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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방향이 속도보다 중요하다 (히 6: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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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향이 속도보다 중요하다 (히 6:4-8)
  

크린턴이 대통령직을 마치고 회고록을 썼습니다. 그는 이렇게 회고하고 있습니다.
“내가 케네디 대통령과 악수하는 순간 결심하였다. 나도 대통령이 되겠다.”
대통령으로 방향을 정하고 나니까 속도가 생겼습니다. 그는 오직 대통령이 되는 길로 걸었습니다. 드디어 대통령이 되었습니다.
방향은 속도보다 중요합니다.
같은 아침 이슬을 마시며 뱀은 독을 만들지만 꿀벌은 꿀을 만듭니다. 방향이 완전히 다릅니다.

술중독 아버지가 두 아들을 두었습니다. 아버지는 술로 패가 망신하고 객사하였습니다. 그런데 큰 아들은 술주정꾼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작은 아들은 술을 한 모금도 마시지 못 하였습니다. 신문기자가 큰 아들에게 물었습니다.

“왜 그렇게 술을 마십니까?” “내가 술을 안 마시게 되었습니까? 아버지가 술중독으로 패가 망신하였습니다.”
신문기자가 둘째 아들에게 물었습니다.
“왜 그렇게 술을 안 마십니까?” “내가 술을 마시게 되었습니까? 아버지가 술중독으로 패가 망신하였습니다.”
방향이 중요합니다.

백두산 천지에 물이 고여 있습니다. 백두산을 오를 때 중국 장사꾼들이 막대기를 꺽어 놓고 1,000원씩에 팔고 있었습니다. 별 장사가 다 있다고 여겼습니다. 막대기를 1000원에 사들고 백두산 천지에 올라가 보았습니다.
동쪽으로 흐르면 두만강을 통하여 태평양으로 흘러갑니다.
서쪽으로 흐르면 압록강을 통하여 대서양으로 흘러갑니다. 같이 있던 물이 영영 만나지 못 하는 물이 됩니다. 방향이 중요합니다.

본문으로 모시고 들어가려고 합니다.

“땅이 그 위에 자주 내리는 비를 흡수하여 밭 가는 자들의 쓰기에 합당한 채소를 내면 하나님께 복을 받고 만일 가시와 엉겅퀴를 내면 버림을 당하고 저주함에 가까와 그 마지막은 불사름이 되리라”(7)

비가 자주 내리는 땅이 있습니다. 옥토라는 의미입니다. 농사짓기에 좋은 땅입니다. 수분이 넉넉하여 무엇을 심든지 잘 되는 축복의 땅입니다. 이 옥토에 두가지 종류가 자라고 있습니다.
하나는 채소입니다. 축복의 식물입니다.
다른 하나는 가시와 엉겅퀴입니다. 땅만 못 쓰게 하는 잡초입니다. 저주를 받아 나중에는 베어서 불구덩이에 들어가게 됩니다.
좋은 땅에서 채소로 방향을 잡았느냐 가시와 엉겅퀴로 방향을 잡았느냐에 따라 종말에 축복과 저주, 천국과 지옥으로 갈라집니다.
속도보다 방향이 중요합니다.

같은 성령, 같은 교회, 같은 곳에서 살면서 축복과 저주로, 천국과 지옥으로, 구원과 멸망으로, 채소와 가시로 갈라질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의 핵심이 여기에 있습니다.
“한번 비췸을 얻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예한 바 되고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 타락한 자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케 할 수 없나니 이는 자기가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박아 현저히 욕을 보임이라.”

한번 비췸을 얻었다는 말은 복음을 진하게 접하였다는 말입니다.
하늘의 은사를 맛보았다는 말은 영적 체험을 분명히 하였다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성령에 참예한 바가 되었다는 말은 성령의 일을 하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선한 말씀의 체험도 하였습니다.
내세의 능력도 맛보았습니다.

영적으로 높은 수준에 이르렀다는 의미를 이렇게 세 마디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하고도 타락한 사람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은 다시는 새롭게 할 수 없고 회개할 수 없게 된다고 말했습니다.
이 말은 성경에 가장 해석하기 어려운 말씀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 말씀속에는 두가지 의미가 들어 있습니다.

