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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들을 귀를 주시옵소서 (사 5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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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을 귀를 주시옵소서 (사 55:3)
 
 
사 55:3 너희는 귀를 기울이고 내게로 나아와 들으라 그리하면 너희의 영혼이 살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영원한 언약을 맺으리니 곧 다윗에게 허락한 확실한 은혜니라

지난 주일에 설교제목을 기억하십니까? "학자들의 혀를 주시옵소서"였습니다. 말씀대로 힘써 살아오신줄로 믿습니다. 그런데 이사야 선지자는 학자들의 혀가 되기 위해서는 학자들의 귀도 필요하다고 했습니다.  사 50:4  "주 여호와께서 학자의 혀를 내게 주사 나로 곤핍한 자를 말로 어떻게 도와 줄 줄을 알게 하시고 아침마다 깨우치시되 나의 귀를 깨우치사 학자같이 알아듣게 하시도다"  듣지 못하고서는 말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과거 모세가 "모세야 모세야"하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고, 사무엘이 성전에서 "사무엘아 사무엘아"하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고 사울이 다메섹 도성으로 가는 길에 예수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들을 귀를 주시옵소서"라는 제목을 가지고 말씀을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귀는 청각과 평형감각을 담당하는 기관으로 청각기관계의 한 부분입니다. 에픽테투스(Epictetus)는 우리가 두 귀와 하나의 입을 가진 것은 말하는 것보다 갑절로 듣게 하기 위함이다."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듣는 것보다 말하는 것이 많으면 잔소리가 되는 것입니다. 귀가 잘못되면 잘못들을 뿐 아니라 육체의 평형감각은 물론 모든 사고판단의 평형감각을 잃게 되고 맙니다. 

하나님은 말씀의 하나님이시며 예수님도 말씀이 육신이 되신 분이시며 성령님은 성경말씀의 저자이십니다. 성경의 이야기는 모두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하나님 말씀을 청종하고 하나님의 뜻을 따름으로 하나님께서 주시는 가나안 복지 또는 약속과 축복의 땅에 이르라고 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말씀을 따라 갔고 모세나 여호수아도 들을 귀를 지니고 살았습니다. 그리고 참 선지자들도 믿음의 사도들도 그리고 좋은 성도들도 말씀에 귀를 귀울이며 신앙생활을 했습니다.

그러나 충분히 하나님의 말씀을 알아 들을만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드는데도 불구하고 의외로 듣는 귀가 없는 사람들이 성경에는 많니 나옵니다. 구약시대에는 말할 것이 없고 말씀이 육신이 되셔어 오신 예수님이 직접 말씀하시던 당시에도 율법을 철저하게 지키며 살았던 바리새인들, 율법을 가르쳤던 율법사들, 회당의 회당장들도 예수님의 말씀을 잘 알아듣지 못하는 먹통이었습니다. 심지어 열 두 제자들도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기 전까지는 역시 말귀를 못 알아듣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 "너희는 귀를 기울이고 내게로 나아와 들으라 그리하면 너희의 영혼이 살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영원한 언약을 맺으리니 곧 다윗에게 허락한 확실한 은혜니라"했습니다. 들을 귀가 있어야 영혼이 삽니다. 들을 귀가 있어야 확실한 은혜를 받습니다. 들을 귀가 있어야 하나님의 뜻을 정확히 알고 행할 수 있습니다. 

