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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어떤 임금의 비유 (마 18:2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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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임금의 비유 (마 18:21-35)

교회에서 가장 많이 사용하고 있는 단어는 구원이다. 또 많이 사용하는 단어는 그 구원을 준비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설명하는 은혜라는 말이다. 구원과 은혜란 단어는 사용할 때마다 죄를 덮어 준 용서, 그 용서라는 것이 전제되어 있다. 

구원 얻음, 은혜 받음이란 말 속에는 용서 받음이란 것이 포함되어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여러분과 나는 하나님의 무한한 용서를 받고 산다는 말이다. 도무지 용서받을 수 없는 내가 용서를 받아서 새 사람이 되었다는 말이다. 이것을 알고 있는 우리는 용서의 사람이 되어야 한다. 용서의 귀재가 되어야 한다. 

문제는 용서는 받았는데, 분명 죄의 무거운 짐을 다 벗어 던졌는데 나에게 나름대로 얽혀 있는 자들의 허물이나 실수를 용서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은혜는 물에 새기고 원수는 돌에 새긴다고 미워하는 사람, 내게 어려움을 주는 사람, 나를 넘어뜨린 사람을 용서해주지 못한다. 

그런데 마18:21을 보면 베드로는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일곱 번까지 하오리이까”라고 묻는다. 

이는 엄청난 발상이었다. 일곱 번을 용서한다는 생각 자체가 대단한 것으로 하늘과 땅을 울릴 만한 경천동지(驚天動地)의 말이었다. 그러나 예수님의 대답은 일곱 번이 아니었다. 

마18:22 “일곱 번뿐 아니라 일곱 번을 일흔 번까지라도 할지니라.” 

무한대의 용서를 해야 되는 것이 예수님의 가르침이다. 혹시 7번씩 70번이므로 7×70=490이니 490번 용서하고 491번째는 용서하지 말라는 뜻인가? 절대 아니다. 완전수 7과 70번, 이는 횟수를 헤아리지 않는 조건 없는 용서를 뜻한다. 

그러므로 천국은 용서하는 나라다. 용서가 융단처럼 깔려 있고 용서가 비단처럼 펼쳐져 있고 용서가 비바람을 막고 용서가 양식이 되고 용서가 호흡이 되고 용서가 온 몸을 덮어주는 나라다. 

그러므로 마18:23 “천국은 그 종들과 결산하려 하던 어떤 임금과 같으니”라고 하였다. 어떤 임금의 비유가 용서를 가르치는 비유다. 어떤 임금이 한 일이 무엇인가?

1. 결산한다. (마18:23)

사람은 누구나 결산을 한다. 하루 일과도 결산을 하고 1년의 52주일도 망년회 전 결산을 한다. 결산의 자리에 서는 것, 이 땅에서 반복되는 삶이다. 허나 1년 결산, 10년 결산을 하다보면 평생 결산의 날이 오고 인생 종치는 날, 그 마지막 결산의 날이 돌아온다. 종들이 임금 앞에 서서 결산하듯 우리 인생들도 하나님 앞에 서서 결산을 한다. 

인생의 어느 날에 하나님의 결산을 피할 자가 없다. 살다가 생이 종치면 결산이 없는 인생으로 흐지부지 끝난다고 생각하는 이런 생각은 틀린 생각이다. 임금이신 하나님이 결산하신다.


2. 빚을 탕감한다. (마18:27)

마18:24을 보면 결산할 때에 어떤 종은 만 달란트 빚을 짊어지고 있었다. 자기의 힘과 방법으로 도무지 해결되지 않는, 갚을 것이 없는 자가 되고 말았다. 만 달란트, 이는 천문학적 경제 수치다. 자신을 노예로 팔고 아내와 자식과 가지고 있는 동산, 부동산을 다 팔아 모아도 못 갚은 액수다. 

그런데 임금이 되신 그 종의 주인의 마음에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들어왔다. 그래서 종을 놓아 보낸다. 긍휼이 여기는 마음이 들어오므로 빚을 탕감해줬기 때문이다. 

임금은 여기서 하나님이다. 하나님은 인생들을 결산할 때 긍휼히 여기는 사랑의 마음 때문에 빚을 탕감해준다. 빚은 여기서 죄와 허물이다. 우리의 죄와 허물이란 하나님이 탕감해주기 전에는 어느 누구도 자유로울 수 없다. 죄의 삯이란 사망인데 사망의 삯이 얼마나 큰지 용서받을 수 있는 조건이나 자격이 우리 인생에겐 하나도 없다. 

만 달란트의 빚진 자, 엄청난 액수의 금액이다. 월리엄 바클레이(William Barclay 1907-1960)는 한 달란트를 6천 데나리온으로 보았다. 그렇다면 6천만 데나리온인 셈이다. 보다 쉽게 설명하면 만 달란트의 빚의 액수의 크기는 당시 로마 제국이 주변 국가들로부터 받는 세액의 총액이었다. 

당시 1달란트는 약 26Kg에 해당하는 금이나 은의 가치였다. 시리아 지역은 로마에 1,000달란트, 유대와 사마리아는 600달란트, 이집트는 2,000달란트, 갈리아나 및 에스파냐는 500달란트의 세금을 냈다. 그래서 그것은 모두 만 달란트가 되었으니 어떤 임금을 로마 황제로 보아도 된다. 