1. 정말로 그런 수준에 올라간 사람은 다시는 타락할 수 없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참으로 성령체험을 깊이 한 사람은 결코 타락할 수 없습니다.
바울이 다시 타락하였다는 말을 우리는 들어 본 적이 없습니다. 베드로가 다락방에서 성령 체험을 깊이 한 후에는 타락한 적이 없습니다. 되돌아 선 적이 없습니다. 참으로 성령의 인침을 받은 사람은 전혀 다른 사람이 됩니다.

2. 다른 의미가 있습니다.

그렇게 깊이 성령 체험을 한 사람이 한번 타락하면 되돌이킬 수 없다는 의미입니다. 진정으로 영적 체험을 한 사람은 타락할 수 없다는 해석과 깊이 성령 체험한 사람이 한번 타락하면 다시는 돌이킬 수 없다는 해석은 둘 다 맞는 말입니다.
역설입니다.
그러므로 한번 성령의 깊은 맛을 보고 신앙생활하는 사람은 방향을 정확하게 천국으로 세우고 흔들리지 말아야 합니다.

내가 알고 있는 장로님이 있습니다.

구두를 수선하는 장로님입니다. 교회에서 항상 앞자리에 앉아 아멘을 얼마나 크게 하는 지 아멘 장로라는 별명이 붙었습니다. 구두를 수선하는 동안에는 그는 늘 예수님을 전하였습니다. 그래서 1000명 정도 모이는 교회인 데 반을 장로님 혼자 전도하였습니다. 교회에서 보배와 같은 분이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사건이 벌어졌습니다. 그 장로님이 예수님을 부인하기 시작하였습니다. 홍해가 갈라지는 것보다 기적이라고 하였습니다. 여하간 그 장로님은 죽기까지 예수님을 부인하였습니다. 모두에게 실망을 안겨주었습니다. 흔하지 않은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죄를 용서하시는 좋으신 하나님이십니다. 지은 죄를 또 지어도 또 용서하여 주시는 사랑의 하나님이십니다. 큰 죄도 다 용서하여 주시는 넓으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용서하시지 않는 세 가지 죄가 있습니다.

1. 성령 훼방죄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의 모든 죄와 훼방은 사하심을 얻되 성령을 훼방하는 것은 사하심을 얻지 못 하겠고"(마 12;31)
성령님이 하시는 일을 훼방하는 것은 하나님의 방향을 훼방하는 것이니 용서받을 리가 없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가나안으로 인도하시려는 것이 하나님의 의도였습니다. 그런데 10명의 정탐군은 반대하였습니다. 모두가 죽었습니다. 성령훼방죄였습니다.

2. 성령 기만죄

해마다 7월10일이면 대속죄일 행사를 치루게 됩니다. 모든 죄를 사함받는 일년 365일 중에 가장 중요한 날입니다. 아사셀 양에게 모든 죄를 다 전가시키는 날입니다. 그런데 이 날 다 용서받되 용서받지 못 하는 죄가 있습니다.
대속죄일에 용서받을 것이니까 고의적으로 범한 죄는 용서받지 못 합니다. 이는 성령을 기만하는 죄이기 때문입니다.

3, 타락죄

본문에 나타난 죄입니다. 한번 은혜를 맛보고 타락한 자는 다시 새롭게 될 수 없습니다. 어떤 자매는 이 설교를 듣고 집으로 돌아와 자살하였다는 것입니다.
한번 타락하면 영원히 구원받지 못 하는 몸이라고 비관하여 아예 자살하였다는 것입니다.그러나 이는 오해입니다.
"타락한 자들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케 할 수 없나니"(6) 라는 말씀에는 의미가 있습니다.

바로 해석하여야 이런 오해가 사라집니다. 타락한 자들이라는 말은 <파라페손타스>라는 말로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이는 <하나님을 거부하고 떨어져 나간 자>를 말하는 것입니다.믿음의 사람도 죄를 지을 수가 있습니다. 성령받은 이도 타락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회개할 능력이 있습니다. 회개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이 몸부림칩니다.

