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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죽을 것도 각오하였느니라 (행 21: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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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을 것도 각오하였느니라 (행 21:1-14)  


감동적인 사랑 이야기 하나 해드리면서 말씀을 시작하겠습니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날 무렵인 1945년 6월 런던 광장에서 육군 중령 브라운은 시계탑을 보며 초조하게 누군가를 기다렸습니다. 

브라운은 우연한 기회에 젊은 여성작가 주디스의 책을 읽게 되었습니다. 
전쟁 속에서 그녀의 글은 한 줄기 빛처럼 희망과 용기를 주었습니다. 
그는 용기를 내어 작가에게 편지를 썼습니다. 
기대하지 않았던 답장이 2주 후에 왔고, 두 사람은 수많은 편지를 주고받았습니다. 
사랑의 감정이 싹튼 브라운은 주디스에게 사진을 보내줄 것을 요청했습니다. 
하지만 사진 대신 질책의 편지를 받게 되었습니다. 

“그토록 제 얼굴이 보고 싶으신가요? 당신이 말해왔듯이 당신이 정말로 저를 사랑한다면 제 얼굴이 아름답던 그렇지 못하던 그게 무슨 상관이 있나요?” 
자신의 요청에 이런 반응을 보인 그녀를 이해할 수 없었지만, 더 이상 사진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습니다. 
전쟁이 끝나서 귀국하는 브라운은 주디스와 만날 약속을 했습니다. 

“런던 전철역 1번 출구에서 제 책을 들고 서 계세요. 저는 가슴에 빨간 장미꽃을 꽂고 나갈 거예요. 하지만 제가 먼저 당신을 아는 척 하지는 않을 거예요. 당신이 먼저 저를 알아보고 만약 제가 당신의 연인으로 적당하지 않다고 생각되면 모른 척하셔도 됩니다.” 

브라운은 두근거리는 마음을 진정시키며 주디스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때, 금발의 전형적인 앵글로 색슨계의 미인(美人)이 나타났습니다. 
브라운은 녹색 옷을 입은 아름다운 그녀의 모습에 넋을 잃고, 그녀를 향해 다가갔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그에게 눈길 한 번 주지 않은 채 지나갔습니다. 
순간 브라운은 그녀의 가슴에 장미꽃이 없다는 걸 알았습니다. 
그리고 6시. 멀리서 가슴에 장미꽃을 단 여인이 아주 천천히 그를 향해 다가왔습니다. 
그 순간 브라운의 머리속은 백지장처럼 하얘졌습니다. 
다가오는 여인은 못생기다 못해 흉측했습니다. 

한쪽 다리를 잃은 그녀는 한쪽 팔만으로 지팡이를 짚고 힘겹게 걸어오고 있었습니다.  
얼굴 반쪽은 심한 화상으로 일그러져 있었습니다. 
짧은 순간 브라운은 심한 갈등을 느꼈습니다. 
‘그녀가 자신을 모른 척 해도 된다고 한 이유가 바로 이 때문이었군. 정말 그녀를 모른 척 해야 하나?’ 

‘아니야. 원망해야 할 상대는 독일군이야. 이 여인 역시 전쟁의 피해자일 뿐이고… 3년 동안 난 그녀와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고 그녀를 사랑했어. 이건 변할 수 없어. 이제 와서 그녀를 모른 척 하는 것은  비겁하고 함께 했던 시간을 배신하는 거야.’ 
브라운은 그녀에게 다가갔습니다. 
“잠깐만요!”
그녀가 돌아보자 브라운은 환한 웃음을 지어 보이며, 그녀의 책을 들어 올렸습니다. 
“제가 브라운입니다. 당신은 주디스이지요? 이렇게 만나게 되어 정말 반갑습니다.” 

그러자 그녀는 당황스러운 표정으로 브라운을 바라보았습니다. 
“아니에요… 전 주디스가 아니고 페니예요…  저도 뭐가 뭔지 잘 모르겠어요. 조금 전에 녹색 옷을 입은 여자분에게 부탁을 받았어요. 장미꽃을 달고 이 앞을 지나가 달라는… 그리고 저에게 말을 거는 분을 식당으로 모셔오라고 하더군요.” 
식당에 들어서자 녹색 옷을 입었던 주디스가 환한 웃음으로 브라운을 반겨주었습니다. 
브라운과 주디스의 가교 역활을 하였던 페니가 “감동적인 사랑의 실화”라는 제목으로 영국 '타임즈 지'에 이 이야기를 게재했고, 곧 영국 전역에서 큰 화제를 불러일으켰습니다.

