 번에 걸친 아브람의 실수와 연약과 부족함을 보셨습니다.  그러나 이제 하나님만을 붙잡고 나아가는 그를 보십니다.  그리고 그의 부족함과 실수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그의 인생을 복되게 하셨습니다.

미국의 방대한 철도조직을 갖고 있는 미국의 대표적인 철도회사 회장이 임종을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큰 아들이 아버지에게 달려와 손을 붙잡습니다.  그 때 아버지가 하는 말이  "아들아, 너는 지금 이 세상에서 가장 비참한, 실패한 자의 손을 붙잡고 있구나"

아들은 반문합니다.  "아버지가 실패자라니요?  아버지만큼 성공한 사람이 없습니다.  그 거대한 철도 조직을 아버지가 만드시지 않았습니까?  아버지는 지금 몇 십만명을 먹여 살리고 있습니다.  그리고 미국의 수천만명의 사람이 아버지가 만든 기차에 몸을 싣고 다닙니다."

아버지가 말합니다.  "그렇지 않다.  그 철도를 계획하고 건설하고 사업을 키워 돈을 벌기까지 나는 그리스도를 떠나 있었다.  그리스도가 없는 것은 모든 것이 실패다.  내가 이것만은 네게 말해주어야겠다."

그 사업가는 임종 때가 되어서야 삶에 있어서 진정한 가치가 무엇인지를 깨달았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인생은 선택입니다.  무엇을 선택해서 인생을 계획해 나가십니까?  내게 있어서 진정한 가치가 무엇입니까?  감각처럼 눈에 보여지는 대로 롯처럼 선택을 하시겠습니까?  아니면 살아 계신 하나님을 의식하는 아브람과 같은 선택을 하시겠습니까?  기억하십시오.  선택은 분명히 여러분의 자유입니다.  그러나 순간의 선택이 여러분의 영원을 결정합니다.

내가 결정하는 대로 그렇게 내 생애가 흘러갑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영광이 있는, 하나님이 기뻐서 어쩔 줄 모르는 그 선택을 하십시오.  저는 우리 성도들의 생애가 아브람의 선택과 같이 보다 멋진 선택을 하는 삶이 되어지기를 축복합니다. (오주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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