그러나 우리 나라에 신학교를 졸업하고도 중이 된 사람이 있습니다. 회개하고 돌아 올 마음도 없고 능력도 없고 가능성도 없습니다. 구원의 길에서 완전히 파라페손타스되었습니다.이런 사람을 말합니다. 이런 이들은 한번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으로 완전히 구원이 이루어졌는 데 다시 십자가에 죽으라고 하는 이들입니다. 그래서 한번 은사를 맛보고 타락한 이들은 구원을 받을 수가 없습니다.

방향을 바꾼 사람들이 있습니다.
속도보다 방향이 중요합니다. 방향이 잘못 되면 결론은 파멸입니다. 그 동안의 노력이 헛수고가 됩니다.

방향을 바꾼 사람 가룟 유다

가롯 유다가 대표적인 사람입니다. 유다는 예수님의 제자였습니다. 그러나 방향을 바꾸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에서 마귀의 종으로 방향을 바꾸었습니다.
“조각을 받은 후 곧 사단이 그 속에 들어간지라. 이에 예수께서 유다에게 이르시되 네 하는 일을 속히 하라 하시니”(요 13;27)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너희 열 둘을 택하지 아니하였느냐. 그러나 너희 중에 한 사람은 마귀니라 하시니"(요 6;70)
예수님은 유다같이 방향을 안 좋은 곳으로 바꾼 사람은 태어지지 않으면 좋았을 뻔하였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인자는 자기에게 대하여 기록된대로 가거니와 인자를 파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으리로다. 그 사람은 차라리 나지 아니하였더면 제게 좋을뻔하였느니라 하시니라”(막 14:21)

유다는 방향을 바꾼 사람입니다.
가룟 유다 이름의 뜻은 재미있습니다. 유다라는 말은 찬송이라는 뜻입니다. 가장 아름다운 이름을 가지고 가장 악한 일을 하였습니다. 방향을 바꾸니까 하나님을 찬송하던 사람이 마귀를 찬양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방향을 바꾸면 하나님이 축복합니다.
눈 병에 걸려 두 눈을 뽑아야 한다는 진단을 받을 사람 이야기입니다. 그는 그 병에 걸리기 전에 방탕하였었습니다. 의사가 두 눈을 뽑아야 한다는 선고를 받고 뼈저리게 회개하였습니다. 방탕하게 살았음을 회개하였습니다. 그리고는 이제부터라도 하나님을 잘 섬기겠다고 펑펑 울었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눈이 나았습니다. 알고보니 눈물에 나온 요소들이 눈에 묻은 독소들을 다 씻어낸 것이었습니다. 방향을 바꾸는 것이 회개입니다. 회개는 치유의 능력이 있습니다.

이런 이야기도 있습니다.
한 여인이 역시 방탕하게 살았습니다. 심장병에 걸려 죽게 되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앞에 방탕하였음을 회개하였습니다. 그리고 바르게 살기로 결단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병을 고쳐 주셨습니다.

방탕하게 살 때같이 지내던 친구들이 그를 불렀습니다. 그리고 화려한 파티를 열어 주었습니다. 죽을 병에서 살아났음을 기뻐하는 파티였습니다. 한창 파티가 흥겨울 때 그 여인을 찾았습니다. 없었습니다. 그가 앉았던 테이블에 편지 한 장이 놓여져 있었습니다.
“나는 즐거움이 얼마나 인생을 파괴시키는 지를 알았습니다. 나는 이제 이렇게 살지 않을 것입니다. 나는 집으로 갑니다.”
방향을 바꾸면 새 역사가 일어납니다.

루시퍼의 방향 전환 

우주 역사상 가장 놀랍게 방향을 바꾼 역사가 성경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루시퍼의 반란입니다. 
“너 아침의 아들 계명성이여 어찌 그리 하늘에서 떨어졌으며 너 열국을 엎은 자여 어찌 그리 땅에 찍혔는고. 네가 네 마음에 이르기를 내가 하늘에 올라 하나님의 뭇별 위에 나의 보좌를 높이리라. 내가 북극 집회의 산 위에 좌정하리라. 가장 높은 구름에 올라 지극히 높은 자와 비기리라 하도다. 그러나 이제 네가 음부 곧 구덩이의 맨 밑에 빠치우리로다"(사 14;12-15)

계명성은 루시퍼입니다. 하나님 곁에서 찬송을 맡은 천사였습니다. 하나님과 함께 살다가 보니 하나님이 얼마나 높으신 분인 것을 알았습니다. 자기도 하나님처럼 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보좌까지 올라 가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섬기던 방향에서 하나님처럼 되려는 방향 전환을 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용서하실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보좌에서 쫓아내고 말았습니다.