솔로몬은  기브온 산당에서 일천번제를 드린 후에 자신에게 나타나 네 소원이 무엇이냐? 묻는 하나님께 구한 것은 "듣는 마음을 주시옵소서"라고 했습니다. 잘 듣는 마음이 무엇보다도 필요한 것을 알았던 것입니다. 잘 들어야 지혜와 지식도 갖게 되고 잘 들어야 백성의 억울함도 풀어주는 좋은 재판관이 될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예레미아는 '우준하여 지각이 없으며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며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는 백성이여 이를 들을찌어다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너희가 나를 두려워 아니하느냐 내 앞에서 떨지 아니하겠느냐 ... 우리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자 말하지도 아니하니 너희 허물이 이러한 일들을 물리쳤고 너희 죄가 너희에게 오는 좋은 것을 막았느니라(렘5:21-25).'고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않는 죄가 우리에게 오는 좋은 것을 막고 있다"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노벨상을 받은 사람의 30%가 유대인입니다. 특별히 과학 분야나 물리학 분야는 60%가 유대인입니다. 도대체 어떻게 그렇게 머리가 좋은지 모를 일이다. 무엇을 배웠기에 이 정도로 세계의 200 여 국가 가운데,가장 작은 민족이 어떻게 이렇게 뛰어날 수 있을까요? 유대인의 인구는 남한의 10분의 1밖에 안 됩니다. 세계에 흩어져 있는 유대인을 다 합해도 우리나라 인구의 4분의 1 정도 밖에 안 됩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어떻게 이런 놀라운 일이 일어날 수 있었을까요? 또 미국에는 상당히 수준급의 대학이 3천 개 정도가 됩니다. 그런데 거기에 25%의 교수가 유대인입니다.그렇다면 유대인의 아이큐가 세계 제일일까? 그건 아닙니다. 오히려 유대인들의 아이큐는 세계 중위권에 속해있습니다.
  
세계 185개 나라의 평균지능지수를 조사한 통계를 보면 1위가 107인 홍콩이고 2위가 106인 대한민국 3위가 105인 북한과 일본이고 이스라엘은 45위인 94였습니다.  
그렇다면 유대인들도 어려서부터 매우 심하게 공부를 시키는 것일까요? 그것도 아닙니다. 유대인이 과외를 우리처럼 할까요? 그것도 아닙니다. 그러면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었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듣는 귀에 있습니다. 이스라엘교육은 쉐마교육을 합니다. "들으라"교육입니다. 잘 듣는 귀를 가지고 있습니다. 귀가 열려 있습니다. 

바울은 디모데후서 4장 3-4절에 보면 "마지막 때가 이르리니 사람이 바른 교훈을 받지 아니하며 귀가 가려워서 자기의 사욕을 좇을 스승을 많이 두고 또 그 귀를 진리에서 돌이켜 허탄한 이야기를 좇으리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진리는 듣지 않고 허탄한 이야기, 참말은 듣지 않고 거짓말 듣기를 좋아하고 들어서는 안 될 말들을 듣는 그런 세대가 오겠다고 했는데 안타깝게도 우리의 시대가 그런 시대가 되었습니다. 편향되고 거짓된 이야기를 진리인 것처럼 가르치고 따르는 세상이 되었습니다.  

이 세상에는 귀가 있어도 귀를 막고 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자기 귀는 막고 자기 말만 하는 사람들이 세상에는 참 많이 있습니다. 자기 주장만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귀를 열고 살아야 합니다. 육신의 귀도 열고 마음의 귀도 열고 영혼의 귀도 열고 살아야 합니다. 

말귀를 알아듣는 맑은 귀가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반복적으로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을 지어다'(막 4:9, 막 4:23)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예수님이 이 말씀을 하실 때 육체로 "듣지 못한 자들"이 몇 명이나 되겠습니까? 대부분 다 들을 수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듣기는 들어도 제대로 듣는 자가 많지 않다는 사실 때문에 그렇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누가 무슨 말을 할 때 그 말 소리뿐 아니라 그 말 속에 담긴 속 뜻까지 분명하게 알아 들어야 합니다.
그런데 말귀를 알아 먹지 못한 사람들이 너무 많습니다.  
왜 말귀를 알아듣지 못할까요? 귀가 깨끗하지 않기 떄문입니다. 선입견과 편견에 막혀서 말귀를 못알아 듣습니다.  
사48: 8 "네가 과연 듣지도 못하였고 알지도 못하였으며 네 귀가 옛적부터 열리지 못하였나니 이는 네가 정녕 배신하여 모태에서부터 네가 배역한 자라 불린 줄을 내가 알았음이라 "
렘6: 10 "내가 누구에게 말하며 누구에게 경책하여 듣게 할꼬 보라 그 귀가 할례를 받지 못하였으므로 듣지 못하는도다 보라 여호와의 말씀을 그들이 자신들에게 욕으로 여기고 이를 즐겨 하지 아니하니"