로마 황제에게 갚아야 할 만 달란트라면 평민은 절대 갚지 못하는 액수다. 그러니까 황제 임금은 하나님을 상징하고 하나님이 용서하여 탕감하니까 되는 것이지 사람은 무능하다. 

이처럼 용서받은 사람은 모든 것에서 자유인이 된다. 탕감을 받은 용서는 그만큼 고귀하고 가치 있는 것이다. 용서 받음은 싸구려가 아니다. 아무도 해결할 수 없는 채무가 벗어진 것이 용서다. 고귀하고 고귀하며 고귀한 것이다.


3. 귀하고 귀한 용서를 경험하고도 용서를 못하는 자에게는 노하신다. (마18:33~34)

자유인이 된 종은 행복과 축복의 사람이다. 만 달란트의 빚을 거저 탕감을 받았으니 이 무슨 행복인가? 그런데 자유인이 된 종에게 100데나리온의 빚을 진 동료가 있었다. 그를 만나게 되자 동료 친구에게 달려가 목을 잡고 빚을 갚도록 옥에 가두었다. 

이것을 알게 된 주인은 마18:33~34에서 이렇게 말한다. 

“내가 너를 불쌍히 여김과 같이 너도 네 동료를 불쌍히 여김이 마땅하지 아니하냐 하고 주인이 노하여 그 빚을 다 갚도록 그를 옥졸들에게 넘기니라.” 

100데나리온의 돈은 만 달란트의 가치에 비하여 60만의 1이다. 60만개의 잘못을 용서 받은 이가 1개의 잘못을 붙잡고 옥에 가두니 임금이 진노한 것이다. 

이 비유의 결론은 이렇다. 

마18:35 “너희가 각각 마음으로부터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나의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 

임금의 결산하는 모습이 곧 하나님의 모습이다. 하나님으로부터 자유인이 된 자는 내게 빚진 자들은 조건 없이 용서하고 자유케 해주어야 한다. 친구의 빚을 탕감하지 못하고 형제의 빚을 받으려고 하면 안되듯 우리가 용서 받고도 용서하지 못하면 우리는 하나님의 진노를 사서 형벌에 들어가야 한다. 

주님이 가르쳐주신 오늘의 비유는 천국이 용서의 나라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나라를 만지려면 용서하고 용서받고, 또 용서하고 용서받는 삶을 살아야 한다. 


용서하는 것은 첫째, 나를 위한 것이다.

세상을 살면서 미워하고 원수를 맺는 일들이 많다. 그러나 내가 남을 용서하므로 나의 용서 받은 모든 죄와 허물이 다시는 나를 괴롭히지 않는다. 하나님께 용서 받은 자유와 해방의 기쁨이 완성되는 것은 내가 남을 무한정 용서하는 데 있다. 그러니 나를 위한 것이다. 

용서하는 것은 둘째, 이웃을 위한 것이다.

용서 받음으로써 사람은 새 인생이 된다. 용서 받음의 감격은 사람에게 새로운 결심과 태도를 준다. 나는 용서 받은 감격을 잊을 수 없다. 용서한 사람은 그 사건을 잊어버려도 용서 받은 사람은 용서를 잊을 수 없고 인생이 달라진다. 

내가 중학생 시절, 담임선생님을 속이고 콩쿨 대회에 나갔다. 개근상이 아버지의 교훈이었으므로 개근상 받기로 선생님의 약속을 받고 콩쿨 대회에 나갔다. 물론 집에 큰 일이 있어서 라는 거짓말로 조퇴를 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제천 시민회관에서 단에 올라갔는데 심사위원이 담임선생님이었다. 갑자기 눈앞에 캄캄해서 어떻게 노래를 불렀는지 정신없는 부르고 내려왔다. 그런데 그 다음날 교무실로 불려가지 않았다. 매 맞을 각오하고 학교에 나섰는데 결국 부르지 않는다. 넘어가 주신 것이다. 용서하신 것이다. 그때의 감동이 너무나 크다. 

나는 그때부터 용서의 힘을 안다. 용서는 자신을 위한 것이고 용서 받는 그 사람의 삶의 축복을 위한 것이다. 용서하고 용서 받으면 관계가 회복되고 서로가 복을 받는다.

용서하는 것은 셋째, 하나님 나라의 질서다.

하나님은 용서의 하나님이시다. 용서를 선포하시는 하나님은 우리의 죄된 인생들이 용서를 받고 용서하며 살기를 원하신다. 천국의 법은 용서의 마음이다. 그러므로 용서하지 않고 하나님을 노하게 하는 것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이 아니다. 

하나님은 이 종을 가리켜 ‘악한 종아’라고 불렀다. 용서를 못하면 악한 자다. 이것을 알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을 살자. 하나님을 기쁘게 해 드리는 삶은 용서의 실천에 있다. 용서 불능의 사람은 구원을 반 밖에 모르는 것이다. 그래서 주 기도문, 주님이 제자들에게 가르쳐 주신 기도문은 이렇게 되어 있다. 

우리가 우리에게 잘못한 사람을 용서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용서하여 주시고 우리가 용서를 안하면 하나님은 용서한 우리를 향해 무엇이라 말할 것인가? 우리가 용서해야 주 기도문대로 사는 것이다. 

하나님 나라의 도래는 용서의 사람들이 용서를 실천할 때 이루어진다. 용서할 수 없는 사람, 용서할 수 없는 원수, 용서할 수 없는 이웃 모두 예배를 끝난 후에 새롭게 만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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