아버지와 아들 사이는 끊을 수 없는 사이입니다.
아들은 아버지의 모든 것을 가질 수 있습니다. 다 달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절대로 아들에게 줄 수 없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아버지권입니다. 아들이 아버지가 되고, 아버지가 아들이 될 수 없습니다. 이 사실만은 세상이 두 쪽 나도 양보할 수 없습니다. 루시퍼는 결정적인 선을 넘었습니다. 자기가 하나님을 섬기다가 하나님처럼 되려고 하였습니다.

방향이 중요합니다.
김 재규가 박 정희 대통령을 섬겼습니다. 경호실장이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박 정희를 지키던 총으로 박 정희를 죽였습니다. 방향이 바뀌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방향이 정확하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요한 계시록에 7 교회가 등장하고 있습니다. 그 중에 서머나 교회가 있습니다. 나는 그 교회를 관광차 가본 적이 있습니다. 
서머나 교회에는 폴리캅 목사님이 목회하고 있었습니다. 폴리캅 목사님은 요한의 친구였습니다. 예수님을 믿다가 핍박을 받아 86세에 화형으로 순교하였습니다. 그런데 얼마나 성자인지 당시 그 지역을 지배하고 있던 총독이 그를 죽이지 않으려고 몸부림쳤습니다. 그래서 지방 총독이 폴리캅에게 말했습니다.

“한번만 황제가 나의 주라고 말만 하라. 그러면 살려 주겠다. 그렇게 믿지 않아도 좋아 한번만 그렇게 말하라.”
그러나 폴리캅은 고개를 좌우로 흔들면서 말했습니다.
“내가 86년 동안 그를 섬겨 왔으나 그 분은 한 번도 나를 해롭게 한 적이 없는데 내가 어떻게 그를 모른다고 하겠는가?”
그리고 당당하게 나무에 매달려 화형을 당하였습니다.
한 방향으로 가며 방향을 바꾸지 않았습니다.

“땅이 그 위에 자주 내리는 비를 흡수하여 밭 가는 자들의 쓰기에 합당한 채소를 내면 하나님께 복을 받고 만일 가시와 엉겅퀴를 내면 버림을 당하고 저주함에 가까와 그 마지막은 불사름이 되리라”(7)
방향이 중요하다는 말씀입니다.

무전 여행으로 세계를 돌고 돌아 온 숙대 김 찬삼 교수님의 무전 여행기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그가 아프리카 람바레네로 가서 슈바이처를 만났습니다. 그 곳에서 며칠 지냈습니다. 돌아 오는 날 슈바이처 병원 앞에서 지니가는 트럭을 세웠습니다. 그리고 올라탔습니다. 슈바이처가 문앞에 섰습니다.

김 교수님이 큰 소리로 외쳤습니다.
“선생님! 마지막으로 한 말씀 주세요.” 슈바이처가 손을 흔들면서 소리를 질렀습니다.
“우물을 파도 한 우물을 파요.”
트럭은 먼지를 뽀얗게 남기며 달렸습니다.

예수님이 당회장이 되어 목회하셔도 12명중에 한 명은 가시와 엉겅퀴가 되었습니다. 전진하는 200만명의 이스라엘 민족중에도 언제나 가시와 엉겅퀴를 내는 잡족들이 있었습니다.
방향을 잘 정하여야 합니다.

노아가 홍수가 끝날 때쯤 되었을 때였습니다. 노아는 물이 말랐는 지 안 말랐는 지를 알아 보려고 까마귀와 비둘기를 방주 밖으로 내보낸 적이 있습니다. 이 때 비둘기는 밖에서 돌가가 다시 돌아 왔습니다. 입에는 감람나무 잎사귀를 물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까마귀는 영영 돌아 오지 않았습니다. 나갔다가 다시 돌아 온 비둘기는 중생한 교인의 표상입니다. 죄를 지었으나 다시 회개할 줄 아는 교인의 상징입니다. 그러나 까마귀는 방주 즉 교회에서 영영히 떨어진 교인입니다.