저가 설교를 시작하면 이 이야기를 꺼낸 것은 하나님도 때로는 우리에게 이럴 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모든 사랑하는 사람들이 그렇듯이 하나님도 우리의 진심을 알고 싶어 하십니다.
축복의 하나님은 때론 시련의 가면을 쓰고 우리에게 다가오실 때가 있습니다.
사랑의 하나님은 때론 아픔의 가면을 쓰고 우리에게 다가오실 때가 있습니다.
주고 싶어 어쩔 줄 모르시는 하나님은 때론 우리에게 달라고 하실 때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진심을 보고 싶어 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경에는 ‘시험(test)'라는 말이 있습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언제든지 어떤 상황이든지 하나님께 여러분의 신실한 믿음을 보여드리십시오.
사도행전 21장부터는 새로운 주제가 전개되고 있습니다.
지금까지의 제1차, 2차, 3차 전도여행을 마치고 사도 바울은 예루살렘으로 돌아갑니다.
21장부터 새롭게 전개되는 주제는 사도 바울이 겪을 핍박과 환난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이제부터 사도 바울은 죄수의 몸이 됩니다.
이제 본문을 찬찬히 살펴보면서 은혜를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1, 오직 복음만이

본문에 보면, 사도 바울의 발걸음이 닿은 곳마다의 지명들이 성경에 그대로 기록되었습니다.
행21:1-3절 “우리가 그들을 작별하고 배를 타고 바로 고스로 가서 이튿날 로도에 이르러 거기서부터 바다라로 가서 베니게로 건너가는 배를 만나서 타고 가다가 구브로를 바라보고 이를 왼편에 두고 수리아로 항해하여 두로에 상륙하니 거기서 배의 짐을 풀려 함이러라.”

본문에 나오는 ‘고스 섬’에는 그 당시 사람들이 믿고 있던 치료의 신 에스쿨라피우스(Aesculapius)의 신전과 그것에 부속된 의학교가 있었습니다.
그곳은 우리가 흔히 의학의 원조라고 일컫는 히포크라테스(Hippocrates) 의 고향으로 알려진 곳입니다.
이곳에서 약 70마일 정도 떨어진 ‘로도'에는 고대 세계의 7대 불가사의의 하나로 알려진 높이 150피트의 거대한 태양신 콜로수스(Colossus)라고 불려지는 아폴로 석상이 있었습니다.

물론 바울 일행이 이곳을 지날 때는 이 거대한 석상이 지진으로 파괴된 지 오랜 후였습니다.
역사의 기록에 의하면 주전 224년에 파괴되었다고 전하고 있습니다.
그곳에는 찬란한 희랍 문화가 여전히 숨 쉬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본문은 바울 일행이 바다라로 가서 배를 타고 키프로스섬을 바라보며 시리아로 항해했다고 적고 있습니다.

우리는 성경이 바울 일행의 발걸음이 닿는 곳마다 그 지명을 기록한 내용을 읽으면서 의아한 생각을 감출 수 없습니다.
왜 바울은 그 당시 희랍 문화가 숨쉬고, 로마 문화가 움트는 지역을 방문했으면서도, 그가 경험한 그 곳의 문화에 대한 얘기는 한마디도 하지 않느냐는 점입니다.
여러분, 우리도 성지 순례 등 해외여행을 다녀오면 그곳의 사람들, 건축물, 음식 대한 이야기를 하잖아요?
그런데 우리는 눈을 씻고 찾아보아도 본문에서 그런 묘사를 발견할 수 없습니다.
지나가는 말로도 한마디 하지 않아요.

그 이유가 무엇이지요?
혹자는 바울이 문화 예술적인 안목이 없기 때문이라고 혹평합니다.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 당시 바울만한 문화에 대한 식견을 가진 사람도 쉽지 않아요!
그렇다면 그 이유가 무엇이지요?
그것은 바울의 관심이 오직 복음 전파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바울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었던 것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였습니다.
그의 눈에는 오직 예수님만 보였습니다.
그가 입을 열어 말하고자 하는 것도 오직 예수 그리스도였습니다.

우리는 지난 시간에 바울이 에베소 교회의 장로들과 이별할 때 한 ‘고별설교’를 통해서 그의 결심을 확인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행20:24)”
이 말씀을 영어 번역에서는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복음을 증언하는 일이 아니면 나의 생명은 가치가 없습니다.(my life is worth nothing unless I use it for the work assigned me........)”
여러분은 어느 순간에, 어떤 일을 할 때에 여러분의 생명이 가치 있다고 느껴지십니까?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바울은 복음을 전할 때라고 했습니다.
복음전하는 일! 그것은 생명의 가치를 논할 만큼 중요한 일입니다.
복음을 전할 때만이 직장도 의미가 있고, 직업도 의미가 있고, 재산도 의미가 있고, 성공도 의미가 있고, 결혼도 의미가 있고, 학문도 의미가 있고, 잘 난 것도 의미가 있습니다.
이 점을 확실히 하십시오.
모든 것은 끝이 있습니다.
그러나 영혼 구원은 영원합니다.