분별력이 있는 귀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출발한다.그러므로  좋은 들음이 있어야 합니다. 아무 것이나 무조건 듣는 것이 아니라 꼭 들어야할 것을 들어야 합니다. 세상에는 공해가 많습니다.심지어는 우리의 귀로 듣는 언어 중에도 공해가 많습니다.  이단사설을 잘못 들으면 오히려 우리의 영혼에 독이 됩니다. 그러니 듣는 것을 삼가야 합니다. 꼭 들어야 할 소리를 분별하여 듣는 지혜가 있어야 합니다.소음에 시달리면  "난청" 현상이 일어납니다. 꼭 들어야할  말을 못듣고 만다는 말입니다. 난청에 시달리지 않으려면 듣는 것을 삼가야 합니다. 내가 꼭들어야  할 말, 내 영혼을 유익하게 하는 말씀이 무엇입니까?

결국 들을 귀라는 것은 단순한 청력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대학(大學)'이란 책을 보면'마음에 있지 않으면 보아도 보이지 않고 들어도 들리지 않고 먹어도 그 맛을 모른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들을 귀라는 것이 단순히 청력의 문제만 아닙니다. 우리의 마음의 문제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듣되 전적으로 인격적으로 들을 귀를 간구해야 합니다. 온 마음을 다해 듣는 아니 목숨을 걸고 듣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들어야 할 것을 온 마음으로 듣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건성으로 듣지 않고, 진심으로 잘 듣는 것이 하나님의 마음을 얻는 길입니다. 그런데 그걸 놓치고 사는 경우가 참으로 많습니다.

오늘 새벽에도 보았듯이 
요즈음 새벽예배 시간에 열왕기상을 보는데 오늘 새벽에는 9장을 보았습니다. 
솔로몬이 성전을 건축하고 하나님 앞에 흡족하게 봉헌예식을 행한 후에 하나님께 이전 기브온에서 나타나신 것처럼 솔로몬에게 나타나셔서 "내가 너의 건축한 이 전을 거룩하게 구별하여 나의 이름을 영영히 그 곳에 두며 나의 눈과 나의 마음이 항상 거기 있으리니"(3절) "내가 네 아비 다윗에게 허하여 이르기를 이스라엘 위에 오를 사람이 네게서 끊어지지 아니하리라 한 대로 너의 이스라엘의 왕위를 영원히 견고하게 하려니와"(5절)하고 약속해주셨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 조건이 있다. 그것이 무엇이냐하면 9:4절 이하 "네가 만일 네 아비 다윗의 행함같이 마음을 온전히 하고 바르게 하여 내 앞에서 행하며 내가 네게 명한 대로 온갖 것을 순종하여 나의 법도와 율례를 지키면" 그렇게 하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만일 너희나 너희 자손이 아주 돌이켜 나를 좇지 아니하며 내가 너희 앞에 둔 나의 계명과 법도를 지키지 아니하고 가서 다른 신을 섬겨 그것을 숭배하면 내가 이스라엘을 나의 준 땅에서 끊어 버릴 것이요 내 이름을 위하여 내가 거룩하게 구별한 이 전이라도 내 앞에서 던져 버리리니 이스라엘은 모든 민족 가운데 속담거리와 이야깃거리가 될 것이며(6~7절)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몸으로 들어야 합니다. 
몸이 실천을 해야 바로 듣는 것입니다. 몸이 듣지 않는 말은 단순히 지식과 정보일뿐입니다. 부뜨막에 놓은 소금도 집어 넣어야 짧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몸으로 들어야 합니다. 생활이 되어야 합니다. 참으로 잘 듣는 것은 몸으로 행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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