그래서 교회에는 세가지 종류의 교인이 있습니다. 이는 방주속에 세 가지 동물이 있는 것과 같습니다.
하나는 비둘기와 같이 나갔다가 다시 들어 오는 교인이 있습니다. 타락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즉각 회개하고 다시 돌아 옵니다.
다음으로는 영영 아예 나가지 않았던 동물처럼 교회에 일단 발을 들여 놓고는 결코 떠나지 않는 교인이 있습니다. 일편단심입니다. 변하지 않습니다. 언제나 한결같습니다.
마지막으로 까마귀와 같이 교회 다니다가 떠나 버리는 교인이 있습니다. 이런 교인을 히브리서기자는 말해주고 있습니다.

같은 은혜를 비를 맞으며 유익한 채소를 내는 땅이 있고, 가시와 엉겅퀴를 내는 땅이 있습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선택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당신은 어느 편입니까?
전쟁중에 포로로 잡혀 가면 다음과 같은 네 가지 형태의 포로가 생긴다고 합니다.

(1) 절개형
끝까지 자기의 위치를 지키는 포로입니다. 결코 그 나라에 굴복하지 않는 형입니다. 중국 한 무제때 소무라는 사람은 흉노에게 포로로 잡혀 갔을 때 바이칼 호반에서 가죽옷을 씹으면서 19년을 살면서도 결코 적에게 굴복하지 않았습니다.

(2) 변절형
비굴하게 목숨을 구걸하면서 하라는 대로 다 하면서 타협하며 살아가는 타입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런 부류에 속합니다.

(3) 탈주형
도망치다가 잡혀서 팔다리가 잘려서 병신으로 일생을 살아가는 형입니다. 때로는 코를 자르기도 하고 때로는 중요한 부분을 절단하기도 합니다.

(4) 귀화형
노예로 팔아 버려서 다른 곳에서 고생하는 형입니다. 우리는 때때로 마귀에게 포로로 잡혀 갈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기여코 탈출하여 하나님의 본래 원하시는 곳으로 돌아 와야 합니다.
타락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다시 일어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허락하시면 가능합니다.

마지막으로 이런 이야기 드리고 마치려고 합니다.
“땅이 그 위에 자주 내리는 비를 흡수하여 밭 가는 자들의 쓰기에 합당한 채소를 내면 하나님께 복을 받고 만일 가시와 엉겅퀴를 내면 버림을 당하고 저주함에 가까와 그 마지막은 불사름이 되리라.”

좋은 땅에서 방향을 잘 세우고 채소를 내야 합니다. 그렇게 하면 하나님께서 축복하십니다. 가시와 엉겅퀴 방향을 잡으면 결론은 멸망입니다.

지난 번에 미국에 가서 집회하면서 들은 이야기입니다.
목사님이 새로 이민온 교인을 돌보고 있었습니다. 한 교인이 이민와서 사업을 시작하였습니다. 축복을 받도록 열심히 기도하였습니다. 그는 큰 축복을 받기 시작하였습니다. 이제 어느 정도 기반이 잡혔습니다. 주일 밤예배를 빠뜨리기 시작하였습니다. 너무 바빠지니까 낮 예배도 가끔 결석하였습니다. 물질적인 여유가 생기니까 주말여행도 가끔 떠나 주일을 빠뜨리고 즐기기 시작하였습니다. 목사님이 기도하는 데 하나님께서 생명을 데려가는 환상을 보았습니다. 목사님은 놀랐습니다. 찾아 갔습니다. 그리고 간절히 기도하였습니다.

“하나님! 이 사업이 망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 분은 깜짝 놀랐습니다. 기도를 마친후 목사님에게 기분이 나빠서 왜 그렇게 기도하셨느냐고 물었습니다. 목사님은 이유를 말해주었습니다. 그 교인은 울면서 회개하였습니다. 
다시 하나님을 섬기고 교회를 사랑하는 방향을 세웠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땅에서 축복의 채소를 만드는 하나님의 사람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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