죤 웨슬리 목사님은 그의 후예들에게 이런 부탁을 했습니다.
“당신은 영혼을 구원하는 일 외에는 아무 일도 하지 마시오. 이 일로 시간을 보내고, 이 일에 당신이 쓰임 받도록 하시오. 보시오. 당신이 얼마나 많은 설교를 했느냐, 또 얼마나 많은 일에 관심을 가졌느냐가 문제가 아니라 당신이 최선을 다해 영혼을 구했느냐 못 구했느냐가 문제 입니다. 할 수 있는 대로 많은 죄인을 데려와 회개시켜 구원받게 하시오.”

2. 죽을 것도 각오하였느니라.

우리는 사도행전에서 바울 사도가 예루살렘에 가면 환난과 핍박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라는 사실을 여러 차례에 걸쳐 듣게 됩니다.
밀레도에서 예언을 들었을 때입니다.
“오직 성령이 각 성에서 내게 증언하여 결박과 환난이 나를 기다린다 하시나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행 20:23-24)”

두로에서 성도들을 만났을 때입니다.
“........그 제자들이 성령의 감동으로 바울더러 예루살렘에 들어가지 말라 하더라.(행21:4)”
가이사랴에서는 아가보라는 예언자가 실제로 행동을 해보이면서 예루살렘에서 될 일을 예언합니다.

“우리에게 와서 바울의 띠를 가져다가 자기 수족을 잡아매고 말하기를 성령이 말씀하시되 예루살렘에서 유대인들이 이같이 이 띠 임자를 결박하여 이방인의 손에 넘겨주리라 하거늘 우리가 그 말을 듣고 그 곳 사람들로 더불어 바울에게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지 말라 권하니.(행 21:11-13)”
이에 사도 바울은 단호하게 말합니다.

13절을 다 같이 읽읍시다. 
“바울이 대답하되 여러분이 어찌하여 울어 내 마음을 상하게 하느냐 나는 주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 결박당할 뿐 아니라 예루살렘에서 죽을 것도 각오하였노라 하니”
저는 어제 설교를 준비하면서 ‘만일 내가 바울과 같은 입장에 처하게 된다면, 어떻게 말하고 어떻게 행동했을까?’를 생각해보았습니다.

‘누군가가 거기에 가면 손해를 보고, 고난을 당하고, 목숨까지 잃을 수도 있다고 미리 말해준다면 나는 복음을 위하여 그곳에 갈 수 있을까?’
갑자기 혼란스러워졌습니다.
모르고 갈 수는 있었습니다. 
저가 25년 전 이집트에 온 가족을 이끌고 선교사로 갈 때에는 그 땅이 그렇게 어려운 이슬람지역인지 모르고 갔습니다. 
무식하면 용감하다고 ‘이슬람 근본주의가 무엇인지?’ ‘무슬림 형제단이 무엇인지?’ ‘압둘 라흐만이 누군지?’ 모르고 갔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처럼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알고 가야한다면 선뜻 대답이 나오지 않았습니다.
‘내 믿음이 이 정도밖에 되지 않는가?’라는 생각에 속상했습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나의 진심을 보려고 때론 손해를, 때론 고난을, 때론 목숨까지 요구하신다면 나는 어떻게 할까?’

교우 여러분,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진심을 보여 달라고 하시면 어떻게 하실 겁니까?
“주님, 번지수가 틀리네요. 저는 저의 소원과 뜻을 이루는데 도움을 얻기 위하여 왔을 뿐입니다. 주님의 뜻은 애초부터 관심이 없었습니다.”라고 대답하실 겁니까? 
그래서 사도 바울의 믿음을 다시 보게 되었습니다.
그런 믿음을 갖게 되길 열망합니다.

3. 주의 뜻이 이루어지이다.

행 21:14절 “그가 권함을 받지 아니하므로 우리가 주의 뜻대로 이루어지이다 하고 그쳤노라.”
대부분의 경우에 우리는 우리의 뜻과 계획을 가지고 있습니다.
살림살이에 대한 계획이 있습니다.
자녀 교육에 대한 계획이 있습니다.
목회 계획도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뜻과 계획이 이루어지길 늘 기도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잘못된 것이 아닙니다.
열심히 기도해야 합니다.
그런데 꼭 기억해야할 것이 있습니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계획과 뜻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성경이 강조하는 것은 우리는 우연의 산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출생은 실수도 불운도 우연도 아닙니다. 
혹 부모님은 계획하지 않았을지라도, 하나님은 우리를 계획하셨습니다.
시139:13-18절을 보십시오.
“주께서 내 내장을 지으시며 나의 모태에서 나를 만드셨나이다.
내가 주께 감사하옴은 나를 지으심이 심히 기묘하심이라.

.........
하나님이여 주의 생각이 내게 어찌 그리 보배로우신지요.
그 수가 어찌 그리 많은지요.
내가 세려고 할지라도 그 수가 모래 보다 많도소이다.”
그렇습니다.
부도덕한 부모는 있을지라도 부적절한 자식은 없습니다.
많은 아이들이 부모의 계획과 상관없이 태어날 수 있지만, 하나님의 목적 없이 태어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어떤 일도 우연히 하지 않으시고, 절대 실수하지 않으십니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부단히 알려고 해야 합니다.

내 뜻과 하나님의 뜻이 서로 상충될 때는 내 뜻을 포기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이 일평생 살아가면서 배우는 것은 바로 내 뜻을 주님의 뜻에 복종시키는 일입니다.
우리가 져야 할 십자가란 바로 주님의 뜻을 따르기 위해서 나를 죽이는 고통입니다.
여러분 찬송가 425장을 작사한 폴라드(Adelaside A. Pollard)에 대한 얘기를 들어보셨습니까?
폴라드 양은 아프리카에 선교사로 가는 것이 꿈에도 소원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당뇨와 신경 계통의 병을 안고 병상에 뒹굴어야만 했습니다.
마음이 편하지 않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작은 기도모임에서 옆에서 기도하는 한 할머니의 기도소리를 듣게 되었습니다.
“주님이시여, 저의 삶에 어떤 일이 일어나도 좋사오니 주님의 뜻과 섭리만이 이루어지게 하옵소서.”
이 할머니의 기도소리를 듣는 순간 그의 마음이 깨어지기 시작했습니다. 
그의 고집이 부서지기 시작했습니다.
그의 집념이 녹아내리기 시작했습니다.
그의 계획이 허물어지기 시작했습니다.
비록 선교사로 나가 하나님의 일을 하겠다는 것이지만, 거기에 자기의 뜻이 온통 지배하고 있음을 발견하게 된 것입니다.
비로소 마음에 평안이 깃들기 시작합니다.
이때의 경험을 찬송시로 적은 것이 바로 425장입니다.

“주님의 뜻을 이루소서. 고요한 중에 기다리니 
진흙과 같은 날 빚으사 주님의 형상 만드소서.
주님의 뜻을 이루소서. 주님 발 앞에 엎으리니 
나의 맘속을 살피시사 눈보다 희게 하옵소서.
주님의 뜻을 이루소서. 병들어 몸이 피곤 할 때
권능의 손을 내게 펴사 새롭게 하여 주옵소서.
주님의 뜻을 이루소서. 온전히 나를 주장하사 
주님과 함께 동거함을 만민이 알게 하옵소서.” 

‘주의 뜻이 이루어지이다!’
성도가 마지막 해야 할 말은 바로 이것이어야 합니다.
건강하든 병들든, 일이 잘 되든 잘 안 되든, 순풍을 만나든 풍랑을 만나든, 이 땅에 더 살도록 생명을 연장하시든 우리를 그의 품으로 불러 가시든 우리가 해야 할 신앙고백은 ‘주의 뜻이 이루어지이다!’ 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를 향한 주님의 뜻과 계획이 우리에게 최선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그 사랑하는 백성을 절대로 손해 보게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그 사랑하는 백성을 절대로 실망시키지 않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그 사랑하는 백성을 결코 섭섭하게 대우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그 사랑하는 백성을 차선으로 다루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는 내 생각은 너희의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의 길과 다름이니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이는 하늘이 땅보다 높음같이 내 길은 너희의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의 생각보다 높음이니라.(사 55:8-9)”

이제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사도 바울의 마음에는 오직 복음밖에 없었습니다.
그는 “나는 주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 결박당할 뿐 아니라 예루살렘에서 죽을 것도 각오하였노라.”고 하였습니다.
초대 교회 성도들은 그를 향한 하나님의 뜻이 최선임을 알고 “주의 뜻이 이루어지이다.”라고 모든 논의를 종결지었습니다.
본문이 주는 메시지가 우리에게 도전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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